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문
한국 방문
1980년대 중반 대한항공 보잉 747로 한국 직항 운행이 시작하였을 때 나는 한국을 떠난 지 거의 20년 만에 모국을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대학 졸업할 때 현대 건설에 취업 시험에 합격한 친구들은 이미 현대건설의 상무나 전무로 승진하여 한국의 국내 건설업과 중동 국제건설업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설계사무소를 시작한 친구들은 우후죽순처럼 치솟는 아파트단지 건설사업 부터 시작하여 한국 내에 중요한 건물 설계를 도맡아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내가 골프를 시작한지도 벌써 20년 가까이 되는 줄 알게 된 친구들이 나를 안양골프장에 데리고 갔다.
이병철 회장이 설립한 안양골프장(현 안양베네스트GC)은 한국의 첫 개인기업 골프장이었으며 그곳에는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1967년에 오픈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병철 회장이 지인들과 골프를 치고 있었다. 그날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은 그는 골프를 멈추고 서두러 클럽하우스로 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온 것이었다. 이 회장과 박 대통령이 함께 라운드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며 이 회장과 박 대통령은 9홀을 돌고 나서 저녁식사 자리로 이어졌다. 박 대통령은 그 후부터 자주 안양골프장을 찾아와 친분을 나눴다고 한다.
서울대 관악 켐퍼스
내가 처음 서울대학 관악 켐퍼스를 찾아갔을 때 그곳은 원래 삼성회사소유의 '버들골'의 골프장인 관악 컨츄리클럽 이었다고 들었다. 당시 교수회관으로 쓰이고 있는 옛 클럽하우스의 발코니에 이병철회장이 자주 앉아 골프장을 내려다보며 혼자의 생각을 즐겼다는 의자가 아직 있었다. 나도 그 의자에 앉아 이병철회장의 체온을 느껴보았다. 박정희, 정주영과 함께 한국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위인들임을 생각하게 했다. 그가 작고하기 며칠 전인 1987년 10월 27일경에 이회장이 골프카트를 타고 마지막 골프를 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어두워졌는데도 더 치고 싶어 하는 그분을 위해 일하는 직원들이 골프장에 사용하는 모든 차들을 동원하여 라이트를 켠 채 생애 마지막을 라운드를 했다는 이야기를 귀국 후에 듣게 되었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의 소니를 앞지른 아들, 이건희를 길러낸 한국 전자기술의 아버지요, 최근에 세계 여자골프의 선봉을 지켜가는 박인비가 태어나도록 한 한국 골프 운동의 원조이기도 하다.
관악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관악산에 와서 연주봉 절벽 위에 의상대를 짓고 수행하기 위해 골짜기에 절을 건립한 후 관악사라 이름 지은 데서 비롯됐다는 기록이 있다. 예부터 개성의 송악산(松岳山), 가평의 화악산(華岳山), 파주의 감악산(紺岳山), 포천의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오악(京畿五岳)의 하나로 산봉우리와 바위가 빼어난 명산으로 꼽혀왔다. 산봉우리는 불 모양이므로 풍수상 형세(形勢)는 화성(火星)으로, 경복궁의 ‘왕도남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화기(火氣)의 산으로 보았다. 내가 60년대 초반과 2010년부터 이해까지 일해 온 숭례문의 현판이 가로 쓰이지 않고 세로 쓰여진 뜻도 관악산 화기를 재우기 위한다는 풍수해설 이었다고 들었다.
서울대는 해방 직후인 1946년에 10개의 독립된 대학을 미군정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을 발표해 하나로 묶어 만든 연합대학이었다. 해방 전 조선 땅에 있던 유일한 종합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모두 10개 대학을 합친 것이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대는 1954년 군사정부 아래 ‘미네소타프로젝트Minnesota Project)’라는 이름의 미국원조 계획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1969년 겨울, 박정희 대통령은 홍종철 당시 문교부장관, 최문환 서울대 총장을 이끌고 일찌감치 눈 여겨 봐뒀던 관악골프장을 찾았다고 한다. 1971년에 박대통령은 "한강을 굽어보는 언덕에 문화의 유산을 이어받을 사랑스러운 아들딸들에게 진리 탐구의 전당을 마련해주고자 한다"는 요지였지만, 박정희 정부가 4대문 안에서 서울대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비공식적인 추정이 오랫동안 존재했었다. 학생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강하게 반발했고 1975년 봄 관악 캠퍼스의 설립과 동시에 정문 입구엔 전투경찰 병력 1개 대대를 지휘하는 세계 최대 파출소가 들어서면서 관악캠퍼스는 그렇게 탄생했다고 한다. 관악캠퍼스 마스터플랜은 1971년 완성되었고 기공식 또한 당해에 서두러 이루어졌다. 그 후 1단계 이전은 1974년에 이루어졌고, 1979-1980년에 4단계로 공과대학이 이전하였다고 했다. 서울대 의과대학 외에는 모두 관악구 봉천동과 신림동 일대의 관악산 아래에 모여 있었다. 20년 만에 찾아온 내 눈에 비추는 모국의 변화는 젊은 피가 끓는 듯 가난과 후진사회에서 벗어나는 격동기를 거치며 성장과 발전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음을 보았다.
내가 살던 오아이오주
그때 나는 오하이오주에 살고 있었다. 내 나이 28세에 미국 미네소타 주에 유학 와서 나이 30 중반부터 내 가정을 꾸리고 40 중반부터 내 사업을 시작한 곳이 오하이오 주이다. 이곳은 미국 대통령 5 사람을 배출한 본향이며 지금도 대통령 선거철이면 오하이오 주의 결정이 전 미국 선거에 지대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동부처럼 유럽의 경향이 없고 서부처럼 아세아나 멕시코의 영향이 없는 지리적으로 미국 중앙에 위치한 미국사회의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다. 북쪽에는 디트로이트 시의 미시간주, 서북쪽에는 시카고 시의 일리노이 주가 있다. 1979년에 나의 사업을 시작하여 2005년 은퇴할 때까지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동안 미국의 역사를 바꾼 이곳 출신의 위인들에 관하여 알게 되었다. 데이튼 시는 주청사가 있는 콜럼버스에 가깝고 신시네티에도 가까워 오하이오 서남부에 3 도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1865년에 미국역사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경제적 어려움에서 이제 막 안정되고 회복되어 이민인구가 증가하는 때였다. 스팀엔진으로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유럽에서 자동차를 스팀엔진이나 전기 엔진으로 만들어보려는 무렵이었다.
오하이오 데이튼
우리 가족이 사는 데이튼 시의 윌버와 오빌 라이트 형제는 1860년대에 태어나서 1870년대 초반부터 이곳 바쁜 길가에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며 장난감 비행기를 만들어 날리는 취미를 일삼았다. 북쪽으로 약 200마일 되는 곳에 디트로이트에서는 아직 자동차 생산이 시작되기 이전이었다.
이들 형제는 프로펠러를 돌려 공중에 날아가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형제가 낮에는 가게에서 자전거를 고치고 저녁이면 모형 비행기를 만들어 들판 위를 날아 가도록하는 취미에 몰두하였다. 나무와 종이로 만든 비행기 모형에 프로펠러 돌리는 모터를 설치하고 조금씩 날기 시작하였다.
인류 최초의 비행
1903년 12월 17일에 처음으로 사람을 태우고 엔진 힘으로 날았다. 그들은 노스캐롤라이나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처음으로 1분 동안에 650피드를 날아서 착륙한 사실이 1905년에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실이 인류가 하늘을 날아가는 처음 시작이 되었다. 이 무렵에 디트로이트에 자동차 생산이 시작되고 1914년의 세계 1차 대전에 공급되면서 자동차와 비행기의 생산이 본격적인 괘도에 오르게 되었다. 미국에서 두 번째 큰 라이프 페터슨 공군기지와 공군 박물관이 데이튼 시에 있게 된 유래이기도 하다.
데이튼에서 발명된 세계적인 상품 중에 NCR (National Cash Register) 계산기가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내면 가게 주인이 요란한 소리 내는 기계에서 잔돈을 돌려주던 기억이 난다. 곧 이 기계가 세계에서 가장 일찍 제일 많이 쓰인 현금계산기다. 잔 페터슨은 1884년에 이 계산기의 공장을 세워 세계적인 사업운영으로 약 2만 명의 직원이 하루에 수백 대의 계산기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2차 대전 중에 미국 해군의 위탁을 받고 독일과 일본의 군사통신 암호를 해독하였다.
2차 대전 중에 독일군 움직임의 암호를 미리 알아서 적군을 섬멸하였다. 일본재독 야마모도 이소로구의 비행정보를 암호 속에 미리 탐지하여 필립핀에 도착 직전에 추락시켜 암살하는 등의 2차 대전 승전을 이루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NCR의 암호해독 책임자 조세프 데쉬 (Joseph Desch)는 본인의 암호 해독으로 그렇게 많은 독일과 일본군의 목숨이 희생됨이 후회스러워 혼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후에 미국 정부에서 평화적 노력만을 약속 받고 다시 돌아와 컴퓨터 발명에 헌신하였다. NCR의 계산기 기술이 IBM 컴퓨터로 이어지며 세계적 IT 기술계 혁명으로 이어짐을 바로 이곳 데이튼 시에 사는 동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