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학생혁명

우리가 졸업할 무렵에 4·19혁명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자유당 부정선거에 반대하여 서대문 길에 이기붕 국회의장 댁을 점거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댁을 점거하려 광화문 길을 행진하다 경찰의 총탄에 맞아 젊은 생명을 잃어야 하는 비극을 우리 눈으로 보았다. 이기붕 가족은 대통령 저택에 은둔했다가 육군사관학교 생도 큰아들의 권총으로 가족 모두 자살하는 비극도 후에 보도되었다. 나는 군중 속에 밀려 거리를 행진하고 형은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진 학생들의 응급치료를 맡았던 시간도 있었다. 결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한마디 남기고 하야하여 하와이로 떠났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수습에 나섰고 윤보선과 장면 정부를 지나 박정희의 5·16군사혁명으로 이어졌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미국에 유학 온 후에 모국을 돌아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졌다. 안정된 사회에서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격동기를 겪는 한국, 그리고 분단된 조국을 좀 더 냉정한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처참하도록 가난한 남한이 민주사회의 초석을 다짐하는 몸부림과 절규가 내 젊은 눈에 보였고 철두철미하게 독재 정치하는 북한은 빠르게 안정되어 감을 비교할 수 있었다. 6·25 한국 전쟁 이후에 공산주의 사상을 선택하여 월북한 남한의 저명한 인사들은 한사람한사람 조용히 숙청되고 김일성 독재를 신봉하는 사람만 살아남게 됨을 볼 수 있었다.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

함께 유학 와서 북한 함경도에 가족을 그리워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친구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에 나는 다음과 같은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보관하고 있었다. 여러 해 지나서 1993년 9월 18일 시카고 한국일보에 보도되었다.

“김일성 주석 들어보시오.”
“나는 북조선의 가족을 찾는 사람이오. 독일과 일본이 2차 대전을 저질러 놓고 전쟁을 마칠 무렵에 미국, 소련, 영국의 세 사람이 한반도의 우리민족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소. 독일을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 듯 일본을 북일본 남일본으로 나눌 것이지 왜 죄 없는 한반도를 두 동강이로 쪼개놓았느냐 말이요. 내가 분통 날 때 당신은 얼마나 고심했겠소. 생각 끝에 스타린과 모택동에게서 도움을 약속받고 한반의 통일을 이루어 보리라 결심한 당신의 용단에 나도 감탄하오.

하지만 젊은 용기만으로 세계정세를 모르고 6월 15일에 38선을 넘어와 수백만 우리 동포가 목숨을 잃고 수만 명의 외국 젊은이들의 목숨이 이 땅에 자유를 지키려 희생되었소. 얼마나 많은 우리 조상의 유물을 불태우고 전쟁의 가난 속에 허덕이고 가족이 나누어져 살게 된 민족의 뼈아픈 비극을 저질렀소. 돌이켜 보면 우리가 싸우는 동안에 한반도 전쟁 덕을 본 일본은 미국 돈으로 장사하고 부자 행세를 하게 되었소.

잠자는 사자로 불리던 중국은 모택동 혁명에 성공하고 이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듯하오.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은 세계를 앞서가는 나라가 될 것이오. 이렇게 다가오는 장래를 위해 하루속히 남과 북이 같이 앉아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 사랑과 온정을 베푸는 일이 시급하오. 당신이 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정일이 한테 꼭 일러주오.

당신이 저지른 전쟁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족이 부모 형제 보지 못하고 죽어갈까 두렵소. 다시는 이땅 위에 전쟁이 없고 다른 나라의 지배 받는 일이 없어야지오. 다음 세대에 자라나는 훌륭한 동포 모두가 당신이나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네 인생과 세계복지를 위해서 살아야지요. 찾아가서 얼싸안고 울고 웃고 내가 평생 동안 그리워하며 살았노라 알려주고 고향 땅에 묻히는 염원을 들어주시오. 위대하신 수령님! 심금을 울리는 당신의 형제들의 가족 찾는 노래를 들으심네까!”라는 기사가 났었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 가슴 속에 가족 찾는 이 절규는 아직도 끝없이 메아리친다. 북한 동포는 자유를 얻지 못한 채 가족 보지 못하고 공개처형 공포 속에 살고 있다. 어서 빨리 자유의 세계로 구출되어 우리와 함께 평화 속에 살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첫 모국 방문 때

80년대 중반에 대한항공이 서울과 LA를 직항하는 항로를 열었을 때 나는 고국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모국 방문길에 올랐다. 기내 방송에서 한국어, 영어, 일본어 방송을 하고 마지막 인사말로 “Thank you for assistance.”라고 말하기에 나는 승무원을 찾아가 “Thank you for your corporation."로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에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고쳐서 말하기에 안심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친구들은 강남에서 제일 높은 63 Building 맨 상층 식당에 데려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점심 먹으며 회의하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대기업 중역이 좋으냐? 혹은 자기 사업하는 사장직이 좋으냐? 하고 물었다. 현대, 동아, 대우 회사들 중역으로 일하는 친구들이 ”우리는 풍전등화.“라고 대답하였다. 일하다가도 나이 40 중반이면 밀려나가는 한국 기업의 실정이란다. 이곳 미국에서는 전문가의 지식과 기술의 황금기가 45세부터 55세라는데 그 귀중한 인재들의 지식과 경험이 버림받는 한국의 실상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전혀 홍보없던 대한민국

캐나다 밴쿠버의 인류 박물관에 세계 각국의 문화를 전시하고 있었다. 일본은 큰방 전시실 하나를 가득 채웠고 이름 모를 여러 나라가 이렇듯 진열장을 매웠는데 한국은 방 모퉁이 작은 서랍 속에 옛 부채와 버선 한 켜래 숨겨있었다. 대학의 아세아 연구 웹에 들어가 Korea를 찾으면 김일성 선전뿐이었다. 영국에서 발행한 중국 역사책에는 고구려의 문화가 중국의 문화로 알려지고 고구려 고분 벽화는 중국의 회화로 설명 되었다. 책에 따라 한국은 일본과 중국 혹은 미국과 소련의 전쟁 완충지로 역사도 문화도 없는 나라로 설명하고 6·25전쟁과 박정희 군사혁명만이 소개되었다.

한국은 80년대부터 고개를 들었다. 1984년 미국 로스엔제레스에서 올림픽 하는 동안 우리는 밤잠을 설치고 한국을 응원하였다. 양궁, 권투, 레스링, 유도에서 금메달 받고 애국가 울리며 태극기 오를 적마다 얼마나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는지 그 감개무량한 순간은 잊을 수 없다. 재외 동포의 조국사랑은 내국민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더욱 뜨겁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때 시작된 한국의 여자양궁은 지금까지 금빛을 반짝이고 있다. 1988년 한국 올림픽은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말한 것처럼 올림픽 사상 올림픽 이념을 실현한 가장 훌륭하고도 가장 세계적인 경기였다고 한다. 6ㆍ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은 동서(東西) 진영의 장벽을 초월하여 12년 만에 미소(美蘇) 양국을 같은 대회에 참가시킴으로써 한국이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를 맺게 되었다고 했다.

한국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고 국제적 지위를 끌어올린 전환점으로 정치, 이념, 인종, 빈부, 종교 등을 초월한 범세계적인 인류애를 실현한 문화, 예술, 평화의 올림픽이었다고 평가되었다. 이때부터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 나와 한국의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기 시작한 듯하다.

가슴 뿌듯한 우리 조국

요즘에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서울의 남산에 올라 한강을 내려다보면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나이 백 살 다되어가는 한강대교 건너편에 땀 흘리는 젊은 새마을, 강남의 품에 내 마음이 눕는다. 잠실대교 건너편에 세계의 눈길이 몰렸던 88올림픽 공원, 한남대교 건너편에 IT산업의 심장이 뛰는 신도시의 위용, 반포대교 건너편에 한류가 자라난 예술의 전당, 동작대교 건너편에 모교의 터, 관악산, 원효대교 건너편에 한국 현대사의 분기점을 상징하는 63시티 그리고 국회의사당, 남산 발밑 가까운 곳에 5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국립박물관, 강 하구에 인천 국제도시와 함께, 흐르는 한강은 반세기동안 세계경제의 기적을 일구어낸 내 집 안방이다.

한강은 기억한다. 6·25전쟁 휴전 이후 약 5년이 지났을 무렵에 나는 대학 시험공부에 바쁜 때였다. 흑석동 한강 둑 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홀연히 땅 밑에서 내게 말을 거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앉은 바로 앞에 검은 군화 끝이 조금 나와 있었다. 나는 무심코 내 발끝으로 차서 파보았다. 중공군의 신발 속에서 발가락뼈들이 나오지 않는가. 나는 소스라쳐 놀랐지만 곧 마음을 진정하고 그 영혼을 위해 잠깐 기도한 다음 다시 흙을 곱게 덮어주었다. 한강 다리 무너지고 도하작전 중에 수만의 전사자 중에 몇 명의 시체가 그 밑에 누워 있을까 생각하며 떨리는 가슴으로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왔다.

얼마나 많은 적과 우방의 목숨이 이 땅에서 전쟁터의 연기 속에 사라졌는가, 한반도가 신음하는 동안 모든 사람은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기며 살아남지 않았던가. 살생과 포탄이 남긴 빈 땅에 가난을 헤치며 하루살이 하던 세월이 엎드리면 코에 닿는 반세기 전의 짧은 시간이다. 이 나라에 어르신과 세계에 흩어져 여생을 돌이켜보는 참전용사의 기억에는 아직도 어제 일처럼 눈앞에 선명히 그려진다. 죽을힘으로 살아난 목숨이 내 집을 짓고 내 고향을 다시 찾아 세웠다. 새마을 운동, 현대 자동차, 삼성 전자, 세계를 주름잡는 여러 물결이 한강에서 시작되어 태평양에 오늘의 파도를 이루었지 않는가.

나의 뿌리내린 고향

고향을 찾아가면 가족, 친척, 조상의 묘지, 그리고 함께 자라난 이웃이 있어 내가 자라난 뿌리를 본다. 내 몸의 채취가 스민 집안에는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키워준 부모님의 향기가 가득하다. 가족은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 고장 나도 언제나 고칠 수 있는 사이, 사는 동안 항상 마음을 함께하는 사이다. 모든 사람에게 꿈이 있고, 그 꿈의 고향이 내 집이다. 사람 몸의 기능은 멈추어도 그 영혼은 꿈의 고향을 찾아가 이루어놓은 전설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영생은 그런 모습으로도 존재하는 것이 안일까. 사람은 죽어 사라져도 꿈은 영원하다.

내 고향은 한강, 흐르는 강물이다. 떠오르는 희망이요, 떠나가는 추억이다. 바다와 땅이 뒤섞여 흔들리는 진통을 겪은 후에 산과 계곡이 주름잡고 강물이 흐르게 된 태곳적부터 우리의 숨결은 이 땅에 보금자리 쳤다. 이태조가 고려의 도읍, 개성을 떠나 한양에 도읍을 천도할 때, 서울이 태어났고 오늘의 한강 기적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26전쟁을 신음하며 홍역을 치렀지만, 나라를 지킨 선열의 희생으로 발판을 짜고 그 위에 딛고 선 자손들의 강렬한 정기는 빛을 냈다.

한강은 땀 흘려 젖 줄기 뿜어내어 훌륭한 민족의 슬기를 키운다. 북악산 너머 저쪽으로 대동강은 아직 반세기 지나도록 묶여있지만 우리가 찾은 자유는 가족형제의 사랑으로 항상 동포들을 껴안는 내일의 그리움에 꿈이 부푼다.

고향집에 싸리문 먼저 열리면 지난밤 찬바람의 어둠을 깨우는 태양의 얼굴은 새벽닭 홰치는 소리에 가슴이 뛴다. 희망의 무지갯빛이 하늘 높이 타오른다. 산과 바다를 다스리는 옥황상제의 뜻 따라, 용꿈 태몽 첫아기 울음소리가 천지를 흔든다. 온 누리 찬 눈 속에서 솟아나는 새싹들이 삼백 예순다섯 발자국 한해를 그려, 세계 방방곡곡에 씨 뿌리러 간다. 태양계가 광막한 우주 안길을 열어, 사이버 공간으로 질주하는 계절에 우리 기술의 명석한 혜안이 지구를 이끌어, 한류는 오대양 육대주에 넘쳐흐른다. 목청 올려 부르는 오! 찬란한 이아침의 찬가, 관악산 횃불이여 세계 평화의 선봉이어라.

스포츠는 내인생의 동반

미네소타 대학원 다닐 때 일하며 공부하는 시간을 어렵게 쪼개어 어렸을 때부터 즐기는 운동 시간을 잊지 안했다. 6개월이 겨울철인 미네소타에서 스키와 스케이팅을 빠트릴 수 없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유도 배우러 오면 땅에 넘어지는 방법부터 배운 후에 남을 넘어뜨리는 기술을 연마한다. 넘어졌을 때 다치지 않고 다시 잃어서는 기술은 한평생 동안 나에게 도움이 된듯하다. 눈이나 얼음위에서 뒹굴어도 지치지 않고 계속하기에 스키와 스케이팅을 빠르게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면 특이한 기술은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야 함을 알게 되었다.

미국은 세계 각국에서 인제들이 모여든 무대이기에 특출한 재능을 가친 친구들을 가끔 만난다. 스케이팅을 타다 만난 친구가운데 자기나라 학기 팀의 대표선수였음을 알게 되었다. 5살 때부터 한평생 빙판 위에서 살아 왔음을 이야기 들으며 참으로 감탄하였다. 스키를 배우면서 모글을 만나면 나는 예외 없이 넘어졌다. 모글은 급한 경사에 많은 스키가 지나가는 동안 자연히 생기게 되는 작은 눈 언덕들이며 마치 공동묘지처럼 보인다. 어떤 토요일 오후에 시간 내어 혼자서 모글스키 연습은 어두워지도록 노력해 보았다. 수십 번 넘어진 몸은 멍들고 배도 고팠다.

스키장에는 전깃불을 밝혀 낮에 일하는 사람들이 저녁 운동을 하도록 해놓았다. 나는 스키를 벗어 어께에 매고 나오려는데, 모글스키 경사 위에서 새처럼 눈을 타는 선수를 보았다. 모글 마다 발로 찬 눈발은 바람에 날리고 전깃불에 비추어 환상의 아름다움을 보였다. 나는 경사 밑에서 기다려 그를 붙들고 자초지종 내 경우를 설명하였다. 한국식 영어하는 나를 측은하게 보았는지 나를 데리고 리프트 타고 경사 위로 올라갔다. 그는 먼저 조금 내려가서 나를 기다리며 내게 내려오라고 손짓을 했다. 모글 두개를 지나고 나는 보기 좋게 넘어져 뒹굴었다. 그는 나에게 모글 스키 배울 수준에 와있지만 요령을 모른다고 설명하고 다음의 다섯 가지를 기억하여 모굴 하나하나를 정복하라고 일러주었다.

첫째 어께와 얼굴은 항상 경사 아래쪽만을 향하고 내려갈 것, 둘째 체중은 발레리나처럼 항상 앞 발가락 끝에 서서 몸을 굽히고 펴는 자세를 반복할 것, 셋째 모글 꼭지에 이르렀을 때 몸을 낮추고 두발을 모아 스키를 180도로 돌려서 다음 모글을 향하여 준비할 것, 넷째 다음 모글 꼭지를 향해 내려가며 스키를 경사의 대각선으로 유지하며 모굴 아래 눈을 힘껏 밀어붙여 다음 모굴 위에서 속도가 거의 정지되는 균형을 찾을 것, 다섯째 모글 하나하나에 호흡을 조절해 리듬을 만들어 내려가는 것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중에 그가 스키장의 학교 교장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서 고마운 인사를 다시 했던 기억이 난다.

잘하려면 미쳐라

“잘하려면 미쳐라.”는 어렸을 때 유도 선생님 말씀이 생각이 났다. 나는 그 후부터 친구들과 코로라도 주의 가장 어려운 스키장을 찾아다니며 다리뼈에 금이 나도록 즐겼으나 결혼한 후에 아내의 충고를 받아드려 스키를 멈추었다. 그 때 한국에는 대관령 스키장 하나 있었다. 40년이 지난 최근에 한국의 k-shuttle을 타고 4년 후의 올림픽을 준비하는 평창 스키장의 설비를 방문하였을 때, 한국의 발전상을 실감하였다.

의학박사 학위 마친 형이 이태리 로마에서 국제 의학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나는 휴가를 내어 함께 떠났다. 플로렌스에 로마 시대 사찰건축과 레오나르도 조각물들은 유럽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 건축가인 나에게 감명 깊었다. 로마 도시에 로마제국의 콜로시움을 구경하면서 그 웅장함 뒤에 숨겨있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인을 학대하는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사자들의 발톱을 상상하기도 했다.

로마오페라극장 표를 얻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시간 안에 도착하려고 강행군하는 중에 낯선 다섯 집시 젊은이들이 길을 막아섰다. 손짓으로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한 순간에 누군가 뒤에서 내 왼쪽 팔꿈치를 강하게 쥐어 잡기에 나는 뿌리치며 돌아섰다. 돌아서는 순간에 바른쪽 호주머니에 손이 스침을 느꼈다. 그 순간에 바른쪽 호주머니 속에 내 돈지갑을 빼어간 것이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는 중에 나는 내 뒤에 섰던 괴한을 쫓아 번화가에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로 바짝 다가서 달려가며 길을 건너갔다. 필사의 도망자와 목숨 건 추적자의 영화 장면을 찍는 듯한 순간이었다.

로마의 집시들

홀연히 건장한 청년들이 나를 둘러섰고 길을 지나던 모든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나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달아나던 괴한이 한 젊은 여인 뒤에 멈춰 섰고 그 여인은 웃는 얼굴로 자기 가슴의 브래지어에서 내 지갑을 꺼내주는 마술을 보여준다. 순간적인 요술을 보는 듯 놀라웠다. 지갑 속에 현찰은 사라졌지만, 요행이라고 할까, 내게 꼭 필요한 크레디트 카드와 운전면허 등의 내용물은 고스란히 남겨있었다. 나는 내 지갑을 높이 들어 구경하는 모든 사람에게 흔들어 보여줬다. 큰길, 네 모퉁이에서 서부활극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이 손뼉을 치고 소리치는 동안에 집시 괴한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탈리아 관광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흥분된 경험이었다.

미국 오하이오 주 사무실에 돌아와 직원들이 이제 막 설계를 마친 사무실 건물 주인을 만났다. 계약에 따라 설계비를 시간 안에 지급해줄 것을 부탁하며 악수를 하고 그는 떠났다. 해어진 다음 계약서를 다시 보니 건물 주인이 너머 많이 지급하게 됨을 느끼면서도 나는 서둘러서 테네시 주에 네시빌로 떠났다. 그곳은 미국 컨트리 뮤직의 본산지다. 유명한 가수의 노래가 이곳에서 음반으로 제작되는 때였으며 엘비스 프레슬리나 달리파튼 같은 컨추리뮤직 거장들이 사는 문화 도시였다.

권총 강도

초청한 친구와 점심 먹으러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 문을 열려는 순간, 내 뒤에서 누군가 “너도 손들어!”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권총이 나를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내 친구는 벌써 지갑을 차위에 내놓고 두 손을 번쩍 들고 멀찌감치 서 있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내 지갑 속에 든 돈을 기억했다. “내 지갑에 38불 있는데 20불은 너에게 주고 나머지 18불은 내 친구와 점심 먹게 해줄래?”라고 물었다. 강도는 뜻밖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술이나 마약에 취하지 않았고 눈을 반듯하게 내 눈에 맞추는 정신이 말똥말똥한 친구였기에 나는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강도는 총을 흔들어 내 이마에 가까이 가져오며 급한 모습을 보였다. “오케이 오케이!”하며 나는 두 손가락으로 천천히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손에 쥐고 돈을 꺼내어 내밀었다. 그는 물러서며 그 돈을 자동차 후드 위에 놓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내가 태권도 발차기라도 할까 무서웠는지 나더러 뒤로 물러서라고 손짓했다. 갑자기 얼굴에 웃음을 띠며 고맙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돈을 움켜쥐고 달음질쳐 사라졌다.

6·25 전란을 겪은 가난 했던 우리나라 길가에 거지들이 많았고 소매치기는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었다. 나는 논산에서 군사훈련을 거쳐 의무병으로 목숨과 주검 사이에 군복무 하는 동안 세상 삶에 여물어졌는지 이런 일을 당해도 당황하지 않았든 듯싶다. 어쩌다 그해에 그런 끔찍한 사건들이 한꺼번에 있었는지 지금도 궁금하고 아찔하다. 하지만 어느 영화에서 보았듯 집에 강도가 들어왔을 때 놀래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우리 집에 처음 찾아온 손님이신데 좋은 대접해드리고 싶소.”하며 강도를 달래어 이야기 나누며 친구가 되는 경지까지 갈 수 있을까 하고 혼자서 상상해보기도 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부득이한 형편에 어쩔 수 없이 하면서 사는 듯하다. 어떤 경우는 자신이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도 많다. 내가 건물 주인에게 남은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달에 직원들에게 줄 월급이 모자라 그냥 지나갔다. 미국에는 화투로 짓고땡이나 고스톱을 칠 기회는 없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카드로 포커게임은 자주했다. 하면서도 지고 싶지 않아서 친구의 돈을 훨씬 많이 뺏게 되는 때도 있었다. 친구는 나를 보고 “너는 강도야.”라고 했다. 부득이 하였을 때 나는 도둑도 되고 남들이 말하는 강도질도 했음이 분명하다.

도둑과 강도는 경찰에 붙잡히고 교도소에 가는 사람만의 소행이 아니고, 내 삶 속에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알게 모르게 죄짓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문을 읽으며 사회의 분위기와 풍조에 따라 크고 작은 죄짓는 경우도 다양해 보인다. 그 죄를 갚으려고 그만큼 좋은 일을 많이 하여 갚고 돌려주며 살아가야 하는 생각을 자주한다. 옳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참으로 옳은 삶을 살아감은 얼마나 어려운지 인생은 끊임없이 빼앗고 돌려주는 자신의 도전이라고 할까.

애국심과 우리의 국력

자본주의 사회가 자유경쟁을 기반으로 세워졌기에 인류의 생존경쟁 본능이 사회 발전을 이루어가는 것인가. 그러한 능력으로 인류가 지구 위에 만물의 영장이 되었을까. 올림픽 때가 되면 본능적인 애국심이 발동한다. 뛰어난 체력과 기술을 4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으로 세계의 정상에 도전하는 열망의 순간이며 세계의 모든 나라가 참여하는 인류의 큰잔치이다.

밴쿠버 동계 올림픽의 쇼트트랙 우리 여자 선수들이 금메달 빼앗기는 반칙으로 중국이 가져갔고 소치 올림픽에는 우리가 금메달을 되찾고 중국이 반측으로 벌을 받는 경우도 보았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질서와 규칙을 따라 인간 최첨단의 능력을 보여주는 개인기의 경쟁이며 여러 선수가 팀을 이루어 진행하는 조직력의 발휘이다. 정상에 이르면 그 나라의 국기가 오르며 국가를 연주하고 금빛으로 빛나지만 뒤지면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목에 건다.

어느 땐가 오래전에 동네에서 맨발로 뛰고 맨몸으로 씨름하며 시작한 구경거리가 꾸준히 자라서 나라 사이에 경쟁으로 성장하고 이제는 전 세계의 흥행으로 펼쳐졌다. 경쟁종목이 다양해지고 의상과 운동기구의 발달로 스포츠 과학이 동원되는 경제적 뒷받침도 한몫한다, 운동 종목에 따라 일등과 이등의 차이를 사람의 감각으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미소하여 첨단 기계에 의존하여 판별하고 3등과 4등의 차이가 거의 같지만, 3등은 메달을 받고 시상대에 오르고 4등은 경쟁에 참석한 영예로만 만족하기에 더욱 관심을 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체구가 작고 체력이 약한 동양인들이 서구의 장신 선수들과 시합하면 어른과 아이가 경쟁처럼 보였을 때도 있었다. 콜럼버스 오하이오에서 세계 고등학교 야구시합의 마지막 경합이 있었다. 일본과 브라질 팀을 각각 꺾은 한국과 미국의 선수들이 결승에 이르렀다. 고등학교 후배인 선동열 투수를 앞세워 결승전에서 미국 팀을 이겼던 날에는 온 가족과 동포가 목이 쉬도록 응원하였다. 좁은 우리 집에 몰려와 냉면 먹으며 승리를 축배 했던 때가 엊그제같이 기억된다.

반세기 지나는 세계 경제의 변화 속에 우리나라 젊은이도 체구가 성장하고 이제는 우리의 경쟁력을 어디에나 내놔도 보라는 듯 국력상승을 뽐내어 보여준다. 월드컵 경기 때 서울광장에 모여 뜨겁게 응원하는 붉은 악마의 열기는 경기장 밖에서 보여주는 우리의 자랑이었다.

건축 양식

올림픽의 근원은 약 3천 년 전에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그곳 신을 섬기는 종교적 행사로 시작되었다고 역사책은 말하지만, 그리스의 석조물 조각이 인도의 목조 조각에서 유래되었고 석조건축양식도 동아세아의 목조건축양식에서 발달되었음을 고려하면 그 근원이 동남아세아에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 고대건축의 둥근 기둥 위에 사각 주두(기둥머리 쟁반)이 있어 그리스의 도릭 건축 양식이 되었으며 후에 아이어닉 형식과 코린시안 형식으로 발전하는 역사적 유래를 보면, 역사에 관한 견해가 다르다. 그러한 종교적 행사의 근원도 신라의 화랑정신과 같은 그 뿌리가 동남 아세아의 어느 곳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유럽의 역사는 2만 년 전에 빙하기 이후에 시작하였고 동남 아세아는 6만 년 전부터 시작된 인류학을 보아도 이해된다.

올바른 경쟁은 성장의 원동력

경기를 보는 흥분과 감동의 짜릿한 설렘은 우리가 타고난 본능적 경쟁의식인가보다.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뿌린 수억의 정자들이 어머니의 몸 안에서 필사의 수영 경쟁을 하여 제일 먼저 도착한 정자 하나가 기다리는 난자의 품에 안기는 치열한 경쟁에서 우리는 태어났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고 세상에 왔다. 그러기에 한목숨이 제각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존엄과 귀중한 가치이기도 하지 않을까. 한 목숨이 세상을 살아감도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경쟁 속에서 새끼 낳아 씨앗을 이어가는 운명이기에 살아있어 건강한 목숨으로 경쟁함은 얼마나 귀한 삶인가.

남자와 여자로 다르게 태어나 남자의 가는 길은 더욱 험한 길인 듯하다. 여자가 항상 좋은 씨앗을 찾아 능력 있는 후손을 이어가기 원하기에 남자는 황소의 머리에 뿔이 솟도록, 독수리의 부리가 사납게 굽도록 싸움하여 생존경쟁에 제일 강한 씨앗을 가졌음을 증명한 후에야 비로소 여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존재다. 그러기에 목숨은 곧 올림픽 경쟁이다. 정당한 경쟁은 사회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기에 경쟁하지 않고 정부에 의지하는 사회주의 구소련의 정치는 무너졌다. 경쟁에서 승리하면 명예와 물질적 혜택이 있어 동기를 부여하고 생산의 질과 양이 성장하여 국가와 사회가 함께 성장한다. 정부나 개인 기관에만 의지하려는 안이한 노동조합은 쓰러진다. 그뿐만 아니고 일찍 은퇴하고 삶 속에 도전을 잃은 후에 곧 사망하는 사람도 가끔 본다.

후진국에서 태어난 우리 세대가 선진국에 이민 왔을 때 균등한 경쟁의 기회가 있었기에 언어와 문화의 격차를 극복하고 각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한길에서 현대나 기아차를 보면 친구처럼 반갑고 세계 각국의 벽에 붙은 삼성이나 엘지 티브이를 보면 가족 얼굴 보듯 기쁘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일본의 소니 전자제품이 미국의 시장을 석권하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지금은 삼성이 유럽과 세계 각 지역에서 소니를 추월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가 참으로 대견스럽다.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버둥거리며 이불 덮고 흐느끼던 외로움, 자나 깨나 해바라기처럼 모국에 살아계신 부모님 생각, 내 나라 내 민족 그리움에 몸부림치던 시절, 가족 친척 향기가 물씬거리는 어린 시절 고향 생각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기에 우리 선수의 올림픽 메달 소식이 이렇게도 기다려지는 것일까. 태극기 오르고 애국가 울리면 눈물 펑펑 쏟는다.

동성애자 스티브

미국에 살다 보면 언젠가는 동성애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대학원을 마칠 무렵에 시작한 엘러비 건축 사무소는 직원 550명이 일하는 미국에서 제일 큰 건축 설계 사무실 중에 하나다. 내가 일 시작하기 얼마 전에 다른 주에서 이사해온 독신 건축가 스티브가 나보다 상급 직책에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스티브와 나는 같은 건물을 설계하는 임무를 갖게 되었고 그는 설계 감독을 하고 나는 도면을 그리는 일을 하는 직책이었다, 그는 나에게 매우 친절하였고 자주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서 민간인 건축가로 3년 동안 근무하였다고 한다.

한국 동두천에서 근무하는 동안 한국인 김동철과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며 내가 김동철을 닮았다고 한다. 나는 김동철이 누군지 모르고 어딘지 스티브의 행동에서 조금은 이상한 태도를 볼 수 있었다. 스티브와 나는 시카고의 건축물 현지답사를 함께 가게 되었고 그날 밤을 같은 호텔에서 머물게 되었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그는 나를 데리고 술 마시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은 동성애 하는 사람들만 모여 친구가 되고 술 마시고 춤추는 곳이었다. 여자는 없고 모두 남자들이었다.

유도 덕분에 위기 모면

나는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도 술을 배우려했지만 체질이 맞지 않았는지 술꾼이 되지 못했다. 술 마시고 남자가 남자를 끌어안고 춤을 추는 모습에 낯설고 소름이 끼쳤다. 내 체질에는 딱 질색이었다.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혼돈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나를 감독하는 직책이기에 나의 직장을 위해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이런 곳이 있는 사실이 내게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했다. 스티브는 김동철과 동성애 관계였음을 나에게 고백하는 듯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술을 마시는 척하고 취하는 척하면서 춤을 추자는 스트브를 잘 달래어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다.

방문을 잠그고 잠들려는 무렵 스티브가 내방 문을 두들기고 잠옷을 입은 채 들어왔다. 그리고 내 손을 붙들고 자기 말을 들으라고 간절히 부탁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빠르게 몸을 피하고 방에서 나가주기를 청했다. 그는 나를 겁탈하려는 듯 대들었다. 그 순간 내 유도 실력이 나왔다. 두 남자가 잠옷을 입고 한바탕 붙었지만, 그는 침대에서 내 발에 걸려 방바닥으로 꺼꾸러졌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하게 유도의 목을 조르는 기술에 관하여 말해주었다. 숨이 끊기고 정신을 잃게 됨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얼굴색이 파래지고 조용히 방을 나감으로 하마터면 동성애자 될 번한 위기를 모면했다.

다음 날 그는 내가 유도 몇 단이냐고 물으며 자기 허리를 다치게 했다고 불평을 했지만, 나는 모르는 척하고 우리는 웃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을 마치고 본사에 돌아왔다. 미국 사람들은 우리보다 시치미 떼는 단수가 높은 듯하다. 스티브는 친절하고 책임진 일에 충실함에 변함이 없었다. 나도 입을 꼭 다물고 조금도 남에게 기색을 보이지 않았기에 아무 일 없이 지냈다. 놀라운 사실은 직원들 가운데 여러 명의 동성애 직원들이 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집에 아내가 있고 밖에 동성애 남자가 있는 경우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정상적 안정된 생활상이 아니었기에 스티브도 그 직장에서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게 됨을 보았다.

돌이켜 보면 동성애 부부는 과거 인류 사회에 오랫동안 지속하여 왔다. 과부가 많은 동네에 맷돌 부부가 있고 교도소나 군대 생활에 오랫동안의 외로움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동성애 부부는 존속해 왔다. 현대인의 생활환경은 개개인의 고독을 더욱 증폭하였다. 외로움 속에 사랑의 갈증을 이성과 풀지 못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로 동성과 동반 생활하게 됨은 날이 갈수록 쉬워지고 있다.

도면을 오래 그리다 보면 시력이 약해져서 안과 의사를 찾게 된다. 의사가 나의 바른쪽 눈은 원시이고 왼쪽 눈은 근시라고 하기에 나 자신이 신기롭고 놀라웠다. 그때부터 나는 내 주위를 한쪽 눈으로 본 후에 다른 쪽 눈으로 다시 보는 버릇이 생겼다. 운전하다가 옆에 운전사를 한쪽 눈으로 보고 눈을 감고 떴던 모양이다. 자기에게 윙크하는 줄 알았는지 내 차를 따라오기 시작하는 듯했다. 분명히 동성애인임을 알고 나는 때어놓으려다 교통사고 날 뻔도 했다. 다음 신호등에서 간신히 때어 놓고 도망쳐 왔다.

온 인류의 숙제

지구 위에 인류의 인구 폭발 때문에 수억 년 동안 사람과 함께 살아온 수없이 많은 동물의 생명이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환경은 지구 표면에 기후의 변화를 가져오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이상기후까지 여기저기 나타나며 자연의 모든 생명에 생태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 가정은 남의 아이를 입양해 기르지만, 아이를 낳지 않기 때문에 인구증가를 늦추는 결과도 있을 수 있겠다. 그리고 자라난 아이들이 부모와의 관계를 본받아 그들은 동성애 부부를 다시 이루며 살게 되지 않을까.

지구 위에 인류는 풍선처럼 커질 만큼 커져서 이제 터지기만 기다리는 위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 선진국의 결혼 결핍에 따른 인구증가 속도가 줄어든다거나, 중국처럼 한 가정에 한 아이만을 갖게 하는 정책 등은 세계적 인구증가를 다소 늦출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후진국의 인구 증가를 억제하지 못하기에 인류의 지구표면 파괴는 멈추지 않는다. 최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애 결혼의 합법성을 거론하여 지금까지 지켜온 가정의 도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성애 가족처럼 이러한 비정상 가족이 많을수록 인류의 인구증가를 조금은 늦출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