숭례문의 얼
숭례문의 얼
남문 열고 종을 울리니 개명 산천이 후닥닥 밝아온다
할아버지 지팡이 버리고 떠나신 문지방
조선 태조 칼을 꽂고 땀 냄새 피 냄새 집채 바위 끌어왔다
인왕산 선바위 밑뿌리에 으르렁대던 호랑이
한여름 여치 떼 울음소리 달밤을 재우고
변강쇠 쩌렁쩌렁 갓 쓰고 모시 두루마기에 비단 부채 펴니
강원도 금강송 통나무들 장쇄로 굴려다가
도편수 장척대로 재서 먹줄을 튕겼다
수라상 물린 장수 활시위 당기면
문루를 떠난 화살이 보름달에 꽂힌다
남문 밖에 노망든 할머니 나막신을 찾다가
계곡에 버려둔 총각 지게
벼 이삭 줍는 댕기 맨 아낙네들
풀 비린 웃음을 가득히 지고 왔다
문 안에는 땅재주 광대놀이
활옷 입은 궁녀도 배를 쥐고 웃는다
석수들 밑돌 묻고 목수들 기둥세워 대들보 높이면
참빗으로 머리 빗듯 자귀 깎고 대패 밀고 끌로 홈을 팠다
왕관 눌러쓴 아기 왕 가랑가랑
목청 높여 와조를 다스리는데
꼭두각시 그림자놀이하는 밤에
숭례문은 불에 탔다
속 타는 흰 연기에 할아버지 수염이 탔다
소방대 물줄기 기와지붕 위로 한강 넘치고
북악산에 바람꽃 시들어 청계천 억새 잎에 핏자국 젖었다
홍예 아래로 남군 북군 구두 소리
놀란 선조마저 화성 멀리 떠나고
전차 철길 바둑판에 정치꾼 경제꾼
밀고 당기며 관자놀이 시끄러운데
자리 깔고 누운 할머니 옹고집 당파 싸움 멈추려나
관악산 열병에 몸살 난 동학군들
성 밖에 서성거리는 바람잡이 누리꾼들
남문에 몰려들어 아우성치다
신음하며 죽어간 젊은이들 뼈가
어느 날 발굴 유적에서 빛을 볼거나
대들보 받쳐든 보아지는
비단 꽃 잔청에 오색이 화려하고
추녀 떠올린 소머리 공포는
길게 혓바닥을 휘저어 내밀었다
처마 끝 기와 문양 봉황은 목을 휘어 깃을 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