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동족상잔의 비극

초등학교에 국군부대가 주둔하고 무등산에는 후퇴하지 못한 공산군 빨치산이 숨어 살고 있었다. 총성이 요란하고 수류탄 폭음과 화염에 잠 깬 새벽, 치열한 살인의 절규, 목숨의 마지막 비명, 창밖에 보이는 지옥은 12살 된 나에게는 너머나 눈물겨웠다. 아침 길에 군인들의 시체를 치우고 포로 열 사람은 끈에 묶여 무등산 기슭에 이르렀다. 헌병은 포로에게 삽을 주어 땅 구덩이를 파게 하고 불 뿜는 총 끝 연기에 한 사람씩 목숨이 사라졌다. 제 무덤을 파고 그 자리에 쓰러진 시체들을 흙으로 덮고 헌병들은 떠났다. 잠시 후에 가족과 동료인 듯한 사람들이 찾아와 소리 내어 울며 흙 속에서 찾은 시체를 등에 메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딸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찾아온 바다 건너 평화스러운 마을, 아름다운 산, 뛰놀던 운동장, 아버지의 그리운 고향은 정겨워 보였다. 내 마음에 숨겨있는 아픈 상처를 딸의 아름다운 기억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전쟁 동안 죄 없이 희생된 많은 고인의 영혼에 묵도하는 한순간을 딸 모르게 나 혼자 눈을 감고 고개 숙였다.

장대한 무등산은 우리가 모르는 긴긴 백제역사를 혼자서 기억하고, 태극기 흔들며 온 민족이 기뻐하던 해방, 한 민족이 서로 싸우며 죽어가던 뼈아픈 한국전쟁, 경부선에서 격리된 호남을 묵묵히 가슴에 품고... 옛날에나 오늘에나 한결같은 부모님의 마음처럼 다정하게 우리를 끌어안아 주었다.

미국 이민생활의 비결

이민생활 중에 사업하고 싶어 하는 이웃에게 말해주는 비결이 있다. 미국에서 미국인 고객을 상대할 때 한국인의 자부심을 겸손하게 보여주면 그들의 관심은 더욱 커진다. 내가 엘러바마주 버밍햄에 처음 갔을 때 백인이 사용하는 엘리베이터와 흑인이 사용하는 엘리베이터가 구분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백인이 나에게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한국인 미국 건축가라고 웃으며 답했을 때, 나와 그는 친구가 되었다. 아무리 유색인종을 낮추어 보는 백인도 웃는 기싸움으로 반듯이 이겨내면, 서로 필요한 친구 사이가 되기 마련인 듯하다. 건축가로서 자기 사업하면서 다섯 손가락으로 다섯 부문을 항상 쥐고 살았다.

첫째

첫째는 사람, 둘째는 돈, 셋째는 상품의 질, 넷째는 마케팅, 다섯째는 계획이다. 첫째 사람 관계는 가족에서 이웃이나 친구 혹은 낯선 사람들까지도 좋은 관계로 지내도록 노력하고 사업에서는 직원, 고객, 그리고 소비자와의 관계를 관리하는 일이다. Team을 이루어 더불어 일하는 관계를 만들어야한다. 가정에 의사가 필요하듯 전문직에는 변호사, 경리사, 은행이 함께 일한다. 모든 연락은 문서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모든 약속은 법적 책임과 질서를 따르기에 미국의 건축가 협회 (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는 모든 계약서의 본보기를 준비해 놓았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 이전에 인간적인 관계에서 서로 존경하는 분위기를 유지함이 더욱 긴요한 듯하다.

둘째

둘째 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관리는 사람 관리만큼 중요해 보인다. 돈을 가져야 존재하고 돈이 있어야 기능을 다 할 수 있다. 돈 때문에 가정이 파탄하고, 회사가 멸망하고, 부자가 거지 되는 소식을 매일 듣는다. 쓰는 돈보다 버는 돈이 더 많으면 부자가 되고, 버는 돈이 더 적으면 거지가 된다고 말한다. 나의 경우는 내가 대학 학비를 걱정하고 육군 사관학교를 가겠다고 서울에 왔을 때, 일선에서 육군 병원장 하시는 숙부가 찾아와 “용완아, 대한민국에서 교도소와 군대생활에 드는 돈이 학교에 드는 돈보다 더 많기에 너는 대학에 가라.”하고 대학 입학시험에 원서를 내도록 격려해주셨기에 나는 공대 건축과를 가게 되었던 기억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돈을 벌려고 일하면 돈의 노예가 되지만, 사회에 필요한 일을 찾아 봉사하면 돈이 나를 찾아온다.”고 말한다. 숙부와 형과 아내가 의사이고 누이가 간호사이며 주위에 의학 분야의 관련이 많았기에 나는 의학 전문 분야의 건축을 택하였다. 미국 대도시의 병원에 응급실, 수술실, X-ray, 병리 검사실, 응급 환자실, 진료실 등의 특수 분야 설계에 앞장을 서도록 노력하여 지식을 얻고 경험을 쌓도록 했다. 사회에 필요한 역할을 찾아 하려고 노력했기에 돈은 뒤따라 왔다.

셋째

셋째는 상품이나 전문직의 품질이다. 건축이 내 전문 분야이기에 나의 상품은 질이 좋은 건축설계이다. 한국의 4년제 대학 건축과를 졸업했을 때, 건축 구조학적 지식은 강했지만, 예술적 설계는 약했다. 미국의 5년제 건축 대학은 창작예술에 치중했기에 대학원 입학하기 전에 1년 동안 창작 예술에 전념했다. 그 한해가 나의 건축 인생에 가장 많이 배운 한해였다. 나체 스케치 시간에는 젊은 전문 모델이 실오라기 하나 몸을 가리지 않고 예쁜 자세를 취하여 15분마다 자세를 바꾸면 학생들은 15분의 스케치를 그려놓는다. 한 시간 동안 그린 4장 중에서 하나를 교수님에게 제출했다. 나는 평생 처음 보는 천상의 여인처럼 아름다운 나체에 황홀해서 첫 시간에는 한 장도 제대로 그려보지 못했다. 나는 미술공부를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다. 건축의 질은 느낌이 좋고 기능이 편리하고 공사비와 운영비가 경제적이면 성공한 작품이 된다.

넷째

넷째 마케팅은 생산품이나 전문가 사업의 생명줄이다. 경쟁자보다 앞서 정보를 얻어 새로운 고객을 찾고 고객과의 연줄을 튼튼히 지켜야한다. 시간 안에 설계 응모하면 수십 개 건축회사 중에 몇 개의 회사를 선택하여 면담을 요청한다. 45분 동안에 회사의 능력을 소개하고 주어진 project를 어떻게 설계하고 싶다는 설명을 마치면 15분 동안 질문에 응답한다. 그런 후에 건물 주인은 응모회사의 실물 경력을 조사하고 2-3주 후에 최종 선택을 발표한다.
면담 시간의 자료를 준비하고 설명하는 연습은 교회에 목사님이 설교 준비하듯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실수 없는 발표를 해야 한다. 고등학교 때 유치진 작품, 원술랑 연극을 한 경험이 내게는 큰 도움이 된듯하다. 자연스럽게 웃기기도 하며 편한 마음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해답을 진지하게 교감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어하는 미국인이 2-3번 연습하면 한국식 영어 하는 나는 5-10번을 연습해야 했다. 회사를 계속해서 사회에 알리고 사회 안에 흔들림 없는 회사의 명성을 지켜야 한다. 부지런히 새로운 지역을 개발함이 마케팅이다.

다섯째

다섯째 계획은 시간과 함께 일하는 선견지명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때를 맞추면 척척 진행되고 때를 놓치면 모든 것이 허탕이 된다. 따라서 미리미리 계획하고 준비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기에 그 순서도 미리 준비해 놓음이 계획의 이득이다. 이들 다섯 가지, 사람, 돈, 질, 연관, 때, 등에 관한 사고방식은 나의 사생활에도 적용되어 나 자신을 항상 쉴 틈 없이 바쁘게 만든 듯하다. 후에 쉬려고 은퇴했을 때 백수가 과로사할 만큼 더욱 바빠졌음도 이 다섯 가지에 익숙한 생활 습관 때문이었으리라.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 따겠다.

형은 미국에서 의사가 되었지만, 생화학연구의 길을 택하여 노벨의학상을 받은 연구소에서도 일했다. 우리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둘째로 태어나 손해를 많이 보며 자랐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모의 첫아기는 딸, 다음 아기는 아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후에 모두 8 남매가 되었지만, 큰딸은 해방되기 이전에 결핵성 관절염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섯째 딸은 해방 직후에 만주에서 북한으로, 북한에서 남한으로, 두 달 동안 우리 가족 필사의 탈출을 마쳤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태어난 2남 1녀는 나와 동생들의 나이차가 커서 어머니를 도와 내가 동생들을 돌보며 키운 듯하다. 동생들 우유먹이고 지저귀 빨래는 내 몫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장남에 장녀이셨기에 큰아들의 장래에 가장 큰 기대와 관심이 쏠린 듯했다. 그러기에 나는 항상 형의 그늘 속에서 형의 헌옷을 입고 자랐다. 형은 공부 잘하고 나는 아이들과 놀기 좋아했다.

해방되었던 1945년 나는 8살이었다. 7살부터 일본말과 일본글을 배우다가 해방된 후에 처음으로 우리말과 한글을 초등학교 일 학년부터 배운 해방둥이다. 광주에 무등산을 바라보는 서석 초등학교는 우리 형제자매가 자라난 보금자리다. 내가 6학년 때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상공회의소 주최 운동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내 나이 13살에 어른들 뛰는 마라톤 26마일에 참가했다. 아버지가 자전거 타시고 내 뒤를 따랐고 교정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른들이 모두 돌아온 후에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확성기에서 장래의 손기정이 나타났다고 떠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형은 공부 잘하기에 노벨상 받고 나는 운동으로 올림픽 금메달 받겠다고 떠들며 부모님의 웃음을 만들던 때가 이곳 초등학교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