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건설은 고인돌 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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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문화
피터벨욷(Peter Bellwood)는 그의저서(The Prehistory of the Indo‐Malaysian Archipelago,1985)에서 이들은 나무 껍질을 두들겨 섬유를 만들어 옷을짜서 입었고 종이를 만들었으며 대나무 가지를 입으로 불어 대나무 안에 독살이 짐승에 맞아 사냥을하는 무기로 사용하였으며 거대한 바위를 새워서 재사를 지넸으며 고인돌(dolmen)은 멀리서 운반해온 거대한 바위 세개를 세우고 그위에 편편한 바위를 언져놓은 묘지인데 이곳에서 대만섬, 황해연안, 한반도일대와 일본에까지 분포되었다고 설명한다. 윌햄솔하임은 이들이 해양민족(Oceanian)이며 7,000년전에 나무배를 만들어 바다를 항해하였다고한다.
이들이 거대한 바위를 멀리서 끌어와 성지에 세움은 그들의 종교형식 이였으며 6만년전에서 일만년전사이에 동남아세아에 인구가 집결된 지역에서 지도체재가 있고 노동력이 있는 곳에서 시작된 풍습이다. 이들 거석문화를 갖인 해양민족은 해빙기이전에 해안선따라 남인도, 서남아세아, 지중해를거쳐 스페인과 영국해안에 이르러 거석문화의 유적을 남기었다고 본다. 영국의 스톤헨즈(Stonehenge)은 10,000년전에 이민해온 외래민족이 3,000년전에서 6,000년전사이에 세웠다고 하는데 30개 거석을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먼거리에서갖어와 세우고 30개 편편한 바위를 위에다 언젔으며 그안에 다섯쌍의 거석을 태양을 향하여 자리를 정했다.
한국에 이영문이 출판한 ‘고인돌 이야기’와 한국 방송통신위원 KNN방송에 <고인돌 루트>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고인돌의 발자취’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고인돌 역사를 설명한다. 아래 사진들은 구글에서 퍼온 것들이다.
태양신을 따르는 구석기 시대를 지나면서 조상 종교와 천체종교가 나타나고 신석기시대 후반에 이르러 8.000년 전부터 시작하여 3.000년 철기시대에 이르는 동안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는 청동기 생활하는 시절이었다. 자연 거석을 멀리서 끌어와 조상의 묘지에 덮개로 누여 놓고 제사를 드리는 초기 남방식 풍습이 후에 세워서 입석묘지로 발전하였다. 두개의 입석 위에 평편한 지붕돌을 얹어 고인돌(Dolmen)을 세우게 되는 북방식 양식이 나타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고인돌의 진화과정이 한반도에서만 볼 수 있다.
국민일보 윤복현 논설위원의 해설을 보면 태양신을 숭배하는 농사짓는 해양민족이 바닷길을 따라 고인돌 문화를 세계 각 곳에 전파할 때는 그들이 바위를 물에 뜬 배로 생각했던 듯하다. 나침판이 있기 이전에는 해 뜨고 해 지는 곳을 보고 동서쪽을 알아봤고 밤에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보고 방향을 알아봤을 것이다. 낮에는 그림자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알아차리고 밤에는 북극성 주위에 북두칠성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알아차린 듯하다.
옛사람들은 지상에 왕궁이 있듯이 바다 밑에는 용궁이 있고 하늘에는 천궁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기에 천궁에 북극성은 왕이요, 북두칠성은 7신하로 생각하였다. “7”이라는 숫자를 가장 성스러운 숫자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동아세아의 천체 종교에서 “7“의 의미가 여러모로 적용되기 시작한다. 동아세아의 그런 습관은 인도 갠지스 강의 불교에 적용되고 인더스 강을 지나 서남아세아에 전해져서 후에 기독교의 교리에도 적용되어 성경에도 430여번이나 나타난다. 오늘의 모든 종교에 성스러운 “7”숫자가 적용되고 있다. (아래 사진은 북두칠성 성혈을 보존한 바위)
아래서 보여주는 도표처럼 1년을 12등분하여 12개월로 나누며 하루를 12등분하여 다시 겹으로 나누면 24시가 된다. 동아세아 십이지(十二支)란 율력 체계에서 사용되는 간지에서 뒤쪽에 붙는 열두 가지를 말한다. 앞에 붙는 십간이 하늘을 의미한다고 하여 천간이라고 하는 한편으로 십이지는 땅을 의미한다고 하여 지지(地支)라고도 부른다. 12 지지는 子(자), 丑(축), 寅(인), 卯(묘), 辰(진), 巳(사), 午(오), 未(미), 申(신), 酉(유), 戌(술), 亥(해). 띠로 나누어 보면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12부분의 주기가 이루러졌다. 동아세아의 황도대는 모두가 동물이다. 서양의 황도대는 조디악의 어원에 동물의 뜻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개는 동물이 아니다. 동아세아의 황도대가 유럽에 전해지는 동안 변조된듯하다.
피라미드의 진화와 분포
어머니의 뱃속에 인류의 과거가 숨겨있듯이 동아세아 문화에 피라미드의 진화가 숨겨있는 듯하다. 피라미드는 건축물이기에 건축가의 견해로 설명하려고한다.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한 민족은 산(mound)을 짓고 고인돌(dolmen)을 새우는 풍습을 가진 민족이다. 그들 신석기 시대 민족은 동아세아 한반도 남단에 살았고 5만 년 전부터 현대 인류로서 가장 먼저 겨울을 이겨내는 훈련(discipline)된 생활을 시작한 민족이다. 열대지방에서는 나타나기 어려운 과학, 기술, 조직력을 바탕으로 종교적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 성장과정을 거쳐서 태어난 결과이지 돌연히 나타날 사건이 아니다. 피라미드 안에 안치된 석곽묘는 고인돌의 구조와 유사하여 피라미드는 고인돌이 낳은 자식임을 보여준다.
1982년에 적봉시 흥룡와촌에서 옥 귀걸이를 비롯해 수십 점의 옥기들이 발굴되어 BC6200경의 유물들로 판명되어 흥룡와문화로 소개되었으며 한국에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패총에서 발굴된 것들과 같다. 암록강변 수암지역에 매장된 옥돌의 질이라고 한다. 요하 주위에서 발굴된 사해문화, 부하문화, 보조구문화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홍산문화(BC4500-BC3000)로 결집되어 요하문명을 대표한다.
홍산문화의 특징은 섬세한 토기문화를 비롯하여 금속도구로 멀리 백두산에서 가져온 옥돌을 조각했고 금속도구로 큰 바위를 필요한 크기로 깨어서 멀리 끌어와 층단식 적석총 피라미드를 짓고 작고 섬세한 석관을 만들어 시신을 안장했다. 홍산문화의 옥돌조각은 황하문명보다 1000년을 앞섰고 층단식 석조 피라미드는 이집트보다 2000년을 앞섰다.
피라미드는 돌로 지은 큰 무덤이다. 두 가지 요소가 합하여 이루어진다. 첫째는 조상을 숭배하는 생활풍습에서 시작되어 조상이나 자신의 시신을 영구보존하여 영생을 믿는 종교적 습관이고 두 째는 큰 돌을 다루는 기술과 대중의 헌신적 노동력 관리이다. 동아세아의 유교적 사상에 부모에 효도하고 임금에 충성하는 태도는 유교 이전에 동아세아의 도덕생활에 그 오래된 역사의 뿌리가 있고 음양오행의 천문지식과 건설기술 과학에 기반하여 거대한 적석총 피라미드가 세워질 수 있었다. 압록강변 지린시 일대와 서안 외곽에 널리 흩어진 수천 그루의 층단식 피라미드 유적들은 고구려 장군총을 비롯하여 피라미드의 고향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수만년을 거친 생활 풍습 안에 진화과정을 거치지 않은 아프리카나 남미대륙의 피라미드는 외부에서 수입되어 이루어진 문화임을 상상할 수 있다.
피터벨욷(Peter Bellwood)는 그의저서(The Prehistory of the Indo‐Malaysian Archipelago,1985)에서 이들은 나무 껍질을 두들겨 섬유를 만들어 옷을짜서 입었고 종이를 만들었으며 대나무 가지를 입으로 불어 대나무 안에 독살이 짐승에 맞아 사냥을하는 무기로 사용하였으며 거대한 바위를 새워서 재사를 지넸으며 고인돌(dolmen)은 멀리서 운반해온 거대한 바위 세개를 세우고 그위에 편편한 바위를 언져놓은 묘지인데 이곳에서 대만섬, 황해연안, 한반도일대와 일본에까지 분포되었다고 설명한다. 윌햄솔하임은 이들이 해양민족(Oceanian)이며 7,000년전에 나무배를 만들어 바다를 항해하였다고 한다.
그 이전부터 동아세아의 초가집을 짓던 농가의 주거건축 습관처럼 짚배(대나무와 마른 나무줄기를 엮어서 만든 배)를 만들어 세계 각 대륙으로 여행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1945년 미국의 수송기 조종사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준 서안시 외곽에 피라미드 집결지(구글에서 보여주는 아래 사진)는 1963년이 되서야 중국의 고고학계가 관심을 불러왔다고 전해진다. 만주 지린성 일대의 피라미드 군단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 천 개의 피라미드 집결지이다. <한중고고학연구>, 1994, 번역본, 원본은 王仲殊, 中國古代墓葬槪說, <考古> 第5期. pp 449-458.에 따르면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770년 ~ BC 221년)의 여러 무덤에서 이른바 방추형(方錐形), 즉 사각뿔 형태의 봉분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리고 서안 일대의 무덤들은 이미 전한 시기의 왕릉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중 어떤 양식은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이라고도 한다.
이들 피라미드(아래 사진) 중에 BC3,000년 이전의 동이족의 유물들이 발굴되었기에 당시 중국의 신화통신이 밝힌 내용 중에 “중국문명은 동이족 고조선민족의 문명을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당시 중국 한족은 황하 유역에서 농사를 짓고 몽골인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거란 오환 여진 이들은 완전 유목민으로 정착문명과 거리가 멀다.
초기 형식이 만주의 고구려 장군총(將軍塚)처럼 위로 갈수록 낮아지는 계단식이다. 고구려의 무덤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들여쌓기 공법이라 한다. 중국과 일본에 없는 고구려 건축 공법이다. 이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서안의 외곽지역 중에 Banpocun (반포) 라는 곳은 7000년전의 유물이 다량 발굴된 앙소문화, 고대 유적지이기도 하다.
독일 저자 HartwigHausdorf의 저서는 “Das chinesische Roswell (German) : Ufo Encounters in the Far East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라고 소개했다. 등장하는 사진 중 상당수에는 Photo by Hartwig Hausdorf 라고 당당하게 찍혀있다. 그 사진들이 서안 근방에 있는 피라미드를 찍은 것들이다. 중국정부는 그를 추방하였다. 정확한 근거 있는 소문은 아니지만 그럴 듯한 이야기가 있다. 중국 서안지역 피라미드 발굴에 참여한 중국인 발굴 전문가 故 장문구(張汶邱 )씨가 죽기 전에 증언한 내용이라고 한다.
"1963년 4월에 우리 고적 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 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는 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 트럭을 나누어 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 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미드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 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 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 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 곳보다는 가운데 것이 대단했어요. 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 그림, 여러 문자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 절구, 솥, 그릇, 등 생활도구 1500여점,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 칼, 창등 장신구류, 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동아세아인들의 머리 습관)를 한 정 중앙시신 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 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
우리는 처음 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 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 듯 마치 외계인의 세계, 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 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 날 대충 7할 정도 파악, 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황하족 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 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 자리에 두고 일단, 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 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하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 이상 소식을 들은 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모든 것입니다."라는 이야기가 떠돈다.
진나라가 그처럼 중국 서북방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한족 역사가들은 세계의 첫 재국, 진나라와 진시황제를 오랑캐 즉, 흉노로 취급하는 처지가 되어서 처음으로 당황하게 된듯하다. 중국 정부가 60년대부터 발굴하고 동이족(고조선과 고구려)의 유물들이 출토됨으로 발굴을 중단하고 동북공정을 시작하여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는 정책을 먼저 시작하게 된 듯하다. 동아세아의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를 중국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동북공정이다. 동이족인 진시황제의 무덤은 지금도 발굴이 중단되어 있다. 진의 통치 범위는 현대 카자흐까지 미치는 대제국인 것으로 추정된다.
Robert M. Schoch는 2003년에 출판된 저서 VOYAGES of the PYRAMID BUILDERS(아래 사진)에서 중미의 마야문화가 동아세아 상나라문화의 연장된 문화임을 시사함으로서 세계의 피라미드건축기술 근원이 동아세아에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영국해군선장출신 Gavin Menzies는 2003년에 저서에서 명나라의 해군은 1421년에 미 대륙을 방문하였고 세계해양지도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고증하였다. DICK TERESI는 2002년에 출판된 LOST DISCOVERIES에서 현대과학의 뿌리가 바빌로니아에서 시작하여 마야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중에 동아세아는 이미 대부분의 기술과 과학을 훨씬 오래전부터 보유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아프리카 나일강 유역에 피라미드를 건조한 왕과 귀족들 중에 동아세아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장 큰 피라미드의 주인 쿠푸(고부)가 작은 체구에 동아세아인의 인상이다. 그와 함께 일한 건축가 헤무누 역시 얼굴에 광대뼈가 높은 동아세아인의 모습이며 그들의 후손들이 혼혈아의 특색인 아름다운 모습이며 동아세아에서 명명하던 4자 이름들이 많다. 우리나라 고구려에 연개소문, 을지문덕처럼 북미대륙에 원주민들의 이름과 같은 현상이다. 아프리카 귀족들이 사용한 가구들 중에 아랍인들과 흑인 원주민들을 노예로 보이는 그림과 조각물의 예들이 있고, 옥돌, 상아, 목재칠기등의 모양은 동아세아 제품들과 유사하다.
1986년에 중국의 서남부지역, 성도 시에서 발굴된 산싱두에이(삼성퇴)문화는 요동반도와 상나라 사이에 위치하였던 촉나라 씨족들이 주나라가 정복할 무렵에 거대한 청동가면들과 인체청동상 및 얇은 금박이 제품들과 수많은 옥돌제품들을 제작하는 문화와 문명을 동반하여 중앙아세아로 이주한 사실을 이해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들 문화는 에집트 문화나 그리스의 문화와 공통성을 볼 수 있고 후에 페르시아의 문화와도 공통성을 보게 된다.
신석기시대부터 한반도 남부에는 농경에 필요한 저수지를 파고 난 대량의 흙으로 작은 산을 지어 올렸다. 때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되기도 하고 커다란 분묘(Mound)가 되기도 했기에 지금도 한반도 남단에 많이 남아있으며 그 문화는 북미대륙에 미시시피 강 유역으로 연결됨을 이미 설명하였다. 피라미드는 흙으로 큰 산을 짓는 무덤에서 시작하였다. 일본의 오사까-나라일대에 산재한 떼 입힌 대형 고분들이야말로 한반도 남부의 백제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부여족의 무덤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고분은 닌또꾸천황(仁德王)능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한 겹의 해자만이 고분을 둘러싸고 있지만 원래는 세 겹의 해자가 둘러쳐져 있었고 총길이는 무려 1천미터 가량이다. 이 규모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절반 규모에 달한다.
같은 곳 한반도 남단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고 많은 고인돌(Dolmen)이 모여 있다. 한반도 주위에 40,000여개의 고인돌은 세계 해변에 분산된 전체 고인돌의 절반에 달한다. 신석기시대 만주일대에 석탄불에서 나오는 금속 연장이 자연석을 깨트려 사각형 바위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만주 지린성 일대와 서안시 외곽에 수 천 개의 층단식 피라미드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동아세아 신석기시대 문화에 수 천 년의 금속문화와 농업발달에 따른 높은 인구밀도에 사회적 경쟁이 인류문화 문명의 요람지였음을 볼 수 있다. 흙으로 봉산을 짓고 고인돌의 거석문화를 거친 피라미드 진화유적이 한반도 주위에 수없이 많다. 아프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에 나타난 피라미드는 돌연변이 현상으로 그 성장과정을 찾아볼 수 없다. 일시적으로 나타난 고도의 섬세한 가구 공예문화도 그 뿌리가 아프리카나 중남미 대륙에 있지 않고 동아세아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동아세아에 만주의 유목민 생활과 남부의 농경민 생활이 연합하여 가장 일찍부터 문화와 문명이 자라난 뿌리가 이곳에 있다.
멕시코 아스텍 문화는 해와 달 피라미드를 세웠고 그 크기는 이집트 피라미드 크기와 유사하다. 달 피라미드 앞에 축제 행로가 2마일 길이로 뻗어 있고 그곳에 살아 꿈틀거리는 동아세아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동아세아의 피라미드 문화가 태평양 건너편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면 육로와 해로로 통하는 지중해에 전해짐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수 천 년이나 수 만 년을 거쳐 피라미드가 잉태되고 진통을 거쳐 탄생하는 과정이 한반도 주위에서는 볼 수 있지만 아프리카나 서남아세아에서는 볼 수 없고 북남미 대륙에서도 볼 수 없다.
한반도와 황해 해변에 신석기시대부터 밀집된 인구는 큰 흙무덤(고분)과 고인돌 (입석)무덤의 풍습을 융합하여 요동반도 압록강 유역과 서안시 근교에 큰 돌무덤(적석총)이 층단식 피라미드 모습으로 건축하기에 이른다. 수만 년의 석기시대를 거쳐 진화된 고분문화와 입석문화는 수천년을 거쳐 층단식 피라미드로 진화하였다. 만주 지린시와 서북내륙에 서안 근교를 비롯한 주위지역에 수천개의 적석총 유적들은 고구려 고분군을 포함하여 동아세아 문화의 세계적 유산이다.
문화와 문명은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전해진다. 세계적 원거리에 전해지는 수단은 4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씨족이나 민족의 대이동으로 긴 시간을 거쳐 이루어진다. 둘째는 상업 연결로 육로나 해로를 통하여 동남아세아의 무명과 비단이 서남아세아와 유럽에 전해지듯이 혹은 동아세아의 도교 유교 불교가 서남아세아에 기독교나 회교도로 전해지듯이 분포되는 현상이다. 셋째는 급격한 정치적인 변화에 따른 분포현상이다. 침략자가 침략지역에 문화와 문명을 전달하거나 혹은 현지의 문화를 흡수하는 현상이며 비교적 인접 지역 가까운 거리에서 일어난다. 넷째는 정치적 고위층 무리가 필사의 도망자들이 되어 동반하는 무리와 그들의 지식과 생활문화를 도피지역에 전하는 방법이다. 새로운 집권자가 기존 집권자와 주위에 충성했던 귀족들을 모두 말살하려는 의도가 있을 때 필사의 도망자들이 형성되고 거대하고 치밀한 준비가 시작되고 추적을 불허하는 먼 거리까지 이르게 된다.
중미 아메리카에 전해진 피라미드는 셋째의 경우이며 나일강에 전해진 피라미드는 넷째 경우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양자강중류 중원에서 거주하던 중국 한족이 강 하구와 황하 하류에서 거주해온 한반도계 해양민족(동이족)국가들 상, 은, 촉, 요, 진,등의 여러 나라들을 점령하고 주나라를 세우듯 침략 국가들을 세웠다. 이때 이미 열려있는 육로와 해로를 따라 동이족 여러 나라 왕들과 귀족들이 중앙 아세아인의 희생제물이나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동아세아 역사에 가장 큰 탈출이 이루어진다.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문화의 절정에 이른 상나라가 중앙 아세아의 주나라에 침략 당하였을 때 약 25만 명의 인구가 탈출을 하였다고 한다. 지중해 연안 아프리카에 이르는 육로나 항로의 지식이 있었고 육로로 북아메리카대륙에 그리고 적도선 해로를 따라 남아메리카에 이르는 필사의 도망을 할 수 있었을 듯하다.
3000년 전에 세워진 피라미드의 그 거대한 구조는 종교적 배경에서 고도의 과학과 막대한 노동력의 조직적 운영으로만 가능한 건축물이기에 더욱 경이롭다. 한편 그 무렵에 남미대륙 태평양연안에 패루에도 층단식 피라미드들이 많이 세워 졌고 조금 후에 중미에 해와 달 피라미드가 나타났다. 한반도와 황해연안에 신석기시대부터 인구밀도가 높고 훌륭한 종교문화와 금속문명을 갖추어 그들이 나침반을 이용한 원양항해를 통하여 남미대륙과 아프리카에 연결되는 가능성을 보면 세계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중국의 동북공정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이 서안시 외곽에 진시황제의 무덤이라고 전해진 거대한 피라미드를 발굴하였다. 발굴 유물들은 진시황제의 무덤이 아니었다. 황하문명이 아닌 고조선의 유물임을 알게 되었다. 1973년에 시도된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진시황제 보다 수천 년 이전의 유물임이 밝혀졌다. 그 때까지 만리장성 북부에는 문화가 없는 야만족인 동이족이나 훈족으로 알려진 지역문화가 중국 황하문명보다 더 일찍 더 훌륭하게 존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진시황제의 무덤을 포함한 그 일대의 모든 발굴조사나 학구적인 연구를 금지하고 동북공정 정책을 발표하였다.
중국 공안 당국은 한국민족의 역사와 분쟁이 되는 모든 역사유적을 폐쇄하고 접근을 금지하고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 56개 소수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고 규정하고 지금까지 지켜온 중국한족의 제한된 역사관을 탈피하고 중국보다 앞선 동이족(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문화도 중국의 문화라는 학교 교과서를 발부하여 학교 교육부터 시작하고 있다. 마치 일본이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교과서를 발부하여 학교 교육에 사용하는 정치적 교육과 같은 것이다.
한국의 위키백과의 설명에 의하면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 동북부 지역의 동북 3성(헤이룽 장성, 지린성, 랴오닝성)에서 일어난 과거 역사와 그로 인한 현대사와 미래사의 현황에 관련하여 2002년 초부터 2004년 초까지 그리고 2007년 이후 지금까지 변강사지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 실시된 연구 작업을 포함한다. 정식 명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다. 동북공정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에 의한 국책사업이며,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한다고 했다.
동북공정은 만리장성 외곽에 홍산문화와 서안의 진시황제 무덤에서 시작된다.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蔵)에 의해 발견되어, 1935년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나 미즈노 세이치(水野清一) 등에 의해 대규모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전쟁후에 각지에서 발굴이 잇달았다. 이 문화는 원래 1954년 홍산(紅山) 뒤쪽에 있어 '홍산후'(紅山後)라 하였는데 차즘 홍산후를 기념하여 '홍산문화'라고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1984년에 흙으로 빚은 여신의 얼굴상이 출토되었다. 랴오닝성 차오양시(朝阳市, 조양시) 뉴허량(牛河梁, 우하량) 여신묘(女神庙)로 중국 1급 역사 유물로 지정되어 랴오닝성고고연구소(辽宁省考古研究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2년 64건의 금지출국 전람문물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서안의 진시황제 무덤지역 역시 동이족의 문화이기에 발굴을 중단하고 동북공정을 서둘고 있다. 이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요하공정(遼河工程)은 중화인민공화국 동북부 요하지역의 역사와 현황에 관련하여 제시된 공정의 하나로 정식 명칭은 2003년 6월부터의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며 일명 뿌리 찾기 운동을 말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황하문명(黃河文明)보다 빠른 요하문명을 중화문명의 뿌리로 규정하고 동이족 역사를 뿌리로 하는 다음과 같이 동아세아의 유구한 역사를 정의하였다. (신석기/청동기 요령지역 문화와 주요 유적 발굴을 종합하여 1만 년전부터 지금까지의 기록을 위키백과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기원전 8000년 ~ 기원전 7000년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신낙 문화 유적(모계씨족의 정주 취락) 新樂 文化(신러) 랴오닝성 선양 시 북부 지역.
기원전 7000년 ~ 기원전 6500년 신석기시대 소하서 문화 유적 小河西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지역.
기원전 6200년 ~ 기원전 5200년 신석기시대 흥륭와 문화 유적 興隆洼 文化(싱룽와)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지역.
기원전 6000년 ~ 기원전 5200년 신석기시대 사해 문화 유적 査海 文化 내몽골 접경 사해 유역.
기원전 5200년 ~ 기원전 5000년 신석기시대 부하 문화 유적 富河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부하 유역.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4400년 신석기시대 자오바오거우 문화 유적 趙宝溝文化(자오바오거우) 내몽골 난하 계곡과 허베이 성 북부.
기원전 4500년 ~ 기원전 3000년 신석기시대 훙산 문화 유적 紅山文化(훙산) 내몽골 요동 하북 지방.
기원전 3000년 ~ 기원전 2000년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 소하연 문화 유적 小河沿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소하연 유역.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500년 초기 청동기시대 하가점 하층 문화 유적 夏家店 下層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맹극하(孟克河) 유역.
중국역사에 가장 길게 지속된 왕조이며 마지막 제국인 청나라도 한반도 백두산에서 자라난 누루하치가 세운 만주족의 국가이다. 중국의 성지로 장백산이라고 부르고 한반도와 접경하여 남쪽은 백두산이고 북쪽은 장백산이다. 중국 고고학계는 이미 한반도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문화가 황하문명보다 수천 년 먼저 발달한 사실을 인정하지만, 황하문명이 만주문명의 뒤를 따라 이루어진 사실을 외부에 발표하기를 꺼려한다. 발표하기 이전에 처음부터 중국문화며 중국역사라고 주장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