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50년 (7)
내 청춘을 바친 숭례문
숭례문(서울 남대문)은 내 청춘을 받친 건축인생의 시작이었고 미국에서 현대건축가 40년을 활동한 다음, 다시 숭례문 복구공사에 참여한 건축인생의 마지막 행사였다.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아침(한국의 일요일 밤) 8시 TV에 YTN 24시간 방송을 켰을 때 숭례문 불길은 우리 민족의 혼이 어두운 서울 하늘에 횃불처럼 크게 타고 있었다. 육백년 도읍을 지켜온 수문장이 제 몸을 불사르고 잠들려는 우리의 문화의식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아침 교회에 가려던 나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길이 없어 TV에 엉겨 붙어 있던 중에 펑 소리와 함께 터지는 산소 절단재 투척에 검은 연기는 한순간에 흰 연기로 바뀌고 화면이 보여주는 마지막 하얀 연기 속에서 내 마음은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1961년 7월 건축과 졸업논문 심사에 나의 한국건축양식에 관한 발표는 일제 36년 동안 우리문화를 공부하는 일이 금지되었기에 당시 우리세대에 선구적인 노력으로 교수님들의 주목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 일본건축학자 관야정의 조선건축 책자와 고유섭 선생의 고고학 자료를 연구하며 준비되었다. 대부분 동기졸업생들은 4월에 이미 졸업하였고 나는 군복무기간이 끼어서 9월에 졸업하게 되었다.
김형걸 건축과장님이 심사하였고 졸업반 주임교수 김정수 교수는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주관하는 숭례문 복원공사의 건축 자문위원장이었다. 나는 곧 7월에 시작되는 현장사무소에 출근하여 서울대, 한양대, 홍익대, 선배들과 숭례문 실측에 종사하였다. 한편 현장에서 일하는 목수들과 석수들을 지휘하는 조원재 도편수는 전통건축의 살아있는 증인으로 현장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를 보조하는 이광규 목수 부편수와 김천석 석수 부편수가 한국에 실존하는 최고의 전통건축 기술진을 이루고 있었다.
숭례문은 이성계가 고려의 국사에 종지부를 찍고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옮겨 사방에 사대문을 지어 성곽을 두르고 궁궐을 새웠다. 태조 5년 (1396)에 숭례문을 도읍의 관문 곧 이조 왕국의 정문으로 건립하여 2년 후에 완성하였다. 세종 29년(1447)에 보수되었음이 실록에 기록 되었으나 성종 10년(1479)에 보수된 기록은 공사 도중에 발견된 기록에 의해서 알게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고종 때에 보수했음이 논의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직전(1907)에 문루 양쪽 성곽을 헐어내려 큰길을 내었을 때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되었으나 6⦁25한국전쟁에 포탄을 맞아 부분적인 손상이 있었다가 문루와 석축의 노화현상이 심하여 군사 정부의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결단하여 1961년에 중수공사를 감행하였다.
우리나라 건축양식은 성곽건축과 사찰건축에 가장 잘 보존되었으며 한옥의 건축전통도 궁궐건축에 잘 보존되어 있다. 목조건축양식의 변화는 중국의 당송시대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전기양식이 있고 고려 때 원나라와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발전된 후기양식으로 나누어진다. 현존 목조 건축물들 중에 전기양식은 백제에서 일본에 건너간 대부분의 백제문화 건축물과 중국 산서성에 도교사찰 진사의 건축물과 당나라의 도읍 서안에 산재한다. 우리나라 전기 목조건축 양식은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볼 수 있으며 부분적인 양식이 사찰 건축에 산재한다.
숭례문 건축양식은 우리나라 후기 목조건축양식 중에 가장 웅장하고 궁궐과 성곽 건축물 중에 가장 오래된 전통양식이다.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기둥 상부를 들보로 연결하고 기둥과 지붕구조 사이에 수많은 첨차와 소로를 축적하여 만들어진 공포 구조물을 갖춘 다포양식이다. 다포의 기능은 지붕의 무게를 고르게 분배하여 처마의 곡선이 아름답게 조성되고 오래토록 유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재도와 설계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추녀와 처마의 곡선을 찾아서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목조건축은 건축부제들이 지붕위에 개와를 비롯한 무거운 하중을 받아 차츰 휘어지게 된다. 목조 건축물에 처마곡선은 필연의 결과이다.
숭례문 현판
아세아의 남방건축물들은 처마곡선이 크고 북방건축물들은 비교적 작다. 시대적으로 고대건축물은 처마곡선이 경직하고 후대에 올수록 곡선이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숭례문의 추녀모양과 그 밑에 귀포의 모양은 웅장하며 우아한 곡선으로 각 부제들이 그 기능에 맞는 예술적 표현으로 역사의 향기가 가득하다. 지붕에서 기와를 들어 내리면 크기를 기록하고 문양을 탁본하여 재사용여부를 결정하였다. 우리 선조들이 수천 년 동안 대대로 전수해온 정교하고 안정된 예술과 기술이 숭례문의 모든 부제 하나하나에 가득하여 감탄을 멈출 길이 없었다.
문루 하부에 석축은 거대한 화강암을 사각방형으로 다듬어 이를 맞추어 높게 쌓고 무지개모양 홍예를 짓고 관문 통로를 이루었으며 철갑문을 달았다. 성문이 열리고 닫는 시간을 종을 쳐서 알렸다. 색깔 찬란한 단청은 붉은색과 초록색의 두 가지의 혼합색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문루 중앙에 걸린 현판은 양녕대군의 친필이라고 전해지며 세워 쓰인 의미를 관악산 풍수에 연결하기도 한다. 숭례문(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썼다고 한다. 우리나라 성곽건축 건설기록은 화성(수원) 성역의괘에 정확하고 정밀하게 기록되었다.
1961년 7월에 시작된 서울시 산하의 공사 관리는 중단되고 1962년 3월부터 문교부 문화재 위원과 국립박물관의 협조로 진행되었다.
숭례문의 모든 기록물 보관
필자는 쉬지 않고 조원재 도편수와 새로 부임한 김정기 감독을 보조하며 해체되는 모든 부재를 하나하나 실측하고 기록하였다. 수천 개에 달하는 모든 숭례문 건축부재들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원형을 찾고 그 모든 기록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조원재 도편수 댁에 투숙하여 도편수와 함께 출퇴근하며 사라져가는 전통건축기술을 이해하고 용어를 기록하여 후에 건축학계에 전해줄 수 있도록 기록하였다. 동기동창 여상현과 장석진의 도움을 받으며 실측도와 복원도를 공사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작성하였다. .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시민들의 궁금함을 돕기 위하여 당시 일간 신문에 보도하기도 했으며 당시 손으로 쓴 원고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공사 도중에 발굴된 기록과 유물들은 앞으로고 계속해서 연구할 의문들을 남겼다. 예를 들면 기록을 남기지 않고 서둘러 진행된 보수공사가 이조 후기 어느 때였을지. 이태조 때 건축양식이 세종 성종 때에 변조되지 않았는지. 지금의 우진각 지붕이 원래는 팔작지붕이었는지. 많은 의문이 숨겨있는 국보 일호 건축물 안에 실마리를 찾아서 규명하는 과정이 우리가 우리의 근원을 찾는 학구적 임무이며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노력으로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963년 5월 14일 준공식에 최봉주 현장사무소장, 김정기 감독관, 조원재 도편수, 최용완 제도사, 네 사람은 윤태일 서울특별시장에게서 중수공사 공로 표창장과 금일봉을 받았다. 그때 광주광역시에 사시는 부모님이 참석하셨다. 그 후에 윤천주 문교부 장관은 나를 문교부 건축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위촉하였고 당시 철도청 산하에 공무원 교육원에서 한국문화사와 건축사 강사로 일하며 25세 젊은 나이에 바쁘게 연구하며 종사하였다.
교육 공무원인 아버님도 교육원에 오셔서 교육과정을 거치는 중에 내 강의를 듣고 가셨다. 김정수 교수는 연세대학교 이공대 학장으로 부임하시고 나는 건축과 졸업반에게 특강을 하였다. 당시 대학원 과정이 설치되어 이경회 학생과 주남철 학생이 한국건축 관계논문을 준비 중이었다. 윤장섭 교수와 현지답사하며 함께 연구했다.
문화재청은 숭례문이 다행히 디지털 측량 기업인 위프코가 2002년 문화재청 의뢰를 받아 3D 레이저 스캔으로 촬영해 놓은 자료가 있었고 수기(手記) 형태 숭례문 도면도 있었지만, 이 3D 레이저 스캔 자료가 복원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태조 5년(1396년)창건
옛사람들은 건물 부재들의 용도에 적합한 여러 가지 나무들을 산에서 찾아 가장 적절한 시기에 베어서 바닷물에 수년 동안 침수한 다음 다시 그늘에서 수년 동안 말려서 나무의 결을 따라 부재용도에 맞는 모양으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박원규 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교수는 “건축물 나무 부재(뼈대를 이루는 중요한 재료)의 벌채 연도를 알면 건축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며 “숭례문 목부재 68점의 나이테 연대를 측정한 결과 1860년대에 대대적인 지붕 공사가 있었던 흔적을 찾았고, 조선 태조 때 사용됐던 건축양식을 가진 목부재도 알아냈다”고 말했다. 숭례문은 조선 태조 5년(1396년)에 창건돼 세종 29년(1447년) 터를 새로 닦으면서 재건됐다고 알려졌다. 성종 10년(1479년)에 대규모 공사가 이뤄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에는 6·25전쟁 때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기 위해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진행한 게 전부다.
하지만 이번 나이테 연대 측정 결과 숭례문의 상층과 하층의 지붕을 받치는 목부재인 ‘추녀’ 7개가 1860년대에 벌채된 것으로 분석됐다. “고종 5년(1868년) 정도에 ‘숭례문 문루와 성문 수리공사가 급하다’는 내용의 개인적인 기록 등이 나온다”며 “그 시기에 지붕까지 들어내는 대규모 공사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
화재 후 나의 기록에 관한 대서특필
1966년에 모교와 자매결연한 미네소타주립대학에 대학원과정을 위해 서둘러 도미할 때에 숭례문 자료들은 부모님 댁에 남겨 두었다. 수년 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살림을 치우실 때 숭례문 자료들을 안전하게 보관하셨고 내가 미국에 온 지 20년 후에 이민 오실 때 숭례문 모든 자료를 고스란히 가져오셨다. 그 후에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다시 20년 동안 숭례문의 모든 자료를 보관할 수 있었음은 어머님의 정성이였다고 감사해한다. 숭례문은 불에 탔어도 사라진 부재들의 기록이 살아 있기에 불에 타지 않은 아래층을 회복하고 여기에 보관된 기록에 따라 위층이 회복되면 숭례문은 다시 국보 일호로 화상을 회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옴을 나는 믿었다. 6백년의 역사가 다시 후세에게 전해지게 됨은 내 인생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로 느껴졌다.
화재발생 후에 2008년 2월 11일부터 2월 25일 사이에 LA에 중앙일보와 한국일보를 비롯한 일간지와 한인 방송국들은 내가 소장해온 숭례문 실측도와 자료들을 대서특필 보도하였다. 1963년도에 작성되어 서울시에 전해준 실측도와 복원도는 문교부 문화재 관리국으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모두 분실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내가 가진 실측자료가 숭례문 복구에 유일한 복구 설계 자료임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문화재청에서 조상순 학예사는 곧 나에게 숭례문 실측도와 자료들을 가지고 한국에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보내왔다. 나는 서둘러 한국을 방문하고 숭례문 현장에 찾아가서 문화재청 최종덕 건축과장을 비롯한 숭례문 현장사무소 이정연 사무관과 문화재청 직원들과 보수공사 도편수 신응수씨를 만났다. 신응수 도편수는 1962년에 이광규 부편수를 도우며 당시 복원공사장에서 함께 일하는 젊은 목수였기에 다시 만남을 무척 반가워했다.
다음날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회가 서울 광화문 사무소에서 소집되었고 나는 문화재 위원들에게 자료들을 설명해주었다. 1962년에 숭례문 현장 감독으로 일했던 김정기 씨도 만났다. 문화재청 이건무 청장은 나를 숭례문 복구단의 고증분과 위원과 기술분과 위원으로 위촉했다. 자료의 일부는 사진촬영으로 복사하여 남겨주고 미국에 귀국하였다.
문화재청은 60년대 숭례문 수리공사 당시 실측 조사작업에 참여했던 최용완 씨의 숭례문 해체실측기록 소장자료들을 확보해 조사·분석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라고 발표했다. 해체실측기록 자료에는 지난 1961년부터 1963년 사이에 진행된 숭례문 해체보수 공사 과정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부재 규격, 수리된 부재의 위치와 수량 등이 매우 상세히 나와 있어 숭례문 원형 복원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고 했다. 현재 숭례문복구자문단 고증분과 위원으로 위촉된 최 위원은 해체실측기록 이외에 숭례문 기와, 부재 등의 탁본 자료와 사진 등을 가지고 최근 방한하여 숭례문 해체보수 당시 도면 기록 작성을 담당했다고 보도했다. 최 위원은 소장한 해체실측기록 등을 숭례문 복구단에 공개하였고, 숭례문 복구단은 기록 등을 자세히 분석해 숭례문 복원 설계 등에 활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KBS-TV에 출연 생방송
서울에 채류중에 문화재청의 알선으로 2008년 10월 14일 저녁 9시 뉴스에 KBS TV 방송의 대담 요청을 받았다. 정은승 아나운서와 숭례문에 관한 대화로 생방송을 하였다. 나는 한국의 문화재 건축과 현대건축이 연결되어 대학 건축과에서 교육과정에 전통건축 연구가 이루어지고 현대 건축의 설계에 우리나라 고유의 특성을 보여주는 현상이 나타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2010년 2월 10일 이건무 문화재청장, 최종덕 건축과장, 신응수 대목장, 그리고 관여 기관장들이 참석하여 복구공사 착공식이 열렸고 화재 잔여부분 해체에 착수하였다. 숭례문 발굴 및 조사연구를 기반으로 드디어 해체실측이 진행되었다. 문화재청 숭례문 복구단체는 복구공사팀, 실측고증팀, 행정지원팀, 3팀으로 구성되고 복구자문단은 고증분과, 기술분과, 방재분과, 3 자문위원팀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고증분과와 기술분과 위원으로 일하였다. 매년 숭례문 복구 현장에 찾아가 공사과정을 지켜보며 신응수 도편수를 도우며 고증과 기술면에서 협조하였다. 하지만 상세도면 없이 공사가 진행됨은 우리나라 문화제 보수공사에 현대건축기술과 완전히 결별되었음을 보았다. 한국의 국보 제일호 문화재 숭례문의 복구가 외국에 있는 교포 건축가의 소유물인 실측도에 의존하여 복구되는 상황은 참으로 한국의 슬픈 현실임을 모두가 함께 느꼈다.
신응수 도편수는 2010년 3월 5일 KBS 아침마당에 건축 팀을 소개하였고 도편수 본인이 초보자 목수로 1962년에 이광규 부편수의 조수로 숭례문 공사에 참여한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당시 조원재 도편수와 일하는 최용완 제도사를 도와주기도 했고 목수에게 도면을 읽는 일이 필연으로 느꼈을 때 최용완 제도사가 본인을 남대문 시장에 데려가서 9가지 제도기 세트와 제도기구를 사주며 제도실의 제도판에서 실습하도록 해준 최선배의 친절에 지금도 고마운 마음 잊지 못한다며 다시 숭례문에서 함께 일하게 되는 인연을 기뻐하였다. 나는 아침마당 방송을 통해 우리가 우리 문화를 인식하고 세계에 알리는 일이 우리 앞에 직면한 중대한 과제임을 강조했다.
한국 문화재청은 유홍준 청장이 화재 책임으로 사퇴하고 이건무 청장이 약 3년 동안 근무하였다. 그 후에 이명박 대통령은 최광식 청장을 임명하였다가 6개월 후에 문화부 장관으로 승진되며 김찬 청장이 뒤를 이었다. 숭례문 하체의 불에 타지 않은 하층부분 공사가 거의 완료되고 화재에 소실되어 사라진 상체부분 공사에 진입할 무렵에야 김찬 문화재 청장은 나에게 공사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문화재청에 인수하도록 요청하였다.
숭례문과 함께 있는 동안 나의 느낌을 아래와 같이 시를 썼다.
<詩>
그슬린 얼굴
최용완
불에 탄 상처를 가리개로 두른 채
병상에 누어
찾아온 나를 껴안고 흐느낀다
36년 동안 몸을 빼앗기고 마음이 짓밟혔던 고통
해방되어 찢겨진 옷깃을 여미었었다
반세기 지나도록
정치에 경제에 바쁜 사람들 구경하는 동안
빼앗긴 역사
잃어버린 문화
흩어진 선조의 혼을
지켜 돌보아 온 외로운 숭례문
육백년 옛 도읍의 수문장이 제 몸을 불사르고
훨훨 타는 불길 속에
피 끓는 선조들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애통함이여
불에 그슬린 임의 얼굴을 더듬어
가족의 넋을 다시 찾으려.
그 앞에 엎드려 통곡하는 경복궁의 눈물
2011.08.08
내가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조선일보에 “숭례문, 겉 구조만 잰 도면만 갖고 완벽한 복원 가능하겠나” 하고 대서특필한 기사에서 “문화재청은 왜 이제 와서야 건축가 최용완씨의 실측도를 요청하는가”하고 물었다. 문화재청은 “최씨가 기증한 자료가 매우 의미 있고 귀한 자료인 것은 분명하지만, 불타고 없는 내부를 복원하는 것은 대목장의 몫"이라고 해명했다. 세계적 문화유산을 대목장 한사람에게 의존하는 한국 문화제 관리가 한심스럽기 짝이 없어다는 느낌이 들었다.
2011년 11월 4일에야 문화재 청장의 대리인 박왕희 씨는 나와 협약서를 체결하였다. 나는 한국에 두 번 다녀가는 여비만 받고 모든 자료의 복사 사본을 무상증정하였다. 숭례문 하부 공사가 끝나고 상부에 불타고 없어진 부분의 자료가 필요할 때에 내가 간직한 모든 자료들을 동원하여 복구에 필요한 고증분과와 기술분과 위원의 기능을 다하였다.
숭례문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되는 과정과 그 기록은 일본과 중국 외에도, 세계 선진국 전문가들이 한국의 문화재 관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문화재 보수공사가 1960년대의 수준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상황을 보며 답답하고 섭섭함을 느꼈다. 잃어버린 전통 기법을 단 한 번의 시도로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문화재청은 외국에 개인 소장 자료로 국보가 보수되었다는 수치를 감추려고 내가 준공식에 참석하는 것마저 주저하는 듯했다.
드디어 2013년 5월 4일 박근혜 대통령 참석으로 준공식이 열렸고 숭례문은 5년3개월간 277억원을 투입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에 나무기둥에 틈이 열리고 단청이 벗겨지고 기와 재작에 문제들이 나타나며 공사 관리 부실이 들어나며 변영섭 문화재 청장은 임명 8개월만에 경질되었다. 재료보급 재작 감독이 한사람에게 주어진 문제점을 비롯한 후진성은 한국사회가 겪는 진통인 듯하다. 현대건축에서 소외된 전통건축의 장래는 참으로 우려스러움을 느끼며 나는 나의 할일을 마쳤지만 현재 소장한 모든 자료의 원본은 부수공사 기념관을 설치할 무렵에 기증할 예정이다. 후배들의 계속하는 연구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한심스런 문화재관리와 우리의 할 일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우리생활을 새롭게 정립하여 우리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가, 선조가 우리에게 전해준 것들이 무엇인가, 우리가 후손들에게 우리의 전통을 어떻게 전해줄 것인가, 세계화 역사 속에 우리민족의 역할을 분명히 확립하고 실행할 때가 지금인 듯하다.
최근 중국의 변화
한반도와 호흡을 함께하는 중국의 변화를 본다. 지난 2012년 4월에 중국을 다녀왔다. 여행사 안내를 따라 상해 항주 소주 황산 장가계 원가계를 둘러보았다. 어렸을 때 만주에서 몇 해 살았고 모택동 혁명 후에 네 차례 다녀왔다. 이번 여행 중에 두 가지 놀라운 경험은 최근에 달라진 중국의 모습과 중국의 자연 경치이었다. 15년 전에 상해의 동부, 푸둥 지역은 허허벌판에 정부가 세워놓은 전망 탑하나 우뚝 서 있었다. 이번에 다시 찾아간 푸둥 지역은 뉴욕의 맨해튼이 들어섰고 서울의 강남처럼 중국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홍콩의 금융가를 본토의 땅으로 옮겨오는 정책으로 상해는 바야흐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둔갑하였다. 자전거 도시가 자동차 도시로 변했고 고대 도시가 현대 도시로 탈바꿈했다. 도시 교외에 주거지는 가난한 마을에서 현대식 주택지로 발전하였고 고속도로는 빠르게 뻗어 나가고 있다.
새로 지은 주택건물마다 지붕 위에 조상의 영전을 모시는 작은 공간을 건축했음은 동아세아의 오랜 유교적 생활풍습을 불 수 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관광객은 붐볐고 그들의 고유한 시끄러운 말소리는 옆을 지날 적마다 조용한 분위기가 얼마나 좋은지 다시 느끼게 했다. 50년 전에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을 이곳에서 가끔 볼 수 있었다. 우리 안내는 여행 중에 귀중품의 손가방을 눈앞에 보관하고 다니라고 경고했다. 뒤에 매면 뒷사람 것이고 옆에 두면 옆 사람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5억의 인구에 56개 소수민족이 각자의 언어와 풍습을 보존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중국정책은 유럽인들이 세운 신국가의 정책과 크게 대조되기에 중국의 만만디 사상을 여기서 볼 수 있다.
항주와 소주
상해 근교에 항주와 소주는 기원전 200년 진시황제가 날씨와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머무른 지역으로 그때 운하가 개설되었다. 남녘에서 쌀을 북녘으로 가져가면 북녘에서 석탄을 가져왔다. 11시간의 뱃놀이도 아직 남아있다. 이탈리아에 베니스가 있듯 중국에 소주, 물 위에 도시가 있다. 고구려를 침략하려다 을지문덕 장군에게 패배당한 수양제는 황허 강와 양쯔 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개설했고 원나라 칭기즈 칸은 운하를 북경까지 연결하여 남방의 쌀과 비단을 실어오게 했다고 한다. 세계 최대의 경항대운하 인공 물길이 북경(北京)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항주(杭州)를 잇는 수로이다. 북경, 천진 등 6개 성(省)에 접해 있으며 황하(黃河), 회하(淮河), 장강(長江, 양자강) 등 5대 강을 연결하여 전체 길이 1,794km로 세계에서 가장 길고 2500년 역사를 보여주는 해운 통로이다.
항주시에 서호의 기후와 경치는 중국 문화제 국보 1호 ‘남송의 도시 풍경 그림’으로 자세히 묘사되었으며 원나라 때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도 나타날 만큼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곳이다. 황산은 오대산, 보타산, 아미산과 함께 중국의 4대 불산에 속한다. 공산당 정부에서 처음 개방정책을 시작한 덩샤오핑 때에 개발되어 관광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미국의 국립공원인 캘리포니아에 요세미티에 비교되는 곳이다. ‘하늘 아래 이름난 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황산에 모였다.’라는 별명을 가졌다.
징가계와 원가계
장가계의 천문산은 세계에서 가장 긴 곤돌라를 45분 동안 타고 도시의 지붕을 지나 산악지대의 급경사를 오르는 장관을 감상한다. 곤돌라가 끝나는 지점에서 정부 관광청에서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고불고불 99굽이 비탈길을 약 30분을 오르면 드디어 천산 층계 밑에 도달한다. 999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산봉우리에 커다란 동굴이 뚫렸다. 해발 1,300m의 고지에 높이 131m 폭 57m의 하늘로 열린 문은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과 구름이 통하는 문이다. 이곳 역시 최근 공산 정부의 장쩌민 지도자 때에 개발되었다.
원가계는 ‘대자연의 미궁’이며 ‘지구의 기념물“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능원이다. 일 년 중에 260일 비가 내리는 신비스러운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120만 바위 봉우리 들이다. 높이는 평평한 고원에 이르고 계곡의 바닥은 미국의 그랜드캐니언 협곡에 바닥처럼 천 길 낭떠러지로 깊다. 자연보호 구역 국립공원으로 수억 년의 원시림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어있다. 구름이 바다를 이루어 봉우리 바위 절벽에 자라는 소나무가지에 스쳐 흐르는 절경은 세계적인 자연 유산이다. 삼국지에 유방의 난을 피해 장량이 이곳에 숨어 살았다고 전해지고 영화 아바타의 배경을 이곳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중국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나라의 음식을 다 먹어보지 못하고 그 나라의 글 한자를 다 배우지 못하고 그 나라 땅을 다 밟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 하지만, 원가계 경치를 보지 못했으면‘나이 백 살 되도록 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다. 15억 인구의 중국과 12억 인구의 인도 사이에 동남아세아는 인류의 문화와 문명의 뿌리를 품고 있음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그 뿌리에서 인류 역사는 새 시대의 싹이 꿈틀거리며 자라 올라옴을 보았다.
고립되어가는 북한
중국이 세계 경제에 게방하고 도약하는 동안 중국과 한국에 접한 북한을 보면 걱정스럽다. 세계의 이목이 북한의 새 지도자와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두는 동안 북한 동포는 더욱 외면당하고 고립되어가고 있다. 최근에 조금은 북한의 새로운 모습을 본다. 여러 신문과 방송보도를 보아도 김정은 체제는 과거의 북한과는 조금 다르다. 젊은 지도자의 개방적인 태도는 좀 더 우리에게 가까워지는 느낌을 준다. 최근에 동창회지 논설위원이며 LA 중아일보 편집국장인 이원영 동문을 비롯하여 미주 교포 여덟 사람으로 구성된 방문객이 북한을 다녀와서 보고하는 모임이 있었다. 자유스럽게 취재할 수 있는 여유롭고 자신 있는 북한 감시단의 태도에 방문객도 놀라고 여행 기사를 읽는 독자도 흥미롭게 했다.
9·11사건 이후에 후세인의 이라크 독재 정부가 미국의 침공으로 일주일 만에 사라짐을 본 북한은 핵무기 개발이 유일한 생존방법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미사일을 남쪽으로 발사하겠다고 하며 위협과 공포청치를 계속한다. 연임에 성공한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에 ‘미얀마의 길을 따르라.’고 권고하고 핵무기를 내려놓고 평화와 진전의 길을 주문한다. 유엔이 북한을 경제 봉쇄하고 국력을 약화시켜 정부의 붕괴를 기대했던 정책은 북한 동포를 극도로 가난하게 만들고 중국의 원조에 의존하여 북한의 영토가 중국 산업의 개발지역으로 변화하는 현상을 보게 한다. 태어나면서 지도자에게 종교적으로 의존하는 북한 동포는 벽에 걸린 두 얼굴을 보고 ‘가난해도 이대로가 좋다.’하는 구호를 외우며 가난을 인내하고 기아상태까지도 복종하며 산다.
남한 동포와 재외교민이 북한 지도자에서 눈을 돌려 북한 동포를 끌어안는 적극적인 노력이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남한에 반정부 주의자들
지난 며칠 동안 캐나다 로키산맥 관광을 다녀왔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 중에 과거에 청와대에서 국방 보좌관으로 일하던 모 인사와 버스 안에서 오랜 시간 이야기 나누며 최근 국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정치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꿰뚫고 있는 인물 백과사전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한국 진보계 인사들을 셋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가정에 해방 후부터 좌익계활동을 해온 혈연이 있는 이들, 둘은 전두환 호남학생 탄압 때에 반정부 항거한 학생 운동권 출신들, 셋은 김대중 친북 기회를 악용하여 만들어진 교조의 반미교육을 받고 자라난 신세대들로 설명했다.
대부분 이들은 대중의 관심을 이끄는 사건을 주동하고 종북 좌파 몇몇 소수의 활동에 흥미를 갖고 동조한다고 한다. 북한정부의 악랄한 인민탄압에 무관심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원칙적인 혜택을 주장하며 남한의 민심을 교란시키는 활동에 동조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기는 한국 언론은 김정일 일거일동 소식을 전할뿐 평양인민들의 부유층 생활이나 북한 농민들의 극심한 생활고는 알 길이 없고 오직 탈북 민들의 말로 전해지는 소식을 통해서만 북한 인민들의 어려움을 알게 될 뿐이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나드는 탈북민의 비참한 생활상과 잔인한 인권탄압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 선조는 우리 민족의 자유를 찾기 위해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목숨을 바쳐 해방운동을 하였다. 남한국민들이 북한인민들의 자유를 찾기 위한 노력이 전혀 없는 듯하다.
잔인하게 인민의 인권을 유린하는 세계에서 최악의 정부라고 규탄하는 유엔도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보호를 받고 있기에 손을 쓰지 못하는 실정이다. 남한의 국가 보안법은 좌경진보파의 숫자가 너머 많기 때문에 북한 정부처럼 정치수용소에 넣을 수도 없고 박정희 군사정부처럼 인간개조 훈련을 시킬 수도 없다.“그래 나는 종북 인사다. 어쩔래?”해도 주적으로 처벌하지 못한다. 이것이 한국의 진보파와 보수파가 만드는 국민의 불안이다.
평양에 부유층은 남한의 전자재품들을 사용하고 남한의 한류가 중국을 통해 북한에 들어오고 남한국민의 부유한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 농민들도 차츰 소식을 듣고 있다. 공개처형으로 인민을 위협하고 기만교육으로 인민을 속여 지냄도 한계에 이르고 있다. 남한의 진보파가 북한에 동조하고 북한의 인민들이 남한국민을 인식하는 경향은 남과 북이 가까워지는 느낌을 보여준다. 이것은 과도기의 전조인 듯하다. 과도기에 겪는 불안을 극복하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세력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조용한 국민들이다. 공갈 협박에 흔들리지 않고 사회교란에 휩쓸리지 않고 각자의 사회임무에 꾸준히 충실한 국민들이다. 남한 국민과 북한 인민들의 가슴에 흐르는 민족적 양심이 대동맥을 이루고 한강과 대동강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현재 세계의 추세는 스탈린식 공산주의 독재가 쓰러진 이후부터 독재정부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공산주의는 국민의 자발성이 약해져서 경제가 무너지고 소련 연방국가가 사라지게 됨을 보았고 북한도 그때부터 어려워졌다. 북한의 김 씨 삼 세대를 이어가는 독재정부가 지금의 지구상에 펼쳐지는 정치 환경에 얼마나 오래 더 존속할 수 있을까. 국민의 생산능력이 약해질수록 북한의 국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갈수록 남한과 가까워지는 중국의 생각도 달라지고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국민의 복지를 감당할 수 없어 정부는 빚더미를 지고 비틀거린다.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GM같이 막강했던 자동차 산업도 은퇴 고용인의 복지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 보수적인 사회주의 야당은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쟁의 반대편에서 대조 역할을 하다가 잠깐 정권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원동력을 앞설 길은 없다.
세계경제에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놀라운 발전을 보여준 한국의 맥박은 아직도 쉬지 않고 뛰고 있을 것이다. 반기문, 김용, 세계적 지도자를 속속 배출하고 한국의 상품은 이미 세계의 일용품이 되었고 한류는 세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생활도구가 되었다. 솟구쳐 거침없이 나가는 우리의 앞길을 누군들 막을 수 있으랴.
나이 70 어르신
나이 70 어르신에 이르면 삶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고 한다. 아이들이 성숙해서 가정을 이루고 손자 손녀가 재롱부리는 재미를 보며 즐거움을 누린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 은퇴재산과 건강관리가 중요하다. 나이 들면 운동신경이 약해져서 넘어지기 쉽고 감기 들면 면역력이 약해서 폐렴을 앓기 쉽다고 한다. 아내는 음식에 관심을 쏟고 나는 운동에 관심을 두어 매일 함께 걷는 운동을 하며 건강을 위해 노력하며 산다. 낮에는 사회봉사에 바쁘고 저녁이나 주말에는 독서와 글쓰기에 바쁘게 지낸다.
친척이나 친구들이 찾아와서 집에 머물러 세상 이야기 나누며 함께 웃고 지내다 가고 나면 우리가 아이들일 때 할아버지와 친구들이 돌 화롯불에 곰방대 두들기며 ‘세상이 말세’라고 불평하시던 때를 기억한다. 이제는 우리자신이 그렇게 하며 그때 할아버지 심정을 이해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우리도 가끔 젊었을 때 바빠서 가보지 못한 외국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우리가 배워 온 세계역사에 편견이 많았음을 다시 생각하곤 한다.
어르신은 인생의 죽음을 면하게 되는 겸손한 기간이기도 하다. 우리 부모는 80대 중반에 고별하셨다. 우리의 시계도 멈추지 않고 그때를 향하여 초침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인류가 태어나는 때가 있고 떠나는 때가 있다. 태어나는 때는 부모가 준비했지만 떠나는 때는 자신이 준비해야 함을 함께 생각하고 있다. 죽음이 두려워서 떠나기 전에 종교를 택하는 친구들을 가끔 본다. 종교는 과학이나 예술처럼 인간만이 갖고 사는 커다란 혜택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생활의 한부분이 되면 삶에 많은 도움을 얻으며 살게 됨을 주위에서 항상 본다.
인생의 황혼
어르신의 인생 황혼은 슬프고 아름다운 기간이기도 하다. 이루지 못한 꿈은 떠나는 날에도 아쉽고 아름답다. 목숨이 떠나고 나면 사는 동안 인류사회에 보탬이 되는 좋은 성취와 흔적은 다음 세대로 이어져서 이 세상에 영원히 남께 되는 데, 그것이 영생하는 결과가 아닐까 싶다. 동물은 목숨을 유지하려고 매일 먹이를 찾아다니고 짝을 찾아서 떠난 후에 목숨을 이어가도록 새끼를 남기고 간다. 인간은 언어가 형성되면서 종교◦ 예술◦ 과학의 형식이 사회를 이루고 만물의 영장으로 이 땅에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 않는가. 목숨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사람들을 위해 사람답게 살아왔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잘 달궈진 몸과 마음이 미국에 이민하여 한국인의 뿌리를 깊게 키우며 살아온 듯하다. 세계화 추세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살아온 우리의 세대는 거의 지나가고 있다. 다음 세대는 디지털 정보시대로 바꾸어서 지구의 표면은 더욱 축소되고 인류는 더욱 하나의 국가로 가까워지는 듯하다. 시간이 갈수록 마시는 공기와 물에 오염이 더욱 심해지기에 심각한 공해와 싸우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사람을 시험관 안에서 만들어 우주인이 태어나는 때가 오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드디어 모든 인류가 어르신이 되는 때가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 사회 환경과 의학의 발달로 100세를 내려다보는 때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수만 년 전부터 수백 년 전까지 사람의 나이는 40세까지가 보통이었다. 자연과 함께 사는 다른 동물처럼 먹고 자고 자식 낳는 일이 인생의 축복이었다. 사회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때에 겪는 변화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인생에 가장 성공하는 절정의 나이는 45세에서 55세까지라고 말한다.
Wellbeing, Wellaging, Welldying
사람의 나이에도 자연연령, 건강연령, 영적연령으로 분별하여 진단하기에 이르렀다. 사람이 아름답게 사는 것을 웰비잉(Wellbeing) 이라고 하고, 사람이 아름답게 나이 드는 것을 웰에이징(Wellaging)이라고 하며 사람이 아름답게 죽는 것을 웰다이잉(Welldying)이라고 구분한다.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면서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나이 들어가면서 건강하게 자신과 남에게 도움 되어 살다가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삶을 마감하는 일인데 쉽지는 않다.
본인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여 자신을 다스리고 사회에 봉사하는 삶은 아름답다. 개인생활과 전문분야에 밀려오는 어려움이 있지만, 역경을 인내하는 긍정적인 즐거움을 찾으면 성공한 사람이다. 이들의 공헌은 사회가 받아주고 금전도 뒤따라온다. 가정과 사회에 필요한 일을 찾아 열정을 갖고 즐기는 삶을 웰비잉(Wellbeing)이라고 한다.
중년과 노년에 건강의 원천은 부부 사랑에서 온다고 한다. 서로 마음을 터놓고 소통하는 이웃이 되고 아이들이 출가한 후에도 서로 의지하며 함께 즐기는 시간은 아름다운 삶의 지름길인 듯하다. 나이 들면서 질병, 고독감,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지금까지 누려온 역할 상실 등에 실망하지 않고 적응하여 자기 나름대로 가족과 사회에 공헌함을 즐기는 노년을 웰에이징(Wellaging)이라고 한다.
세계 역사를 통하여 가장 훌륭한 업적의 64%가 60세 이상의 노인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한다. 과거에 나이 60이면 환갑잔치를 하여 오래 살았음을 축하했는데 이제는 인생이 60부터라고 말하는 때다. 나이 들면서 이기주의나 노욕(老慾)을 자제하고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남을 위한 훌륭한 일을 하게 되고 좋은 인연을 맺어 행복을 얻는 듯하다.
이성 감성 영성의 능력을 겸비한 현대인의 삶은 더욱 아름답다. 이성은 사리를 이해하여 당면하는 현실에 본인과 이웃의 지식과 철학을 동원한다. 과학적 판단을 하고 대응함으로서 성공의 길에 오른다. 감성은 노래, 춤, 그림, 조각, 시와 소설, 등의 예술을 즐기고 느낌 속에 함께 젖어보는 시간이다. 삶의 아름다움이요 행복한 순간이기에 마음속에 싸여온 걱정이 사라진다. 영성은 믿음에 의지하여 자연의 섭리에 수긍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능력이다.
위급한 진단을 받았을 때, 사후를 걱정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환자는 병이 빨리 악화하여 생명을 잃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념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치료와 회복에 도움되어 행복을 되찾는 이들도 자주 본다. 전쟁터에 나간 용감한 병사는 나라를 구하고 살아남아 승전가를 부르며 돌아오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병사는 전쟁에 패배하고 목숨도 잃는다고 한다.
우리의 사후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준비해 놓은 다음, 두려워하지 않고 늠름하게 죽음을 맞으면 아름다운 죽음, 웰다이잉(Welldying)이라고 한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담담한 최후를 맞기 위해 존엄사를 허용하는 미국의 5개 주가 있다. 1994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존엄사법을 제정한 오레곤 주는 시한부 환자를 위해 의사가 처방해준 약물을 스스로 복용해 사망하는 것을 허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땅 위에 제한된 생명의 공간 안에서 자기가 밟고 온 발길을 돌아보며 행복한 마음으로 새로 찾아오는 생명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줌은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리라.
한순간 지나거나 일백년을 살거나 하나뿐인 목숨. 삶의 길에 등장하는 때부터 인연을 맺어 실패와 도전을 눈물과 웃음으로 삼키며 세월 함께 꿈을 꾸고 나면 퇴장의 시간이다. 사랑 안에 태어나서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목숨에 도움이 되려함이 목숨의 가치라고 할까. 그래서 인생의 사랑은 받는 것보다 끝까지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싶다. 때가 오면 겁 없는 결단으로 아름다운 웰다이잉(Welldying)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내와 함께 걷는다
태어나서 처음 엄마가 내 손을 잡아주어 두 눈이 떴고 아빠와 첫 걸음마 할 때 마음이 열리었나 보다. 친구들과 거닐며 노래 불으면 밝은 세상이 우리를 찾아왔다. 자라면서 수없이 지나는 사람 중에 내 짝을 찾았다. 결혼행진곡에 우리만의 인생을 걷기 시작하고 살면서 아내와 함께 걷는 시간이면 가는 길에 낭만이 가득히 흐른다.
분주한 도심에도 사색하는 공간이 꾸며졌고 교외에 나가면 나무와 풀들 벗하여, 꽃향기, 솔 냄새, 구름 가는 바람길, 계절을 밟고 가는 흙길이 열렸다. 나무와 바위들의 산길, 이름 없는 풀꽃 가득한 들길, 곡식이 무르익는 농촌 시골 길, 옛 왕과 신하들이 다니던 궁궐 길, 상가에 진열장 드려다 보는 도시길, 기적 소리 울리며 달려간 기차 철길, 흰 줄 끌어가는 비행길, 매일 흘러가는 길들을 따라 우리와 함께 가는 세상은 이야깃거리가 넘친다.
걷는 단조로움과 즐거움에 내 마음은 창문을 열어 시를 읊고, 상상 속에 소설을 이야기 하고, 연륜과 함께 찾아온 철학을 설명하고, 묶여있던 모든 욕구에서 풀려난 자유, 이미 지나간 시간, 이제야 찾아오는 낯선 공간, 아무 목적지 없이 비어있는 여정, 그럴듯한 제목 없는 대화, 우리들의 이야기 나눔은 마음이 서로 손을 잡고 끊임없이 다가오는 세계를 헤쳐 간다. 삶의 문을 연다.
같이 걷는 동안이면 생각하는 속도를 맞추고 두 마음이 하나 되어 아이들을 기르는 사랑의 기틀을 만들고 생존경쟁 속에 필연의 순리를 생각한다. 오직 사랑만이 이루어낼 수 있었던 기회를 감사하게 된다.
이제는 자라난 아이들이 집을 떠났고 둘이서 서로 의지하는 말 없는 대화로 함께 걸어서, 가족, 친구, 친척, 기다리는 사람들, 멀리 계신 부모님, 돌아가신 선조, 우리를 보호하는 신, 모두 맞아서 소리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새들 노랫소리에 함께 콧노래 부른다. 언덕 넘어 해지는 수평선을 보고 새벽 바다와 함께 걷는 길에 아침 해 뜨는 순간이면 밤이 낮으로 바뀌는 기적을 경험한다.
이렇게 걷기는 가장 단순한 활동의 근본이라, 아주 신비롭고 과학적인 움직임이란다. 걸음은 우리 삶에 시작부터 몸의 꿈틀거림이요, 바른발 디디면 왼쪽 뇌신경이, 왼발 디디면 바른쪽 뇌신경이 몸을 바로 세운다. 뇌신경은 움직이며 발달했기에 좌우가 바뀌었나 보다. 운동초기에는 탄수화물이 동원되지만, 운동시간이 길어질수록 체지방을 연소하며 비만을 제거한다. 한 걸음을 떼는 순간 200 여개의 뼈와 600개 이상의 근육이 일제히 움직이기에 모든 장기도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팔을 힘차게 흔들면서 보폭을 넓혀 빠르게 걷는 파워워킹은 전신을 사용해 운동효과를 극대화하고 발바닥 전체가 지면에 닿아 하체근육과 신경이 튼튼해진다. 복합호흡으로 심폐기능을 강화시켜 필요한 산소를 끊임없이 공급한다.
모든 고등생물은 지구의 중력에 저항하여 살기에 다리의 움직임은 생명의 모습이다. 다리가 무너지면 삶이 흔들리기에 다리는 또 하나의 심장이라 부른다. 비탈길을 오르면 숨 가쁘고 가슴에 고동이 친다. 맑은 바람 속에 만들어진 마음과 몸이었기에 피는 산소를 공급하고 오장 육부가 정비된다. 걸음을 바르게 잡으면 골반에 균형을 잡고 근육과 골격을 제대로 사용하여 척추가 바로 서는 자세교정이 된다. 걷기는 각종 성인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필수운동이다. 고혈압 환자의 혈압이 떨어지고 지친 몸이 기운을 차려서 시들은 마음에 새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매일 30분 정도의 걷기를 권고하지만 즐거운 걸음은 한 시간이 짧게 지난다. 걷는 동안 모든 병을 고치고 잠든 시간과 걷는 시간이면 몸과 마음을 청소하고 함께 걷는 시간이면 다시 오는 젊음을 되살린다. 사람도 가정도 사회도 더불어 건강해진다.
땅을 눌러 걸으면 지구가 흔들린다. 산천경개 느슨하게 숨을 쉬면 하늘과 땅이 만남을 보고 조물주의 아름다운 창조의 손자국을 본다. 같은 길을 매일 걸어도 항상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시고, 처음 겪는 새날을 맞아서 끝없는 삶의 즐거움을 본다. 우리가 이 세상을 걷고 남기는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아침 길의 시작이기에 우리는 해 지는 황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다.
걷는 동안 한때 무겁고 역겨웠던 시대가 시들고 요란스럽던 유행이 사라져서 밟고 지나간 길은 역사의 끝이요, 앞에 걸어갈 길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미래의 시작이라, 지금 걷는 이 순간만이 진실한 우리 삶의 순간이다. 내 몸은 길을 걷고 내 마음은 아내와 함께 이 순간에 넘치는 영원한 우리 몫을 나누며 오늘도 하루를 누비며 엮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