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dog 이야기
행사 중에는, 소, 돼지, 가구, 고물 자동차 등을 사고파는 거래들도 있었다. 두 젊은이는 우연히 핫도그(Hotdog)이라는 큰 간판을 보게 되었다. 그 앞에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음식을 사먹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따끈하게 덥혀주는 보신탕을 상상하며 쫓아가서 줄서서 기다렸다. 이윽고 그네들의 차례가 되었다. 키가 큰 앞 사람이 아직 자리를 뜨기도 전에 큰 조각을 달라고 주문하고 돈을 냈다.
주문을 받은 사람은 석쇠 위에 데워진 소시지를 빵에 넣고 노란 겨자를 발라서 종이에 잘 싸서 앞사람 어깨너머로 전해주었다. 배고픈 젊은이들은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종이를 열어보고 크게 실망하는 듯 자기들은 개의 이 부분을 한 번도 먹어본 일이 없다고 중얼거렸다.
동물 연구하는 학자들은 오만 년 전에 동아세아에 유목민들이 늑대를 집에서 기르는 때부터 개가 사람과 같이 살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동아세아에 귀족사회에 애완견의 이야기는 삽살개를 소개하는 기록으로 오래전부터 전해온다. 주나라의 기록 서경에 상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주위의 부락민에게서 개를 말처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발바리라는 개 이름도 오래된 우리말이다. 동양에서는 개와 돼지를 길러서 먹는 음식습관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서양에서는 개와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가족처럼 살아온 습관이 있기에 먹지 않는다.
음식 문화도 서서히 변한다. 미국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음식은 날 소고기를 구어 먹는 스테이크인데 최근에 동물성 지방이 심장마비에 영향이 많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고기 소비량이 줄어드는 실정이다. 수년 전까지 날생선을 먹는 일본식당을 야만인들처럼 생각하던 미국인 음식습관이 건강음식을 찾아 서투른 젓가락질을 배우며 한국의 건강음식도 찾게 되었다. 이제 한국사회도 애완동물의 습관이 늘어나고 다른 좋은 음식들이 소개되면서 개고기 찾는 이들이 줄어듦은 기쁜 소식이다.
미국 유학은 나보다 2살 위인 의과대학 졸업한 형이 먼저 왔고 이듬해에 간호학과 전공한 누이가 그리고 1966년에 내가 왔다. 모국에는 어머님과 두 남동생과 여동생이 남아 있었다. 형은 대학원 박사과정 하는 동안 사귄 유럽계 미국여학생과 결혼했고 누이는 대학 수영장에서 운동하는 동안 수영을 가르쳐주던 토목 공학도와 결혼했다. 나는 대학원 졸업하고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아내를 맞을 계획으로 결혼을 늦추고 미국 여학생들과 데이트 연습도 가끔 했다. 우리 부모는 일제하에 전남 순천에서 백화점을 경영하시는 할아버지의 큰아들로 목포상업학교를 나오신 아버지와 제주도에 사시다가 광주여고보를 졸업하신 어머니가 중매결혼으로 가정을 이루셨다.
우리 가족이 만주에서 해방후에 필사의 탈출
해방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만주 무순 시에 살고 있었다. 그때는 무순 노천탄광이 세계에서 가장 큰 석탄 생산지였다. 1945년 8월 15일부터 소련군들은 밤낮없이 우리 마을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몹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군인들 모습이었다. 어느 날 이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일본의 금융회사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를 대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 나이 7살에 어머니의 두려움을 함께 느꼈다. 형은 9살, 누이 4살, 막내딸 한살, 사남매를 데리고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셨다. 어느 중국인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며칠 후에 집에 돌아오셨지만 어머니와 만날 곳을 약속하고 곧 집을 떠나셨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집에 모든 것들을 시장에 들고 가셔서 팔고 금반지, 금 목걸이, 금 팔지를 사오셨다.
만주의 무순에서 우리 가족이 떠나 며칠 후에 압록강 가까운 시골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다. 신의주 건너편에 단동에 머물며 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찾았다. 소련군들이 국경을 봉쇄하였기에 물길을 아는 나룻 꾼은 값을 많이 주어야 찾을 수 있었다. 새벽 일찍이 나룻 꾼은 우리를 깨워 배를 타도록 서둘렀다. 형과 나는 금들을 안으로 꾀매 숨긴 외투를 입고 아버지는 짐을 메고 어머니는 막내를 업고 작은 나룻배 바닥에 모두 엎드리고 위에 포장을 덮었다.
압록강을 건너서
배꼬리에 노가 물을 젓는 소리만이 들릴 뿐, 안개 낀 압록강 수면 위로 두 시간쯤 지났을까. 홀연히 소련군 따발총 소리가 따따따 멀리서 들리기 시작하였고 가끔 장총 소리도 따쿵 따쿵 울렸다. 형과 나는 가느다란 포장 틈새로 밖을 보았지만, 칠흑같이 어둡고 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안 했다. 머리 위를 지나가는 총알 소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요란하였다. 가끔은 총알이 물위에 떨어져 물 튀는 소리도 들렸다. 아버지는 한 살 된 딸과 어머니의 머리를 이불로 감싸고 엎드려 기도하고 계셨다.
총소리는 차츰 조용해졌고 새벽 동틀 무렵에 우리는 북한 땅에 발을 드려놓았다. 우리 가족은 달구지에 몸을 실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하여 이틀 후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 기차역 앞에 광장은 넓고 쓸쓸해 보였다. 가까운 여관에서 우리 가족은 몸을 풀었다. 며칠 머무는 동안 아버지는 개성 쪽으로 가는 기차 편을 알아보시고 우리 형제와 누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소련군과 인민군의 축구시합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 뒤에서 젊은이들이 앞으로 밀려들어 누이가 앞으로 넘어지며 울었다. 어디선가 소련 헌병이 달려와서 북한 젊은이의 뺨을 때렸다.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 우리 민족 젊은이의 뺨을 때리는 순간 내 어린 가슴에 아픔을 느꼈다.
피난민 기차
기차는 평양역을 떠나 남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데 기차 안에 설 자리도 없고 기차 옆에 매달리고 지붕 위에도 타고 기차 몸통은 온통 사람들로 감쌌다. 우리는 다행히 기차 안에 의자에 앉았지만, 바닥에 앉고 선반 위에 눕고 무더운 땀 냄새는 숨이 막혔다. 얼마 후에 몇 자리 건너편에서 어느 여인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렸고 창밖으로 하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이 던져졌다.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에게 그것은 죽은 아기를 며칠이고 안고 우는 젊은 엄마를 옆 사람들이 보다 참지 못해 죽은 아기를 빼앗아 창밖으로 버렸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기차는 말없이 철길 따라 달려만 가고 있었다.
삼팔선이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며칠 동안 시골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드디어 인민군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산길에서 우리는 인민군들에게 잡혀갔다, 아버지는 사 남매를 데리고 조용하셨고 어머니는 그들 중에 제일 우두머리인 듯 한 장교를 붙들고 교섭을 하셨다. 어머니 손가락에 금반지를 빼주는 듯하였다. 장교는 우리를 인솔하고 계곡에 내려왔고 계곡 건너편에 초록색 군복을 입은 남한 군인들과 미군들이 멀리 보였다. 장교는 우리에게 잘 가라는 듯 손짓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는 서로를 감싸 안고 조심스럽게 계곡을 건넜다. 기다렸다는 듯 미군 헌병들이 우리를 검색하고 곧 우리 몸에 디디티 살균 가루를 몸 안팎으로 뿌려 덮어씌웠다.
38선을 넘어 남한의 품안으로
하얗게 눈사람 된 우리는 까만 눈만 깜박였고 어머니와 아버지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목숨을 걸고 소련군의 경계선을 넘어 만주를 탈출하고 북한 인민군이 경계하는 38선을 넘어 북한을 탈출한 부모님의 안도하는 웃음을 처음 보았다. 서울에서 기다리시는 할아버지를 만나고 며칠 후에 전남 순천에 도착하였다. 그때까지 두 달 동안 목마르고 영양실조 된 2살 된 막내 누이는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어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 전란을 겪은 어린 시절, 4·19 학생혁명 때 대학 졸업, 5.16 군사정변,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한국, 숭례문 복구공사와 문화제 전문위원, 미네소타 주 유학생활까지 20여 년이란 폭풍 같은 세월이 지나갔다. 아버님은 해방 후에 경리 직책에서 일하시다가 경리에 부정이 많은 사회를 싫어하시고 교육 공무원으로 바꾸어 종사하시다가 여생을 마치셨다.
유학 중 부친 임종도 못해
내가 유학 오기 전에 중풍으로 반신불수 되신 아버지는 우리가 유학하는 동안에 돌아가셨다. 우리는 비행기 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아버님의 장례식은 어머님과 아우들의 몫이었다.
미국의 대학 기숙사 생활은 우리가 졸업한 1970년대부터 남녀 혼숙으로 바뀌었다. 가장 보수적인 미시간 대학에서 시작되어 미국에 많은 대학 기숙사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남녀 혼숙 기숙사가 되었다. 내가 기숙사 생활하는 4년 동안 여학생을 내방에 데려올 만큼 용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말에 미국 여학생들과 사귀는 대학생활은 바쁘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다. 영화 구경하거나 공원을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동안 영어도 쉬워지고 미국의 사생활 문화에 익숙해졌다. 내 나이 30 가까이 되도록 여자 친구가 없었기에 남자와 여자가 다른 점도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만난 여자 대학생들은 함께 유흥소를 찾아가서 술 마시고 춤을 춤도 보통이었다.
여학생 버나딘
그중에 나이 24살인 버나딘은 우리 관계에 적극적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며 어학전공 학사과정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서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 했다. 검은 옷을 좋아해서 하얀 살결에 대조를 보이며 운동신경이 있어 나하고 취미가 맞았다. 검은 색 차 운전을 빠르게 하며 활동적이어서 한국 여학생과는 크게 대조되었다. 고등학교 때 이미 사랑하는 남학생과 연애하다 결혼했고 아이 없는 부부 생활 2년 만에 이혼한 후에 대학에 다시 학사학위 마치려 돌아왔다고 한다. 남자의 마음을 잘 알고 이해가 빨랐다. 담배를 피우며 나에게도 권했지만 내가 거절한 이후부터 다시 권하지 않았다. 반듯이 내 양해를 얻고 피웠다.
놀기 좋아해서 함께 마시고 주말에 고고 춤추는 유흥업소를 자주가게 되었다. 몸을 비비고 춤을 추게 되면 내 얼굴이 붉어져서 남자가 수줍다고 나를 놀려댔다. 한번은 기숙사에서 양말 구멍 바느질이 귀찮아서 헌 양말 두 켤레 주며 고쳐 주기를 부탁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꿰맸다며 다음 날 들고 왔다. 어머니에게 사귀는 한국 학생과 결혼하면 어떠냐고 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대학 졸업 기다려 결혼해도 좋다고 기쁜 소식인 듯 나에게 전해주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살며 자기 학비를 부담하는 부호가정의 자손이라고 한다. 며칠 후 아버지를 찾아가 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 나이 29살인데 한국에 아내도 있고 자식들도 있을 사람이라고 결혼은 적극 반대라고 실망하는 듯 소식을 들려주었다. 나는 한 번도 미국 아내를 갖겠다는 생각하지 안 했기에 그때부터 우리는 차츰 멀어졌다. 남자는 여자를 재미있어 사귀고 여자는 남자와 결혼하려고 사귀는 사이임을 처음 알게 되었다.
태능 공대 재학시절
서울 공대 교정이 태릉에 있었기에 졸업할 무렵에 학교 부근 마을에 하숙생활을 했었다. 학교와 마을 사이에 공동묘지가 있고 묘지 밖으로 돌아가는 길이 꽤 멀었다. 밤을 새워 설계과제를 마치고 새벽에 오는 길을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짧은 거리를 택했다. 처음에는 머리털이 뾰족 서고 무서웠지만, 며칠 후부터 익숙해지고 적막을 즐기며 쉬어가는 묘 옆자리도 찾았다. 어느 날 새벽에 달빛이 밝은데 아기 우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면 소리 나는 곳도 옮겨 갔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달빛에 도망가는 여우를 보고 안심하고 돌아왔다.
하숙집에 매일 내 밥상을 들어다 주는 부엌 아가씨가 있었다. 어느 날 새벽에 묘지 길목에서 아가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내에서 이 집 하숙생이 밤에 묘지를 도굴한다는 소문이 돈다고 일러주며 자기는 그 소문을 믿지 않으려고 나를 보러 왔다고 한다. 용기에 감탄하며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다음날은 초저녁에 일찍 돌아와 잠이 들었다. 자다가 새벽에 잠이 깨었을 때, 내 옆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아가씨를 보았다. 나는 당황했지만, 조용히 껴안아주고 절대 비밀을 약속하며 돌려보냈다. 몇 달 후에 아가씨가 떠나고 하숙집 아주머니가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아가씨가 시집가고 싶어 해서 그렇게 해보라고 허락해 주었다고. 나는 지금도 가끔은 그 아가씨와 버나딘을 생각해보곤 한다.
빼어난 미인이었던 숙자
미네소타 건축과 학사과정을 마칠 무렵 역사 논문만 남았다. 기숙사를 떠나 세인트폴 도시 근교 직장 가까운 곳에 방을 얻어 이사했다. 직장에서 영주권을 얻어 주었기에 수년 동안 실무 경험을 쌓고 귀국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올즈모빌 새 차도 구입했다. 총각에게 차가 생기면 여자 친구가 따른다고 했다. 삼십 넘은 노총각을 누가 좋아할까 생각했지만, 그곳 한인회장 사모님의 누이동생이 미국에 온다고 비행장에서 마중하고 데려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한국에서 영주권 받고 언니와 함께 살려고 이민 오는 길이었다. 숙자는 부모를 일찍이 잃고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지 못했지만 빼어난 미인이었다. 몸매에서 손결까지 내가 본 한국 여인들 중에 제일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수년 동안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지만, 여러모로 간격이 있어서 손에 쥐어줘도 모르는 사이, 결국에 해어지고 말았다.
내가 방을 얻은 작은 집 2층에 미국 여학생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두 여학생 모두 남학생 친구들이 있어 주말이면 밤새워 놀다가 자고 가는 날을 자주 보았다. 어느 날 병원 구급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 내며 우리 집 앞에 섰고 피를 많이 흘리는 여학생을 실어갔다. 며칠 후에 회복해서 돌아왔지만, 다른 여학생이 나에게 귀띔해 주었다. 철삿줄 옷걸이로 낙태를 시도한 후에 출혈이 심해지자 구급차를 불렀다고 한다. 평생 다시 임신하지 못할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하는 당시 유행했던 여학생들의 낙태방법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짝을 만나다.
석사 학위 마치고 건축가 면허시험 합격했을 무렵에 드디어 내 짝은 이렇게 찾았다. 콜럼버스 오하이오에서 직장 생활 중에 한인들의 모임에서 만났다. 내가 운동을 좋아하기에 골프, 스키, 테니스를 모두 즐겼는데 취미가 같았다. 함께 운동하며 알게 되었다. 년 말 성탄절의 춤을 추는 모임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탱고 춤을 추자고 요청했다. 잠깐 기다리라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춤을 못 추나 보다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어디서 장미꽃을 입에 물고 요염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우리는 동호세와 칼멘처럼 춤을 추었고 관중은 열광하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 후부터 우리는 약혼하고 주말여행을 함께 다니기도 했다. 몇 달 후에 뉴욕에 여행 가서 맨해튼 5가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갑자기 내가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고 한다. 잠시 후에 지나가는 불쌍한 노인을 도와주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그 순간에 내게 좋은 성품을 볼 수 있었고 나와 결혼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다짐했다는 이야기를 결혼한 후에 나에게 들려주었다. 아내는 내가 미국에 온 다음 해 1967년에 의학전공으로 미국에 와서 의사가 되었고 나는 대학원을 마친 후에 곧 미국의 건축가 되었다.
우리는 1남 3녀를 두어
우리는 1남 3녀를 두어 아이들도 모두 대학을 마쳤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시민이기에 자라나는 아이들 함께 나도 드디어 미국시
민이 되고 말았다.
나는 대학원 다니는 동안 일하던 엘러비 건축 사무실에서 계속해서 일했다. 제도판에 엎드려 설계도면 그리는 일은 건축설계의 중노동이었다. 지금처럼 컴퓨터의 도움이 없었기에 연필이나 잉크로 매일같이 제도하다 보면 손가락이 휘어지고 눈도 나빠졌다. 사무실 일에는 백인들의 텃세가 대단했다. 궂은일은 모두 내게 밀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경향은 백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초년병들이 겪어야하는 노장들의 텃세이기도 하다. 그들 사이에 낄낄대며 주고받는 농담을 알아들을 길 없고 함께 웃지 못하기에 소통이 안 돼 답답했다. 사람들은 동정심을 갖는 눈으로 쳐다보는 듯하고 자기들의 사투리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는 나 자신이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