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50년 (5)

한국 참전영사를 위한 자선봉사

흑인건축가와 백인건축가를 동행하는 AAI 건축사무실을 창업한 1986년 6월에 후에 8년쯤 지나 1994년에 데이튼 상공회의소에서 그해의 스몰비지내스로 입상하면서 더 큰 프로젝트를 얻기 시작했다. 데이튼 VA를 포함한 병원건축설계를 하던 중에 한국 전쟁 참전용사들을 만나면 한국이야기에 꽃을 피웠다. 1995년에 오하이오 주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프로젝트에 설계비와 공사감독비 12만 불의 비용을 무료봉사를 하였다. 한국전쟁기념 공원에 세워진 비석에 회사이름과 내 이름이 새겨짐을 보고 살아있는 사람의 비석을 보는 이상한 느낌마저 들었다.

1999년에 데이튼 한인회가 약 2,300명 교민의 관심을 잃고 일할 사람이 없어 위기에 봉착하여 문을 닫게 된다고 들었다. 식당 사업하는 손상현 회장에게 금년도 일을 맡기고 나는 부회장으로 다음해의 행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 회장직을 이어받았을 때 당시 한글학교를 구해낸 우기희(현 중앙일보 ‘이아침에’ 칼럼리스트)의 한글학교 모금운동으로 한인회와 한글학교는 다시 튼튼한 기반을 쌓기 시작했다.

그해에 한인축제는 데이튼 한인회 역사에 가장 큰 행사였다. 나는 한국에 연세대학 건축과에서 한국 온돌주택 건축연구 자료를 얻어와 온돌방 모형을 만들었다. 볶음밥, 불고기와 김치가 제일 많이 팔렸다. 한국정부와 현대건설의 지원을 요청하며 한국의 문화를 미국 중서부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한국 정부가 참전용사를 위한 행사를 알려왔다. 40명을 수용할 능력을 가진 한인회는 클리브렌드, 신시네티, 콜럼버스, 대도시의 한인들이 감당할 수 없고 데이튼 한인회만 할 수 있다고 한다. 선발된 대학 학생들과 유명한 인간문화재들을 포함한 연예예술인단이 오하이오 주의 한국 전쟁 참전용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미군 재향군인 회장과 나는 데이튼 시장을 찾아가 데이튼 컨벤숀센터를 무료로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대학생 모두를 이박삼일동안 무료 숙박하도록 미국가정과 한국가정에 분배하였다.
한국에서 준비해온 무대공연과 전시장을 보는 참전용사와 가족의 눈에 눈물이 고이도록 감동을 선사했다. 참전용사 한사람씩 무대에 올라와 한국 국방부에서 준비한 메달을 목에 걸어주었을 때 가난하고 비참했던 한국전쟁의 기억을 씻기고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얼을 그들의 마음에 한사람 한사람 심어주었다.

오하이오 각처에서 찾아온 75명의 참전용사들과 100여명의 가족들 그리고 미국 오하이오주 고위인사들이 참관하는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협조해준 교민과 미국 가정에 감사했다. 젊은 나이 목숨을 바쳐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한 그들에게 참으로 고마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같은 해에 한인회관 설립 모금 음악회를 개최하고 한국에서 김성길 오페라가수 및 국내외 음악인들을 초청하였을 때, 필요한 여비와 숙박비도 자진해서 부담하였다.

국회위원 토니 홀

그곳에 국회위원 토니 홀은 매번 선거철마다 당선되어 반평생 민주당 자리를 지켜온 미국 정치계에 토주대감이었다. 1973년 그가 미국 국회의 국가안전보장 위원장으로 일할 때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에 닉슨 대통령을 방문하여 경제 지원 약속을 받은 때였다. 박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백악관에 직통전화를 설치하고 27살 젊은 정보원이 박대통령의 자제들 영어교사로 수행해갔다.

그때부터 25년이 지났을 때 필자가 1997년에 데이튼 한인회장으로 일하는 무렵, 국회위원 토니 홀은 항상 한인들 사회에 관심이 많았고 내가 다니는 한인 침례교에 가끔 들려서 우리들과 함께 한인들과 예배를 함께 보고 교인들과 이야기 나누기도 했다. 나는 옆에서 통역을 하기도 하고 선거철이면 한인들 모금운동을 하여 그의 재당선을 지원했다. 나의 건축설계 사무소에서도 선거자금을 지원을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토니 홀과 점심을 같이 하는 때가있었다. 그때 그가 김대중 대통령의 목숨을 구해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73년 늦은 밤에 잠들려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미국정보국장이 일본 동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김대중씨 납치사건에 관한 보도였다. 의심스런 몇 사람이 김대중씨를 결박하고 동경 앞바다에 대리고 나간다는 보도였고 미국 정보부 요원들이 멀리서 주시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당시 김대중씨는 한국의 민주화노력에 유일한 희망으로 미국 정보원의 감시와 보호를 받도록 배치된 상황이었다.

그는 즉각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했다. 박대통령은 사건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느꼈다. 박대통령은 즉시 김대중씨를 구출하기로 의견을 함께 했다. 토니 홀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장 지시가 미국정보 부장을 통해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김대중 씨는 팔과 다리가 묶기고 눈을 가린 체 바닷물 속에 잠기려는 순간 이였다. 미국 정보부 요원들로 하여금 박정희 대통령의 구출 명령을 일당에게 전하도록 하고 그들과 함께 김대중 씨를 다음날 자기 집 대문 앞에까지 동행하여 눈가림을 풀어주도록 지시했다."고 이야기하며 미국과 한국 관계에 매우 긍정적인 국제사회의 장래를 설명해주었다.

나는 며칠 후에 한인회장 명의로 한국 청와대 김대중 대통령께서 토니 홀 국회위원께 감사장 보내주면 한인회가 전달하겠다고 서면으로 신청했다. 그런 일이 있었던 며칠 후에 시카고 총영사가 데이튼 한인회를 찾아와 김대중 대통령과 토니 홀 국회위원은 이미 절친한 친구관계임을 설명하고 이제 와서 감사 할 사이는 지났다고 알려주고 돌아갔다.

필자가 한인회장직을 마치고 이사회장직에 있을 때 민주평통위원으로 청와대에 김대중 대통령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런 대화를 나눌 틈은 없었다. 김대중 회고록의 내용에는 당시 이후락 정보부장이 박정희의 승인을 받고 실행한 일로 추측한다고 기술되었다. 그리고 토니 홀 외에도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 닉슨 대통령 보좌관 까지도 막후 행동의 한 부분으로 활동하였다고 기술되었다. 후에 데이튼 국회위원 토니 홀은 죠지 부쉬 아들 대통령이 유엔 식량기구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이태리 로마로 이사했다.

그 후부터 나와 연락이 끊겼지만 그가 한국역사에 끼친 영향은 한국 사회에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되었기에 이 내용을 교민신문에 기고도 했다. 그는 그렇게 유명한 미국 정치계에 거물 이었지만 항상 비행기 일반석의 좁은 자리에 끼어 앉아서 여러 사람들과 검소하게 대화하는 그의 모습은 내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고 존경스럽다.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

나는 미중서부 민주평통위원 지부장으로 임명을 받고 중서부 13개주 한인회장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을 받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데이튼 한인회는 시카고 총영사관의 관할구역이기에 시카고에 자주 들렸다. 6시간 운전하면 이르는 거리다. 어느 날 시카고 한인이 북한에서 반입한 그림을 판다고 알려왔다. 20여장의 유화를 전시하고 있었다. 그중에 금강산 풍경화가 눈에 들었다. 폭이 180 CM 높이 150 CM 크기의 그림은 금강산을 보는 듯 장관이었다. 중앙에 귀면암이 우뚝 서있고 멀리 만물상이 펼쳐져 하늘과 구름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금강산 풍경의 일품이었다. 그림 모퉁이에 “금강산 귀면암 97년 5월 로성근”이라고 쓰였다. 김일성 주석이 뽑은 젊은 화가로 알려졌다고 한다. 우리 집안 파이어플레이스 위에 딱 알맞은 그림이었다.

금강산 관광

서울대학교 미주 동창회의 총회에 오하이오주 대표로 참석하는 중에 북한에 금강산 관광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로성근 화가와 귀면암을 보고 싶었다. 북한 국경을 지나며 우리의 여권을 가져가는 인민군을 보며 마음이 설레고 두려움마저 느꼈다. 경관이 좋은 곳마다 김일성을 선전하는 문구를 바위 깊게 새겨놓아 통일되면 어떻게 지워서 경관을 다시 회복할까 부터 걱정되었다. 동해에 해금강이 멀리 보이고 10월의 단풍은 우리를 뜨겁게 환영하는 듯하지만, 가난한 동포들은 웃음 없이 살고 있으며 “우리는 이대로가 좋다.”고 관광객이 보도록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북한 여자안내원은 김일성 뱃찌를 달고 우리를 인도하며 감시하였다. 사진촬영 금지구역이 많고 북한 수공예품 판매 구역에 자주 들렀다. 길가에서 그림을 파는 화가들을 만났을 때 로성근을 찾았다. 나는 $300.00을 주며 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다음 날 같은 곳을 찾아가 다시 그를 찾았을 때, 그는 멀리 있어서 오지 못하지만 수채화 한 폭을 전해 받았다. 로성근의 “선죽교” 수채화 이었다.

귀면암 건너편에 바위에 앉아 안내원과 이야기 나누는 동안 안내원은 노래도 잘 부르고 시조를 읊고 춤도 추어 다양한 재주를 보여주어 나는 놀랐다. 전국에서 선발되어 평양에서 훈련받은 기쁨조 요원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계곡 따라 하루 종일 걸어서 구룡폭포까지 올라가는 동안 목마르면 계곡에 흐르는 물을 마셨다. 오염되지 않은 환경은 참으로 고마웠다. 금강산 관광호텔은 현대건설에서 설치하였지만 삼류수준 호텔 정도로 유지되며 전깃불이 자주 꺼져서 엘리베이터 타기가 두려웠다.

새벽녘에 잠들려는 무렵, 건물 밖 멀리서 인민군 군가가 들려왔다. 발코니 밖에 나가보니 내 귀에는 씩씩한 군가라기보다 침울하게 들리는 슬픈 합창이었다. 방마다 김일성/김정일 얼굴을 벽에 걸어두고 자유를 빼앗긴 공포의 삶 속에 장송곡처럼 슬피 들려왔다. 다음날 남한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술에 취해 유행가 부르는 남한관광객과 저만치 철조망 건너편에 영양실조로 자라지 못하고 여윈 체구의 인민군이 헐렁이는 군복을 입은 모습은 눈물겹도록 대조되었다. 투덜대며 끌려가는 버스엔진 소리는 시간이 멈춰선 계곡의 가슴을 치며 언젠가 햇볕 비추는 날 있을 거라고 길섶에 바위의 침묵은 눈물겨웠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이런 글을 썼고 그해 미주 조선일보 5005년 12월 3일에 인쇄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께

“김정일 국방위원장께, 우리 민족의 자유북한연합이 당신에게 구합니다. 북한 인민에게 자유를 허락하십시오. 인간 도살장 같은 정치범 수용소를 치워버리고 인민이 각자의 능력으로 먹고 살 수 있게 해방시켜주시오. 그들이 당신만을 위해 살다가 생을 마치는 불행한 인생이 아니고 각자 생명의 가치를 동등한 사회 안에 공정하게 평가 받는 권리를 보장해 주시오. 수천만 우리 동포의 목숨을 당신의 손아귀에 쥐고 권력과 부귀를 세습적으로 누리려는 생각은 우리 민족 앞에 용서받지 못합니다. 자유 민주 시대의 흐름을 막겠다는 착각을 버리십시오. 국방위원장님, 사회주의 이론이 비과학적임은 이미 증명된 사실입니다. 북한이 체제를 개방하고 인권을 보장하여 정치범과 탈북자 처형을 중단할 것을 강구합니다. 당신 아버지의 남침 전쟁으로 생사기로에서 벗어나려는 우리민족 모두가 바라는 바요. 용단을 가지시고 대담하게 인민을 배려해주시기 부탁합니다.”

우리 어머니

내가 미국에서 직업생활과 사회활동을 하는 동안 나는 우리 어머님을 많이 닮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주도 여자로 일제강점기에 광주여고보에서 교육을 받고 목포 상업학교를 졸업하신 아버지와 결혼하여 8남매를 두셨다가 두 딸을 잃고 지금의 6남매를 기르셨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식 정구 운동과 피아노 오르간 연주를 즐기던 어머니는 육상선수이시며 하모니카를 대중 앞에서 연주하시는 아버지와 잘 어우러져 우리에게도 자주 가르쳐주었다.

동내 반장, 학부모회장, 동창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시며 항상 사회활동을 즐기셨다. 위에 3남매를 먼저 미국에 유학 보내고 중풍으로 반신불수 되신 아버지를 6년 동안 집에서 치료하셨다. 아래 3남매를 시집 장가보낸 다음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미국 이민 가도록 주선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한국을 떠난 지 20여 년 동안에 이사를 3번이나 하시면서도 자식들의 학교 기록과 내가 대학 졸업하고 일했던 숭례문 자료는 잘 보관하였다가 그것들을 들고 가족이민의 제일 끝으로 미국에 오셨다.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고 노인 아파트에 살며 노인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과 회담 후에 LA에 들렀을 때 태극기를 허리에 묶어세우고 노인회를 대표하여 공항에 나가 환영을 했다.

내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내 아이를 기르며 어머니의 모습을 본받았다.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화를 내지 않고 아이들의 잘못을 지적해서 설명해주었다. 사회에 나가면 잘못의 값으로 벌을 받기에 우리 집안에도 벽에는 매가 항상 걸려 있지만, 내가 어머니에게서 매 맞은 일 없듯이 나도 내 아이들에게 매질하지 않았다. 하지만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매를 들고 몇 차례 맞을 실수였는지 논쟁을 하다가 함께 울고 웃으며 수습하는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자라난 하늘이며 땅이시다. 보름달이 열 번 비추는 동안 우리는 어머니 몸 안에 바다가 있어 헤엄치며 꿈틀거리는 벌레 모양, 지느러미 흔드는 물고기 모양, 팔과 다리 움직이는 짐승 모양으로 자라다 탯줄 끊겨 소리치며 세상 밖에 태어난다. 우리가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라는 동안 네발로 기기 시작하고 드디어는 두 발로 서서 걷는 인류의 진화과정을 재연한다. 처음에는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다가 그다음에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어머니의 몸 안에 단세포 생명체가 한사람으로 자라는 과정은 자연이 억만년의 아련한 추억을 띄워 보이는 길고 긴 실타래가 아닐까.

조건없이 주시는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몸 한 조각이 자라서 아기가 되고 아기에게 주는 그지없는 정성은 모든 목숨의 뿌리이며 삶의 바탕인 듯하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거침없이 주는 사랑이 없었으면 이 땅 위에 어떤 목숨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기르는 동안 어머니는 새벽에 목욕하시고 뒤뜰 바위 앞에 정화수를 떠놓으시고 엎드려 기도드리며 마음은 하늘을 우러러보셨다. 어머니가 엎드려 기도드리던 하늘의 영(靈)은 내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항상 마음속에 느끼면서 함께 사는 듯하다.

삶 속에 흐르는 시간은 눈물과 웃음을 데려오고 빠르기도 늦기도 하지만 지구는 한결같은 속도로 공전과 자전하여서 해가 오고 달이 가듯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어른으로 자라서 세상 삶에 어려움을 겪는 때가 오면 어눌한 생각에 두려움이 덮치고 외로움이 구덩이를 깊이 파서 죽음의 속도보다 빠르게 쓰러뜨리려 하는 역경이 온다. 이 순간에 어머님이 내 안에 심어준 하늘을 보게 되고 나를 붙들어 올리는 손길을 느껴서 외로운 길 허덕임에서 헤어나게 한다. 수렁에서 건져낼 뿐 아니라 하늘이 마음의 벗이 되어 그 힘으로 세상이 깜짝 놀라도록 기적(奇蹟)을 만들기에 사람들은 만리장성을 쌓고 피라미드를 세워 올렸다.

진정한 고마움을 얻고 고개 숙여 기도하며 눈물 흐르는 경지에 이르기도 하지만, 어머님의 하늘 없는 사람은 하늘이 사람을 잊었는지 사람이 하늘을 버렸는지 파란만장의 외로운 길을 걷다가 한세월 텅 빈 무덤으로 홀로 떠나는 사람도 있다. 사형수 중에 형장에서 마지막 남기고 싶은 한마디를 물으면, “어머니“라고 힘껏 외쳐 교도소 벽을 울리고 삶의 부조리에 막을 내리는 인생의 막장도 있다. 싸움이 멈추지 않는 이 땅 위에 어머니는 평화의 여신으로 모든 목숨이 다시 돌아가는 꿈속의 고향 땅이라 할까.

믿음은 사람이 사는 동안 언제나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믿음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겠는가.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있어 생성이 있고 노래와 춤으로 보여주는 감성이 있고, 더불어 살며 말을 하기 시작하여 지성이 따라왔기에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서게 되었다. 사랑이 있기에 목숨이 있고, 삶 속에 종교가, 예술이, 과학이 있다. 그 사랑과 믿음은 하늘에서 어머니의 옥합에 담겨 우리에게 전해진 삶 속에 가장 고귀한 유산이리라.

우리 어머님께서 막냇동생 가까이 로스앤젤레스 요양원에 계시고 나는 오하이오 주에서 건축설계 사업에 바쁜 날들을 보내던 때였다. 83세 나이에 아이들과 가족 친척들 이야기로 한 참 꽃피우는 중에 나는 문득 어머니께 여쭈었다. “어머니 80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였어요.” 어머니는 조용히 생각하시는 듯했다. 그리고는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이제 막 걷기 시작하고 재롱부리는 때였지.” 이렇게 뵙고 난 얼마 후 막냇동생의 어머니 위급한 소식에 서둘러서 찾아왔을 때는 이미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몸이 잿가루 되어 태평양에 뿌려지면 물결 따라 고향 찾아가 아버지 뵙고 바람 따라 아이들 찾아보시겠다고 유언하신 그 날,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대화는 내 마음에 메아리 울린다.

이 세상에 가장 큰 힘

내가 어렸을 때 수풀 속에 새끼 새들의 둥지를 발견하고 신기해서 더 가까이 가보려는 순간 어디선가 어미 새가 날아와서 내 얼굴에 부딪혔기에 놀라서 도망쳤던 일이 있다. 그 작은 어미 새의 필사적인 용기는 그 순간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었음을 나는 상상한다. 1945년 해방 후에 우리 가족이 만주에서 북한으로, 북한에서 남한으로 탈출한 우리 어머니의 용기와 슬기는 우리 6남매를 전쟁과 가난 속에 구해낸 커다란 능력이었음을 나는 잘 기억한다.

낳으시고 길러주신 우리 어머님, 언제나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함께 웃음 짓고 눈물 흘리시는 우리 어머님. 지금도 보고 싶은 어머니! 어머니!

동부의 보스턴에 출장 가면 항상 들리는 식당이 있었다. 유니언 오이스터 하우스 식당은 부두에서 머지않은 해물시장 가까이 있고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이다. 병원설계 회의를 마치고 직원 3사람과 찾아갔을 때 1〜2층은 이미 만원이고 우리는 3층 지붕 밑에 조금 컴컴하지만 아늑한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잠시 후에 웨이터가 와서 내가 앉은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대답하자 의자 등바지에 붙어있는 글씨를 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잔 케네디가 대통령될 때까지 즐겨 찾아온 자리라고 작은 동판에 새겨진 글씨가 있었다. 나도 여자 친구와 저녁 먹으러 이런 방을 찾은 일이 있기에 그도 그랬으리라 상상할 수 있었다.

대통령도 줄 서서 기다리는 나라

아들 조지부시 대통령이 데이턴을 방문했을 때 그 곳에 유명한 스테이크 식당에서 저녁 식사하고자 했다. 보좌관이 주인에게 전화하고 예약하려는 때 주인은 식당 규칙에 예약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대통령과 보좌관이 줄에 서서 기다렸다가 식사를 마쳤다. 이것이 자유와 평등의 미국 사회이다. 대통령이 떠난 후에 주인은 그 자리에 조지부시 미국 대통령이 식사했다고 동판에 새겨 붙쳤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했고 식당은 더욱 알려졌다.

이차대전 후에 미국에 보스턴 바닷가재가 식도락가의 입맛을 끌기 시작하면서 유럽 식당에도 바닷가재 요리가 시작되었다. 출장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살아있는 가재 두 마리를 해물 시장에서 사서 상자에 넣어 손에 들고 왔다. 부엌 바닥에 풀어 놓아 뻘뻘 기어 다니자 아내와 두 아이는 소리를 치며 좋아 했다. 하지만 큰 냄비에 물을 끓여 익힌 후에 검은 색 가재는 빨갛게 색이 변했고 축 늘어진 채 접시 위에 올려놓았을 때는 온 가족이 나와 가재를 외면하였기에 나는 당황하고 실망스러웠다. 뻘뻘 살아있던 생물에 정든 아이들이 살생한 아빠를 잔인하게 보는 듯 했다. 결국에는 며칠 동안 혼자서 얼려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나와 아내는 별로 싸울 일이 없었다. 나는 집밖의 일에 충실했고 집안일은 거의 아내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남의 집은 돈과 아이들 때문에 가끔 싸운다는데 나는 생활비와 아이들 교육은 아내가 주인이었고 나는 옆에서 보조하며 협조하는 노력했을 뿐이다. 한번은 아내가 신발 모으는 취미가 있었기에 차고의 가구마다 신발이 가득 채워졌다. 나는 참다못해 아내가 집에 오기 전에 모든 신발을 차고 바닥에 늘어놓고 벽에 “필립핀 대통령의 아내 아멜다의 신발”이라고 써 부쳐놓았다. 아내가 집에 와서 성난 고양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기에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이 다시없었다.

첫 중국 방문

우리 부부는 데이튼 시청 초청으로 중국 방문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People to People's Ambassador Programs 으로 데이튼 City Manager Valerie Lemmie가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우리 부부와 동행하기를 요청하였다. 북경, 서안, 계림, 상해를 방문하고 그곳의 지방정부, 학교, 병원, 등을 방문하여 직원들과 소통하고 관광도 하게 되는 14일 기간의 여정이었다. 1945년 해방되는 해에 나는 만주를 떠났고 이제 다시 중국을 찾아가는 가슴 뿌듯한 여행이다.

1997년 10월 26일 우리 일행은 북경에 도착하였다. 공항 신축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누추한 시설을 보며 택시에 나누어 탔다. 낡은 유럽 차에 합승하는 불편은 관광객을 맞을 준비가 전혀 없어 보였다. 운전기사는 화난 사람처럼 불친절하여 우리와 커다란 여행 가방들을 호텔 가까운 큰길가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비탈길을 끙끙거리며 간신히 호텔 대기실에 도착하였을 때 침울한 분위기는 1945년 해방되었을 때에 보았던 중국과 달라진 게 없었다. 벽에 걸린 중국지도에 북한의 도시들을 명시하였고 남한은 공백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침 식사는 우리가 한국이나 미국에서 먹는 중국음식과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큰 접시에 담은 음식을 각자가 먹는 젓가락으로 가져다 먹기에 위생관리가 전혀 없었다.

자금성과 만리장성

천안문 광장에 모택동의 얼굴이 크게 걸렸고 경비는 삼엄하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미국에서 왔다고 하면 적국에서 어떻게 여행 왔는지 궁금해했다. 돌다리를 건너 천안문 안에 들면 자금성 궁궐에 든다. 원, 명, 청시대의 24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자금성은 그 방수가 9000여 개에 달하여 갓난아기가 궁내 방에서 하룻밤씩 자더라도 27살이 된다는 세계에서 제일 큰 황궁으로 알려졌다. 궁궐의 오래된 북쪽 부분은 원나라의 건축양식이기에 명, 청 궁궐을 짓기 전에 원나라 왕궁이 있었을 듯싶었다.

도시 외곽 가까운 곳에 만리장성이 있다. 산을 넘고 계곡 넘어 끝없이 쌓아 올린 벽돌 성벽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포함한 ‘세계의 7 기적 건축물’ 중에 가장 큰 규모이다. 성벽 위에 큰길은 병사들이 이동하는 통로이며 곳곳에 병사들이 머무는 누각이 세워졌다. 지도를 보면 한반도의 서부에서 시작되어 대륙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뻗어 나갔다. 기원전 400년경에 춘추전국시대부터 북방민족이 두려워 세워졌지만, 중국은 몽골에 지배되었고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나라가 중국역사의 가장 오랜 왕조가 되었다. 만리장성 남과 북이 서로 경쟁하며 56개 민족이 섞여 살면서 고대부터 12세기까지 세계 문화와 문명을 지배한 대국이었음을 볼 수 있다.

서안

서안은 실크로드를 따라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와 교역을 하던 주, 진, 한, 당, 나라들의 수도였으며 진나라 진시황제의 본향이다. 보존된 문화 양식이 한반도의 백제, 신라, 일본의 나라시대 문화와 연결된다. 서안의 도시 평면을 보면 옛 경주와 일본의 교도의 가람과 공통성을 보이며 동서와 남북을 축으로 사각형의 성곽을 건설하였다. 명대에 개축된 현재 성곽은 잘 보존되어있다. 서안 11,000년의 역사 속에서 모계사회에서 부계 씨족사회로 변천하고 고대 왕조의 기록이 잘 보존된 아세아 문화사의 보고이다. 흙으로 지은 피라미드도 산재하여 피라미드의 고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세계 8대 기적중의 하나인 진시황 병마용갱은 1974년에 한 농부가 땅을 파다가 발견하였으며 우리 일행은 그 농부와 만나 인사도 하였다. 진시황릉에서 야 1km 되는 거리에 8,000명 군대와 130개의 전차, 520마리 말의 모습을 흙으로 빚어 실물 크기로 각각 다르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이 거대한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계림

중국의 계림은 월남과 가까운 지역으로 하천과 산의 모습이 동양화에서 보는 수려한 경치의 근원지인 듯하다. 우뚝우뚝 선 산봉우리들은 신의 조각처럼 특이하고 아름답다. 봉우리마다 이름이 있고 전설이 있어 4시간 배를 타고 흘러가는 동안 이야기와 그림책을 보는 듯 넋을 잃고 도취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처럼 맨몸으로 개울물에 헤엄치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다. 밤이면 어부들이 대나무 배 위에서 새의 목을 묶어 생선을 물어오기만 하지 삼키지 못하도록 하여 고기 잡는 풍습도 구경하였다. 일본사람들은 자기 나라 고유의 풍습인 줄 알았다가 이곳에서 유래된 연줄임을 후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독사를 술에 담아 오래 보관한 후에 마시는 술맛을 이곳에서 처음 맛보았다.

상해는 중국에 우리나라의 부산과 같은 역할의 도시이다. 북경은 북방을 대표하고 상해는 남방을 대표하여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우리 일행은 병원과 학교를 방문하였다. 중국은 인구 폭발을 방지하러 ‘한 가족에 한 아이’ 정책을 세웠기에 그 귀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최선을 다하는 듯하다. 유치원 학생들에게 외국인 선생이 영어를 가르치고 서구식 교육을 모방하여 공산당 이념을 어렸을 때부터 훈련하고 있었다. 병원 설비는 크게 실망하였다. 시설과 의료시술이 미국에서 보는 현대의학에 이르기에 요원함을 보았다. 도시의 교통은 보행자와 자전거가 대부분이며 가끔 보이는 모터사이클과 자동차는 그 안에 섞여 교통질서는 혼잡할 뿐이었다. 공산당 정책으로 부자는 모두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가난한 살림에 부엌과 변소 설비가 모두 공용으로 지저분하고 비위생적 환경이 대부분이었다.

잠에서 깨는 사자

우리 일행의 1997년 방문은 중국의 1984년 덩샤오핑 주석에 의한 개혁개방정책 이후에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외국인 방문이 이제 막 시작하였기에 여러 면에서 불편하고 후진성을 경험하였지만, 이차 세계대전 때 ‘잠자는 사자’로 불렸던 중국이 이제는 분명히 잠에서 깨었음을 보았다.
아내는 어린 시절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자랐다. 아군과 미군의 수천 명이 한국전쟁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살해되고 부상당했을 때 가까운 흥남부두에서 퇴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장인 장모와 8세 된 아내는 마지막 배에 올라 거제도를 거쳐 남한으로 옮겨왔다. 부산에 사는 동안 엄마와 딸이 길을 가며 나눈 이야기 중에 “너는 커서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돌봐라.”하신 말씀에 아내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의과대학을 마친 후 미국에 유학 와서 의사가 되었다.

네 아이들이 대학 다니러 집을 나간 이후부터 아내와 나는 함께 여행 다녀오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장인 장모가 서울에 살아계시는 동안 해마다 찾아가서 제주도 구경도 다녀오고 미국에 모셔와 건강관리도 해드렸다. 장모님의 파킨슨 신경질환은 80세를 넘기시며 갑자기 심해졌다. 83세에 서울 삼성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아내는 병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운명을 앞둔 며칠 전 중환자실에서 딸을 깨운 어머니는 딸에게 “여보여보 저 아름다운 구름을 봐요. 저기가 천당인가 봐요.”하시며 손짓을 하셨다.
어머님 돌아가신 9개월 후에 장인마저 떠나시고 어머님이 평생 동안 권사로 봉사하신 불광동 은평교회 장지에 함께 모셨다. 아내는 55세 되는 해에 30년의 마취의사 직업에서 은퇴하고 곧 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60세 되는 해에 아내는 미국 감리교의 목사 안수를 받고 나는 장로 안수를 받았다. 아내는 남가주 뉴포트비취 감리교 부목사직을 봉사하기 시작했고 부모님 떠나신 후 매년 성묘하러 한국에 다녀왔다. 어느 해 성묘하러 한국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고 저녁 식사하러 서대문 부근의 식당에서 나오는 길에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다.

불의의 사고

친척들과 함께 저녁을 마친 아내는 돌층계 셋을 남기고 바닥에 얼굴을 부딪치며 넘어졌다. 놀란 친척들과 함께 아내에게 급히 뛰어갔을 때는 입과 코에서 흘러내는 피가 앞가슴까지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강남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 담당의사는 아내의 얼굴이 왼쪽 눈에서 턱까지 광대뼈가 함몰되었다고 했다. 아내의 뇌와 눈 그리고 치아 등을 진찰하는데 꼬박 6시간이나 걸렸다. 강남에서 성형외과를 개업하는 사촌 동생이 급히 달려와 아내에게 정신적 안정감을 주었다. 의사들과 사촌 동생은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서 48시간 이 내에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그 이유는 파괴된 연골이 굳어지면 수술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란다.

또한, 이곳에서 수술하게 되면 치료기간이 두어 달 넘게 되어 타국에서의 불편함이 클 것이니, 차라리 귀국하여 거주 지역의 병원에서 치료받는 게 아내에게 더 편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의 모든 여정을 취소했다. 우리 부부는 병원에서 주는 시디 디스크 한 장을 소중히 들고 다음 날 아침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여인

얼굴 한쪽에 붕대를 감고 먼 창공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에게서 처음 만났을 때의 웃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창밖의 뭉게구름처럼 아름답던 추억이 뭉실뭉실 떠올랐다. 만날 때면 언제나 다소곳이 웃고 있는 아내의 얼굴은 세상 어느 여인보다 아름다웠다.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고, 아기들을 향해 웃는 아내의 얼굴이 바로 사랑이란 것을 새롭게 느끼면서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은 손녀들을 보고 오는 날이면 아내의 혼자서 웃는 얼굴을 자주 보게 된다.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나에게 아직 웃음을 아끼지 않는 아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인이다.

여자는 아이 때부터 거울 보는 것을 좋아한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화장을 하고 밖에 나가기 시작한다. 집안에서는 생 얼굴, 밖에서는 화장한 얼굴 사이를 오가며 한평생을 그려 넣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날마다 가꾸어야 할 소중한 아내의 얼굴인데, 상처가 난 아내의 속 사진을 한 장의 시디에 담겨 아내의 핸드백 속에 처박혀 있다. 가슴이 허허로워져 자꾸 아내의 붕대 감은 얼굴을 쳐다보게 된다. 그 곱디고운 아내의 얼굴이 본래대로 돌아올까 걱정도 되었지만, 그보다 말없이 회복의 기도를 하고 있는 아내를 보는 것이 더 괴로웠다.

본래 인간의 피부는 털로 덮이어 있었다. 그런 인간에게 옷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면서 털은 빠지고 그 자리에 솜털로 자리바꿈이 되었다. 이렇게 형형색색의 옷에는 자신의 얼굴도 옷에 맞게 치장을 하며 살아간다. 그게 어쩌면 인생살이 중 하나이지만 말이다. 아내는 30여 년을 병원의 수술실에서 환자들의 마취를 담당했다. 지금은 미국 감리교 부목사로 시무하며 동시에 가정상담소에서 목회자와 의사로서 가정상담을 하고 있다. 이런 아내의 생활이니 화장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비행기는 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집 부근의 오렌지카운티 병원을 찾았다. 50세 전후의 한국인 2세 성형외과 의사에 의해 수술이 시작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대학 병원에서 가지고 온 시디 디스크 한 장이 놀랍게도 미국 수술실 절차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컴퓨터 스크린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1960년대에 한국을 떠나온 우리 부부는 한국의 경이로운 의료기술 발전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수술은 아침 8시에 시작하여 11시 반경에 환자는 회복실로 옮겨졌다. 얼굴 반쪽이 퍼렇게 멍들고 부어 있지만, 옛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의식을 회복한 아내는 내게 물었다.
“얼굴 어때요? “
“다친 쪽이 안 다친 쪽보다 더 예뻐.”
얼굴 피부는 움직이지 않지만, 아내의 웃는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의사는 수술과정을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다. 얼굴의 세 곳을 열고 타이타늄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들어 올렸다고 했다. 얼굴에 흉터가 보이지 않도록 입안과 귀 뒤로 수술했고 가장 작은 흉터를 남기려고 온 정성을 쏟았다는 곳은 눈 아래에 작은 주름살 부분이었다고 했다. 나는 감사한 마음에 울컥했다.

50대 중반의 혈전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전혀 예기치 못하고 깜짝 놀라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난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지 묻기 전에 앞을 보고 더 낳은 미래로 연결되는 기회였다고 보면 회복이 빠른 듯싶다. 지구의 저쪽에서 일어났던 사고를 지구의 이쪽에서 수습했다. 사람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당할 적마다 우리 부부는 서로 의지하며 온 정성을 모아 회복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내가 40대 중반 나이에 목과 허리의 척추에 신경이 눌려 치료받고 회복한 후에 50대 중반에 몸에 혈전이 생겨 위기를 넘겼다. 한국과 중국을 다녀오는 긴 비행기 여행 을 마치고 귀가한 후에 곧 센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하였다. 다음날 오하이오 직장에서 집에 오는데 왼발이 붓고 걷기가 어려웠다. 아내는 이미 저녁상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운동하다 나도 모르게 다쳐서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밥 먹으려는 데 의사인 아내의 눈은 유심히 관찰한 다음 차려놓은 밥상을 뒤로하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서둘러 직행했다. 의사가 나를 진찰하는 위급하고 심각한 모습을 보고 나는 이 병의 위협을 처음 느꼈다. 왼쪽 발목에서 혈전이 생겨 허벅지 안에 혈관을 막았다고 한다.

혈전은 발이나 발목부근의 정맥 안에서 작은 핏덩이가 생기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고 한다. 그 작은 핏덩이가 정맥의 흐름을 따라 올라 머리의 뇌에 들면 뇌졸중, 심장에 들면 심장마비, 허파에 들면 폐경색으로 급사하는 질병으로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이다. 약 1,000명중에 한사람이 혈전을 가질 확률이라고 한다. 현대의학에서도 예방하는 차원으로 아스피린 먹는 길밖에 없다.

다행이도 혈전이 뇌, 심장, 허파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몸 안에 피를 묽게 하는 치료를 계속하였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일주일 후에 다시 재발하여 이번에는 대정맥 하단에 앞으로 사는 동안 영구적 필터를 설치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는 걱정스러웠다. “골프는 계속해서 칠 수 있어요?”하고 물었다. 의사의 대답이 명답이었다. “골프 역사에 유명한 벤호간도 대정맥에 필터를 넣고 세계선수권을 몇 번이고 했다오.”하며 웃는다. 의사가 골퍼였기에 내게 가장 시원한 답을 들려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수년 후에 집 뒤뜰 발코니 아래 온도계를 달아놓고 싶어 의자를 끌어다 올라섰다. 높이가 조금 모자라 등바지 위에 올라서려고 생각하며 의자가 넘어지면 붙들 곳까지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올라서는 순간부터는 기억하지 못한다. 깨어나 보니 콘크리트 바닥끝에 머리를 부딪쳐 피투성이 된 채 바른손에 아직 장도리 들고 엎드려 있었다. 내 비명을 듣고 달려온 아내는 내 머리를 묶어 피를 멈추게 하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가는 동안 내가 정신 잃지 않도록 계속 말을 시켰다. 구급차 불러도 언제 올지 모르는 때였다.

나는 정신 오라가락하며 응급실에서 치료받고 5시간 잠든 후에 깨어났다. MRI 사진에 뇌가 조금 왼쪽으로 쏠렸고 바른쪽에 물이 고여 있었다. 의사는 뇌진탕 상처가 이 정도면 오래 동안 코마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한 체질일까 아니면 하늘이 도왔을까. 3〜4개월 고개 돌리지 못하고 조심해서 살아났다.

나이 65세 은퇴한 해에 나에게 4번째 생명의 위기가 다가왔다. 오하이오 주에서 남가주로 이사하고 중국 안에서 한국의 뿌리를 찾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 방문하는 여행을 즐기는 때였다. 서안에서 북경까지 열흘 여행을 마치고 오는 길에 독감을 앓았다. 한국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전신검진을 받았다. 간염이 발견되었다. 간 속에 1.5cm 직경의 까만 반점이 나타났고 2개의 회색 반점들이 보였다. 필라델피아에 형님의 친구 의사 한혜원 누님을 찾아가 까만 반점은 레이저로 태워서 제거하고 회색 2점들은 약물치료를 받아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은퇴하지 않고 오하이오에서 건축 일만 열심히 하고 살았으면 간암으로 세상과 작별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삶과 죽음의 거리는 그렇게 가깝고도 멀다. 이렇게 4번이나 죽음에 가까이 갈 적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운명을 하늘에 맡겼기에 이렇게 담담하게 살아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