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50년 (6)
중국 역사 탐방 서안에서 북경까지
1997년에 필자가 중국에 다녀온 후에 8년이 지나 이번에는 역사공부에 흥미를 가진 서울대학 동문들과 다시 중국의 역사지역을 탐방하는 기회를 가졌다. 2005년 10월 19일에 여행사에서 준비해 준 이름표를 목에 걸고 서안 공항에서 입국절차를 마친 후 최근에 지은 현대식 공항건물 대기실에 들어가는 데 중국 교포 젊은 남녀가 나를 안내하며 밖에서 기다리는 차에 몸을 실었다. 8년전 1997년 9월에 서안의 진시황제의 황릉 주위에서 발굴된 병마용갱을 방문하였던 때와 분위기가 믿지 못할 만큼 달라졌다. 이곳을 다시 찾아옴은 서안과 북경 사이에 중국의 사적지를 찾아 우리역사를 보고자하는 뜻이었다.
운전기사는 영어를 못하지만 젊은 여인은 영어에 불편 없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약 1시간 반 동안에 서안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도심에 들어서는 블루버드 가운데 커다란 낙타들과 카라반 조각물들은 옛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의 무역사업이 천오백년 지난 오늘에도 살아 있는 듯 보여주었다. 서안의 성곽 옛 모습은 잘 보존되었고 성곽 밖의 둘레 물길에 아직도 물이 가득하고 규모가 서울 성곽보다 훨씬 작으나 동서남북 성문이 온전하고 격자식 도시 평면은 우리나라 옛 경주시나 일본 교토 시의 평면과 유사하여 1500년 전 도시계획이 건축의 도시계획을 공부한 나에게 역사의식을 깨워준다.
지금까지 발굴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는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에 묘핸조다로와 하라파 유적이 있다. 기원전 4000년경에 성곽 안에 물을 저장하는 인공호수가 있고 동서와 남북으로 축을 이룬 바퀴 달린 차 움직이는 큰길이 있고 공공시설과 주택지역을 나눈 격자형 도시계획이다. 발굴된 토기유물들도 신라 토기와 연관성이 있다. 이들 도시들은 인도 남부에 원래의 인도 원주민 드라비디안들의 도시였다고 하며 발굴된 유물 얼굴과 눈 모습이 동아세아인들과 연관되어 광대뼈와 눈 꼬리가 올려 보이기에 우리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서울대 동문 여행
산서성 역사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민경탁 동문의 인솔에 17명의 서울의대 동문과 가족들이 돈황 막고굴과 서역을 방문하고 도착하여 함께 합류했다. 산서성 유물들을 모아 1993년에 완공된 현대식 박물관 중국 고전 건물의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주, 한, 진, 당, 시대로 나누어 진열된 유품은 청동기, 금은옥기, 벽화, 도자기 조각상, 화폐, 건축물 와당 및 동경 등은 찬란한 세계문화 중심지의 유물들로 끝없는 역사와 학문의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당나라 장희태자 묘의 벽화에 우방 국가 영접하는 모습이 그려졌고 동에서 한국인, 북에서 흉노인, 서에서 아랍인의 모습 중에 한국인의 의상과 새의 깃을 단 머리관은 특히 눈에 띄었다.
일행은 곧 서안 오페라 하우스로 갔다. 디너 씨에터로 층과 층을 나누어 좌석을 배열하고 약 500명이 관람하는 현대식 건물이다. 약 50여 명이 등장하는 무대의 크기는 모든 장비를 갖추고 음악, 무용, 곡예 등으로 펼쳐지는 라스베이거스 무대에 버금가는 호화찬란한 세트와 조명을 갖추었다. 중국 벽화에서 보는 비천상의 의상들과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는 악기와 선율은 가관이었다. 며칠 전에 관악산 서울대학교 교정에 있는 규장각에서 보았던 그림과 방불하여 가야금, 거문고, 피리, 징, 꽹과리, 크고 작은 북, 그리고 서울 성균관에 보관된 악기 종 모습, 등 여러 종류의 관현악기들이 현대음악에서 들을 수 없는 특이한 동양음악으로 들려주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기차 편으로 서안 동쪽의 옛 수나라 수도인 안양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우리가 어려서 읽었던 삼국지의 배경. 관운장과 조조의 이야기가 먼 기억 속에 새롭게 상기된다. 낙양 목단화는 유명하여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상품이었고 우리가 머무른 호텔 이름도 목단대주점이라 했다. 기차로 오는 동안 황하 계곡의 지형은 황토층의 두터운 지질이 오랜 세월에 범람이 계속되어 주름 깊은 계곡 속에 가난한 농부들의 움막집과 밭가는 모습을 본다. 우리나라 해방 후의 농가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용문석굴
10월 21일 아침 일찍 일행은 용문석굴에 도착했다. 황하의 남부 후난성의 수도인 정주시 서쪽 이강 기슭에 자리 잡은 용문석굴은 황하의 북부의 산서성에 운강석굴의 계속으로 간서성의 돈황석굴과 함께 중국의 삼대 석굴이다. 선비족이 세운 위나라는 지금의 산시 성 대동시에 운강석굴을 마치고 기원후 494년에 수도를 낙양으로 옮겨 황하 남부 중원에 한족을 다스리려 했다. 백제의 침략으로 운강석굴 완성을 중단하게 되었고 이곳 용문 석굴을 493년에 다시 시작하였다. 그때까지도 중국의 역사에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력이 컸음을 볼 수 있다. 용문 석굴은 수나라, 당나라를 거쳐 523년에 완성되었다. 동굴의 대부분은 이강 서쪽의 용문산 언덕에 있으며 강 동쪽 언덕에는 석굴과 향산사 그리고 시인 백거이의 묘소가 있다.
약 2300석굴 중에 당나라 석굴이 약 1400개에 달한다. 그중에 가장 큰 봉선사 석굴은 노사나 마애불 좌상이며 17미터 높이에 좌우에 네 보살들과 함께 35미터 넓이, 30미터 깊이에 조각되었다. 양면에 호신상은 경주 석굴암과 같은 모습이며 중앙에 얼굴 모습은 당나라 측천무후의 인상이라고 전한다.
동굴 중에 한반도의 신라에서 승려들이 찾아와 조성된 기록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경주 석굴암처럼 정교하고 잘 보존된 것은 없으나 전실과 후실을 통한 건축양식은 공통성이 많았기에 당나라와 통일신라의 불교문화 연관성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같은 날 오후에 낙양 고대 박물관 안에 관우신전에 들렸을 때 81가지 음식을 차려놓은 제사상을 구경하며 갑자기 배고픔을 느꼈다. 허기를 달래며 왕성 공원과 백마사를 들려 보는 동안, 주나라와 한나라를 거쳐 수나라와 당나라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 양식은 원나라나 청나라의 건축양식이지만, 우리나라 삼국시대 건축양식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자료들이었다.
이튿날 황하를 막아 2003년에 완성한 현대식 소양시 수력발전소를 보는 동안 중국 산업발달의 원동력이 그 규모를 자랑하는 듯했다. 곧 쑹산 소림사로 향했다. 쑹산은 중국의 오악산 가운데 성산으로 음양오행의 중앙에 위치하여 역대 제왕들이 찾아와 제사를 드리던 도교, 유교, 불교의 성지이다. 이곳 소림사는 인도의 달마 스님이 바닷길과 황하 물길을 따라 찾아왔다고 전한다. 불교가 서남아세아를 통해 중국에 들어왔다는 우리가 배운 교과서 역사의 설명과 분명히 다르다.
소림사 무술원
소림사 탑 공원은 230개의 불탑과 부도들 중에 몇 개는 티베트씩 불탑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쑹산 소림사는 옛 스님들이 도를 닦는 과정으로 무도를 연마하던 전통이 유래되어 지금은 세계적 무도 수련 도시를 이루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무도 학교를 세워 세계 각국에서 5000여 명의 재학생이 있고 5만 여명의 수련생이 이 도시에 살면서 무도를 연마한다. 한국에서 찾아온 한국 택권도인과 연예인이 이곳에 다녀간 기록을 볼 수 있었다.
일행은 후난 성의 수도 정주 비행장으로 옮겨 그날 밤 늦게 산서성의 수도 태원시에 도착하였다. 산시 성은 동에 산둥 성, 남쪽과 서쪽에 황하, 그리고 북에는 만리장성으로 원래는 흉노의 땅이었다고 한다. 황하 남쪽 중원에 자리 잡은 한족과 피가 섞이면서 양귀비를 비롯한 많은 미인이 태어났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 부모에서 태어나는 미인들을 봄도 마찬가지다. 육로와 수로를 통하여 중국 교역 중심지가 되었으며 북중국과 남중국을 지배하는 정치적 중심지였기에 여, 순, 우 등의 왕릉이 이곳에 있으며 위, 진, 당나라가 이곳에서 건국되었다고 전한다.
이튿날 태원시의 재벌가족들인 공씨, 상씨, 양씨, 조씨, 왕씨, 교씨 등의 주거지를 방문하였다. 근대 중국경제를 일으키던 부가와 자손들이 살던 주택지들이 지금은 박물관으로 잘 보존되었다. 우리 일행은 교가대원에 들려 중국 영화 ‘홍등가’에 나오는 영화 촬영지를 답사하는 동안 생활풍습과 유물들에 익숙해졌다.
세계 문화재 진사
오후에 중국 도교의 대표적인 사찰인 진사에 도착하였다. 중국 고대 모계사회의 상징으로 성모전에 여신상을 숭배하는 사찰이다. 입구 바른쪽에 종각, 왼쪽에 북각이 서 있고 물을 건너 향당에 모퉁이에 송나라 때(우리나라 고려 때) 세워진 4개의 동조각상이 서 있다. 그 뒤에 헌당은 지정된 문화재 목조건축물로 당송대의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이전의 건축양식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헌당을 지나면 우리나라 불찰 가람처럼 석교가 있고 그 역시 지정된 문화재이고 석교 건너 본당인 성모전에 도교의 산신령으로 여신상을 모셨으며 그 목조 구조 역시 우리나라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건축 양식과 통하는 바 있으며 지정된 문화재이므로 진사는 참으로 중요한 중국의 문화재 사찰이다. 진사 서쪽에 당나라 측천무후의 명복을 위한 무측전 불교 사찰이 있다. 칠층 전탑 앞에 포대화상을 모신 미륵원이 있고 그 앞 양쪽 화랑에 팔만대장경을 돌비석들에 새겼다. 우리나라 해인사의 나무판에 새겨진 팔만대장경과 대조적이다.
처음 알게된 동서양사
일행은 다음날 중국 불교 본산지인 오대산으로 이동하였다. 그 안에 108개의 불교사찰이 세워졌고 오대산은 세계 불교의 본부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백탑사 중앙에 티베트식 불탑은 75미터 높이로 하늘을 찌르는 높이의 구조물이다. 수상사에는 사자를 타고 앉아 설법하는 문수보살을 모셨다. 석가가 인도에서 설법할 때 문수보살은 이미 중국 오대산에서 설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희랍의 왕들이 인도와 중국에 와서 머리 깎고 불교 승려로 수련을 받은 후 지중해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중국에도 있고 인도에도 있다.
현통사의 벽돌 돔과 아치 구도도 특이하며 그 뒤에 작은 금당 건물은 일본의 국보인 금당보다 더욱 크고 아름답다. 한국의 오대산 월정사 역시 중국의 본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대산 관광을 마치고 항산산맥을 넘어 대동시로 버스가 이동하는 동안에 많은 중국인이 아직도 요동(꿈의 동굴)이라는 황토 토굴 주거지에 이름도 생년월일도 없이 살고 있음을 보았다. 매년 4월에 이곳에서 일으키는 황사는 산동 반도와 황해를 건너 한반도까지 이른다고 한다.
11월에 비가 내리면 농사가 시작된다. 숫말과 암당나귀 사이에 태어난 노새는 힘이 세고 온순하여 이곳 생활에 큰 노동력을 제공한다. 그들은 자체번식하지 못하는 특징이라고 한다. 항산 고개 넘어 넓게 펴지는 평야에 위치한 요나라의 수도 웅현에 도착했다. 1400년 전 북위시대에 세워진 현공사는 이곳 양귀비의 고향이라 한다. 웅현시 북쪽에 대동시가 있고 만리장성과 봉화대가 여러 곳에 눈에 든다. 석탄 매장량이 중국에서 가장 많은 지역으로 도심에 흐르는 옥녀강은 주위의 탄광에 많은 물을 빼앗겨 작은 개울처럼 줄었다. 우리는 50미터 높이 절벽에 매달린 삼현사에 들려 광야를 내려다보았고 곧 호텔에 짐을 풀었다.
운강석굴
다음날 아침 대동시 교외의 운강석굴을 찾았다. 인도의 불교가 티베트 산맥을 넘어들어 오고 바닷길로 오대산에 들어올 무렵, 인도의 석굴 조각 기술(아잔타 석굴)이 북위시대의 중국석굴로 나타남이 운강석굴이다. 불상 조각과 건축 양식이 백제 문화의 것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조각물에 나타난 목조건축 양식은 백제에서 일본 나라 지역에 건너간 법륭사와 약사사와 공통된 점이 많다.
제 9석굴의 코끼리 모습은 동인도 불교가 서역을 거치지 않고 바닷길로 전해져 변질되지 않은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제 8석굴 입구에 새겨진 힌두교 신들의 모습은 일찍이 불교가 갠지스강 유역에서 시작되었을 때 중국의 도교와 인도의 힌두교와 융합되었던 특색을 보여준다. 우리가 배운 서양사관 역사는 불교의 조각문화가 그리스문화에서 왔다고 했다. 유럽이 아세아를 침략 점령하고 백일들의 우월성을 가식하는 정치교육이었음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 10월 27일 새벽에 일행은 버스로 대동시에서 북경으로 직행하는 석탄 먼지 자욱한 고속도로를 뚫고 북경 비행장에 시간 맞추어 도착하였다. 장쩌민 중국 정부 때부터 현재의 중국은 불교국가로 정책을 세워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 문화를 멀리하고 아랍 국가들의 회교도 침략을 저지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불 수 있었다. 2008년에 있을 세계 올림픽을 위하여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었으며 8년 전에 방문했을 때보다 길에 가는 자전거 수는 줄고 자동차 수는 부쩍 늘었다. 하지만 보행자, 자전거, 모터사이클, 버스, 트럭이 뒤섞인 교통질서 없음은 예나 다름없었다.
나는 4살 때부터 8살 때까지 만주 무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반세기 지난 1997년 9월에 서안, 북경, 계림, 상해를 방문하였을 때 중국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올해 10월에 다시 방문하는 동안 중국의 커다란 변화와 사회 환경에 발전을 보았다. 동아시아 문화발달과 한국과 중국, 일본과의 문화사 관계를 공부하는 동안 우리가 배운 지식에 너무나도 부족함을 느꼈다. 앞으로 젊은 다음 세대가 할 일에 많은 격려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행을 준비한 민경탁 동문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면서 즐거운 여행기록을 여기서 마감한다.
한국 참전용사기념공원을 비롯해 데이튼 VA 병원건물, 다운타운에 라이볼 빌딩, 양키추레이스 골프 클럽하우스, 데이튼 들레곤 야구경기장, 워렌 카운티 빌딩, 등의 수많은 건물들을 내 손으로 설계하고 데이튼 시민들에게 남겨주었다. 시카고 한인회에 필요한 한인문화 회관을 기본 설계하여 무료봉사해주고 2004년에 남가주 뉴포트비취에 이사 왔다.
은퇴하고 남가주에 이사
오하이오 주에는 아직 찬바람에 눈발 날리는 2월 어느 날, 이곳 남가주에는 매 한 마리가 뒷마당에서 작은 나무 가지를 입에 물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걸 보았다. 뒤뜰에 토끼들 가족이 우리를 맞이했고 그들은 매일 밤에 찾아와 집주인인 양 우리를 보고도 아랑곳없이 풀을 뜯어 먹고 밭에 우리 먹을 채소도 훔쳐 먹었다. 그러다 계곡에 매 한 쌍이 나르기 시작하는 때부터 토끼들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삼월 어느 날 매 한 마리가 발에 들쥐 먹이를 쥐고 우리 집 굴뚝 위에 앉았는데 까마귀 여섯 마리가 요란하게 짖고 매를 괴롭히려고 떠들고 있었다. 그중에 용감한 놈은 매 머리 위로 가까이 나르며 매에게 속히 떠나라는 듯 재촉하였지만 매는 꼼작 않고 쉬어 앉아 있다가 유유한 모습으로 넓은 날개를 펴고 날아갔다.
나는 아우가 선물로 가져다준 망원경을 들고 뛰어나와 탁자 위에 세우고 계곡 건너 소나무 주위를 샅샅이 들춰봤다. 그리고 어미 매가 새끼 세 마리에게 먹이를 나누어 먹이고 있음을 보고 나는 아이들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 질러 아내를 불러내어 보게 하였다. 어미 새는 갈색 깃에 검은 반점이 있고 무서운 모습인데 새끼는 하얀 솜털에 병아리들처럼 작고 입을 째지도록 다 벌려서 어미 새에게서 받아먹는 얼굴들은 너무도 신기하고 귀여웠다.
그때부터 매일 뒤뜰에 나가 만원경보는 재미가 내 일과에 더해졌고 집에 찾아오는 친구들에게도 보여주며 이제는 내 집 식구들처럼 느껴졌다. 어미 새가 보이지 않는 저녁에는 어미 새에게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고 새끼들이 굶주릴까 염려도 했다. 비가 내리고 바람 부는 밤이면 네 가족이 서로 엉켜서 어미 새 발톱이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소나무에 밀착한 모습을 상상하며 잠이 들기도 했다. 남가주의 늦은 봄 사월에는 아침에 안개가 끼어 자욱하고 오후에야 해가 나서 계곡 건너편을 볼 수 있기에 초조하게 기다려지는 때도 있었다.
코발트색 남가주 하늘 높이 어미 새는 수놈 새와 동무하여 매들이 가진 독특한 소리로 대화하며 고공 무용 하는 때면 나는 하염없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새들과 함께 즐기며 내 마음도 그들 따라 한없이 높이 나르다가 문득 집에 들어가 아내를 불러내어 같이 앉아 춤추는 한 쌍의 새들을 보기도 하고 둥지에서 기다리는 새끼 새들을 살펴보기도 했다.
수놈 새는 어미 새를 집에 데려다 주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면 어미 새는 새끼 새들을 보살핀 다음 줄곧 먹이 잡으러 떠난다. 먹이를 물어와 새끼들에게 먹이는 시간이면 나는 그들에 즐거움을 함께 나누며 어미의 그 사랑만이 이 큰 우주의 지구에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생성의 능력을 본다. 창조주는 어머니에게 그 능력을 주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자식들을 낳고 기르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4월 말쯤에 매 삼 남매는 벌써 많이 자랐다. 하얀 솜털 안에 검은 반점들이 많이 나타났고 날개에 깃이 자라 퍼덕이는 움직임을 연습하였다. 어미가 먹이를 나누어줄 때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은 독수리 새끼들과 전혀 다르다. 독수리 새끼들은 생존경쟁을 어려서부터 시작하여 서로 싸워서 어미에게서 음식을 얻어먹기에 살벌한 가족인데 비교하면 차례를 기다리는 매 삼 남매의 우정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5월 들어 새끼들의 몸이 커져서 집이 비좁아 그중에 하나라도 밀려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어미 새가 새끼 세 마리를 위하여 집을 준비하였을 때 사람의 지혜를 초월하는 자연의 섭리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분비물을 배출할 때 모습은 아래치마를 올리고 궁둥이를 집 밖으로 돌리고 여지없이 쏘는 물총 같은 줄기는 아래 소나무가지들을 하얗게 칠해놓았다. 나는 그 모습을 내 몸으로 시늉하며 아내와 같이 웃기도 하였다. 소나무 아래에 풀을 깎는 시끄러움이 있을 때는 어미는 소리 나는 곳을 주시하고 긴장하여 집을 지키는데 새끼들은 철없이 바쁘기만 하다.
5월 중순에 벌써 새끼들은 어미만큼 자랐고 하얀 솜털과 검은 반점들은 모두 갈색으로 변하고 무서운 매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면서 넓은 날개를 펴고 둥지 안에서 나르는 연습을 시작하였다. 발이 약간 공중으로 뜨는 때도 있었다. 역시 차례를 지켜 순서 있게 연습하기에 날개가 부딪치거나 몸이 밀려 둥지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5월 하순 우리가 며칠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날 첫째와 어미는 이미 어디론가 기다리던 여정에 따라 떠났음이 분명했고 둘째와 셋째만 남아 있었다. 둥지에 먹이는 남아있기에 둘이서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면서 이번에는 둘째가 떠나는 날임을 나는 감지하였다. 둘째가 처음에는 둥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소나무가지 위로 날개를 치고 옮겼다. 하지만 멀리 땅에 떨어질까 내려다보고 또 보고하다가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날갯짓만 하다가 다시 둥지로 돌아왔다.
한참 만에 둘째는 다시 같은 나뭇가지에 조금 높게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조금 높은 가지 끝을 향하여 걷는 듯 나르는 듯 조심스럽게 옮겨갔다. 셋째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따라 나와 옆 가지에 올라와 둘째만을 쳐다보고 떠나지 말라는 듯 애처로운 표정으로 지켜본다. 둘째는 가지 끝에 이르렀고 이제는 정녕 떠날 준비를 하는 듯 위를 보고 날개를 크게 펴고 마음을 정한 듯하였다. 드디어는 둘째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해야만 하는 일을 해냈다.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서 떠나간다.
아! 나는 육 남매의 둘째로 태어나 둘째가 떠나는 모습에 참으로 감개무량한 내 인생의 즐거움을 다시 보았다. 하지만 한편 혼자 남은 셋째가 걱정되었다. 둘째가 떠난 뒤 홀로 둥지에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에 뜰에 나와 망원경 앞에 앉아 셋째를 찾는 내 눈에는 빈집만 남아 있었다.
소나무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용한 새벽의 적막이 내 마음을 비워 놓았고 한해가 다 지난 듯한 공허한 느낌은 마치 삼 년 전에 우리 집 막내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집을 떠나던 날과 같은 느낌이었다.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새 출발의 기쁨인지 헤어짐의 슬픔인지 혹은 시작인지 끝인지 우리 인생에 하나의 변화를 겪는 순간이었다.
다시 바뻐진 은퇴생활
은퇴하기 3년 전부터 할일을 생각해왔기에 시간은 여전히 바쁘게 지나갔다. 집에서 프리웨이타고 1시간 넘어 운전하는 먼 LA에 이웃집 들리듯 자주 찾아가 문인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건축 작품을 창작하듯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때 시를 쓰기 시작하였지만 공부하며 운동선수 노릇하는 틈에 시를 쓰기 어려웠고 유학시절에 영어배우기 바빠서 좋아하는 시를 쓰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다 써서 남에게 보여주면 신문이나 잡지에 올랐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해온 듯하다.
시를 쓰는 시간이면 시상에 젖어 상상의 세계 속에서 느낌이 넘쳐 기쁨, 슬픔, 분노, 희열 사이에 방황하는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 나의 생각과 느낌이 남에게 감동으로 전해질 때, 기쁨이 있기에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바쁜 삶속에 시제가 떠오르면 곧 메모지에 적어 호주머니에 보관하였다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곧 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쓰다 보면 독자들과 함께 감동을 나누게 되어 영향력을 갖게 된다고 한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적인 역할을 맞게 된다. 이렇게 쓴 시가 100편쯤 되었을 때 한국의 문인협회 회장, 이사장을 역임한 신세훈 선생을 LA에서 만났다. ‘코리언 에어 비빔밥’을 비롯한 10편의 시가 2011년 봄호 ‘자유문학’에 출간하여 나는 드디어 한국문단의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그런 후에 200편쯤의 시를 썼을 때, 한국문단에 오직 한 사람뿐인 시인, 수필가, 소설가, 희곡작가, 평론가의 거장, 홍승주 선생을 만났다. 그분이 나의 시를 보고 시집출판을 권고하여 2013년 6월 15일에 시집을 출판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함께 운동하는 친구들이 내가 호랑이 띠 해(1938) 가을(9월)에 태어났다고 추호(秋虎)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자라난 무등산을 회상하여 시집이름을 ‘무등산 가을 호랑이’라고 정했다.
그러는 동안 역사공부에도 취미 있어 ‘새로운 세계를 보는 눈’으로 역사수필을 써서 전자책 ‘yongwanchoi.com'를 만들었다. 한국 문단에 저명한 평론가이며 ’에세이 포레‘ 발행인 겸 편집인 한상열 선생은 나의 수필, ’미국에 개 이야기‘를 1911년 봄호에 실어 신인상 당선작가로 한국 문단에 수필가로도 등단하였다.
아내의 한미 가정상담소
아내는 2009년부터 남가주에 한미 가정상담소 운영하는 일에 자원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남가주에 글 쓰는 한인들이 ‘사랑방 글샘터’ 모임을 갖는 책임을 나에게 맡겼다. 늦깎이 문학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매주 수요일에 모여 시, 수필, 소설, 생활수기를 잘 쓰기 위한 문학공부를 해왔다. 저명한 강사들을 초빙하여 지도를 받고 바쁜 이민생활로 젊었을 때 이루지 못한 문학에 대한 꿈을 펼친다.
회원들 중에는 이혼수속을 위해 상담소를 찾았다가 글샘터 회원이 된 후 글쓰기에 몰두해 행복한 가정을 다시 찾은 경우도 있다. 또 93세된 한 노인이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다가 글샘터 회원이 된 후에 삶의 희망을 다시 찾고 인생경험담을 기록해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한 회원은 남편을 잃은 후에 무덤 옆에서 시를 쓰기 시작해 시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어떤 회원은 글을 쓰지 안했다면 원수처럼 미웠던 남편과 해어졌을 것이라고 회고하며 지금은 자식들과 함께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이민생활을 통해서 겪는 한과 슬픔을 글로 승화시키며 자신을 회복하고 즐거움을 다시 찾는 모임이 되었다. 올해 창립 5주년을 맞아 20여명의 시인, 수필가, 소설가, 회원들이 한국 문단에 등단하였다.
아내가 상담소에서 가정문제와 건강문제를 상담하는 동안, 우리처럼 은퇴한 가정이 겪는 여러 가지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매일 한결 같이 꾸려가는 삶 속에 급작스러운 변화를 맞게 되면 실패의 위기가 되기도 하고 성공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한평생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직장생활에만 몰두해 오던 남편이 정년퇴직하면 부부는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새로운 환경을 만나게 된다.
이제 막 은퇴한 부부가 가정상담소를 찾아와 하소연을 한다.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가정을 끌어가던 남편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아내의 조강지처 애정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말다툼은 감정폭발로 이어지고 드디어 가정폭력까지 일어나 노년 이혼으로 몰락하는 비극까지 연출하기도 한다.
상담을 하면서 두 사람이 은퇴 이전의 불만부터 오늘까지 참고 숨겨 쌓여온 하소연을 털어내고 나면 조금은 분노가 풀리는듯하여 다음을 약속하고 돌아간다. KO나 판정승은 없지만 상대편의 처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차츰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부정적 생각에서 긍정적 태도로 진전을 보이면서 다시 안정된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옆에서 마음 졸이며 걱정하던 자식들도 겨우 안도의 한숨을 돌리게 된다. 남자의 은퇴는 바깥사람이 안사람, 할아버지로 탈바꿈하는 것이며, 여자의 은퇴는 어머니의 위치에서 남편의 건강과 아직 생존하신 부모님들 보살피고 손자 손녀들을 생각하는 할머니로 탈바꿈이 아닐까.
건강 문제
또 하나의 변화는 나이 들면서 닥쳐오는 건강 문제이다. 은퇴 3년 후에 간암이 발견되었다. 다행히 1985년부터 개발된 치료약이 악화하는 속도를 늦춰주었지만, 완치는 기적이다. 세계적인 암 전문의의 연구 조사에 따르면 암으로부터 완치된 환자들의 공통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성이라고 한다. 걱정 끝에 자신을 잃은 환자는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죽음을 초월하고 희망을 지켜가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암도 물리치는 놀라운 기적을 일궈낸다는 것이다. 직장이나 외부생활에 중점을 두던 삶에서 은퇴한 남편도 아내와 마음을 합쳐 이제는 집안일도 나누어 하고 사회봉사도 같이 하면 남은 삶을 더 건강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갈수록 사람의 수명은 길어지고 있다. 미국 사회보장제도 통계를 보면 65세에 건강하게 은퇴한 사람은 평균 17.5세를 더 산다고 한다. 반면 은퇴하면서 권위와 명예를 모두 잃은 듯 상실감에 빠진 사람은 평균 34년밖에 더 살지 못한다고 한다. 본인의 재산과 정부보조금을 지혜롭게 관리하면서 건강한 음식을 가려먹고 몸과 두뇌 운동을 끊임없이 지속하며 주어진 능력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은 100세 시대 도전에 승리하는 인생이리라. 7080대에도 위대한 발자국 남긴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인구폭발과 환경오염의 가속화로 깨끗한 환경은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자연을 보호하고 즐기며 주위에 부담되지 않도록 건강하게 살다가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적절한 때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는 노년이 되기 위해 좀 더 자기 관리를 잘해야만 할 것 같다. 시들기 전의 꽃이 더욱 아름답듯, 지기 전의 황혼이 더욱 빛나듯 우리도 모두 그런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한국의 전통건축 역사와 문화사가 동아세아의 문화와 어떻게 연관되며 세계 문화사 안에 어떤 위치인지 알고 싶어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다. 일본에 4번, 중국에 4번 현지답사를 하였고 인도, 캄보디아, 월남, 등의 동남아세아를 찾아다니며 조사하였다. 그중에 앙코르왓, 인도, 네팔 여행기를 나누어 보려고 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이 앙코르왓 유적
캄보디아는 동쪽에 월남을 그리고 서쪽에 태국을 접경하여 말레이 반도를 이룬 나라들이다. 남쪽에 인도네시아 섬나라들과 지형적으로 한 맥을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받는 중에 월남인들이 동아세아 사람들의 인상에 비하면 캄보디아인의 인상은 더욱 인도계 혈연으로 보였고 피부색갈도 적도에 가까운 남방계인들 임을 느꼈다. 캄보디아 국토 중앙에 메이콩 강이 흐르고 강 옆으로 거대한 톤레삽 호수가 있어 호수북단에 세계에 칠대 불가사이 중의 하나인 크머르 제국(790-1350AD)의 문화유적들이 모여 있다.
인천공항에서 6시간 직행 비행기로 시엠립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마치고 밖에서 기다려 환영해주는 일행을 만나 곧 호텔에 들었다. 도시의 분위기는 1950년대에 한국의 경제를 상기시켰다. 공중 교통설비가 없어서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이 큰 길을 매웠고 한국인들 식당들도 가끔 볼 수 있었다. 이 지역에 39개의 11세기 전후에 세워진 힌두교/불교 사원들과 궁전의 유적지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매년 그 수가 늘어나고 국가적 사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39개의 유적지들 중에 7개의 지역, 앙코르왓, 앙코르톰, 바콩, 반테이스레이, 베이욘, 프레아칸, 타푸롬에 가장 많은 유적이 모여있다. 이들 사원과 궁전들을 역사적 순서로 해설하면서 관광을 한 감상을 기록하고 앞으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흥미를 돕고 여행한 기록을 작성 해보려고 한다.
앙코르 왕국의 인드라바르만 1세와 자바르만 3세 때(877AD)에 앙코르지역동부의 바콩을 비롯한 지역에 사원과 궁전을 건설하였다. 바콩 피라미드는 우리나라 고구려의 장군총과 같은 층단식 석총에 사방 중앙에 층계를 내어 5층을 지어 올렸고 맨 상층 중앙에 동쪽으로 문이 열린 탑 하나를 세워 다시 5층 지붕을 올렸다.
고구려 분묘건축 양식에서 사방신(청용,주작,백호,현무)를 보이는 사방향공간의 개념이 이곳 건축양식과 연결됨이 명료하고 고구려의 음양 5행 사상에 5행이 있는 것처럼 5층 구조물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석굴암의 구조가 해 뜨는 동쪽으로 향하듯이 앙코르에 모든 신전과 사원들은 동쪽을 향하였고 앙코르왓 사원만이 유일하게 서쪽을 향하였다. 이곳 프레아코 사원은 처음으로 세워진 사원건축양식으로 승려들이 수양하는 우리나라 암자와 같은 공간으로 탑들을 건축 하였다. 아직 석조건축 양식이 이곳에 들어오기 이전에 벽돌전탑으로 건축하고 밖에 회를 바르고 풍부한 조각으로 싸여서 인도의 조각미술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관광버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모습을 보면 대부분 두 사람이 타고 생활전선에 나가는 모터사이클들이다. 낭만적인 젊은 남녀들의 데이트도 보이지만 작은 바퀴 두 개 위에 삼 세대 가족 다섯 사람이 함께 붙들고 아슬아슬하게 가는 모습은 온가족이 생존경쟁의 마지막 한계를 가는 듯하였다.
반테이스레이 사원
앙코르에서 약20키로 미터 북쪽에 거의 쿨렌 산비탈에 가까이 자리 잡았다. 동쪽에서 외곽 성문을 들어서면 긴 난간을 따라 내곽정문에 이르고 그 안에 인공호수를 사방에 두른 사원을 본다. 성곽 주위에 그리고 궁궐이나 사찰주위에 인공호수를 건설함은 세상에서 격리하고 보호하는 방법이며 우리나라와 동남아세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다.
반테스레이 사원은 자이야바르만 5세 때(967AD)에 건축물이며 붉은색 사암석으로 분위기가 따스하고 특이하다. 힌두교 전설을 조각으로 풍만하게 장식하였다. 3층 피라미드 위에 3탑을 세웠고 탑지붕은 5층 구조이며 매 층에 동문에서 서문으로 통하는 축을 이루어 좌우에 균형을 갖추었다. 정면에 양편 돌 창문 안에 다섯 개의 작은 기둥들이 대나무 마디처럼 조각되어 있다. 문설주와 문주방과 보 밑에 신비스러운 글들이 기록되었고 깊은 양각으로 구름모양의 넝쿨 잎 조각과 힌두의 파괴 신 쉬바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음과 양의 사상과 같이 힌두교에도 남자의 상징 링가와 여자의 상징 요니가 있어 자연종교에 자손들 번식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성기의 상징적 표현들을 볼 수 있다. 링가는 원형으로 하늘과 연결되고 요니는 사방형으로 땅에 연결됨을 본다.
힌두교의 삼성은 우주의 창조신 브라마, 관리 신 비쉬누, 그리고 파괴와 창조의 신 쉬바로 이루었고 크머르 제국의 종교의식에서 가장 많이 숭배하는 신은 쉬바 신이다. 이 시대 역사에 계속되는 전쟁 중에 승리를 보장하는 위대한 힘을 부여하는 신이기도 하다. 상채가 노출된 여신들의 아름다운 조각과 생선들, 거북이, 악어 등의 해양문화를 보이면서도 소를 타고 말을 탄 농경문화와 유목문화가 이미 융합된 역사적 내용을 볼 때 우리나라 통일신라에서 이미 세계화된 불교문화가 전성기를 이루고 고려시대 문화로 연결되는 모습을 본다. 사찰의 벽에 조각은 손가락들이 뒤로 넘어가는 듯하고 발목이 많이 꺾이면서 양쪽 무릎이 궁둥이와 일직선을 이루는 움직임이 신기하게 보였다.
앙코르왓 사원은 캄보디아에 가장 중요한 문화재이며 세계의 7대 불가사의 문화유물들 중에 대표적인 문화재 이다. 크머르 제국이 앙코르에 수도를 정하고 자야바르만 6세, (1080AD)에 완성된 거대한 사원 건축물이며 가장 최근까지 캄보디아 원주민들이 종교의식을 실행해왔기에 가장 잘 보존되었다. 17세기부터 유럽에 알려젔고 1907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 세계에 알려진 유적지이다. 최근에 일본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회의에서 세계문화제로 지정되어 프랑스와 일본정부의 후원으로 수차례 복원공사가 반복되고 있다.
앙고르왓은 유일한 서쪽을 향한 가람이다. 사면이 인조호수로 둘렀고 물 건너서 성지에 들어가는 육교양편에 긴 난간은 9개의 머리를 가진 코부라의 몸으로 만들어 졌다. 두 마리의 사자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물 건너 정문에 이르면 입구가 3대문으로 열렸고 서울에 광화문처럼 중앙에 큰문은 제왕의 문으로 부른다. 문 안에 들어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삼층 피라미드의 일층에 이르고 속세의 층이라고도 부른다.
건축양식
성지를 둘러싼 전체의 석벽조각은 8부분으로 나누어져 서쪽의 양쪽 벽에는 제왕의 승전 역사를 조각하였다. 남쪽 2벽에는 왕조역사의 기록과 지옥과 천당을 그렸다. 동쪽 2벽에는 바다의 전쟁과 비쉬누 신의 승리를 보였다. 북쪽 2벽에는 크리쉬나와 디바스의 승전을 축하하는 조각이다. 힌두교의 전설에 따라 12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역사, 생활상, 전쟁상, 신화의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세계에 으뜸가는 조각 문화재이다.
우리나라 불교 전설에 손오공 이야기가 이곳에 조각물에도 나타난다. 비쉬누는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다윈의 진화론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생선의 모습으로 생명이 시작되어 거북으로 변하고 네 발로 움직이는 돼지가 되고 다음에는 사자의 몸을 가진 사람이 나타난다. 11세기까지 전해온 인간의 육감에서 느끼는 상상과 21세기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비교할 수 있는 흥미로운 예술적 표현들이 무진장 함축되어 있다.
문안에 들면 십자형 통로로 나누어진 4개의 정원이 있고 양쪽에 경전각이 보여 한국의 궁전건축에 좌의정과 우의정을 좌우로 나누어놓은 인상이다. 정원을 지나면 다시 가파른 층계를 오르고 3대문이 열려있고 피라미드의 2층에 이른다. 여기는 승려들과 귀족들의 층이고 역시 양쪽에 경전각들이 세워졌다. 3번째 층계는 드디어 제왕과 제사장이 걸어서 신을 영접하기위해 오르는 피라미드의 삼층 즉 천신의 층에 이른다. 중앙 탑에 비쉬누 신의 위치가 중앙에 있고 사방으로 통로가 연결되어 4개의 성수지가 있어 왕과 제사장은 성수에 몸을 씻을 수 있도록 물 안에 드는 층계가 있다.
전체적으로 삼층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 졌으며 천신 층에 가장 큰 중앙 탑이 섰고 작은 탑들이 세워져 모두 5개의 탑들이 피라미드의 상부를 형성하였다. 탑들의 상부는 5층 지붕이다. 비쉬누 상이 놓였던 위치에 현재는 불상이 자리 잡고 있어 불교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웅장한 건축규모는 밖에서 느낀 바와 같이 안에서도 훌륭한 조각장식으로 이루어 졌으며 원래 건축물에 색상은 퇴화 하였지만 찬란한 신과 제사장 왕의 영접장면을 상상 해보면 인류역사 당시의 과학과 예술과 종교의 삼위일체를 이루었음을 감개무량하게 체험할 수 있다. 해가 지는 오후에 호수에 비치는 앙코르왓 서쪽 전경은 처음 프랑스 파리에 들렸을 때 에펠탑이 강물에 비추는 것을 보고 느꼈던 것처럼 지구를 떠나 멀리 어느 별나라에 온 느낌이었다.
크메르 제국의 황금기
자야바르만 7세(1181AD)에 앙코르톰 사원과 궁전들이 건축되었다. 자야바르만 6세의 앙코르왓 건설을 보면서 자라난 자야바르만 7세는 대규모의 앙코르톰 도시계획을 준비하고 크머르 제국역사의 황금기를 이룬다. 앙코르톰 성곽도시 동쪽과 서쪽에 거대한 인공호수를 건설하여 매년에 지나는 건조기와 기후변화에 대비하는 물을 저장하였고 발굴된 흙은 건축기반에 사용하였다. 호수 한복판에 수장제를 행하는 메본 사원을 지었다. 정방형의 앙코르톰 성곽도시는 앙코르왓의 10배나 되는 면적을 차지하고 베이욘 사원을 정중앙에 세웠다. 남쪽 성문 앞에 9개의 머리를 갖인 코브라 뱀의 몸을 허리에 끼고 앉아 있는 108명의 장사 신상들이 양쪽에 배열되어 장관을 이룬다.
성문에 이르면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건축 기법인 코벨 아취아래 성문이 있고 성문위에 4개의 커다란 얼굴이 동서남북을 향하는 조각이 있다. 네 모퉁이에 각각 세 마리의 코끼리 얼굴과 세 개의 코끼리 코는 기둥모양으로 얼굴을 받쳤다. 베이욘 사원 동북쪽에 코끼리 테라스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오는 군대를 영접하던 곳으로 벽에 조각물들은 왕의 위용을 보여주는 조각들이다. 나는 왕이 일어서서 손을 흔드는 자리를 찾아가 그곳에서 내손을 허공에 저어 보았다. 내 귀에 우레 같은 함성이 광장을 매우는 듯 들리고 웅장한 음악과 찬란한 색깔들이 분위기를 흔들고 비둘기 떼가 하늘로 나르는 느낌이 들었다.
앙코르톰 도시성곽의 정 중앙에 위치한 베이욘 사원은 삼층의 사각평면 위에 천신층 중앙부분을 원형평면으로 가장 큰 탑을 두었음이 우리나라 석굴암이 전방후원 평면으로 방형은 인간세계를 그리고 원형은 신의세계로 정의하는 개념과 공통성을 본다. 37개의 탑이 서있고 모든 탑들은 부처의 얼굴이 동서남북으로 향하였다. 원래 탑들은 49개 혹은 앙코르톰 입구에 다리교량에 앉은 54신과 같은 개수였다고 한다. 탑으로 이루어진 밀림 속에서 길을 잃기 쉬울 만큼 좁고 얼굴들이 많아서 신들의 얼굴로 둘러싸인 신비스러운 느낌을 경험하게 한다.
외곽전체는 회랑으로 지어 앙코르왓처럼 조각 벽으로 전체사찰을 둘렀다. 조각물의 내용은 앙코르왓에 조각물내용과 유사하지만 베이욘 사원의 조각은 외부 조각 벽과 내부 조각 벽으로 이루어진 이중 조각물이여서 그 내용이 더욱 풍만하다. 대부분의 조각내용은 전쟁 양상을 보였고 그 안에 머리모양이 다르고 귀가 짧은 중국 군인들이 참전하였으며 궁실내부에도 중국인들이 나타났음은 우리나라 역사에 신라시대 당나라 군인들이 그리고 고려시대에 원나라 군인들이 왔었음을 상기 시켰다.
창과 방패로 무장한 보병들이 대다수이고 지휘하는 왕이나 장군은 코끼리위에 얹은 대형안장 위에 있다. 지휘 장교는 벤허 영화에서 보듯 말이 끄는 췌리엇(전차)을 타고 전쟁 지휘를 하는 중에 말위에 체구가 작은 마부가 말고삐를 잡고 있음은 특이한 점이였다. 군인들이 진격하거나 행군할 때에 가축들도 가끔 섞여 있고 적을 살생하는 실전의 모습도 보였다. 배를 탄 해군들의 모습이 있고 배 머리가 용머리로 조각되었음은 우리나라 이조시대 전라감사 이순신의 거북선 머리와 같은 모양이다.
북쪽 벽에는 궁궐 내에 비쉬누와 쉬바 신들이 보이고 자연의 경치를 보이며 왕과 귀족들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쪽 벽 남부에서 시작된 조각 내용은 건물전체를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그 내용이 진행되었다가 동쪽 벽 북부에 이르러 왕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었다. 조각물의 내용은 앙코르왓 조각 벽과 함께 역사를 실감하는 배경으로 세계에 유일하게 역사기록을 한 조각의 진수이다.
제국의 왕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동안에 격는 고충을 느낄 수 있다. 가물어 흉년들면 굶는 백성들이 이웃나라에서 곡식을 빼앗아 와야 산다. 이웃나라에 빼앗겨도 죽기에 있어도 전쟁, 없어도 전쟁이었다. 내부에 정적은 항상 주위에서 맴돌며 기회를 찾고 충신들과 간신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사랑 뒤에는 질투가 따르고 만족 뒤에는 불만이 따랐다. 그러기에 왕은 천신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거다.
동아세아의 종교
앙코르톰 도시의 북쪽 성문을 나가면 프레아칸 사원이 있다. 자야바르만 7세는 남문 밖에 앙코르왓 사원이 이미 세워 있음을 보고 북문 밖에 프레아칸 사원을 세웠다. 거대한 불교사원이며 한때에 1000명 이상의 승려들이 수도하고 불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불교대학이었다. 동아세아의 자연종교인 도교는 과학적인 천체종교로 성장하여 지구의 자전과 태양계 공전을 연구하였고 미 대륙 마야문명에 까지 전해졌지만, 남아세아의 자연종교인 힌두교는 자연의 창조, 유지, 변화의 삼대개념에 머물었기에 새롭게 발전하지 못하고 대승불교는 자야바르만 7세에게 국교로 추진하기에 충분한 내용이 있었다.
많은 조각물들 중에 앙코르톰 안에 코끼리 테라스에서 보았던 귀면 얼굴을 갖인 사람의 몸으로 짐승 발을 가진 모습이 많이 보이고 그들이 하늘을 떠받고 사찰 구조물을 떠받는 모습이 여러 곳에서 눈에 뜨인다. 춤추는 무희들이 건물을 떠받는 모습으로 사원이 천국에 세워진 듯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네발을 갖인 용의 몸 위에 비쉬누가 옆으로 누어있는 모습은 불교 사원에 누워있는 부처의 모습과 같아서 힌두교와 불교의 융합된 모습이다. 우리나라 불교에 동아세아의 유교가 융합된 현상과 같다.
7개의 역사적 순서로 설명해온 마지막 지역은 타프람 사원이다. 한때 79,640명의 인구가 사원 안팎에 모여 살았고 자연산 의약 제품들을 생산하여 왕궁과 106개의 병원들에게 분배 하였다고 기록이 전한다.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위해 1186년에 세워진 사원으로 알려졌다. 거대한 나무들 숲 속에 숨겨졌기에 19세기에 사원건축 발굴 과정에서 비단 무명나무와 줄기나무 뿌리들이 건물들을 감고 있어 그대로 남겨둘 수 밖에 없었다. 건물들과 나무뿌리들이 섞여서 오히려 앙코르 관광지역 중에 가장 낭만적인 분위기를 갖추었고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유명한 영화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제국의 왕들은 서민들에게 항상 노동을 공급하고 집과 식량을 제공하면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큰 성곽과 사찰을 지었다. 그러다 거대한 자연 재해에는 저항하지 못하여 크머르 제국은 1431년에 멸망하고 수도는 놈펜으로 옮겨져서 태국과 400년 전쟁을 치르며 정복되었다. 그 후부터 캄보디아는 태국과 월남국 사이에서 약소국으로 가난하게 살아 왔다. 톤레삽 호수 안에서 배를 타고 생활하는 부양민들의 모습을 관광하는 때에 그들의 배들 중에 짚으로 짜서 만들어 가족이 사는 집모양의 배들이 여러 개가 모여서 있는 곳을 지나갔다. 짚으로 짜서 집 모양으로 건조된 배는 제주도에 옛 풍습에서도 볼 수 있고 짚 배라고도 부른다. 중남미의 마야문화와 남미의 잉카문화의 해변생활에서도 볼 수 있기에 세계역사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한때 침몰하지 않는 짚 배로 대륙이 가깝게 교류되었음을 다시 느꼈다.
동아세아의 송나라이후에 건축물들은 모두 목조건축물 들이여서 그 유물들이 보존되지 못 하였다. 동남아세아 문화에 관한 연구가 결핍되어 유럽문화가 동아세아문화보다 앞서서 발달한 것처럼 보는 현대인들의 세계사 교육에 잘못이 있다. 필자는 세계역사 속에 동양과 서양을 균등하게 다시 조명하여 공정하게 연구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세계 7대 불가사의 크머르 제국의 문화 탐방기를 여기에서 마친다.
인도 여행
세상에 금과 은으로 집을 장식한 부자들과 저녁이면 대소변 볼 곳을 찾는 가난한 사람들이 섞여 사는 나라, 인도에 우리 일행이 발드려 놓은 곳은 2008년 아카데미 오스카상을 휩쓰러간 영화 "슬럼독 밀리오네어"의 본고장 뭄바이(봄베이)였다.
타지마할 팔레이스 호텔이 테러리스트 공격을 받고 정치적 경제적 상처가 아직 아물지 못한 광장에 인도의 문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아취는 서울의 독립문보다 몇 배나 더 커보였다. 1877년에 영국군들이 인도에 침략해 와서 인도를 지배하고 1947년에 마지막 영국군이 떠나기 전에 광장을 기념하여 건립된 관문을 영국군 문이라 부르지 않고 인도의 문이라고 부르는 수치스러움을 보았다.
일행은 곧 배를 빌려 타고 바다 앞에 보이는 코끼리 섬을 찾아갔다. 뉴왁 공항에서 17시간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다음 날에 피로를 느끼지 않고 관광하는 흥분에 마음이 들떠서 바다 바람이 더욱 상쾌했다. 코끼리 섬에 오래 동안 고물이 된 장난감 기차를 타고 돌계단아래 도착하여 층계를 오르면 굽타왕조(우리나라 통일신라시대)에 거대한 암석을 두더지가 흙을 파듯 뚫고 들어가 찬란한 조각예술을 이룬 힌두교 석굴사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도의 종교
인도는 갠지스 강에서 기원전 600년에 불교가 시작되어 아세아에 포교된 종교문화의 원천이지만 현재 인도 자체 내에는 힌두교가 지배적이다. 이 동굴사원에 힌두교는 동아세아의 도교와 함께 자연을 숭상하는 가장 오래된 종교양식이다. 모든 자연물을 신으로 보는 다신교다. 그중에 힌두교의 자장 중요한 창조의 신인 브라마, 평화와 유지의 신인 비쉬누, 파괴와 부활의 신인 시바 신들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 코끼리 섬의 석굴사원 벽에 조각된 이들 3신들 중에 시바신의 세 얼굴, 두 얼굴, 그리고 춤추는 모습이 살아 움직이는 듯 실감이 난다.
다음날 인도역사에 비단 산업이 동쪽으로 당나라와 연결되고 서쪽으로 이집트, 그리스, 로마로 연결되는 실크로드 요색 이였던 아우랑가바드를 찾아갔다. 이곳에 아잔타 석굴은 인도 불교미술의 국보들이 보전되었으며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조각과 회화들을 합하여 위대한 세계적인 문화의 유산이다. 중국의 둔황, 운강, 용문, 3대 불교석굴 사원들과 함께 기원전 1세기에서 시작되어 1000년 동안 동남아세아에 수 백 개의 불교 석굴조각 동굴건축들이 유행하였다.
7세기 통일신라 때에 김대성 건축가가 건립한 경주 석굴암도 그중에 하나이며 아잔타 석굴과 용문석굴의 건축양식과 공통성을 보여줌은 전방 후원의 평면과 본실에 석가상의 주위를 윤회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석굴암은 전실이 방형이고 본실은 둥근 천정과 원형의 평면으로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이 다른 종교인들의 피해를 받지 않고 완전히 보존되어 높게 평가받는다. 유네스코 지정된 우리의 세계적 유산이다.
일행은 인도의 밤 열차 커튼으로 가린 이층침대에 각각 누어 다음날 아그라에 도착했다. 중국이나 인도에 힘든 노동하는 일꾼들을 꾸리라고 부르는데 미국에 대륙횡단 철도공사를 맡았던 중국 노동자들과 같은 이름이다. 영국인들이 아세아 노동자들을 지칭하는 이름인 듯싶다. 그들은 흑인노예들과 달리 기술노동 계약을 하고 삯을 주는 관계였다. 우리 여행 짐들이 꾸리들의 머리 위에 몇 개씩 얹고 양쪽 어께에 걸고 층계를 오르내리며 나르는 모습을 보며 1945년 해방 후에 우리나라의 기차역을 보는 듯했다.
타즈마할
아그라는 세계에 7개의 기적건축물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타지마할이 있는 곳이다. 인도의 무굴 왕국은 동아세아 몽골제국이 인도 북부를 침략한 후에 동아세아 문화의 영향을 반아 세워졌다. 12세기에 아세아의 칭기즈 칸이 로마제국보다 몇 배나 더 큰 영토를 아세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제국으로 세계를 통합한 후에 이루어졌다. 칭기즈 칸의 자손 티무르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 동양의 문화와 문명 그리고 과학과 기술을 서방에 전하여지고 유럽의 국가들을 중세 암흑시대의 긴 잠에서 깨어나 15세기부터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동서교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인류의 현대역사가 이때부터 시작했다.
이 무렵에 인도 북부에 무굴 왕국의 4번째 왕 자항거는 궁궐과 기념물 건축을 즐겼다. 그의 아들 다섯 번째 왕 샤자한은 아버지의 본을 받아 아그라 성 건축을 완성하고 사랑하는 왕비를 기념하여 정방형과 원형을 조합한 인도의 고유한 건축양식으로 타지마할을 건립하였다. 건축 전체을 하얀 대리석으로 짓고 장미, 재스민, 릴리, 등의 꽃과 잎과 줄기를 붉은 색,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대리석 안에 상감하여 그 규모와 아름다움이 비할 곳이 없다. 삼백 명의 왕비들을 거느리는 중에 동쪽과 서쪽에 다른 두 왕비들의 기념건물도 붉은 벽돌 건물로 첨가하는 자상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말년에 아들 왕에 의해 성 안에 감옥에서 7년 동안 감금되어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사랑하는 아내 옆에 타지마할 땅속 깊이 묻혔다. 아들왕은 힌두교에서 회교도로 전향하고 무굴제국은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다. 아그라 성 궁궐과 타지마할 무덤은 인도의 얼굴이 되어 인도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들리는 곳이다.
다음날 우리 일행이 찾아간 카주라호 사원들은 타지마할보다 600년 앞서서 세워진 챤델라 왕국의 석조 탑들 이였다. 우리나라 고려 때에 해당하는 시기에 인도의 석조 조각예술은 극치에 이르렀다. 석탑의 건조양식도 인도고유의 모습을 이루었고 그 특성을 관찰하면 높은 석단을 쌓고 피라미드 몸체는 단 위에 세워졌다. 층계를 따라 올라 단위에 오르면 다시 층계를 밟고 탑 입구에 이른다. 방문객의 참배는 전실에 머물지만 본실은 상징물이 중앙에 위치하여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상징물의 주위를 돌 수 있도록 통로가 설치되었다. 이들 4 공간은 각각 독립된 구조물이며 지붕은 코벨 식 아치 돔으로 건설되었다. 외부의 탑 구조 역시 웅장하고 섬세한 인도의 고유한 건축양식이다.
남녀 신들의 성교모습
탑의 외부 중단에 조각된 600여 남녀 신들의 성교모습은 84가지 몸의 모양을 보이며 짐승과 성교하는 풍습도 포함되었다. 개, 돼지, 말, 낙타, 코끼리를 동원하여 전쟁에 이르는 모습은 캄보디아에 앙코르와트 조각물들과 유사한 힌두경전의 내용을 볼 수 있다. 이 사원의 예술은 인도의 가장 중앙에 위치한 카주라호 도시의 세계적인 명물로 당시 신의 도움을 받아 인구를 증가하여 노동력과 국력을 키우려는 왕국의 의도를 볼 수 있다.
우리 일행은 다음날 바라나시에 도착하여 줄곧 석가모니의 첫 설법을 한 장소 녹야원을 찾아가 기원전 600년의 세계적인 종교, 불교의 원천지를 답습하였다. 기원전 300년에 아소카왕조에 황금기를 이루었던 불교는 동아세아,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해지고 북쪽으로 티베트와 몽골에 전해졌으며 서쪽으로 기독교와 회교도가 뒤따라 설립된다.
갠지스 강 힌두교 저녁 축제를 보러 일행 모두 꽃목걸이를 하고 릭샤(사람이 끌고 가는 택시)를 타고 강가의 밤 축제 마당에 이르렀다. 배를 타고 힌두교 노래와 춤으로 강변에 불을 밝힌 화려한 축제이다. 불교보다 먼저 시작된 힌두교의 원천지를 찾는 순례자들은 매년 백만을 넘는 방문객을 이루고 이들이 참배하고 지켜보는 무대 위에 밝은 조명과 확성기 그리고 밤을 새워 진행되는 조직적 축제과정은 무질서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느낄 수 있었다.
인도의 성지
다음날 아침 새벽에는 준비된 한번 쓰고 버릴 신발들을 신고 짐승 똥들이 아직 치워지지 않은 질퍽한 새벽길을 더듬어 갠지스 강을 다시 찾아갔다. 다시 배를 빌려 타고 강 건너 동쪽에 해 뜨는 아침을 맞아 강가에 힌두교 신자들이 가족의 시신을 화장하는 풍습을 관람하였다. 머리 깍은 장남이나 장손이 장례 제주가 되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벽바람에 날려가는 검은 연기 속에 사리지는 고인의 영혼을 멀리서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은 갠지스 강 물결에 고요히 떠가고 있었다.
상류로 배를 옮기면서 지난밤 축제현장을 다시 찾았다. 축제가 사라진 공허한 아침은 습관처럼 강물에 침례하는 사람들과 순례자들로 강가를 가득히 붐비었다. 갠지스 강물은 성수이기에 몸을 담그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더욱 상류에 오르면 강물에 빨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강가에 건물들은 대부분 오랜 역사를 간직한 사원 건축물들이며 순례자나 방문객들이 머무는 곳들이 많았다. 성지를 찾는 동안 걸인들에게 너그러워서 걸인들의 천국처럼 수 십 명의 걸인들이 줄을 지어 길가에 앉아 동냥을 기다리기도 하고 무질서하게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어린아이 거지부터 병든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행 중에 가장 큰 걸인들의 운집을 볼 수 있었다. 바라나시는 힌두교의 신비가 가득히 숨겨진 도시, 인도 역사와 전통이 살아 꿈틀거리는 도시, 현대인의 지식이나 상식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옛날의 모습을 굳게 지키는 도시이다.
인도 여행의 마지막 도시, 인도의 수도 뉴델리 공항에 도착하였다. 호텔에 가는 동안 세계에 어느 도시에도 버금가는 깨끗한 도시였다. 하지만 여장을 풀고 찾아간 서울의 강북에 비유되는 올드 델리는 인도의 어느 곳에서나 보아온 아이들과 소와 개들이 버려진 가난한 거리의 풍경이었다. 달리는 시내버스에 문과 창이 열려있고 문과 창이 없는 삼륜차 택시는 세 사람이 앉을 공간에 다섯이나 여섯 사람 끼어 앉아 흙먼지가득 날리며 달려간다.
인도 여행의 마지막 날에 우리 일행은 국립박물관을 찾아갔다.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굴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묘핸조다로와 하라파 유적부터 소개되었다. 기원전 4000년경에 성곽 안에 물을 저장하는 인공호수가 있고 동서와 남북으로 축을 이룬 바퀴 달린 차 달리는 큰길이 있고 공공시설과 주택지역을 나눈 도시계획을 보며 우리나라 신라의 수도 경주나 백제 문화의 일본 교또 격자 도시계획을 연상하게 한다. 발굴된 토기유물들도 신라 토기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이들 도시들은 인도 남부에 원래의 인도 원주민 드라비디안들의 도시였다고 하며 발굴된 유물 얼굴과 눈 모습이 동 아세아 인들과 연관되어 광대뼈와 눈 꼬리가 올려 보인다.
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이동식 목조사원은 인도 남부에 드라비디안들에 의해 최근에 만들어진 건축물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목조조각과 목조건축특성을 보여준다. 석조조각과 석조건축물이 발달하기 이전에 목조문화가 있었고 석조 피라밑이 건설되기 전에 동아세아에 흙으로 지은 피라밑 무덤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우리가 가진 지식과 상식의 인류문화에 발달과 흐름을 우리가 다시 연구하고 진실을 규명하도록 해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인도 여행은 참으로 흥미롭고 도전이 넘치는 여행이었기에 여행준비를 잘해준 아세아여행사 정수자씨와 가이드 싱순일씨 그리고 동행한 26명 회원들 모두에게 감사하며 인도여행기를 마무리한다.
네팔 여행
인도여행을 연장하여 27명 우리 일행은 세계의 지붕위에 앉은 나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하였다. 높은 산등성이와 계곡에 마을을 짓고 모터사이클 타고 도심에 오가며 사는 부지런함을 볼 수 있고 집들이 깨끗하여 인도의 삶보다 빠르고 진취적인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도 우리민족의 혈연 티베트사람과 인도사람 사이에 혼혈의 모습이 많았다. 인도의 부자들은 인도의 본토인보다 부지런한 네팔 사람들을 하인으로 채용한다는 소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숙소는 카트만두에서 히말리아 산맥 가까이 낭탕 고원지대에 위치하여 밤이면 모든 별들이 쏟아질듯이 하늘이 가까워 보였다. 마른나무 밤불을 지피고 둘러앉아 와인 잔을 돌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번잡한 아래세상에서 떠나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어깨춤을 추며 천국을 보는 듯 기뻐했다. 다음날 해 뜨는 새벽에 병풍처럼 두른 산 정상에 각각 햇빛이 이를 적마다 신비스런 색깔과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들의 감탄에 새벽바람이 차다운 줄 몰랐다.
다음날 365계단을 오르는 라마식 불교사찰에 이르러 오색(하늘, 땅, 물, 불, 바람, 들의 상징)의 깃발로 하늘을 가린 5세기부터 전해오는 석가의 반구형 부도 사원건축 양식을 보았다. 사방에 두 눈을 크게 그린 양식은 이집트 문화에 눈의 모양을 강조하는 양식과 상통하는 듯하다. 옴마니밤메흠 자신을 보호하는 경문이 새겨진 작은종을 손으로 돌리며 탑의 주위를 돌게 한다. 서식하는 원숭이가 많아 원숭이 사원으로 알려져 자연과 조화되는 환경인 듯하다. 넘치는 문화유산과 고적은 가엽게도 가난에 쪼들려 버림받은 느낌을 감출 길이 없다.
안나푸르나
다음날 히말리아 고원 안나푸르나에 가까운 도시, 포카라에 도착하여 예티 에어라인 소형비행기를 대절하여 세계의 정상 에베레스트 위로 떠올랐다. 한 시간 동안 눈앞에 펴지는 8000미터 높이 이상의 봉우리들, 비행기 날개 옆으로 바람이 구름을 밀고 지나면 눈을 뜨고 우리를 보고 닥아 오는 준엄한 산 얼굴들, 얼마나 많은 등산가들이 가까이하려다 눈 폭풍이 몰아치는 빙벽에 막혀 목숨을 잃거나 살아 울며 돌아갔을까, 검푸른 삼각 봉우리가 하늘을 찌른다. 구름과 눈사태 계곡을 내려다보는 에베레스트 정상위로 우리들의 날개가 스치는 무렵 하얀 눈송이에 마음이 부풀어 너덜너덜한 아래 세상을 까맣게 잊는 듯 멍 하는 순간 이였다. 눈앞에 커다란 검은 다이아몬드가 신비스런 빛을 내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우주와 지구의 모든 역사를 잊은 듯 한순간 스쳐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웃을 수밖에.
산악인들의 트레킹 코스로 널리 알려진 안나푸르나 계곡은 네팔의 여인들이 베틀로 짠 융단처럼 색색이 아름답기만 하고 등산객들은 히말리아의 치맛자락을 밟고 걷는 아이들처럼 즐겁기만 하다. 일행은 다시 카트만두에 돌아와 옛 하누만 왕궁건축지였던 두바 광장을 찾았다. 벽돌건물에 나무 지붕을 얹고 처마 밑에 받침대에 나무 조각은 훌륭한 힌두교의 예술이다. 우리나라 목조삼층탑과 유사하여 불국사 석가탑처럼 불교사찰에 석조 삼층탑 이전에 목조 삼층탑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파괴와 창조의 신, 시바신의 아내로 알려진 여신상의 몸에 해골들로 장식하고 손에 여러 개의 해골을 든 모습은 중미 유카탄 반도에 마야문화와 유사함을 느끼게 하고 힌두교와 마야문화가 동시에 숫자에 "0"을 사용 하는 공통성은 우연의 일치일까 생각하게 한다. 유럽과 북미대륙이 아직 빙하기에 얼음 밑에 깔려있는 수 만년 동안 우리민족 한반도의 혈연은 북남미 해안에 이르고 한편으로 만주와 몽골을 지나 티베트에 이르는 인류의 대동맥을 이어온 사실이 수년 전 혈연유전학에서 발표되었다. 티베트와 네팔의 문화는 우리나라 불교문화와 가까운 친척으로 이곳에서 우리 역사를 다시 보게 한다. 에베레스트 산 정상위로 지나는 내 작은 몸과 목숨을 느끼던 이번 여행은 참으로 오래 기억될 경험이었다.
(아래 사진들은 필자의 사진들과 황만익 교수의 사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