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50년 (4)
논산 훈련소
나는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미국에 왔다. 18개월 학도병과 36개월 일반병의 선택이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학비가 떨어져서 논산 훈련소에 혼자 내려갔다. 일반병으로 근무하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원입대했다. 입대한 첫날에 삭발한 머리에 군복을 입고 배당된 막사에 찾아갔다. 충청도 시골에서 징병으로 소집되어온 훈련병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기차나 버스를 평생 처음 타고 논산에 왔다는 산골에서 농사만 짓다가 온 청년들도 있었다. 낯선 분위기였지만 마음에 준비하고 왔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다음날 군번을 받아 목에 걸고 군화신고 철모를 쓴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니 며칠 전까지 학생이었던 내 모습과 전혀 달랐다. 우스꽝스럽고 귀엽고 조금은 씩씩해 보이기도 했다. 30명이 한 막사에 자고 아침 여섯 시 나팔소리에 깬다. 세수를 마치면 막사에 15명씩 서로 맞보고 앉아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밥과 국이 담긴 냄비를 앞에 놓고 소대장의 “식사” 호령을 기다린다. 잡곡이 섞인 밥에 쇠고기 콩나물국이 하루 3번 먹는데 가끔 김치가 따라 나오면 큰 경사였다. 군대생활 3년 하고 먹은 콩나물을 한 줄로 이어놓으면 지구를 한 바퀴 돈다는 농담이 실감 났다.
가끔은 재미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30개의 밥 냄비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 졌는데 마지막 훈련병의 밥 냄비가 도착하지 안 했다. 식사 당번 사병과 소대장은 모든 사병을 세워놓고 온 막사를 뒤졌지만 숨겨진 밥 냄비를 찾지 못했다. 냄비 하나 더 만들어 식사를 마친 후에 돌아온 냄비는 31개이다. 두 줄로 서로 마주보고 식사했는데 누가 마술 부려 한 그릇 더 먹었는지 알 길이 없다.
대학 재학생의 혜택
소대장 박 대위는 내가 서울대 재학생임을 알고 소대장 보조병으로 발탁하고 사무실 청소와 심부름을 시켰다. 소대장 밥 냄비는 장교식당에서 내가 배달하였고 소대장이 외출하면 내가 먹었기에 가끔은 내 옆의 훈련병과 나눠 먹는 재미가 대단했다. 박 대위는 나에게 여러가지 특권을 부여했다. 우리 소대에 배달되는 담배와 건빵을 내가 소대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소대원들은 나의 공정성을 보았는지 나의 의견을 따르게 되고 질서가 유지되는 듯했다.
하지만 말썽꾸러기는 어디나 꼭 있었다. 화를 자주 내고 내 평생 처음 들어보는 시골 사투리 욕은 말끝마다 튀어나왔다. 드디어 다른 소대원과 싸움이 터졌다. 말리던 소대원 중에 한사람이 대검(총에 꽂는 칼) 두 개를 들고 와 쌍방에 하나씩 주며 나가서 남자답게 싸우고 오라고 막사 밖으로 쫓아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 욕하고 화낸 병사는 피를 흘리며 끌려 들어왔다. 곧 위생병을 불러 상처를 치료하고 끝냈다.
당시 훈련과정은 일제강점기의 2차 대전 군대훈련 방법으로 인권유린이 심했다. 훈련 중에 두들겨 맞는 경우가 심했고 변소에서 타살된 시체가 발견되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뜻밖의 위기
1958년 1월 13일 새벽에 나에게도 그런 위기가 일어났다. 북한 최전방 일선에서 트럭을 타고 훈련병을 실어가는 전투복 헌병들이 나타나 나를 찾고 있음을 알았다. 학도병들을 일선으로 데려가는 과정이다. 내가 학도병으로 잘 못 알려진 것임을 알고 나는 곧 훈련소 사무실 마루 밑으로 몸을 숨겼다. 몇 시간 후에 학도병 여러 명을 태우고 트럭은 떠났다.
어둠 속에 숨어 들어간 마루 밑은 몹시 춥고 그곳은 병원 쓰레기로 가득 싸인 곳이었다. 아침에 박 대위가 출근하는 때까지 그 속에서 기다리려고 마음을 다졌다. 잠옷만 입고 잠들면 얼어 죽을까 두려워 유리조각으로 손바닥을 찌르며 아픔을 참았다. 새벽빛이 들며 주사기 깨진 것들과 바늘, 피 묻은 수술 방 쓰레기 위에 내가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사실을 보았다.
평생 처음 당한 엄청난 구타
잠시 후에 청소 병사가 쓰레기 한 바켓을 구멍 속에 버리는데 그 쓰레기 모두 내 얼굴과 머리에 덮어썼다.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기어 나와 헌병대를 찾아갔다. 헌병들은 모두 경비에 나가고 술에 취한 듯한 헌병 혼자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훈련병임을 알고 내손에 수갑을 채우고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과 배를 감싸고 한사코 피했지만, 코피 터지고 숨이 막히고 얼마 후에 정신을 잃었다. 내 평생 그렇게 심하게 매 맞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헌병 장교가 방에 있었다. 그는 내가 혼자서 자진 입대한 사실을 알고 혹시 간첩이 아닌지 심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온몸이 피투성이고 얼굴이 멍들어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대답하다가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모양이다. 얼마 후에 다시 정신 들었을 때는 막사 안에 내 침대에 누워있었고 박 대위가 옆에 있었다. 누군가 사무직원이 내 등록을 일반병 아닌 학도병으로 잘못 취급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다행히 큰 상처없이 회복되었고 훈련소에서 훈련을 톡톡히 치른 셈이 됐다.
어느 주말에 어머님이 방문하러 오셨다. 훈련소 입구에는 면회소가 있고 가족 면회는 방을 내어 주었다. 나는 어머님을 보자마자 울음만 터트리고 할 말을 잊었다. 어머님도 형의 의과대학 학비에 쫓겨 나의 학비를 도와주지 못함에 죄스러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어머니와 가족 친척들의 소식을 나누는 동안 옆방에서는 남녀의 황홀한 비명이 시끄러웠다. 어머니 떠나시고 나는 헌병에게 이 방들이 어떻게 쓰이느냐고 물어 보았다.
나이 30대 헌병은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시골에서 장가들고 논산훈련소에 오면 신부가 주말에 신랑 보러 온다고 한다. 면회소는 낮에만 허락되기에 방이 모자란다고 한다. 어떤 경우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신부가 신랑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면회소의 헌병들이 남자노릇을 해주는 말 못할 어려움도 숨겨있다고 했다. 매일처럼 피땀 흘리는 훈련소 한 모퉁이에 본능적 사랑이 살아있음을 세삼 처음 알게 되었다. 결혼을 생각해보지 못한 나에게 박 대위는 누이동생을 소개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곧 훈련 3개월을 마치고 숙부가 병원장 하시는 대전 63 육군병원에 배치되었다.
처절한 삶의 목격
나는 위생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는 곧 환자들의 음식을 나르고 침구를 치워주는 동안 그들과 친구가 되었고 병든 몸으로 고통 받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처음 알게 되었다. 그들 중에 어떤 환자는 참으로 비참하였고 조금은 건강이 회복된 듯한 환자들과는 친한 친구가 되기도 했다. 병이 회복되어 퇴원할 때는 기쁘고 헤어짐이 섭섭하였다. 하지만 간절히 회복되기를 고대했지만 끝내는 목숨을 잃는 환자도 있었다. 내 손으로 담요를 펴서 시체를 감싸서 침대 위에 누이고 다음날 화장지에 운송되는 때까지 나는 그 시체 옆에서 밤을 새웠다. 그때처럼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종교를 갈구하는 심정은 내 젊은 시절의 인생관이 요동치는 경험이었다.
어느 날 지뢰 폭발사고로 두 발과 한쪽 팔을 잃고 후송되어온 환자를 보았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이후에 일선에서 가끔 보는 지뢰 사고였다. 나는 그 환자를 볼 적마다 가슴이 아프고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 일선에서 동료 친구가 찾아 왔다, 측은한 마음으로 찾아온 친구를 보자마자 “야 내가 큰일 날 번했어, 살아서 널 보니 얼마나 반갑냐.” 하며 남은 손 하나로 친구의 목을 끌어안는다. 그 순간 그 환자의 희망을 보았고 생명의 의욕을 보았다. 아! 살아 있는 목숨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런 후에 살아가는 길에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 나를 찾아와도 이 환자를 기억하여 자신의 삶에 감사하며 용기를 다시 얻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문학에 심취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문학에 취미를 얻었던 때가 있었다. 군복무 하는 동안 시를 쓰고 일기 쓰는 시간을 다시 얻게 되었다. 21살 내 나이에 내 나름대로 인생관을 찾아 헤매는 귀중한 경험을 거쳤든 듯하다.
군의관들은 내가 병원장의 조카이며 서울대학 재학 중임을 알게 되어 더욱 친절해졌다. 숙부는 내가 군복무 하는 동안 공과대학 학점을 받도록 배려해 주셨기에 대학은 6개월 늦어 1961년 9월에 졸업하고 일반병 군복무도 무난히 마칠 수 있었다. 의과대학은 6년제이고 공대는 4년제여서 형과 나는 같은 해에 졸업했다. 내가 훈련을 마친 2년 후에 형이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다. 형이 훈련 받는 동안 내가 방문하였을 때는 논산 훈련소가 미국식 군사훈련으로 개선되어 내가 겪은 훈련소 분위기와 크게 대조되었다. 인권보장이 향상되고 막사 설비와 식당 분위기가 대학 숙소 같은 인상을 받았기에 백선엽 삼군사령관의 현대식 군부 개조 노력을 한눈으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일본식 군국주의 군사 훈련을 겪었다면 2년 후에 형은 미국식 민주주의 군사 훈련을 받는 대조된 모습이 한국 군부 현대역사의 단편을 보여주었다.
갑자기 찾아온 질환
미국에 올 때 호주머니에 박정희 군사정부에서 허락한 $50과 미국에서 형이 마련해준 비행기 표에 딸려온 어께 가방하나 매고 이국땅에 찾아와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은 이러한 군사 훈련 덕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는 때도 있었다. 우리 형제는 비교적 만리타향 이국생활에 적응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원을 졸업하고 여러 해 미국의 초년병 건축가로 설계와 제도에 몰입하는 동안 내 몸에 나쁜 버릇과 질병이 자라고 있음을 몰랐다.
직장시간 후에 집에 오는 길에 운동을 좋아하는 나는 친구들과 정구를 치고 왔다. 땀 뻘뻘 흘리고 몸을 씻고 나면 그렇게 상쾌할 수 없고 직장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듯했다. 어느 날 운동하고 집에 왔을 때 바른 팔이 재리기 시작했다. 재려나서 풀리면 아프기까지 하였다. 밤에 자다 깨면 바른팔에 감각이 없고 움직이질 못해 왼팔로 들고 놓아야 할 만큼 심해졌다. 아내는 빨리 의사를 찾아가도록 재촉을 했다. 친구 외과 의사를 만났을 때 그는 곧 입원하도록 하고 엑스레이 혈액검사를 마친 후에 신경외과 의사를 만났다. 뒷목 척추에서 신경이 눌린 듯 하다며 다음 날 혈관에 색소를 넣어 엑스레이로 정확한 장소를 확인한 후에 곧 수술한다고 한다.
그날 밤 나는 병실에서 한잠 자지 못하고 고민하였다. “혈관에 색소를 넣어 검사하고 목에 척추 수술을 한다?” 친구 의사의 말이 내 귀에서 비명을 친다. 다음 날 새벽에 친구 의사에게 “집에 가서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는 글을 남기고 병원에서 도망쳐 나와 곧바로 정구장 사우나에 들어가 내 방식의 열 치료를 하고 있었다. 도면을 그리고 글을 쓰고 정구치는 바른팔이 고장 났으니 앞이 캄캄했다. 그 순간 나에게 기대하지 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위급한 상황에 나에게는 구세주처럼 천사가 찾아왔다.
키가 건장한 독일계 중년 남성이 벌거벗고 걸어들어 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왜 병원에서 나왔는지 묻는다. 나는 소스라쳐 놀랐다. 내가 병원에서 나온 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손목에 병원 밴드가 있어서 정신병원에서 도망쳐 온 정신병 환자인가 궁금해 했다. 나는 웃으면서 자초지종 내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도 웃으면서 몇 달 전에 허리에 신경이 눌려 다리가 몹시 아파서 허리 척추 수술을 할 뻔 했는데 닥터 어네스트 존슨이 구해 주었다고 말해준다. 오하이오 스테이트 병원 의사로 물리치료 두 주일 받고 체조를 따라 하면 한달 안에 낳는다고 알려주었다.
구세주 닥터 존슨
나는 곧 집으로 달려가 닥터 존슨에게 전화했다. 그의 사무직원이 환자가 너머 많아 앞으로 2년 동안 새 환자 받지 못한다고 한다. 나는 절망하지 않고 의사의 조수를 불러 내가 건축가이며 가정과 아이들이 있고 이 병은 운동하다 갑자기 일어난 내 생애에 치명적인 병이기에 닥터 존슨을 꼭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약 10분 후에 닥터 존슨이 전화했다. 혈액검사 보고서와 엑스레이 사진을 가지고 다음 날 아침에 찾아오라고 한다. 내가 그의 사무실에 도착해 기다리는 동안 그는 세계 의학 잡지와 미국의 타임지에 그의 얼굴과 글이 실렸음을 보고 그가 세계적 명의임을 알게 되었다.
타임 잡지에 그의 말이 이렇게 인쇄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운전하는 중에 차 안에 벌 한 마리가 날아다니면 벌을 때려죽이려고 차 사고를 낸다.”고 했다.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열어 벌이 나가도록하는 간단한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 환자가 아픈 곳을 치료하는 쉬운 방법을 찾으려 하기보다 서두러 수술을 받게 되면 더 큰 상처를 받는 줄 모른다.”고 했다.
그는 나를 진찰하고 가져온 기록을 검토한 다음, 내가 사무실에서 앉아 일하는 모습과 제도판에 엎드려 일하는 자세, 그리고 차를 운전하는 자세를 보여주도록 했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은 수백만 년 전까지 4발로 기어 다니던 체구인데 어느 땐가부터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쓰던 근육을 쓰지 않게 되었기에 두발로 서서 걸어다니는 현대인의 열사람 중에 한사람은 목과 허리에 병을 갖고 산다.”고 했다.
나를 찾아온 천사
그의 제자들이 일하는 물리 치료소를 알려주어 찾아갔다. 뜨거운 타올로 목과 등을 덮어 근육이 누그러지도록 한 후에 목에서 내려온 신경과 근육을 더듬어 굳어진 마디를 찾는다. 찾은 마디를 치료사의 엄지손가락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눌러서 마디를 풀었다. 누르는 마디가 얼마나 아픈지 소리 지르려는 충동을 참고 견뎌냈다. 뒷목 근육을 보강하는 운동과 체조를 배워서 반복하였다. 사우나 안에서 만나 사람의 이야기 그 데로 한 달 못되어 완치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몇 달 후에 허리척추에 신경이 눌려 좌골 신경통이 왔다. 나는 닥터 존슨에게서 배운 원리로 아랫배 근육 운동하여 혼자서 치료하고 곧 회복하였다. 신체장애로 역경에 처해서 정구장 사우나에 앉아 있을 때 나를 찾아와 닥터 어네스트 존슨을 소개해준 백인 중년 남자는 누구였는지 모른다. 그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천사였다고 감사히 생각하며 나도 남에게 천사가 되기를 노력하며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가끔 근육 마사지를 받았다. 내가 한국에 가면 친척이나 친구 댁에 머물기보다 호텔에 머물었고 그때마다 나를 찾아 와 마사지를 해주는 사촌 동생이 있었다.
고숙의 인생
그는 고등학교 때 갑자기 장님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내 고숙에 관하여 나에게는 전설처럼 신비스럽게 기억되는 이야기가 있다.
1945년 해방 직후에 고숙은 젊은 나이에 경찰 훈련을 받았고 곧 경찰전투단에 배치되었다. 강력범을 단속하는 책임을 지고 일하는 동안 24살에 고모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여수⦁순천 반란사건과 6⦁25전쟁 이후에 고숙은 전투부대장에 승진하고 지리산 주위에 공산군 유격대 토벌을 지휘하는 직위까지 승진하였다.
인민군 잔류와 지방 공산당원으로 조직된 빨치산들은 낮에 숨어있고 밤에 활동하기에 토벌전투는 지리산 마을들의 주변에 옮겨 다니며 밤마다 계속되었다. 경찰 측은 전투설비와 장비를 잘 갖추었지만, 빨치산들은 장비가 부족하여 전투마다 빨치산 측 피해가 항상 컸다. 고숙은 경찰 총경으로 진급하고 지리산 주위에 진주, 남원, 김해, 등의 도시에 경찰서장의 직책으로 승진하였지만, 항상 전투에 몰두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에 여름방학 동안 고숙과 고모 그리고 사촌 동생을 보러 들렀다. 며칠 지나는 동안 고숙의 부하 경사가 여러 가지 고숙의 전투 이야기를 하는 중에 놀라운 사실을 들려주었다.
전설같은 이야기
"그날 밤 정 총경은 20여 명의 무장유격대를 포위하고 직접 진두지휘하여 다섯 명을 생포하고 나머지 빨치산은 모두 사살하였어요. 하지만 그 전투에서 정 총경의 십여 년 동안 자기 몸처럼 아끼고 형제처럼 사랑하는 부하가 빨치산의 총탄에 맞아 숨졌어요. 밤새 슬픔과 분노에 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다음 날 그의 시체를 산에 묻고 그는 온종일 술을 마셨지요. 그리고 밤에 혼자서 평소에 벽에 걸어둔 일본도를 빼어들고 생포한 포로들을 한 명씩 밖으로 끌고 나와 다섯 명 모두 목을 쳐서 죽였어요. 피가 지리산 계곡을 붉게 물들였지요. 그리고 사흘 동안 혼자서 자신을 방안에 가두고 먹지도 말하지도 안 했어요."
그날 밤 이야기를 듣고 괜히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 열여덟 고등학교 나이에 우리 편과 남의 편의 남은 가족의 슬픔을 함께 느끼며 시대가 가져온 어쩔 수 없는 처절함에 혼자 울 수밖에 없었든 듯싶다. 그 후에 고모와 고숙은 두 딸을 출산하여 다섯 가족이 됐다. 김해 경찰서장이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을 태운 열차가 김해 부근을 지나는 중에 술 먹은 한 농부가 철길을 머리에 베고 잠들었다가 기차에 치여 죽었다. 영문 모르는 고숙은 해고 통지를 받고 그날부터 실업자가 되었다.
고숙은 가족을 대리고 서울에 이사했고 여기저기 직장을 찾아서 일 해봤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고 집에서 고모 얼굴만 보고 살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혼자서 사라졌다. 가족들은 남편과 아버지를 찾기 시작했고 많은 친척이 세상 방방곡곡에 모든 곳을 다 찾아다니며 삼 년이 지났다. 그동안에 고모는 속병을 앓다가 돌아가시고 아들은 갑자기 눈이 멀어서 장님이 되고 집에 재산은 모두 사라졌다. 그러든 어느 날, 친척 중에 한 분이 강원도 어느 깊은 산골 암자에서 삭발하고 사는 고숙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소식이 끊겼다.
전쟁의 이산가족
해방 후 격동기에 우리가 지냈던 뼈아픈 기억이 반세기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지금도 가족들이 남과 북으로 해어져 다시 보지 못하고 한평생 그리워하며 살아온 부모⦁형제⦁자매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가슴 깊이 피맺힌 한을 품고 세상과 작별해간다. 풀리지 않는 운명을 체념하듯 역사는 느리게 개으름을 부린다. 지금도 북한 땅은 세상 밖을 보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 못하고, 가족 친구 만나보고 싶어도 찾아가지 못하는 자유 없는 나라. 무자비한 공개처형으로 동포를 공포 속에 떨게 하며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여 계속해서 남한을 위협하는 세계 유일한 히틀러나 스타린 식의 독제국가이다.
세계의 자유인이 반세기 지나도록 북한 동포를 자유의 세계로 구출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느낄 적마다, 그날 밤 지리산 토벌대의 슬픈 눈물은 반세기 지나도록 내 마음에서 마르지 않는다. 우리가족이 잃어버린 숙부를 끝내 찾지 못하듯 남한과 북한은 영영 통일하지 못하고 두 나라로 나누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세월이 갈수록 더욱 가난해지는 북한 땅과 세계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남한 땅 사이에 벽은 자꾸만 높아져 보인다. 그러다 그 벽이 무너지면 동독과 서독의 경우일까, 일본에 쓰나미처럼 큰 혼란이 될까. 살아 있는 동안 죽도록 기다린 가족을 만나고 눈물이 웃음으로 승화하는 날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과테말라의 새로운 계약
미국의 도시, 네쉬빌은 테네시주의 수도이고 그곳에서 1982년에 이여욷 존슨 사무실의 콘설탄트로 계약을 맺고 중미에 과테말라 국립병원 설계를 하게 되었다. 과테말라 도시는 바다수면에서 1.500미터 높이의 화산지대 복판에 위치해 있다. 도착하는 날 우리 일행이 대절한 비행기가 절벽 끝에서 시작되는 비행장 활주로를 내려갈 때 조종사는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과테말라 도시는 주위에 활화산으로 포위되어 매일 검은 연기를 품어내고 있으며 수년전 1976년에 대 지진으로 23,000여명의 희생자를 낸 도시이다. 이곳의 아침인사는 화산이야기로 하루가 시작된다.
1960년부터 내전이 계속되어 우리는 군사정권의 보호를 받고 육군병원 설계를 시작하였다. 지진에 대한 심리적인 공포감 때문에 3층 이상의 건물은 지을 수 없고 일층은 장교들과 고급 인사들의 병실, 2층은 장병들과 공무원의 병실, 3층은 일반 환자의 병실로 분배하였다. 우리가 데려간 통역은 멕시칸인데 도착한 이틀 후에 군부에서 의심받고 추방당했다. 통역 없이 회의를 중단하게 된 처지에 우리 일 행중에 외국어 경험 있는 나에게 통역 책임을 맡겼다. 나는 스펜니쉬 단어 하나도 전혀 모르는 데도 일본, 중국, 미국 등의 외국 생활 경험으로 손짓 발짓하며 눈치껏 이틀 동안 통역해냈다. 다음 날 새 통역이 도착하여 정상적인 회의를 진행할 수 있었다.
평생 처음 경험한 지진
우리가 머문 카미노 로이얄 호텔은 미국에서 설계한 16층 건물인데 우리는 14층에 머물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 우리 일행이 14층 회의실에서 다음 날 설계준비를 상의하고 있었다. 6 사람이 큰 테이블에 청사진을 펴놓고 둘러 앉아 회의하는데 갑자기 지진이 세상을 흔들었다. 땅 밑에서부터 저음괴성이 크게 울려오며 우리는 약 2 피트 아래로 내려앉는 듯한 다음, 좌우로 2피트씩 기울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일생에 처음 경험이었기에 어쩔 줄 모르고 테이블을 두 손으로 붙들고 앉아 있는 동안 나머지 5 사람들은 모두 층층대로 도망치고 없었다. 고층건물에 지진 만나면 층층대와 엘리베이터 주위가 덜 위험하다는 지식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주택건축은 흙벽돌을 쌓아 지었기에 지진이 나면 모두 무너지기 마련이기에 모두들 집 밖으로 대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도시에 지진이 나면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하지만 경제적으로 지진대비를 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지진지대에 세워지는 현대건축은 두 가지 지진방지 설계를 한다. 하나는 건축물 기초와 상부 구조사이에 흔들림이 전달되지 않는 조인트를 설치하거나 두 째는 철골 구조를 바구니 짜듯 진동을 흡수하는 설계 방법이 있다. 우리가 머물었던 고층건물은 유연성 있는 철골 구조였기에 그렇게 크게 흔들렸어도 건물에 피해도 없고 우리는 모두 안전하였다.
과테말라는 1960년부터 내전 중이었기에 우리나라 박정희 군사정부처럼 군정시대였다. 밤이면 가끔 총성이 들리고 매일 신문의 표지에는 게릴라 전투 소식이 실려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영문 신문의 한 이야기에 아버지와 아들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논길을 달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아들에게 모터사이클에서 내려 빨리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아들은 도망쳐서 집으로 찾아 왔지만 학교 선생님인 아버지는 괴한들에게 붙들려 돌아오지 못했다. 다음날 가족이 찾은 아버지의 시체는 손발뼈마디를 모두 꺾고 손톱 발톱을 모두 뽑아놓았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우리가 겪은 6⦁25전쟁보다 더 무식하고 잔인함을 느꼈다.
우리 일행 중에 처음 보는 지진과 사회 환경이 무서워서 일을 그만두고 떠나는 대원도 있었다. 나는 집에 아내와 유치원 다니는 딸이 있었지만, 멀리 외국에 출장 와서 일하며 배우고 싶은 일들이 많아 이러한 환경에도 별로 두려움이 없었다. 설계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시간을 내어 과테말라 역사의 마야유적지를 탐방하기 시작하였다. 약 6개월 동안에 국립병원의 기본설계를 마치고 본설계는 멕시코 건축회사에 넘겨주었다. 나는 2주 동안 휴가를 내어 유카탄 반도 일대에 마야문명 연구에 몰두하였다.
마야문화 유적탐방
마야문자들이 중국 한자처럼 하나의 단어로서 의미를 보이고 네모 안에 들어있는 모양이며 좌우로 혹은 상하로 읽는 형식을 보고 기원전 한나라 때 정립된 한자 이전의 모태였을 가능성을 상상하였다. 상나라 때 갑골문자와는 다르지만, 주나라 때 주역에서 숫자를 표시하는 방법으로 점과 직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짐에 한자와 마야문자의 공통성을 보았다. 그때부터 지난 20여 년 동안 그 일대의 국립박물관과 중미 유카탄반도 일대에 올멕, 테오티와칸, 아스텍, 마야 등의 문화 유적지들을 답사하였다. 많은 책과 학회자료와 학회모임에 참석하는 동안, 동 아세아 문화와 미 대륙에 원주민 문화의 공통성을 찾아보았다.
마야 석조 건축물의 아치는 고구려 고분에서 보는 층단식 지붕(corbel arch)과 같은 양식이다. 마야 석탑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듯한 높은 층계는 중국의 사찰 입구에 그리고 일본 신도사찰에 남아있는 고대 동아세아의 종교 건축양식과 유사하다. 우리나라 불국사 층계와 다보탑에 축소된 층계도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유카탄반도에 엘 타진 석탑은 규모와 모양이 백제 미륵사지 석탑을 연상하게 한다.
유카탄 반도의 마야문화
멕시코 테오티와칸 유적에 건축된 용(dragon)의 모습은 동아세아에 용의 모습과 꼭 같고 다만 고기 비늘대신 새 깃으로 몸을 이루었다. 유카탄 반도에 치첸이트사에는 기둥을 감고 도는 용의 모습도 본다. 용의 얼굴, 귀면은 우리나라 신라건축 지붕기와에서 보는 모습으로 상나라의 청동유물들 조각에서 흔하게 본다. 동아세아 상고사의 금속무기 창시자 치우(蚩尤)의 얼굴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명나라 때 향로에 조각된 코끼리 코를 가진 귀면을 마야건축물 입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음과 양의 종교적 개념과 오행의 개념이 있듯 음력과 양력 같은 두 개의 달력을 사용하며 동아세아의 십이지와 60년 윤회가 있는 것과 같이 13년의 개별 상징과 52년 윤회가 있다. 사람을 희생물로 바쳤음은 동아세아 유교이전에 고대 역사에 오랫동안 존재하였다. 마야 성전(temple)의 가람배치(site plan)가 남북을 축으로 탑을 중앙에 두고 사방에 문을 두는 형식이 동아세아의 궁궐이나 사찰배치와 유사하다. 전쟁에 임하여 높은 장소에 봉화대를 세우고 불을 피우고 검은 연기를 하늘에 올려서 신호하고 북을 쳐서 소리 내어 멀리 신호를 보냄도 동아에아에서 유적에서 흔히 보는 현상이다.
오행의 상징인 다섯 동물은 뱀, 독수리, 표범, 악어, 두꺼비, 등으로 표시하여 우리나라 고구려 문화에서 흔히 보는 청룡, 주작, 백호, 현무, 황인, 등의 오행상징과 상통하는 현상이다. 고대 중국인들이 옥돌을 동전 모양으로 동그랗게 만들고 가운데 동그란 구멍을 만들어 장식물로 몸에 달고 타오티 라고 부르며 잡귀신을 막는다고 한다. 마야 귀족의 의상과 장식에서 타오티를 흔하게 본다. 상나라 왕의 시신을 옥돌 조각으로 몸과 얼굴을 덮었듯 마야왕의 시신을 옥돌 조각으로 몸과 얼굴을 덮었다. 마야인들의 평민 의상은 일본 사람의 하의(훈도시)와 비슷하다.
맷돌과 절구를 사용하여 곡식을 빻고 껍질을 바람에 날릴 때 키를 사용함도 우리와 같고 도리께 질을 하고 디딜방아도 사용하며 삼나무를 말려 깃저고리를 입고 옷감을 만드는 베틀도 우리 것과 유사하다. 중미지역풍습에 개, 닭, 돼지들을 기르고 먹는다. 우리가 매운 고춧가루 음식을 즐겨먹듯이 그들은 매운 토바스코를 즐겨 먹는다.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고 피리를 즐겨 분다. 우리나라 제주도 돌하라방과 비슷한 모자 쓴 인상을 지금의 생활방식과 조각물들의 모습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문화의 연장
동아세아 지역에 그리고 우리나라에 아기머리를 납작하게 변조시키는 편두습관이 중미에서도 있었음을 박물관전시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옛 풍습에 보이듯이 새의 깃으로 장식을 많이 하고 색색이 화려한 옷을 입는 풍습이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에 기록되었듯이 궁중에서 공차기를 하였는데 중미에 공차기 행사도 궁중 행사 중에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동아세아 문화와 미 대륙 원주민 문화의 연결은 세계 역사에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러한 연구는 백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그들은 아직도 미 대륙에 원주민 문화도 아세아의 문화가 유럽 문화에서 시작되었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 식민사관의 교과서로 공부한 지식인의 후손이며 백인들의 침략역사관을 학교에서 공부한 세대이기에 배운 데로만 믿으려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음 세대에게 편견 없는 바른 역사를 찾아 보여줌이 우리의 할일이 아닐까.
북남미 대륙의 원주민이 우리와 같은 혈연이며 동아세아 동이족의 부류임을 증명하는 논설은 1990년대 중반부터 발표되었다. Scientific American. 책자 2008년 7월호에 Gary Stix의 논문은 그전에 1995년 출간된 Cavalli-Sforza의 저서 ‘The Great Human Diasporas’의 내용을 더욱 발전시켜 정확하게 전개한 논문이다. 아래 도표는 National Geographic에서 발표한 인류의 핏줄 속에 감추어진 혈연의 역사를 보여준다.
우리 민족의 혈연은 M174와 M130으로 나누어져서 M174는 만주, 몽골, 티베트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선조로 보이고 M130은 시베리아, 알라스카를 지나 북미, 중미, 남미에 이르는 백제의 선조로 보인다. 현대 인류는 발원지 아프리카에서 10만 년 전경에 서식하다가 해 뜨는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떠난 후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도양과 태평양을 끼고 돌아온 6만 년 전경에 동남아세아에 머물러 모여 살면서 사회생활이 형성되고 언어가 발달하였다.
5만 년 전 한반도 서부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겨울철을 맞은 듯하다. 김치, 곡주, 발효음식을 개발하고 온돌방을 지어 겨울을 이겨내는 우리 민족의 뿌리는 이때부터 영글었으리라. 인류 혈연역사에 가장 오래전에 내륙으로 침투하고 해안선으로 연결된 인류 혈연의 대동맥이 우리의 핏줄이다.
동아세아의 고대문명
세계에서 가장 일찍 9천 년 전쯤에 요동반도 홍산 문화와 문명은 석조성곽을 짓고 토기를 만들고 옥돌 조각물 재작이 시작되었음이 중국의 가장 최근 고고학 발굴에서 발견되었다. 층단식 돌무덤을 세워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동아세아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하나라 은(상)나라로 이어지는 고조선의 역사는 중화 문명의 기반이 된 듯하다. 만주지역에서 시작한 우리 선조는 수만 년 전부터 말과 개를 가정에서 기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나라의 기록 서경에 은(상)상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주위의 부락민에게서 개와 말을 선물로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삽살개나 발바리라는 개 이름도 오래된 우리말이다.
양자강과 황하 중류에서 3만 5천년 전에 성장한 중화 민족의 주나라가 은(상)나라를 비롯한 동이족의 나라들을 점령하는 5천 년 전쯤에 약 25만명에 이르는 민족이동이 해외로 분산되었다고 사마천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동이족의 금속 문화, 조상 종교와 천체 종교로 시작된 피라미드 문화는 나침판을 만든 항해 기술과 함께 전 세계 각 대륙에 전파된 듯하다. 동아세아에서 필사적으로 도피하여 아프리카 나일 강변과 중남미 대륙에 흘러간 것이 아닐까.
마야는 동아세아 문화의 가지
멕시코의 수도 외곽에 테오티와칸의 해와 달의 피라미드는 아즈텍 민족의 유적으로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미국 원주민 문화의 절정기를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로마시대 로마의 도시보다 더 큰 인구와 도시규모를 갖추었던 곳이다. 이 도시 문명이 후대 멕시코 문명의 초석인 아즈텍과 마야문명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테오티와칸은 멕시코에서 가장 잘 보존된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도시로 손꼽히며 AD 150년경에 세워졌다고 한다. 태양의 신전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3번 쩨 크기의 70m높이에 248계단이 있는 피라미드이다.
태양과 달의 신전에서 내려다 본 광장은 축제의 행진이 개최되는 약 2마일 길이의 거리가 남쪽으로 열려있다. 14세기에 침략한 스페인 사람들은 “사자(죽을자)의 거리인바 제물로 바칠 사람을 묶어서 끌고 가던 거리”라고 비하하는 설명을 한다. 거리의 남쪽에 거대한 용의 피라미드와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용의 조각을 보며 동아세아의 문화와 연결됨을 증명한다. 해와 달이 함께 세워졌음도 동아세아의 도교에 음양철학이 연결되었음을 느낀다. 달 신전 피라미드에서 남쪽으로 뻗는 축제의 거리가 시작되며 조금 동쪽으로 위치한 해 신전 피라미드와 만나는 광장은 주위에 여러 개의 작은 층단식 피라미드들이 세워졌다.
이들 기원전후경의 피라미드문화가 시작되기 이전에 한반도 남단에 못을 파고 흙산(mound)을 짓던 풍습은 미시시피 강변을 따라 3,000여개의 흙산들로 연결되며 한반도 남단과 서해주변에 중국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다. 동아세아의 금속문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큰 돌을 멀리서 끌어와 세우는 종교의식으로 피라미드가 세워지기 이전의 진화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피라미드의 진화과정은 아프리카 나일강이나 중미 유카탄 반도 주위에서 볼 수 없다. 동아세아에서만 볼 수 있다.
하바드 대학교 교수 Robert M. Schoch는 2003년에 출판된 저서 VOYAGES of the PYRAMID BUILDERS에서 중미의 마야문화가 동아세아 상나라문화의 연장된 문화임을 시사함으로서 피라미드건축기술의 근원이 동아세아에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만주 지린성 일대에 수천 개의 석조 층단식 피라미드 유적들이 있고 장군총이 사진과 같이 완성된 모습니다.
마야의 저지대와 산악지대에 처음으로 사냥을 주로 하던 유목민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전 11,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시베리아에서 알라스카로 넘어와 북미대륙에 퍼진 주민들의 일단이 멕시코를 거쳐 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석판에 새겨진 마야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113년에 세계가 생겨났고 기원전 2600년경에 마야문명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는데 걸프연안의 벨리즈(Belize)에서 발견된 유물의 방사선연대측정결과 기원전 2000년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마야인들의 농촌부락들이 생겨나면서 마야문명이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기원전 700년경에는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고 기원전 400년 경부터는 돌에 새긴 태양력 칼렌다가 사용되었다고 고고학자들은 설명한다.
(해 신전 피라미드 앞에 축제의 광장)
세계 인류분포에 가장 선진지역인 동아세아는 사계절 기후변화에 맞추어 6만년동안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하는 동안에 생활에 질서가 서고 해양활동과 내륙활동의 융합된 장소, 농경민과 유목민이 경합하는 지점이었을 듯하다. 세계의 선진 국민으로서 자랑스러운 우리의 뿌리를 찾고 인류 문화와 문명에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