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세아에서 시작한 비단길(Silkroad)
원래 사이트에서 비공개였던 글입니다.
종교의 발생과 분포
동아세아 궁성 배치도(siteplan)를 보면 왕궁이 북쪽 중앙에 있고 남쪽에는 제사장 두 곳이 있다. 하나는 하늘에 제사 드리는 천체종교의 형식이며 다른 하나는 조상에 제사 드리는 조상종교의 형식이다. 도교는 자연종교의 경전이며 논어는 가정종교의 경전이다. 이와 같이 종교의 시작은 자연과 가정에서 시작하였다. 음양오행은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며 도교의 주역과 힌두교의 경전이 자연종교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주역(周易)이라는 책이 있었다. 3천 년 전에 선인들에 의해 쓰였으며 2천6백 년 전에 공자가 즐겨 읽었다고 전한다. 주역이 유학(儒學)의 오경 중 하나로, 세상의 변화에 관한 원리를 기술한 책이라고 설명한다. 음양오행의 사방을 다시 여덟 방향으로 나누어 팔괘로 표시하였다. 우리나라 태극기(위에 사진)는 중앙에 음과 양이 동그랗게 그려졌고 네 모퉁이에 사괘를 표시하여 음양오행을 팔괘로 나타낸 도표이다. 주역은 여덟 괘의 의미마다 여덟 가지 더욱 자세한 시공간의 상황을 설명하며 하늘과 땅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경우를 64 경우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고구려 고분 내부의 벽화는 천정에 해와 달. 북두칠성을 그렸다. 주위 사방을 오행의 상징으로 동쪽에 청룡(靑龍), 남쪽에 주작(朱雀), 서쪽에 백호(白虎), 북쪽에는 현무(玄武), 그리고 중앙의 시신을 황금색으로 장식하였다. 흑백 삼원색으로 동서남북 사계절을 이루었고 작은 우주를 지어 생명의 환경을 이루어놓은 지혜이다. 음양오행은 조상종교와 자연종교의 융합으로 후에 유학(儒學)으로 이어져서 동아세아의 도교(道敎)와 유교(儒敎)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동아세아의 중국의 사찰들 중에 모계 종교나 자연신 종교를 비롯하여 도교, 유교, 불교를 함께 숭배하는 사찰들을 본다.
최근에 사람의 유전인자를 연구하고 세계 인류의 혈연을 발표한 학설을 보면, 고구려의 선조(혈연학 M174)는 5만 년 전부터 만주 요하지역에 머물러 겨울 계절에 적응하기 시작하여 내륙의 몽골과 티베트에 이주해 들어갔다고 한다. 백제의 선조(혈연학 M130)는 4만 년 전부터 북미대륙을 지나 중미에 마야문화와 남미에 페루문화로 연결된다. 한편 고고학자들은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이 만주 요하지역에 홍산 문화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동아세아 역사에 상이나 은이라고 불리는 나라 문화는 동이족이나 흉노로 알려진 우리 선조의 문화이고 3,080년 전에 중화민족의 주나라가 세워지고 한나라(BC 200) 때 한자가 정립 되는 때 이전에 세계 각 대륙에 금속문명과 피라미드를 세우는 문화를 전한 우리민죽의 문화인 듯하다. 중국 동해안에 백제의 선조는 중국 산둥 성에 제나라를 유지하며 춘추전국시대의 문예부흥을 불러와 종교, 철학, 과학의 파도가 세계 각 대륙에 전해지게 된듯하다.
2,610년 전쯤에 인도 동부의 갠지스 강에 전해진 동아세아 종교는 불교의 석가 탄생을 맞이하게 되고 서인도의 인더스 강을 지나 600년 후에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 문화에 예수가 태어난다. 예수의 기독교가 설립된 이후에 다시 600년이 지나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가 태어나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끊임없는 분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도의 불교는 일찍이 종교의 고향인 동아세아에 자리를 잡고 경전을 만들어 생활의 기준을 세우고 자연의 질서를 설명해왔다. 동유럽과 러시아 정통 천주교로 이어진 기독교는 1520년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계기로 서유럽에 개신교가 시작했다. 영국의 개신교가 미 대륙에 전해지고 미국의 경제력에 힘 얻어 기독교는 드디어 종교의 고향 동아세아를 찾아왔다. 지구의 회전을 역행하여 고향을 찾아 온 현대종교는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이르렀다.
과학의 발달로 지구 위에 생존경쟁을 이겨낸 현대인류는 자연에 모든 목숨을 지배하는 주인이 된 듯 착각하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 혹은 “사람은 조물주의 걸작”이라고 말하며 자연을 인간 위주의 환경으로 만들고 있다.
인류는 종교와 헤어질 수 없는 운명이다. 진리를 찾고 꿈을 이루려는 삶의 길에 인간과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에 의지함은 무기력한 아기가 엄마에게 의존함과 같이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동아세아에서 시작된 종교와 과학의 원점을 되찾아서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연을 보호하고 이웃을 돌보면, 음양오행처럼 자연과 인류생활이 균형을 다시 이룰 수 있다면, 인류와 지구를 구원하는 미래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노력이 세계평화를 가져오는 시작이 되기도 하겠다.
훈족이야기
한반도와 요동반도에 처음 정착한 현대 인류는 만주지역에 오래 동안 서식해온 늑대와 야생마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늑대를 가정에서 기르기 시작하여 오늘의 가정에서 기르는 개가 되고 동남아세아 농경에 익숙해진 소와는 다르게 야생마를 가정생활에 드려와 유목민 생활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기마민족의 유목국가들은 계속해서 유동하였기에 역사상으로는 짧은 기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후세까지 서구 연구자들에게 잘 알려진 카니슈카, 훈족의 아틸라, 칭기즈칸, 타머레인, 호랑이 바부르 등의 존재와 스키티아, 훈, 타타르, 투르크(돌궐), 몽골과 만주족들이 정복자의 부족으로 이름을 떨쳤다. 아시아 초원지대의 늑대라고 불리는 잔혹한 기마민족 정복자들은 중국한족과 인도, 그리고 유럽의 거주민들을 짓밟았다.
신석기 시대부터 발달한 금속무기와 말을 탄 훈족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기록은 많지 않지만 흉노는 선비와 후한과 남흉노의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 남흉노는 한족에 동화되었고, 북 흉노는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서쪽으로 진출한 흉노의 지도층이 우랄산맥을 넘어 정착했고, 약 2세기가 지나면서 이미 거주하고 있던 유목민들에게 동화된 후 유럽에 돌풍을 몰아온 민족을 훈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곳이 알타이지역이다. 알타이 카자흐 부족은 스스로를 케레이라 부른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 두개골과 신라 금령총에서 발견된 두개골에 나타나는 특징이 편두이다. 편두란 이마가 인위적으로 눌리고 머리 주위로 고랑 같은 주름이 둘러 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두개골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진한 사람은 머리를 납작하게 눌러 편두를 한다’고 썼다. 학계에 따르면 편두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 ‘흉노의 자취’처럼 나타난다.
삼국지에는 ‘부여의 건국자 동명은 까오리국 금와왕(金蛙王)의 시녀가 낳은 아들’이라고 돼 있다. 몽골의 대표적 사학자 수미야바아타르 교수는 ‘금와왕의 까오리는 고리국이며 이 부족은 8 세기 몽골의 건국신화에도 등장한다’고 했다. 또 ‘알타이인의 아버지 탄자강’ 설화에 따르면 금와왕은 알타이인의 시조다. 즉 금와왕-까오리-부여로 이어지면서 알타이는 한민족의 뿌리가 된 것이다. 중국 사가들은 알타이 거주 민족도 흉노라 불렀다. 한서는 ‘조선은 흉노의 왼팔’이라면서 ‘흉노를 이기지 못했으므로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고조선도 흉노로 간주한 것이다.”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이동을 하게 된 원인은 기후 변화에 따른 천재지변이었거나 인구 밀고 높은 곳에서 초원의 길을 따라 인구밀도 낮은 동유럽으로 이주했다고 추측한다. 유목민인 훈(흉노)족은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해 남부 사이베리아를 거처 중앙아시아 초원을 따라 대이동을 시작해 초원을 따라 북상해서 서쪽으로 이동했으리라. 미국에서 제작한 Atilla, The King of the Babarian 에서 훈족(흉노)의 대이동이 한반도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해와 추측은 충분하다. 독일방송에서 제작한 훈족 추적 다큐 <역사의 비밀> 제작에서 베린토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고증으로 한반도 남단 가야 지방에서 출토된 청동솥 유물과 훈족(흉노)이 서쪽으로 이동하며 거쳐 간 지역에서 발굴된 훈족(흉노)의 청동솥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아래 사진)
1924년 경주 노동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국보 91호 기마인물상에서 말 잔등에 실려 있는 청동솥처럼 훈족은 말 잔등에 청동솥을 싣고 다녔다. 훈족의 이동로에서 30여개가 발견된 이들의 청동솥은 훈족의 이동경로를 보여준다. 경주고분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은 전형적인 유목민의 차림이다. 삼각모와 말잔등에 실려 있는 동복(청동솥)은 훈(흉노)의 동복과 같은 형태다. 기마인물은 편두를 했다고 보고 있으며 금관의 직경이 작은 이유는 신라왕들이 마야 문화에서 보는 것처럼 편두를 했기 때문이라 한다. 기마인물상의 발이 등자를 사용하고 있다. 훈족이 사용하던 등자와 같은 형태의 등자는 유럽인들에게는 없었다. 등자는 말 탄 사람이 마상에서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가죽이나 신발주머니처럼 만들어 말안장에 연결시켰다. 등자는 훈족이 유럽을 점령(아래 사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승마 기술의 한 부분이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훈족의 유물은 북한과 중국 길림지역에서 발견되었고 북부중국 초원과 내몽고 오르도스지방, 남부소련, 헝가리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남부 깊숙한 한국의 경주고분과 김해의 가야고분인 대성동에서 발견되는 흉노의 유물은 북방계인 흉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물이다. 청동솥의 용도는 신석기 금속문화를 이어받은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용기로 제례의식에 사용하는 고기를 삶을 때 쓰는 용기다. 국보인 말을 탄 기마인물상이 쓰고 있는 삼각 모자와 복식은 전형적인 유목민이 사용하는 것이며 말안장과 등자는 훈족이 사용하던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사마천은 흉노를 머리는 큰 편이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얼굴은 넓고 콧수염은 많으나 얼굴에 난 수염은 많지 않고 턱수염은 없다. 눈썹은 짙으며 눈은 찢어지고 불타는 듯 강렬한 눈동자를 가졌다고한다. 사마천이 위에 묘사한 흉노의 모습은 그리스의 사학자 프리스커스(Priscus-Priskos)가 서기 448년, 현 헝가리 북쪽 다뉴브강가에 있는 아틸라의 궁정에 동로마 사절의 일원으로 방문해 남긴 아틸라의 모습에 대한 기록과 유사하다. 그 후에 고트족 출신 사학자 졸다니스(Jordanes)는 프리스커스가 남긴 글을 라틴어로 정리하면서 아틸라의 눈을 잿빛으로 기술했으나 유럽인들이 아틸라를 보는 눈은 아세아 사람을 보는 착시 현상이 아닐까.
세계로 연결되는 교통망은 동아세아의 진시황제(BC 240) 때와 당나라(AD 618) 때에 장안(서안)을 중심으로 세계제국이 건설되었다. 이때 한반도에는 고조선 때이며 통일신라의 불교문화가 극치에 이르는 때였다. 백제가 이무렵에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아소까문화를 이르킨 때다. 당나라세력에서 도피한 몽골훈족은 로마를 점령하고 같은 때에 인도에 들어가 쿠샨제국을 침공한다. 몽골훈족의 동아세아문화와 전쟁문명은 동유럽에 전해지고 그들 중에 북유럽으로 이주하여 핀렌드의 바이킹해적이되었다. 이때 게르만 민족은 말을 타기시작해서 서유럽의 질서를 세운다. 훈족의 유족은 영국과 유럽의 해안을 300년 동안 공략하고 영국,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에 정착하였다.
일찍부터 만주에서 자라난 기마민족이 오랜 동안 초원의 광야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그들은 한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말을 타고 금속문화가 발전한 신라 문화를 일으킨다. 한반도의 경상도 언어는 발음이 억세고 북방 언어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일본의 원주민(아이누 해양민족)을 북해도 쪽으로 밀어낸 기마민족도 혈연M714가 대부분이어서 한반도의 민족이다.
존 코벨 박사는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 미국 오벌린대학을 나와 서구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941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15세기 일본 禪畵家 셋슈(雪舟)의 낙관이 있는 수묵화 연구’로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교토 대덕사(大德寺) 진주암에서 오랜동안 불교 선미술을 연구했으며 1959년부터 1978년까지 리버사이드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하와이주립대학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다.
존 코벨 박사와 그의 아들 알란 코벨 박사가 1978-1986년에 걸쳐 쓴 1천 수백편의 글중에서 서기 369년경에 있었던 한반도 최대의 선박건조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그때 한국에서 건조된 배는 대마도에 중간 기착했다가 규슈로 기항했다. 당시의 대담한 부여-가야인들은 이 배를 타고 가 후진국이던 왜, 일본 서부의 절반 이상을 정복하고 이후 1백년 넘어 일본왕의 자리를 대이어 갔다고 여러 차례 발표했다
4세기 부여-가야족의 현해탄을 넘는 항해는 그보다 5백여년 후 바이킹들이 해낸 유명한 항해보다 훨씬 더 주목해 보아야 할 사건이라고 지적한다. 바이킹들은 대담하고 강인한 뱃사람들이었지만 10세기 그들의 활동시기에도 말을 대동한 항해를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부여족, ‘기마족’들은 서양에서 로마제국이 ‘야만인’들에 짓밟혀있을 무렵 약동의 아시아에서 말을 섬나라에 데려가는 그 기록적인 항해를 성공적으로 해낸 것이다. 훈족의 후손으로 잘 무장된 부여족 전사들은 쉽사리 일본 땅을 정복했다고 서술한다. 제주도의 말들도 이때 옮겨졌을까 아니면 원나라의 침략 때 일일까.
동아세아의 석굴
동아세아 종교 건축물은 전방후원(前方後元)의 배치로 시작된다. 음양오행에서 사방형은 땅 위에 사람의 공간이며 원형은 우주 신의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한반도 남부의 분묘와 일본의 분묘들이 전방후원의 모습이며 통일신라 석굴암의 평면이 전방후원이다. 동아세아의 금속 연장이 신석기시대의 혁명을 일으키며 인류는 금속도구로 석벽을 조각하기 시작한다. 나무의 조각은 돌의 조각으로, 돌의 조각은 청동 금속의 조각으로 급속히 발전하여 남아세아와 서남아세아에 전해진 듯하다.
인도의 종교사원과 동굴평면에서 전방후원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아세아 전역에 석굴조각이 유행하였고 인도의 아잔타, 중국의 돈황 막고굴(敦煌 莫高窟), 운강석굴, 용문석굴, 과 헤아릴 수 없는 서굴들이 산재한다. 그리고 한국의 석굴암의 예를 들 수 있다.
아잔타(Ajanta)는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 북서부에 위치한 불교 동굴 사원 이다. 29개의 석굴로 기원전 1세기경부터 약 1세기 동안 지어진 전기 동굴과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지어진 후기동굴이 있다. 인도의 풍속이나, 불교에 관한 것들이 풍부하고 다채로운 필치로 벽면만이 아니라 기둥, 대들보, 천장 등 광대한 공간의 구석구석에까지 묘사되어 있다. 무불상 시대의 것부터 대승불교가 발전하던 시기의 벽화까지 다양하다. 특히 연화수보살도가 유명하다. 8세기 들어 불교가 쇠퇴함에 따라 약 1000년 이상 방치되었다. 1819년 영국군 병사 존 스미스 (John Smith)에 의해 발견되었고 1893년 퍼어슨 (Person)이 조사 발굴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돈황 막고굴은 속칭 천불동(千佛洞)이라고 하는데 감숙성 하서주랑(河西走廊) 서쪽, 돈황시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고, 명사산(沙山) 동쪽 산기슭의 50여 미터 되는 높은 절벽에 층층의 동굴로 배열되어 있다. 실크로드의 전략적 요점에 위치해 있으며 동서방 무역의 중개점이며 종교, 문화와 지식이 융합된 곳이다. 막고굴 492개의 석굴과 조각상, 벽화는 현재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제일 완벽한 불교 예술 보물창고이다. 신라의 명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운강석굴은(云冈石窟)은 중화인민공화국 산서성, 다퉁 시 서쪽 20km에 있는 동서 1km에 걸쳐있는 약 40개의 굴이 있는 석굴사원이다. 북위의 사문통인 담요가 문성제에 상주해 460년(평화 원년) 경에 상건하 지류 무주천의 절벽에 시작한 소위 〈담요5굴〉( 제16굴, 제17굴, 제18굴, 제19굴, 제20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1차 삼무일종의 법난에서 태무제의 폐불 이후 불교 부흥사업의 상징적 존재가 이 5굴의 거대한 석불이었다고 한다. 운강기(460년-494년)로 불리는 중국 불교조각사 상의한 시기의 작품들이다. 윈강의 양식은 양주(감숙성)의 석굴에 그 기원을 가진다고도 할 수 있지만, 윈강의 영향은 용문·천룡산·남북의 향당산 등 광범위한 석굴사원에 미치고 있다. 백제 동성왕의 침략으로 석굴작업은 낙양에 옮겨져서 용문석굴로 이어진다. (사진은 석굴암과 돈황 막고굴)
용문석굴(龍門石窟)은 중국 허난 성 뤄양 시의 남쪽 13km 아래의 양쪽 언덕에 있는 동굴 사원이다. 백제에 침공된 북위의 효문제가 산서성의 다퉁에서 뤄양으로 천도한 494년(태화 18년)부터 시작된다. 역사상 운강석굴의 뒤를 이은 석굴사원이다. 전대인 선무제의 계획을 수용하여 산과 들을 깎아 만든 3굴 가운데, 실제로 북위에 완성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대부분의 석굴이 완성된 것은 당나라 초기였다. 그 외 북위 시기의 대표적인 석굴로는 연화동을 들 수 있다. 북위 멸망 후에도 석굴의 축조는 대를 이어 계속되어 북제로부터 수나라에 걸쳐 축조된 석굴이다. 본존 비로자나불의 얼굴은 당시 이미 실권을 장악 하고 있던 측천무후의 용모를 조각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한국의 석굴암은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진현
동 891)에 있는 석굴(石窟)로서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을 대표하는 이 석굴은 중국이나 인도의 석굴에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규모이지만, 동아세아 종교건축의 전방후원 평면으로 예술적 완성품이며 완벽히 보존된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굴 내부는 둥근 꼴이고, 천장은 돔형 석굴 위에 흙을 덮었다. 좌우 약 6.7미터, 전후 약 6.6미터, 입구의 넓이 3.35미터이며, 그 앞에 장방형의 전실(前室)이 있다. 중앙에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정교하고 장중웅려한 기상이 넘치는 동아세아 석굴 중에 걸작이다. 본존불 뒤의 벽 한가운데에 반육각(半六刻)한 십일면관음보살상, 전실 양쪽 벽의 인왕(仁王) 및 팔부신장,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 입구 비도(扉道)의 좌우에는 사천왕상, 범천·제석천상, 석굴 벽면에 십나한(十羅漢)상, 본존불 윗쪽으로 10개의 감실에 8개에 불상, 그리고 벽의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속에 1체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7체의 보살상을 안치하였다. 선덕여왕 14년(645년) 신라의 수도 서라벌 황룡사(皇龍寺)에 세워졌던 '황룡사 9층 목탑‘은 79m의 높이로 당시 한반도의 불교문화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만리장성과 경항대운하
원래 동아세아의 남과 북은 황하를 경계로 나누었다가 후에 중국 한족 나라들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북방민을 격리하는 분계선으로 만리장성이 나타난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흉노와 몽골족 등의 북방 민족을 막기 위해 중국의 고대 진나라(시황제) 때 세워지기 시작한 거대한 성곽이라고 한다. 전국 시대 당시에 조, 연, 진 3국이 장성을 쌓음으로 시작하여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제가 연과 조의 장성을 연결하고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대비해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다. 하지만 진시황제가 북방민일 가능성이 있어 앞으로의 연구에 주목된다.
이후 명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수하고 증축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동아세아의 남과 북을 나누는 상징적인 유적이다. 그 길이는 지도상의 연장은 약 2,700km이지만, 중첩된 부분을 고려한다면 총 길이 6,351km에 달한다. 동아세아 해양민족이 5만년 전부터 만주 몽골로 이주해 유목생활에 정착하면서 북방 내륙민이 된 이후부터 남방에 거주해온 농경민의 생활과 습관에서 거리가 생겼다. 한반도에 백제와 고구려가 다르듯 중국에도 남방민과 북방민의 분쟁은 중국역사를 가득 매웠다. 하지만 북방민이 지배하는 역사가 대부분이다.
1만 년 전부터 중아아세아 중국한족이 경제적으로 융성한 동북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와 남방해양민족과 혼합하면서 북방 유목민족과의 경쟁은 명나라의 만리장성을 낳게 되었다. 현존하는 장성은 역사와 위치에 따라 쌓는 방법도 다르게 나타난다. 북쪽에 위치한 부분은 흙으로 쌓은 초기 것이기에 후대의 만리장성과 달리 높이도 낮았다. 만리장성은 긴 장벽 형태의 성벽뿐 아니라, 군대 이동의 고속도로이며 국경 초소나 보루, 요새 등이 이루어진 구간도 다수 존재한다. 북방민족과의 경계가 아닌 요동 남부 등에 설치된 만리장성은 본격적인 성벽이라기보다 전진기지 요새가 대부분이다.
한대에 무제가 우웨이와 주취안에 장성을 연장시켰고 남북조 시대( 420~589)에 북주와 북제가 성벽을 대규모로 축조하였다. 수의 양제가 장성을 보수하고 오르도스 남단에 새로운 장성을 쌓은 후에 금나라가 타타르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싱안링 산맥에 대규모로 장성을 쌓았다. 명나라의 영락제와 정통제가 북경 정면 부분의 2중으로 장성을 쌓았다가 명나라의 가정제가 대대적으로 장성을 개축하여 16세기에 완성된 모습이 지금의 만리장성이다.
동아세아의 역사는 북방 유목민과 남방 농경민 사이에 분쟁의 역사이다. 그 분쟁의 유물이 곧 만리장성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분쟁 경계선은 더욱 남쪽으로 내려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20~589)는 한족이 세운 남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여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한반도는 해양을 지배하면서도 항상 북방민과 연결해왔다. 이 시기 황하강남에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개 왕조가 차례로 흥망했는데, 이것을 가리켜 남조(南朝)라고 불렀다. 또한 같은 건강(建康; 건업(建業)의 새 이름)을 수도로 삼았던 삼국시대의 오나라와 동진을 합쳐 육조(六朝)라고 불러 이 시대를 육조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주로 문화사를 다룰 때 쓰이는 시대 구분이다.
이 시대 황하의 강남이 크게 개발되어, 이후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 강남은 중국 전체의 경제 기반이 되었다. 남조는 정치적 혼란과는 대조적으로 불교문화와 문명이 융성하여 육조 문화라 불리는 귀족 문화가 번영하였다. 도연명, 왕희지 등이 활약하는 때였다. 화북에서는 선비족 탁발부가 건국한 북위(北魏)가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북방 유목민의 부족제을 해체하고 귀족제에 의거한 중국적인 국가로 탈피했다.
동아세아의 지도에 만리장성이 분쟁의 경계선으로 뚜렷하게 보이는 반면에 경항 대운하는 남과 북이 하나로 화합하는 상징적 목표물이 되었다. 주나라 때 기원전 486년에 양자강과 회하를 연결한 중국 최초의 운하 ‘한구(邗溝)’가 건설되었다가 서기 605년 수양제(隋煬帝)의 지시로 6년의 공사 끝에 건설됐다. 총연장 1764km로 부산∼신의주 철도 길이의 두 배에 가까운 대운하는 베이징, 톈진(天津),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장쑤(江蘇), 저장(浙江)의 6개 성·시를 지나며 하이허(海河) 황허(黃河) 화이허(淮河) 창장(長江) 첸탕(錢塘) 강 등 5대 강을 관통한다.
지금도 북방의 석탄을 남쪽으로 실어 나르고 남방의 쌀과 곡식을 북쪽으로 실어 나르는 한편 창장 강 삼각주 수출 경제의 핵심적인 수상 운송로로 사용 되고 있다. 2천 5백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 최대의 경항대운하 인공 물길이 북경(北京)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항주(杭州)를 잇는 수로가 되었다. 북경, 천진 등 6개 성(省)에 접해 있으며 황하(黃河), 회하(淮河), 장강(長江, 양자강) 등 5대 강을 연결하여 전체 길이 1,794 km의 해운 통로가 되었다. 오늘의 중국에 북방을 대표하는 베이징(북경)과 남방을 대표하는 상하이(상해)를 연결하는 물길이다. 만리장성과 경항대운하를 보아도 동아세아의 문화와 문명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역사와 규모를 자랑한다.
비단길(Silkroad)
한반도에서 만리장성이 시작하듯 동아세아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비단길도 한반도에서 육로와 해로로 시작한다. 3만 년 전에 유럽에 기후가 따듯해지고 빙하가 녹기 시작할 무렵부터 동아세아 인들이 유럽 땅으로 이주해 들어간 길이다. 이태리와 동유럽 인들의 모습과 생활풍습은 금발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서유럽 사람들의 모습과 성격이 다르다. 훈족이 유럽에 이르는 길이였으며 몽골이 유럽과 서남아세아에 이르는 그들의 뒤안길이었다.
비단길(Silk Road)은 육상, 또는 해상을 통한 고대 동서 교역로로 쓰이게 되었다. 이는 비단길이라는 언어의 기원 자체가 중국의 비단이 로마 제국으로 흘러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단길은 역사를 통해서 문화가 유통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비단길은 단순히 동서를 잇는 횡단축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남북의 여러 통로를 포함해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한 하나의 거대한 교통망으로 보며, 이에 따라서 비단길의 개념 또한 확대된다. 비단길은 3대 간선과 5대 지선을 비롯해 수만 갈래의 길로 구성되어 있는 범세계적인 그물 모양의 교통로 발전하였다.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를 동서로 횡단하여 한반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화북지방 과 몽골 고비 사막의 북단 오르혼 강 연안을 지나서 카자흐스탄과 알타이 산맥 이남의 준가리아 분지를 이른다. 아랄해 연안, 남러시아의 카스피해, 흑해의 동북편과발트해 남단까지 이어진다. 일찍이 문명 교류의 처음은 1만 년 전에 이 초원로를 따라 동아세아 향료와 가벼운 견직물이 북방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지나 까지 널리 전파된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4천~3천년 경에는 동아세아의 청동기 문화화와 석조건축 기술이 전해지고 기원전 1천년경에는 철기 문화가 이길을 따라 전파된 듯하다.
5만년 전경에 늑대를 집에서 기르고 말을 타기 시작한 만주의 기마민족은 고분문화기(3세기~5세기)의 기마문화도 초원로를 통하여 서남아세아로 전달되었다고 여겨진다. 오아시스길이란 중앙아시아의 건조지대(사막)과 반사막에 점재하는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동서로 뻗은 길을 일컫는다. 사막을 비롯한 건조 지대의 군데군데에 항상 물이 고여 있어 수목이 자라고 인간이 생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오아시스다. 오아시스는 사막인들의 생활의 보금자리일 뿐만 아니라, 교역의 중심지로서 거기에서 문물이 집산되고 교통이 발달되어 왔다.
실크로드 중에서 가장 심장부에 위치한 오아시스길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역사시대 전에는 초원로가 많이 이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오아시스길이 동서교류의 주요 통로로 사용되었다. 1만 년 전부터 동아시아 지대에는 이미 상당히 발단된 교통로가 만들어졌으며 파미르 고원이 장애가 되었다가 기원전 138~126년 전한의 장건(張騫,~BC 114)이 파미르 고원을 지나 대월지에 이르는 길을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길이 만들어졌다고 기록이 전한다.
진시황제는 동아세아를 통일한 세계 최초의 제국, 진나라(기원전 259년~ 210)를 세워 수도 서안에 자리를 잡았다. 실크로드 중앙에 위치한 서안의 문화는 그 기세를 실크로드를 따라 이태리 반도에 전하고 200년 후에 로마제국이 탄생한다. 동아세아 민족이 지중해로 연결되고 동아세아 문화가 지중해로 전해지는 길임을 증명하는 좋은 예라고 말할 수 있다.
2천 년 전에 해안선 따라 동아세아에서 거대한 용을 조각하고 미라미드를 세우는 기술이 중미에 이르는 해안교통 능력이 있었다면 동아세아에서 서남아세아에 이르는 해안교통 능력도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기록된데 의하면 기원 1세기전후에 중국 한나라 때 중국 서북에서 시작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의 육상으로 통하는 무역통로가 있는 동시에 해상무역통로도 있다고 했다. 이 통로는 현재의 광동성 서문현에서 시작하여 약 5달 동안 항행한 후 계속 항행하여 타이와 미얀마. 인디아. 스리랑카에 도착한다고 했다. 중국의 비단과 향료 같은 물품은 이 통로를 통하여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수송된다고 했다.
명나라 왕조 시대의 장군이자 탐험가인 정화(鄭和) 제독은 영락제의 심복으로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해에 일곱 차례의 대원정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1405년 6월 제1차 원정을 떠났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전체 길이가 44장(丈; 약 137미터), 폭 18장(약 56미터)에 이르는 대형 선박이 포함된 함선 62척에 총승무원 2만 7,800명이 탑승했다고 한다. 훗날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는 120톤급 3척, 승무원 170명이었고, 콜럼버스의 함대는 250톤급 3척, 승무원 88명에 비교하면 중국은 선진국의 항해지식과 기술을 겸비하여 엄청난 규모의 대함대였다.
소주(蘇州)에서 출발한 함대는 참파와 수마트라를 거쳐 팔렘방, 말라카, 실론 등의 항로를 거쳐 1407년 초쯤 인도 캘커타(Calicut)에 도달했다. 이 항해를 통해 명나라와 교류가 없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차례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4번째 원정은 약간 시간을 두어 1413년 겨울에 출발했다. 이번에는 좀 더 서쪽으로 나아갈 생각으로 준비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캘리컷에 도달한 후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와 아라비아 반도 남쪽의 아덴에 도달했다. 1415년 7월에 귀국했다.
5번째 원정은 1417년 겨울에 출발해 본대는 4번째 원정처럼 아덴까지 도달했으나, 도중에 나뉜 분대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해안의 마린티에까지 도달했다고 전해진다. 1419년 8월에 귀국할 때 사자, 표범, 얼룩말, 코뿔소 등 진귀한 동물을 데리고 돌아왔다. 영국의 해양역사를 공부하는 Gavin Menzies는 정화 제독이 1421년에 대서양을 횡단하여 남미에 도착하여 북남미 대륙의 태평양 연안을 탐험한 다음 태평양의 적도선 해류를 따라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그의 저서 “1421년 중국이 미대륙을 발견하다.”에서 주장하고 있다. 중국 항해사는 이미 지구가 둥근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싶다.
로마가 비단에 취하여 망했다는 말이 전해지듯 비단길은 유럽이 태어난 젖줄리었다. 하지만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로마제국이 동쪽으로 진출한 길이라고 근시안적 주장을 지금도 고집하고 있다.
미인들이 많이 태어나는 산서성
"5,000년 중국역사를 보려면 산서(山西)로 가라"는 말이 있다. 북방민과 남방민이 융합된 산서성을 '중국 속의 중국'이라 말하는 황하문명의 발상지이다. 황하는 오랜 동안 남방민과 북방민의 경계선으로 분쟁과 전쟁이 자주 일어나 중국역사에 큰 사건들이 일어난 지역이다. 춘추전국시대의 12열국(列國) 중 하나인 진(晋)나라가 있던 곳이다. 유목 민족들의 나라들이 차례차례 통치했었다. 한족, 몽골족, 만주족, 후이족(페르시아와 연결되 회교도 민족)들 나라들은 선비족의 북위(386~534)에 의해 통일되는데, 건국 초기에 북위의 수도는 산시 성 북부의 다퉁이었다. 북위는 후에 북중국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된다.
당나라(618~907) 시대 동안 이 지역은 황하의 동쪽이라는 의미에서 하동(河東)이라고 불렸다.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수많은 이민족의 각축지이었다. 북방 민족들이 중국 대륙을 정벌하기 위해선 만리장성 아래인 산서성을 반드시 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역사 격변기마다 산서성은 후방 중심지 역할을 했기에 '중국 역사와 문화, 예술의 보고'라고 부른다. 산서성은 남쪽과 서쪽이 황하로 에워쌌고 북쪽은 만리장성으로 내몽골과 경계를 지었다. 평요고성, 왕가대원, 진사, 운강석굴, 응현목탑, 현공사 등이 이곳에 있다.
중국의 석탄광산이 제일 많은 곳이어서 일찍부터 재원을 확보하여 중국의 재정중심 지역이 되었고 부자와 정치가가 많아 생활수준이 높은 지역이다. '누들로드'의 시발점으로 알려져 있는 산서성(山西省)은 처음부터 황토동굴에 수만 년을 거주해온 동아세아인 지역이었다. 지금도 토굴을 파서 생활하는 주민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중앙아세아의 중국한족이 수천 년 전부터 황하를 건너 산서성에 이주해 들면서 두민족의 피가 섞여 미인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국의 4대 미인,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가 두 민족이 만나는 산서성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서시는 우물을 내려다보자 헤엄치던 물고기가 멈춰 섰다고 말하고 왕소군은 날아가던 기러기가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날개를 멈춰 땅에 떨어졌다고 말한다. 초선은 달이 그녀를 보고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껴 얼굴을 가렸다고 양귀비는 꽃들이 그녀를 보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