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미국 유학 (1)

최용완

1966년 5월 28일 나는 미국으로 가는 판 아메리카 에어라인 제트엔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 김포공항은 작은 시골학교 이층건물 같았고 운동장에 활주로를 깔아놓은 듯 조촐한 모습이었다. 비행기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자동차 엔진을 사람이 꼬챙이를 꽂아 돌려 시작하듯 비행기 프로펠러를 손으로 돌려서 비행기 시동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 때였다.

공항의 이별

평생 처음 층계를 밟고 오르며 설레는 가슴을 누르고 신비의 세계에 발을 드려놓는 마치 촌놈 서울 가는 기분이었다. 정해진 의자에 벨트를 여미고 과거를 털고 달리는 활주로 폭음소리에 그동안 발붙여 살던 땅에서 드디어 헤어지는 느낌과 뒤에서 손 흔드는 가족과 친구들의 이별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리라 약속하고 떠나는 발길에 지난날과 다가올 날의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점술가의 예언

아버님의 뇌졸중 병세로 앞이 막막해진 어머니 옆에서 유학을 한해 미루었다가 가족의 권유로 드디어 출발하기에 이르렀다. 그 전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유명한 백운학 점술가를 찾아갔다. 문을 열고 온돌방 방석 위에 앉았을 때, 어머니가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하자, 그는 대뜸 “미국에 잘 가는 거여. 여기 있으면 동생 죽여.”라고 말을 했다. 어머니와 나는 내심 매우 놀랐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부터 예언자(?)의 말을 믿지 않고 듣지도 않고 다음날 출발 준비에만 몰두하였다.

숭례문 중수공사 현장 뙤약볕에서 2년 동안 실측과 제도를 마치고 25세 새파란 나이에 문교부 문화제 전문 위원으로 여수 진남관 보수공사를 하는 동안 신문 기자와 승강이도 많이 했다. 미국에 형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국에 골동품 건축만 연구하지 말고 미국에 와서 넓은 세상눈을 뜨라는 편지를 보내와 선배와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미국 가서 공부하고 온다고 짐을 꾸렸다.

비행기는 일본 동경에 멈추고 하와이, 센 프란시스코를 거쳐서 목적지 미네아폴리스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표값은 $550.00 막대한 비용이었지만, 다행히 나보다 2년 전에 미네소타대학교에 유학을 간 형이 보내주어 천만다행 호강하게 되었다. 호주머니에 돈은 박정희 군사정부의 규칙에 따라 외국에 출국하는 여비, 고작 $50.00이고 가진 짐은 비행기회사의 표에 딸려 온 하얀 가방 하나 어깨에 달랑 멘 것 하나뿐 있었다.

동경의 키다리 넨시

동경에 도착했을 때 교토에서 일본역사 공부하는 키다리 낸시가 마중 나왔다. 낸시는 내가 숭례문 중수공사 현장에 일하고 있을 때 카메라를 메고 현지답사를 와서 우연히 만나게 된 미국 유학생이다. 집이 미니애폴리스에 있고 한국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나는 서울 근교에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곳을 안내했었다. 영어에 익숙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옳다구나 하고 낸시와 함께 고향 광주에 우리 집을 찾아가서 부모님을 만났다. 여행하는 동안 모든 경비를 내가 감당했었다. 그 여인은 나보다 나이가 2살 더 많은 30세이고 키가 훨씬 더 컸기에 우리 집에서 잠잘 때, 두 다리가 이불 밖으로 튀어나와 그때부터 어머니와 동생들은 키다리 낸시라고 불렀다.

낸시는 공항에서 나를 보자 땀 냄새난다고 목욕탕에 먼저 데리고 갔기에 조금 창피했지만 고마웠다. 대학 다닐 때부터 하숙집에 세숫대야에만 신세를 졌지 목욕탕에 주는 돈이 아까워 모욕을 주저하는 버릇이었다. 그 통에 아버지는 나를 ‘중국 꾸리’라고 놀리기도 했다. 옷을 벗고 목욕탕에 들려는데 남녀가 섞여있어 당황스러웠다. 일본은 일곱 살 되면 남녀를 가린다는 유교도덕이 미치지 못한 곳임을 알았고 모르는 여자 알몸을 쳐다보는 내 얼굴이 뜨거웠다. 그들은 나를 유심히 보는 것 같아 안절부절 뛰어나왔다.

교도와 나라의 역사탐방

낸시가 교토와 나라에 백제역사 건물들을 보여주는 동안 같은 방에서 자고 지냈는데 여행에 몰두해서인지 서로 이성이라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내가 갖고 싶어 하는 사진을 계속해서 찍어주었다. 나라에 이세 신궁은 일본의 성지로 촬영금지 지역인데도 카메라를 치마 속에 숨겨서 주위 사람들 눈을 피해 정성스럽게 찍어주었다.

일본은 서기676년에 신라와 당나라군에 쫒긴 백제 인들이 세운 나라이며 지금까지도 백제문화와 건축물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한반도는 고려 때 원나라의 영향으로 문화의 변질이 왔었지만 일본은 세 번 불어온 가미가제(신의 폭풍) 덕택으로 몽골의 침략을 면했기에 한반도의 삼국시대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다. 공무원 교육원에서 가르치는 동안 공부한 덕이 있었다.

만나는 일본 사람들은 검소하고 친절하였기에 내 마음에 침략자 일본인의 기억이 차츰 사라지는 듯했다. 낸시가 나를 그들에게 미국 유학생이라고 소개할 적마다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고 그들이 미국을 동경하는 겸손한 국민임을 알 수 있었다.

하와이의 에버트

하와이는 태평양 건너는 비행기가 연료를 공급하러 멈추는 곳 이였다. 파란 눈 Mr. Evert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역시 숭례문 공사장에 찾아온 미국 라이프 잡지의 사진기자이다. 그의 아내는 하와이 원주민 추장의 손녀이다. 그의 조부가 하와이를 어느 나라에 소속할까 결정하는 무렵에 일본에 속할 수 있었지만 미국에 속하도록 결정한 사실이 천만 다행이었다고 하와이의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주민 박물관을 구경하고 한국 사람이 사탕수수 밭에 일하며 60년 전에 처음으로 미국에 정착하게 된 역사도 알게 되었다.

미국에 첫발 딛고 하루 지난 동안 모든 환경이 낯설었다. 내가 말하는 영어에 yes와 no의 분간이 가장 어려웠고 고깃살, 빵, 버터, 치스의 음식 냄새에서 벌써 김치가 그리워졌다. 백인들 중에 동양인을 처음 만나는 듯한 눈빛에서 호기심도 보였지만 낮춰보는 느낌도 들었다.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갈등을 느낄 수 있었다. 공항에서 변소를 찾는데 영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사고 낼 번한 순간도 있었다. 돈 환율계산이 항상 힘들었고 $50을 거의 다 써서 호주머니가 달랑달랑해졌다

종착지 미네아폴리스 도착

비행기는 센 프란시스코와 씨아틀을 거쳐 새벽 4시에 미니애포리스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형과 닥터 골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닥터 골트는 의과대학 부학장으로 그가 서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왔을 때 형을 만나 우리 가정을 알게 되었다. 유네스코 교육 재정을 감독하는 직책으로 한국에 공립대학들을 도와주었다. 형과 누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개학하는 9월까지 그이 댁에 머물러 미국 생활을 시작하였다.

미국은 영화에서 보았듯이 물자가 풍부하고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이기에 내가 떠나온 모국은 사람값이 싸고 물건 값이 비싼 얼마나 가난한 나라인지 처절한 느낌마저 들었다. 좋은 음식을 대할 적마다 한국에 두고 온 가난한 가족 생각을 자주하며 가슴이 쓰렸다. 집 사이에 담장이 없고 도둑이 없어 밤에 문을 잠그지 안했다. 이름도 성씨가 뒤에 오고 숫자를 세는 손가락 순서도 반대이고 아이들과 여자가 어른보다 먼저이고 지금까지 내가 자란 한국의 문화와 습관에서 거꾸로 된 것들을 하나씩 배워갔다.

학교와 직장 일을 정확하게 아침 8시에 시작해서 5시면 문을 닫는 기계적인 삶이기에 사람인가 기계인가 조금은 답답하고 냉정해 보였다. 직장에서 집에 가는 길에 동료들과 만나 빈대떡집 일차와 이차하던 낭만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곳 전문인의 삶은 낮 사람과 저녁 사람으로 완전히 분리되는 이중인격 생활이다. 사회의 직책에 기능역할은 하루에 8시간이고 저녁과 밤 16시간은 평등한 바닥에 시민으로 돌아와 가정 일하며 가족과 즐기는 건실한 사회임을 실감하였다. 토요일 일요일을 모르고 24시간 공부하고 일만하던 나의 습관에서 갑자기 둔갑하는 환경에 어리둥절했다.

미네소타대학은 모교 서울대학과 자매결연

이차대전 전쟁 중에 아버지 직장 따라 가족이 만주로 이사했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염불하고 합장 기도하는 습관을 가르쳐 주셨기에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교회에 다니는 때도 아침에 일어나면 염불 먼저 했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일요일에 교회에 다니는 습관을 배우게 되었다. 미국은 기독교 이념에서 세워진 나라임을 이해하게 되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친구들 모여서 성경공부도 시작했다.

미네소타대학교는 서울대 모교와 자매결연하였기에 한국 학생이 무척 많았다. 한국에서 하나같이 똑똑하고 수제라는 학생들이 미국에 와서 언어 불편으로 잔뜩 풀이 죽어 살았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은 사람마다 달랐다. 어떤 학생은 어딘지 제정신이 아닌 듯 행동마저 이상해지고 작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워 옆 사람을 불평하게 하는 경우도 자주 보았다. 한국 부모에게서 학비를 받아와서 공부하다가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낙제한 학생 중에 자살까지 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서울공대 화공학과의 수제들은 미국대학 중에 앞서가는 미네소타대학 화공학과 대학원에 상위권을 차지했다.

한국 학생들이 모여서 학생회를 조직하고 우리끼리 서로 도우며 멀리 두고 온 모국의 향수를 달랬다. 지금처럼 라면이라도 있었으면 얼큰한 한 그릇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일본 사람 부부가 자기 집 가라지에서 몇 가지 동양음식 재료를 팔아주는 곳이 고작이었다. 이미 학교를 졸업하고 가정을 이루어 직업이 안정된 한인 가정에서 처녀총각 파티를 열어주면 오랜만에 한국 음식도 먹고 제일 즐거웠다. 그런 모임에서 눈이 맞아 결혼하는 축복된 부부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도움 요청

매년 4월이면 미니애폴리스와 세인트폴 두 도시의 축제가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참석하는 문화 축제에 한인회가 없었기에 학생회가 주축이 되어 한국문화를 알리고자 뜻을 모았다. 먼저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띄우고 도움을 요청했다. 아슬아슬하게 축제 며칠 전에 전깃줄에 매달린 종이 색등과 태극기 수십 개가 장식물들과 잘 포장되어 도착하였다. 여학생들과 유학생 아내들이 한복을 입고 전시물 차에 타서 색등에 불을 켜고 태극기를 흔들어 한국의 위상이 돋보이는 성공한 행사이었다. 그 후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현구 학생회장에게 감사장을 보내왔다.

아르바이트와 학교 공부의 톱니바퀴

그때는 유학생들에게 직장을 허용했기에 새벽에 일어나 아침 7시부터 11시까지 건축 사무실 직장에서 일하고 기숙사에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오후 1시부터 강의실에 들어갔다가 강의 끝나면 곧 건축과 설계실에서 밤늦게 설계숙제를 하는 날이 2년 동안 기계 속에 톱니바퀴처럼 돌아갔다. 주말에는 이웃 동내 마당에 풀을 깎아주고 몇 푼 받아오기도 했다. 시간당 $1.25를 받고 시작했지만, 그때 25센트는 밥 한 끼를 넉넉히 먹을 만큼 여유 있었기에 아끼고 아껴서 저축하면 간신히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학생이 교수 어깨 위에 팔을 얹고 농담하는 것 처음봐

대학원 담임교수 월터 바이브레트는 외국학생들에게 친절하지만, 우리가 조심스럽고 어려워했다. 한국에서 교수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넥타이만 보는 한국식 겸손이 미국에서는 통하지 못했다. 눈을 마주치고 웃지 않으면 죄지은 사람처럼 의심스러운 눈초리만 받았다. 미국 학생들이 교수님 어깨에 팔꿈치를 얹고 농담하는 것을 보았지만 우리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었다. 교수님은 정드는 재자들을 좋아하는 듯했기에 나도 그렇게 노력했지만 도저히 미국 학생들처럼 건방진 행동을 할 수 없었고 손해만 보는 듯 했다.

미네소타 주는 미국에 겨울이 가장 길고 겨울 기온이 가장 낮은 곳이다. 내가 4살에서 8살까지 중국의 만주 북방에서 살았기에 그때의 겨울을 기억한다. 눈 폭풍에 집 한쪽이 눈으로 덮이면 지붕 꼭대기에서 썰매타고 마당까지 내려오던 기억을 한다. 미국의 다른 주 친구들에게 “우리도 사계절이 있어요. 7월 8월 9월과 겨울.”이라고 농담도 했다. 여름 계절이 짧지만, 일만 개의 호수가 널려있어 수영과 낚시도 쉽게 즐길 수 있다. 타주에서 친구들이 찾아온다고 전화하면 모기장 들고 오라고 농담할 만큼 모기도 많다. 세인트폴과 미니애폴리스는 미시시피 강 유역에 8마일 간격의 쌍둥이 도시(twin city)로 알려졌다.

미국 북방에 우일한 성장도시지역

두 개의 대도시가 어울려서 젊은 세대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었기에 미국의 북방도시로 유일하게 성장하는 추세를 유지하는 지역이다. 다운타운은 불록마다 실내로 연결하는 브리지가 설치되어 겨울에 밖에 나가지 않고 사업과 문화 활동의 도시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겨울의 출근길은 시내버스를 이용했지만 추운 날에 밖에 나가면 코와 손발에 동상 걸리는 위험이 있고 아차하면 응급치료를 받아야 한다.

미네소타 대학교에 캄스탁 홀 기숙사는 6층 건물이며 560여 명의 학생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5층과 6층은 대학원생에게 배당되었고 모두 독방이 주어졌다. 주말에 가족 방문은 허용했지만, 여학생은 들어오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식사시간에 기숙사 식당에 모여 앉아 고국소식을 나누고 국제우편으로 전해진 한국음식을 나누어 먹는 재미가 제일 좋았다. 누군가 고춧가루를 가져와서 음식에 뿌려먹었을 때, 주위에 미국 학생들이 제체기를 시작하고 모두 도망가거나 피해가는 모습도 우리를 웃기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우리는 조금씩 조심스러워졌다.

창 밖게 매달아둔 김치병

마른 오징어와 문어는 우리에게 소중하게 아껴먹는 고향 맛의 절정이었지만, 외국 학생들에게는 여자 음부의 고약한 냄새로 비유하기도 하며 싫어했다. 우리는 지네들 썩은 치스 냄새가 더 고약하다고 대들기도 했다. 어느 우체국 집배원이 한국에서 소포가 왔는데 너머 많이 썩은 것 같아,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통보한다. 찾아보니 아슬아슬하게 포장된 김치와 몇 가지 젓이었다. 조심스레 다시 잘 싸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며칠 후에 청소부가 모두 치워서 다시 쓰레기통 신세를 지며 수모당하는 음식이 되었다. 구조해서 이번에는 마지막 격리 보관처인 유리창 밖에 매달아 두었다. 그 후부터 기숙사 건물 밖에서 보면 김치 병 매달린 유리창이 제법 많아졌다. 어딘지 부끄럽고 창피했지만, 문화의 차이는 해결이 없는 도전이다.

미국은 자동차의 나라다. 미국생활에 신발과 같다. 자기 신발을 갖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지만, 자전거타고 다운타운 직장에 다니는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자동차 값 저축은 여간 힘들었다. 어느 날 다운타운에서 학교 교정에 거의 도착했을 때 경찰차가 길을 막고 빨간불 파란불을 번쩍이고 있었다. 길가에 두 학생의 시체들이 누워있고 파손된 독일제 폭스바겐은 두 동강이 되어 뒹굴어져 있었다.

두 대의 차가 정면충돌한 사고였다. 아주머니가 운전한 링컨 커티넨탈 차는 아무러치도 않고 값싸고 가벼운 학생들 차는 심하게 망가져 있었기에 차를 갖고 운전함도 두렵고 조심스러워 졌다. 미국의 지엠과 포드 자동차는 세계의 자동차 산업을 장악하고 미시간 주에 디트로이트 시는 자동차 산업의 왕국으로 뽐내는 전성기였다. 일본의 혼다 모터싸이클과 독일의 폭스바겐 둔버그가 학생들에게는 가장 안성맞춤이었다.

한번은 기숙사 친구가 폭스바겐 둔버그를 사들였기에 네 사람 타는 작은 차에 아홉 사람이 탔다. 무릎 위에 어깨 위에 허리를 걸치고 그 위에 포개 눕고 아홉 사람은 미니애포리스 국제 공항에 몰려갔다. 한사람의 발끝이 창밖으로 나왔기에 교통경찰의 눈에 띌까 봐 조심스럽게 운전하고 갔다. 고국을 떠나서 이곳에 첫발을 내려딛는 곳, 하늘로 치솟으면 고국으로 찾아가는 그곳, 꿈속에 그리는 고국으로 날아가는 듯 땅에서 바퀴를 접어 올리며 떠오르는 비행기 꼬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눈물 글썽한 가요를 부르며 밤이 새도록 향수를 달래는 때도 있었다.

건축과 친구 중에 식당에서 접시 닦는 일을 하며 대학 다니는 어려운 친구가 대학원 설계실에 자주 들렸다. 이야기 나누다 알고 보니 서울 운동장에서 고려대 운동선수로 뛰던 친구였다. 시합 도중에 서울 공대 선수들에게 거칠게 굴어 내가 동료들을 대신해 목숨을 걸고 태클 한번 날렸던 친구다. 그런 추억을 기억하며 둘이는 서로 가까워졌다. 어느 날 밤늦게 설계실에서 한국어로 이야기하다가 때마침 미국학생들이 들어오기에 그 친구들도 우리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우리 이야기 듣는 듯하더니 한마디 던진다. “너희 한국말이 영어같이 들린다.”고 그때 우리의 영어가 그들에게는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식 영어였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 와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미국 말만 하고 양담배만 피는 미국사람 뿐이었다. 유학생으로 기숙사 식탁에 모여앉아 한국말을 떠들어대는 즐거움은 삭막한 이국땅에 오아시스였다. 고향 소식 나누고 기쁜 소식 슬픈 소식 함께 나누는 친구들이다. 한국과 미국의 정치이야기는 그칠 줄 모르는 토론이며 기독교인과 무신론자의 토론은 핏대 올리는 열변을 토하는 말싸움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우리는 보통으로 이야기하는 말도 외국인에게는 무척 시끄러운 것임을 모르고 떠들어대다 나중에 중국 사람들 모여서 떠드는 모습을 보며 알게 되었다. 한국대학 병원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정신과 의사가 우리와 함께 기숙사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한사람 한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며 우리 안에 절반 이상의 유학생들이 스트레스로 정상적인 정신에서 균형을 잃고 있다고 나에게 귀띔하였다.

극심한 정시적 스트레스

모국에서 똑똑하고 천재라고 칭찬받던 자부심과 자존심이 이곳에서 의사소통을 못하고 새로운 환경에 익숙하지 못해 병신취급을 받는 수난을 겪어야만 한다.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여 군사훈련 받을 때 전혀 교육 받지 못한 시골 청년을 ‘고문관’이라는 존경스런(?) 이름으로 왕따 시키던 기억이 난다. 주위에서 박수 받으며 존경받던 위치에서 격리되고 불상한 동정심의 대상이 된 느낌은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쓰레기로 버려진 듯한 두려움과 멸시받는 눈초리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잠을 자지 못해 무척 피로해 보이고 신경이 예민해진 학생들이 정신과 의사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귀국하는 학생도 종종 볼 수 있었고 심지어는 자살하는 경우까지도 보았다. 그중에는 몇 사람이서 일부러 여학생들과 밤에 강가에 모여 떠들기도 하고 웃기는 시간을 만들어 도움이 되는 듯 했다.

한인 학생회장으로 선출

나는 한인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나누며 내 자신의 인생 공부도 하는 듯했다. 학생회장 선출된 며칠 후에 평양에서 인쇄된 북한신문이 우편함에 배달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 온 외국 학생이 많았기에 누가 북한과 연결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한 달에 한번 오는 인쇄물인데도 김일성 찬양이 눈에 거슬렀다. 한국에서 새로 입학하여 입국하는 학생의 통고를 대학에서 받으면 비행장에서 학교로 안내하는 일도 했다. 푼돈을 모아 올스모빌 헌차를 구했는데 다행히 똥차보다는 조금 고급스럽다고 친구들이 놀려댔다. 나의 학과과정은 거의 마쳤고 건축 역사학과 논문만 남았기에 설계사무실 경험을 쌓고 미국문화에 익숙해지고 싶어졌다.

골프에 입문

미네소타 대학교 교정 안에 골프장이 있었기에 신기하고 호기심에 견디지 못했다. 석사학위 학과과정 마칠 무렵에 싸구려 헌 장비를 구입하여 코치의 지도를 받고 긴 겨울 동안 실내에서 연습했다. 1960년대에 한국에는 미군 팔군 장교들을 위한 골프장이 하나 있었기에 대학 다니며 지나는 길에 눈여겨보았었다. 너머 한가해 보이고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운동이었다. 등록하고 두해 지나서 1968년 봄을 기다려 헌 클럽을 어깨에 메고 골프장을 찾아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클럽하우스에 들려 학생증을 보여주고 얼마냐고 물었다. $37.50 이라고 하기에 당황했다. 실망해서 돌아 나오는데 내 등 뒤에서 “일년에.”하고 소리친다. 그도 웃고 나도 웃으며 내 인생에 골프와의 인연은 이때부터 맺어졌다.

그때 함께 시작한 네 사람은 모두 평생 골프 꾼이 되었고 그중에 한사람은 한국 프로골퍼로서는 처음으로 시니어 프로골퍼의 자격을 취득하였다. 세계에 이름난 선수들과 경쟁을 하며 한국인 골프 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지금은 은퇴하여 후배들을 지도하며 미주 한국일보에 골프 요령을 연제하는 현준선 프로이다. 나와 골프는 평생을 함께하여 사업의 도구였으며 부부 동반 운동이 되었다. 아내와 친구들과 4시간 함께 걷는 운동으로 고생스런 즐거움을 한평생 붙들고 지낸다.

유도 평생교사 자격증

가난한 시절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맨발로 연식 정구공을 차고 다니며 축구를 시작했다. 해방 직후 고국에는 고무신이 고작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야구를 배우고, 중학교 때 농구를, 고등학교 때 유도를, 대학 다닐 때 럭비를, 학교 선수로 뛰었지만 우리 팀은 맨 날 꼴찌만하고 다녔다. 공부만 하는 학교들이였다고 변명도 하고 부모님께서 공부가 중요하지 운동선수는 별로 바라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핑계해야 될지. 미국에 와서 YMCA에 들려서 유도 기술을 보여주었더니 평생 교사 자격증을 주며 학생들을 지도해 달라고 부탁을 받았기에 우쭐했다. 한달 동안 열심히 지도했지만, 보수는 교통비 정도였기에 미국에도 깍쟁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 교정 안에 수만 명의 좌석을 갖춘 축구장이 있음이 신기하게 보였다. 대학 미식축구는 해마다 수만 관중이 열람하고 응원하는 운동이며 겨울철 TV프로그람에 가장 인기가 있다. 체구가 남달리 크고 힘이 세고 몸짓 빠른 선수들의 시합은 마치 로마시대 네로 왕 앞에서 벌어지는 격투사들의 싸움처럼 치열한 흥밋거리다. 한 번의 기회로 승부를 가리는 경기의 특징은 우리의 감각에는 불공정해 보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 땀을 쥐는 아슬아슬한 경기이다. 작전은 경험이 많은 코치가 짜고 선수들은 작전에 따라 각자의 재능과 체력을 실행하는 경기이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를 부여하여 성공하도록 하는 사회 체험을 운동경기에서도 볼 수 있다.

대학원 건축설계 과목

대학원 건축설계 과목은 한국의 교육과 크게 비교되었다. 5학생에게 하나의 설계과제를 맡겨주었기에 한국에서 나 홀로 내 성적을 만들던 습관으로서는 어쩔 줄을 몰랐다. 다행히 5학생이 각각 맡은 부분에 좋은 아이디어와 노력을 실천하여 낙제 점수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보았다. 미국 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 형제 사이에 이야기 많이 하며 자랐고 우리는 어른 앞에서 말없이 조용히 자라서 그들은 의견 소통이 원활하고 우리는 말하기 전에 감정이 먼저 앞섰다.

미국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그리기를 배우고 함께하는 운동 연습에 익숙해서 동양 학생들 보다 예술적이고 team work을 잘해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기관차 운전사가 되기 원하고 소방대원 되기를 꿈꾸는 아이들은 하나밖에 없는 왕위를 바라고 대통령을 꾸꾸는 우리 나라 학생들과 무척 다른 분위기임을 보았다. 우리는 독불장군 되는 경향이 있어 개인운동을 잘하고 그들은 함께하는 운동을 잘하는 듯 보였다.

숙부님의 권총

미국은 자동차 흔하듯 집집이 총기를 갖추고 있다. 농촌의 농가에 짐승들의 침입이 잦은 곳에 총기는 필수품이다. 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때 여름방학을 맞아 대전 육군 병원장 하시는 숙부댁을 찾아갔다. 숙부의 권총이 신기해 보여 숙부 출근하신 사이에 권총을 분해하고 조립하며 만지작거리기 좋아했다. 어느 날 숙부가 감추어둔 자리에 다시 넣으려는 순간 청소부 아저씨가 방에 들어왔다. 그가 총기를 만지는 순간, “빵!”하고 발사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내가 맞았을까, 청소부 아저씨가 맞았을까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총알은 문을 뚫고 길 밖으로 날아갔다. 곧 맨발로 길밖에 뛰어 나갔다. 길에도 다친 사람은 없고 총알은 길 건너 가게의 얼음과자 기계 속에 작은 총알구멍을 남기고 살아졌다. 기계는 붕붕 소리 내며 잘 돌아가고 있었기에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얼음과자를 사 들고 와서 청소부 아저씨와 나눠 먹으며 비밀을 약속했던 기억이 난다.

일본 유학생의 비극

총기 사고는 미국에 어디서나 아무 때고 일어나고 있다. 일본 유학생이 밤에 길을 잃고 헤매다 어느 집 차고 문이 열려있음을 보고 길을 물으려 캄캄한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술 취한 집주인이 더 가까이 오지 말고 멈춰 서라고 소리쳤어도 영어를 못하는 유학생은 계속 다가갔다. 주인은 벽에 걸린 총으로 어둠 속에 움직이는 무서움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아들 잃은 일본 부모는 미국에 찾아와서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고발했다. 미국 헌법에 정당방위라는 판결로 부모는 빈손으로 귀국했고 그 후부터 미국에 오는 일본 유학생 수가 줄었다고 한다.

총을 가진 사람은 든든한 마음으로 벽난로 위에 걸어놓고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기도 한다. 미친 사람이 총으로 이웃을 살해하고 조폭을 구성하여 마약을 드려오는 무서운 범죄를 저질러도 총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함이 미국 사람의 사고방식이다. 하루에 33명쯤의 목숨이 총 앞에서 희생된다고 한다. 사람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취하면 술이 술을 마시고 더 마시면 술이 사람을 마시듯, 오늘날 사람이 만든 기계는 편의를 주다가 기계가 기계를 만들게 되었고 이제는 기계가 사람을 먹는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미국은 매일 33명명씩 총기로 사망

세계에 총의 역사를 보면, 11세기에 몽골의 칭기즈칸이 유럽을 점령하고 세계역사에 제일 큰 몽골제국을 세웠을 때, 동아세아의 폭죽에서 시작되었다. 유럽인이 가장 무서워한 무기는 파죽지세로 터지는 대나무 속에 화약의 폭파였다. 놀라운 소리로 폭발하면서 불이 붙는 무서움에 떨던 유럽인은 문예부흥과 산업 혁명을 거치는 동안 총을 발명하였고 곧 대포를 만들었다. 총과 대포를 앞세운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동아세아의 나침판과 명나라의 항해 지도를 배운 후부터 배를 타고 신대륙을 찾아 나섰다. 아프리카와 인도를 비롯한 동남 아세아를 정복하여 식민지국으로 다스렸다. 동아세아인이 지배하던 세계는 유럽인의 총의 발명과 함께 유럽인의 지배를 받게 되며 오늘의 현대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총으로 시작된 정복의 역사

총과 대포를 앞세워 활을 쏘며 대항하는 원주민을 몰아내는 침략행위가 시작하면서 아세아의 시베리아, 호주대륙, 우리의 혈연인 북남미 대륙에 원주민을 몰아내어 땅을 빼앗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오고 카우보이의 권총이 사회를 지배하는 근대 역사가 있었다. 일차와 이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큰 무기 생산국으로 최대강국이 되었다. 미국의 총을 소유한 국민연합회(national rifle association)는 오늘의 미국사회에 막강한 정치력을 자랑한다.

대학원을 마칠 무렵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음으로 멀리 미국에 왔는데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 며칠 후에 귀국한다며 다음날 만나자고 한다.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뉴욕에 있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다. 미니애폴리스와 뉴욕의 거리는 서울에 있는 친구가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친구에게 다음날 만나고자 하는 거리라고 설명해 주니 실망하고 전화만 하고 돌아갔다. 서울에 도착해서 대전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하듯 작은 나라로 생각한듯하다.

우리가 대학 건축과 졸업할 무렵에 정주영 회장이 현대 건설을 창업하는 때였기에 인제를 모집하는 때였다. 그때 발탁된 친구들이 십여 년이 지날 무렵에 한국의 건설회사가 중역이 되고 외국 건설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동 건설업에 진출한 친구 중에 미국 건설회사와 계약하러 미국에 들르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동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다.

중동건설 붐 시절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국가의 건설공사 입찰을 하게 되면 미국과 유럽의 회사들과 경쟁하게 되고 한국회사의 입찰가격이 월등한 위치였다고 한다. 한국의 노동자는 월남 전쟁을 경험한 강인한 청년들이기에 외국의 노동자처럼 하루에 여덟 시간 근무조건, 침대와 냉장고 있는 숙박시설, 고향에 다녀오는 휴가 조건, 등을 따지는 일이 없이 오직 나라와 가족을 위한 충성스런 일꾼들이라고 한다. 한국 기업은 명철한 두뇌와 민감한 판단력으로 경험 많은 외국 기업을 이겨내며 투기적 사업으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한 결과라고 한다. 한국의 세계화는 박정희 정부의 월남전쟁의 참전에서 시작하여 독일의 광부와 간호사 지원, 그리고 중동국가들의 건설업에서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중동건설 일화

중동 여러 국가의 건설 사업에 참여하여 한국의 급작스런 경제성장이 있는 동안 그 과정에서 들려오는 일화는 무궁무진했다. 그중에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한국의 한 사업가가 영국 런던에서 달라 현찰을 지불받고 미국 센 프란시스코의 호텔에 들었다. 객실 안내원에게 팁을 주며 여자 불러주기를 부탁했다. 잠시 후에 금발 아가씨가 찾아왔다. 아가씨에게 위스키 한잔 따라주며 곧 몸을 씻고 나오겠다고 샤워장에 들어갔다. 샤워하다가 갑자기 현찰 가방이 걱정되어 방문을 열어보았을 때, 아가씨가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현찰 가방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 곧바로 홀 밖으로 쫓아 나갔다. 방문은 닫혀서 잠겼고 옷 벗은 알몸으로 승강기를 타고 대합실까지 달려 내려가 객실 안내원을 찾았다. 영어가 서툴고 알몸으로 소리치는 흥분한 사람을 붙들려 하자 태권도 발차기로 얼굴을 차버렸다. 곧 경찰이 쫓아와서 짐승을 잡는 그물로 덮어씌워서 잡혀갔다는 일화도 들려준 것이다.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함께 다닌 친구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함께 다닌 친구가 찾아왔다. 대학에 가는 무렵에 해어지고 25년 만에 다시 보는 친구다. 친구는 내가 오래전에 잊어버린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용완아, 너는 서울에 대학 다니러 가라. 나는 어머니 모시고 여기 있을 거야."
친구는 철봉에 매달린 채 섭섭한 마음으로 옆에서 운동하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친구에게 어머니께 아들이 4년 동안만 서울에서 대학 다니고 오면 어머니 더욱 잘 모실 거라고 말씀 잘 드리라고 했다. 친구는 철봉에서 내려와 더욱 침울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나, 국문학에서 낙제했어."
둘이서 한참 동안 조용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일 우리 시장에 가서 선생님 선물 하나 사자"
다음 날 둘이서 선생님께서 좋아하실 선물을 예쁘게 싸서 들고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나는 국문학이 재미있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선생님은 내가 쓴 시를 학교 교지에 꼭 실어주시며 총애해주셨다.
선생님 댁을 찾았을 때에 옛날에 천자문 배우는 서당 방 같은 인상을 느꼈다. 대문에서부터 둘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서 대청 앞 디딤돌에 서서 고개를 다시 숙이고 인사했다. 선생님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들어오라 하셨다. 두 사람은 다가가서 선물을 드리고 다시 큰절했다. 선생님은 심상치 않은 듯 왜 왔느냐고 물으셨다.
"선생님 친구가 공부를 덜 해서 낙제점수를 받았나 봅니다. 제가 책임지고 졸업하는 날까지 저 자신이 공부한 만큼 친구도 공부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화를 잔뜩 내신 듯 "미친놈들, 어서 나가" 외치셨고 두 사람은 뒷걸음질 쳐서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같이 공부해서 함께 졸업했다. 단임 선생님이 친구의 성적으로 서울대학 응시하지 못한다고 하셨지만 그때도 나는 이제 처음으로 설치된 치과대학은 응모자가 많지 않다고 단임 선생님을 설득하고 친구는 치과대학에 응모하였고 입학하게 되었다. 그런 후 25년의 세월이 한순간처럼 지났다. 나는 잊어버렸지만, 친구는 잊지 못하고 나를 찾아와 다시 들려주니 참 감개무량하고 고마웠다.

친구의 행운과 불행

친구가 고향 광주에 차린 치과병원은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한국 치과 의사 중에 맨 처음 치아이식 기술을 시카고와 도교를 다니며 배워 왔다. 광주 사람 금니는 거의 자기가 끼웠다고 농담도 했다. 함께 플로리다 올란드에 오렌지 밭을 경영하는 친구를 찾아 아놀드 파머 골프장에서 골프도 치고 디즈니 월드를 구경하며 아이스크림도 먹으며 같이 걸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간 몇 달 후 어느 날, 친구가 간암 초기라는 소식을 들었다. 술 담배 끊고 음식 가려먹고 매일 가벼운 운동하며 규칙적인 생활로 바꾸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친구는 충고 받은 대로 행하고 건강이 회복되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다시 술과 담배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크게 실망했다. 친구는 곧 이어서 서울삼성병원에 입원했고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나는 간곡한 편지를 썼다.

--끊임없이 투병하는 친구에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말로 다할 길이 없을 거야. 태평양 건너 멀리 있는 내 마음은 요즘에 항상 네 옆을 떠날 수 없구나. 우리가 자랄 때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 나눠 먹고 학교에서 집에 가는 먼 길을 같이 걸어주던 어린 시절을 회상할 적마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이 없구나. 내가 고국을 떠나온 뒤에 한참 동안 소식이 끊겼었지, 하지만 다시 만난 그날 밤 우리의 우정은 더욱 뜨거웠고 밤을 새워 이야기하며 비워두었던 지난날들을 모두 매워 넣었던 기억이 어제 일 같아. 금이나 은으로 장식해도 더 고울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이었어.

지난 성탄절 카드에 썼듯이 나는 가끔 네가 행운이 많은 친구라고 생각해. 옆에서 혼을 다해 정성껏 돌보는 아내의 손길, 동창 친구 원장님의 지휘 아래 한국 최고의 삼성의료진, 그렇게 유명하신 치과의사의 회복을 기다리는 광주 시민들의 기원, 매일같이 기도하는 천주교 교우들, 우리나라 어느 임금님도 아프셨을 때 그런 대접을 못 받았을 거야.

친구야, 아무리 힘들어도 떠날 생각은 하지 마. 어떤 좋은 천당이 우리를 기다려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조금 더 같이 살자. 웃으며 아픔을 묻어버리고 편한 마음으로 두려움을 초월하자. 우리 앞에는 패배가 있을 수 없어, 오직 승리하는 길만이 있어, 우리가 학교 운동선수 때도, 우리 사회의 전문분야를 개척할 때도, 여기까지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기에 앞으로 그렇게 살 거야.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친구야. 이제 내가 다시 글을 써서 너에게 보낼 때는 너의 치료가 끝나고 회복하여 고향 집에 돌아가서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기를 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오늘의 우리를 다스리는 신령하신 하늘에 눈물로 기도드리며 이글을 줄인다.--

-태평양 건너편에서 친구 용완이가-

간절한 기도에도 세상 떠나

얼마 후에 친구는 세상을 떠났고 나는 장례식에 시간을 맞춰 대한항공편으로 서둘렀지만, 간신히 묘지에 하관하는 때 도착하였다. 내 손을 관 위에 얹고 친구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며 눈물로 작별하고 관을 내렸다. 주는 이는 잊어도 받은 이는 잊지 않는다는 옛말처럼 내 행동은 내 기억에서 까맣게 사라졌는데 친구는 그 시절을 다시 불러 아름다웠던 우리의 추억을 내 마음에 새겨주고 떠나갔다.

아메리칸 드림 50년 (2)

친구와 함께 한반도보다 조금 작은 플로리다를 방문했을 때, 미네소타 주와 대조되는 점이 많았다. 마이애미 공항에는 그곳이 미국인지 멕시코인지 혼돈할 만큼 남미의 외국인들이 북적댔다. 80년도에 플로리다 경제개발 정책으로 미국 내에 은퇴연금을 저축한 노인 가족 인구와 중미와 남미에서 노동력과 생산력을 갖춘 인구를 이주해 오도록 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름 8–9월은 덥고 습기가 많아 견디기 어렵다고 친구가 들려주었다. 방울벌레를 비롯한 여러 가지 벌레들이 사람과 함께 산다고 한다. 우리가 대서양 어느 해변의 맥도날드에 들렀을 때, 부엌에도, 계산대에도, 탁자 치우는 사람까지 모두 노인들이었다. 지구 위에 오래 사는 사람들만 남는다면 이렇게 될까 하고 두려운 상상도 해보았다. 추위를 이겨내고 사는 미네소타와 더위를 견디며 사는 플로리다는 이렇게도 다를까.

양키와 힐리빌리

캘리포니아보다 작은 한국 안에서도 북한과 남한이 다르듯 땅이 큰 미국은 더 말할 것 없다. 북쪽 사람을 양키라 부르고 남쪽 사람은 힐리빌리라고 부른다. 한국 전쟁처럼 여기도 남북전쟁을 치렀다. 양키는 이성적이고, 사회적이고, 행동이 빠르지만 힐리빌리는 감성적이고, 개인적이고, 생각이나 몸 움직임이 느리다. 동서로 나누면 뉴욕이나 보스턴은 유럽식이나 서쪽에 엘에이와 센 프란시스코는 아세아나 멕시코식이어서 재미있다. 중국에 56개 민족이 자기 문화를 따르며 살 듯 미국은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여 산다. 동쪽에 뉴욕 주민들은 캘리포니아를 동물원이라고 부르며 백인 우월주의는 유색인종을 꺼리고 낮추어본다. 하지만 그러한 구시대 경향은 빠르게 퇴색되고 있다.

고국의 개고기 문화

1988년에 한국과 일본에서 세계 올림픽을 개최할 무렵 미국과 유럽의 동물 애호가들이 한국의 개고기 먹는 풍습을 고쳐보려고 노력하였지만 별로 효력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침 뱉는 버릇, 줄서는 버릇, 교통질서, 등의 많은 습관에는 좋은 발전을 보였다. 미네소타 대학교에 유학 왔을 때였다. 한 교수 부부가 착실해 보이는 한국유학생 두 명에게 휴가기간 동안 집과 강아지를 맡기고 떠났다. 휴가 마치고 집에 와보니 강아지가 보이지 않았다. 교수 부부는 단순히 강아지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함께 강아지를 잡아먹은 한국 유학생 친구는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다니는 학교 학생회장에게 귀띔했다. 이 일로 두 학생은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멀리 텍사스로 전학했으나, 결국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귀국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떤 아내는 개고기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식품점에서 개 사진이 붙어 있는 통조림을 사서 매운탕을 끄려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버린 음식들을 상하지 않게 가공해서 통조림으로 만든 개밥이었다나. 남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혼자 속이 쓰렸단다.

수년 전 여름, 누렁이 보신탕을 즐겨 먹던 두 젊은이가 더운 여름철에 미국을 여행하게 되었다. 미국은 세계에 모든 문화가 미국에 모여 있다는 곳이니 개고기를 먹는 문화도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그러든 어느 날 미국의 농민들 풍습으로 매년 한여름 팔월 말경에 농민들의 박람회 행사가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이 축제는 한 해 동안 농장에서 수확한 가축과 과일 채소를 수집해서 온 가족들이 큰 도시에 나들이했다. 약 보름 동안을 즐기며 매년 이 때만 만나는 친구들과 어울러 한 해 동안 농장 이야기 나누고 가지각색 흥미로운 행사를 치르는 흥겨운 축제였다. 두 젊은이가 이 소식을 듣고 박람회장 (Fair Ground)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