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SAMARITAN HOSPITAL 설계

하지만 설계하는 실력과 부지런함에는 인정받는 듯했다. 직장에는 윗사람을 잘 만나야 출세한다. 멀리 캘리포니아의 LA에 굿 사마리탄 병원 설계 청탁이 들어왔을 때, 인도 출신 노장 건축가와 젊은 한국 건축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비행기 대륙횡단 여행 6시간이 몹시 지루했다. 여러 차례 오가며 하늘에서 대도시 건물들이 모여 있는 도심을 내려다보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건축기술이 이루어놓은 걸작들을 보는 듯 감탄했고 구름 아래 내려다보며 조물주의 창작품 대 자연의 예술도 감개무량했다.

병원은 윌셔 길에 있고 지금처럼 멕시칸, 흑인, 에이시안이 눈에 띄지 않고 모두 백인들의 도시였다. 병원 직원들과 설계 내용을 상의하고 미네소타 회사에 돌아오면 약 10일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설계가 끝나고 공사가 시작할 무렵에는 캐나다 출신 건축가를 보조하며 함께 여행했다. 현장에서 회의 마치면 캐나다 건축가와 함께 라스베이거스에서 밤을 지내고 다음 날 본사로 돌아갔다. 공사가 성공적으로 마칠 무렵에는 겨울철이어서 주말을 콜로라도 스키장에서 지냈다. 미네소타에서 스키 친구들이 몰려오는 때는 함께 겨울 나라 미네소타의 스키 실력을 뽐내고 일요일 밤 비행기로 돌아갔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에 아무 일 없는 듯 출근했다.

내 사무실을 열고 내 사업을 해야지

어느 날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주는 숨어서 돈을 벌고 고용인은 평생 노예처럼 살다가 꿈꾸는 것들 이루지 못하고 직업을 마치는 미국의 자본주의 현대사회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남을 위해 돈 벌어 주는 자는 3년을 빌어먹는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나는 그때부터 내 실속을 차리며 회사에 도움 되는 일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머지않은 장래에 나 자신의 건축 사무실을 차리려는 장거리 계획을 세웠다. 10년 후에 내 사무실 이름으로 건축 설계하는 꿈의 도표를 그렸다. 집 책상머리에 부쳐놓고 가끔 아내와 함께 드려다 보았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아내의 격려는 항상 나의 힘이 되었다.

550명 일하는 미네소타 주의 엘러비 회사에서 120명 일하는 칼스버거 회사로 옮겨 오하이오 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는 동부에 뉴욕 근교나 보스턴에 설계 일들을 맡아 하게 되었고 미국의 동부와 서부의 다른 점을 알게 되었다. 뉴요커는 유럽 사람의 전통을 이어받아 백인들의 자존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서부의 흑인, 히스패닉, 아세아 인들과 함께 사는 곳을 몰아 잡아 동물원이라고 부른다.

엘러비 회사가 남부 뉴올리언스에 분점을 차렸을 때 지사에서 6개월 동안 머물러 일하였다. 미국 내에 프랑스 전통을 이어받은 색다른 지역이다. 미국의 선진 사회에 비하면 후진성이 짙게 풍기는 사회 풍조이다. 프랑스 전통 음식점은 미국에서 제일 좋은 맛을 내지만, 프렌치쿼터 길을 걸어가면 쩨스뮤직과 유럽풍의 빈민가를 구경하는 호기심 가득한 관광객들로 붐빈다. 과거에 남부에서 인종차별 범죄를 저지른 백인들은 모두 중서부 시카고나 클리브런드 근교에 숨어 살다가 수십 년이 지나서 체포되는 신문 기사를 가끔 본다.

마침내 창업

120명 직원을 가진 칼스버거 회사에서 5년 근무하는 동안 건축 전문가의 기능을 거의 배웠지만, 사무실 운영에 관한 지식은 별로 없었다. 마침 데이튼 오하이오에 40명 직원을 가진 레빈포터에서 회사의 파트너를 찾고 있기에 파트너 계약하고 그곳에 이사해 갔다. 3년 동안 파트너로 일하며 회사 자금 관리와 세칙, 고용인법, 고객의 법적 계약관계, 등을 배워 고용주의 경험을 쌓은 다음 곧 서둘러 내 사무실을 차렸다. 미네소타에서 세운 10년 계획이 약 15년쯤 걸렸다. 드디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인 직책을 벗어나 고용주가 되었다. 하지만 경쟁자들은 이미 그들 나이 30대에 창업하여 꾸준히 성장해온 기업들이다. 나는 10년 뒤떨어진 40대 중반에 창업하였기에 나는 내 나이 30대였던 정열을 쏟아 이민생활 속에 뒤처진 10년을 만회하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백인 건축가와 흑인 건축가 동료들을 구하여 세 사람이 함께 일을 시작했다. 회사 이름은 Architects Associated로 정하고 206 South Ludlow Street, Dayton Ohio 45402에 사무실을 차렸다. 자본과 고객은 내가 맡고 설계는 백인이, 공사감독은 흑인이, 각각 나누어 시작했다. 전문가 사업을 혼자서 하기에는 너머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일을 찾아 고객을 드려오는 마케팅이 제일 어려웠다. 미국의 도시마다 30개 또는 150개의 건축 사무실이 경쟁하기에 생존경쟁은 치열하다. 나 같은 한국인이 중서부 백인들의 보수적 사회 안에서 서투른 영어실력으로 일과 고객을 찾아오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다행히도 미국 연방 정부에서 어려움 속에 창업하는 작은 회사를 지원하는 보조 정책이 있어 연결을 만들고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작은 관공서 건물 설계부터 시작하였다. 시간이 가면서 과거에 내가 설계한 건축물 주인을 찾아가서 좋았던 경험을 상기하고 다시 연관을 맺기 시작하였다. 회사는 비교적 순조롭게 안정되고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기업 관리에 사람 관계가 제일 어려웠다. 나도 모르게 우리 문화의 전통적인 권위주의 개성이 나타날 적마다 미국 고용인들은 딱 질색을 하였다.

문화의 차이는 만만치 않아

40년 넘은 고질병을 고칠 수 없었었다. 한번은 직원들이 무더기로 회사를 옮겨 떠났다. 어떤 직원은 내 방에 들어와 내게 욕을 싫건 하고 사표를 내놓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 분노를 느끼기보다 분명히 내게 잘못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 자신의 인간개조가 필요했다. 지도자 훈련도 받아보고 아이들이 선생님 되어 어떻게 미국사람이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 가르쳐 주기도 했다. 옆에 듣기 싫던 아내의 잔소리도 이제 귀 기울여 들어보면 고마워졌다. 곱슬머리 최 씨 고집이 차츰 무릎 꿇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회사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귀중해졌고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목숨처럼 여겨졌다. 산에 가서 도를 닦는 수련을 직장과 가정에서 겪는 듯했다. 이웃과 동화되어 내 자신을 내려놓는 실습을 했다.

함께 생각하고 같이 행동하는 한 묶음이 되기 시작하면서 회사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다운타운에 3층 사무실 건물을 구입하고 내부 구조를 개조하였다. 주소는 11 South Wilkinson Street, Dayton Ohio 45402이다. 대학교 건축, 병원건축, 교도소, 공공시설, 공원, 야구경기장, 등의 큰 설계계약에는 직원이 50여 명까지도 필요했다. 토건, 구조 기술, 냉난방, 수도하수, 기계기술 회사, 실내 디자인까지 하면 약 100여 명의 직원과 그들이 거느린 가족 400여 명의 생활을 보장하는 사업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93년에 나이 61세의 짐 스나이더가 한국 참전용사 기념비를 세우려는 계획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나는 공산군 침략에서 구해준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누를 길 없어,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짐 스나이더는 18세 젊은 나이에 인천 상륙으로 한국 땅에 발을 붓치고 장진호까지 진군하였다가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15,000명 미군해병대원, 2,000명의 미국육군, 200명 영국해병, 그리고 한국군 800명이 약 12만 명의 중공군에 의해 발이 묶였다. 이들 미군 대부분은 캠프 캘리포니아 펜들턴에서 훈련을 받고 파병되었다가 1,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고 살아남은 사람 중에 6천 명이 추운 겨울의 동상으로 손발 얼굴에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고위 장성을 비롯한 수천 명이 잡혔다가 후에 포로 교환으로 귀향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축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자진해서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2년 후에 보이나비치, 오하이오 주지사 후원으로 1995년에 오하이오 주의 한국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완성되었었다. 데이턴의 마이애미 강변에 매년 수만 명의 방문객이 발길을 잇고 있다.

막내딸과 함께 고향 무등산에 올라

다른 회사와 합작하여 한국과 유럽의 건축설계에도 쫓아다녔다. 어느 한국의 병원설계 여행 중에 개인 시간을 얻는 기회가 있었다. 막내딸이 대학 졸업하기를 기다려 딸과 함께 비행기로 13시간 태평양 구름 위를 날아 고향을 찾아갔다. 함께 무등산에 올랐다. 산 중턱에 원효 사는 아버님의 장례를 치른 곳이다.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 가족이 한국 전쟁에서 안전하도록 미국에 이민하기를 바라시던 아버지는 평소에 기도하시러 원효사에 자주 들리셨다. 돌아가셨을 때 절 주위에서 풍장 해주기를 원하셨다. 후에 육 남매와 함께 이민 오신 어머님은 미국에서 돌아가셨고 어머니의 뜻에 따라 태평양에 풍장 하였다. 바람결과 물결이 만나는 곳에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재회하는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었다.

어렸을 때 무등산에 소풍 가서 좋아하는 여학생과 시간을 잊고 노는 동안,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두 우리를 찾고 있었다는 이야기에 아버지와 딸은 함께 웃고 즐거웠다. 산을 스치는 바람은 예처럼 시원하고 바위와 숲의 경치는 세월의 주름살을 보이지 않았다. 초등학교와 가까운 곳에 우리가 살던 옛집도 찾아보았다. 아이가 자라서 미국에 유학해서 건축가 되는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딸에게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고향이었다. 하지만 머리 한곳에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깊숙이 잠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