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도구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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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와 금속 도구의 발전
고고학자들의 최근 발굴보고에 태국에 농산물 유적은 15,000년전의 일이며 쌀농사의 유적도 9,000년전으로 추적되며 월남의 청동유물들은 6000년전으로 소급한다. 곡식을 갈아서 씨겁떼기를 벗기도 곡식가루를 만드는 둥근맷돌은 숫돌과 암돌사이에 마른 곡식을 넣으면서 돌리면 눌린돌 사이로 껍질이 벗겨진 곡식가루가 밖으로 밀려 나오기에 도릿개라고도 하는데 인도네시아 섬들의 고대유물들 중에 26,000년전에 사용되었으며 동남 아세아 국가들과 남북미 원주민들 생활에 필수품으로 최근까지 사용되어왔다. 이들 농사 도구는 에짚트와 서남아세아에서 12000년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 Eden in the East by Stephen Oppenheimer 1998
찰스힉함(Charles Higham)은 이들이 쌀농사를 지었으며 이곳에서 양자강 하구에 이르는 생활지역을 설명하였고 윌햄솔하임(Wilhelm Solheim)은 이들 농업문화는 해빙기(12,000‐7,000년전)이전부터 생활에 적용되었다고 주장했다.흙을 불속에 넣고 그릇을 구어만드는 석기시대 산업혁명은 동남아세아에서 12,000년전에 있었으며 서남아세아에는 9,000년전에 나타난다. 타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나라들은 유럽의 빙하가 녹아서 (12,000년전에서 7000년전사이) 바다의 수위가 오르기전에 육지로 연결되었으며 아스트로 에이시아팈(Austro‐Asiatic) 언어를 사용하는 아스트로네시안(Austronesian)이 살고 있었다. 이들 신석기시대 생활에 관한 연구는 여러학자들에 의해서 보고되었다.
고인돌을 세우는 신석기 시대의 생활을 관찰해보면 흙을 구워 만든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였고 소 개 되지 가축을 길렀으며 청동 금속도구도 사용하였다. 민무늬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 이전의 형태이며 정착된 농경시대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오래 동안 토기를 바닥에 놓지 않고 나무받침대에 올려놓았기에 처음에는 밑 모양이 뾰족하였다가 토기의 생산이 흔해지면서 바닥에 내려놓아 토기 밑이 편편해지기 시작하였다. 청동 금속도구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토기제작에 빗살무늬가 나타나고 세계
에서 빗살무늬가 가장 흔하게 발굴되는 지역이 한반도이다.
빗살모양의 무늬 새기는 틀을 그릇 바깥 면에 짤막한 줄을 누르거나 그어서 새겼기에 통칭 ‘빗살무늬’라고 부른다. 이러한 빗살무늬는 질그릇에 따라 여러 모습을 나타내는데, 한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짧은 줄을 한쪽 방향으로 또는 서로 방향을 엇바꾸어 가면서 그려진 생긴 것이다. 그릇 종류에는 독모양의 크고 작은 항아리, 단지, 대접, 보시기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진흙에 모래만 섞은 것과 석면, 활석부스러기 같은 것을 섞은 것이 있으며 갈색이 기본을 이룬다. 대체로 섭씨 600~700°의 열을 가하여 구운 것인데, 땅을 판 구덩이에서 별다른 특별한 시설 없이 장작불을 피워도 만들 수 있다. 처음에는 제사 때 제기로 사용하다가 생활의 저장용, 취사용, 식기로 각각 사용되었던 듯하다
한반도에서 시작된 빗살무늬 토기는 중국 둥베이[東北]지방과 옌하이저우[沿海州] 등 주변일대에 널리 퍼져 시베리아지역을 지나 북유럽 일대에 캄케라믹(Kammkeramik : 櫛文土器)로 분포된 상황을 불 수 있다. 문양의 단순성과 방사성 탄소연대측정치로 보아도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가 가장 일찍 시작된 듯하다. 신석기시대 유적이 분포된 곳은 동북해안지방·서해안지방·동해안지방·남해안지방의 4곳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재료(바탕흙)·색깔·두께·굳기·무늬 및 토기 모양(기형) 등이 있다. 한강 중류의 암사동유적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래질의 바탕흙에 반쪽 계란 모습을 했으며 생선뼈무늬들이 주로 그려진 그릇을 보면 해양민족의 산품이며 크기는 쓰임새에 따라 3가지 정도로 나누어진다. 황해도 지탑리 유적이나 함경북도 서포항· 농포동 유적 등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찰 흙질에 납작한 밑을 가진 토기들이 등장하고 있다. 강원도 오산리지방으로 가면 납작밑에 눌러 찍은 무늬를 주로 쓴 찰흙질토기들이 나타난다. 남해안지방으로 가면 이른 시기부터 납작밑과 둥근밑(뾰족밑 포함) 토기가 공존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토기모양도 다양했을 것이다. 이곳에는 민무늬토기들이 많으며, 특히 덧무늬토기들이 출토되어 가장 일찍 시작된 듯하다. 한반도 남단에서 민무늬 토기와 밑 끝이 달걀 모양의 단순한 빗살형태로 초기적인 토기형태가 시작되고 한반도 동북지역과 시베리아로 갈수록 밑이 납작하고 복잡한 빗살형태의 후기적 특징을 보임은 빗살무늬 토기가 한반도 남단에서 시작되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한반도전역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는 그 종류 및 문양, 수량 등에서 가장 뛰어나다. 한반도를 비롯하여 시베리아, 중국, 일본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한반도 지역에서 다량의, 그리고 다양한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될 뿐 아니라 그 제작 시기가 다른 나라의 것보다 오랜 것이 많다. 한편 남해안 지방의 덧무늬토기들이나 오산리의 토기들은 빗살무늬토기보다 이른 것으로 BC 8000 년경으로 보고 있다. 일본에서 발견되는 토기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은 물론이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칼의 원형(原型)인 돌단검(石短劍, 磨製石劍)이 가장 많이 나오고 있다. 만주지역 고조선의 청동기 문화유물은 4,400년전의 것으로 발굴되었고 황하지역 청동기 문화유물은 4200년전 것이다. 남한에서 나오는 돌단검에서 금속 청동 단검으로 변형된 가장 초기적인 모양이다, 돌단검의 칼날(劍身)과 칼자루(劍把)가 함께 이어 졌다. 여기에 다시 또 다른 칼자루가 덧붙여지면서 만들어진 형태의 변화를 보게 된다. 비파형 단검은 바로 한반도의 남해안 지역에서 먼저 만들어지고, 그 후에 한반도 인들의 이동으로 만주에서 많이 생산된 듯하다. 영국과 유럽 해안지대에서 발굴된 직인검은 남한에서 만들어진 돌단검과 형태가 비슷하다. 분명 고인돌과 그 고인돌에서 나오는 유물들을 보면 유럽의 고인돌과 유물들은 한반도의 해양민족의 이동에 따라 퍼져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KNN방송에 한반도에서 유럽에 이르는 7개국 30개 지역의 고인돌 취재를 통해 고대 해(환.한)민족을 비롯한 해양 민족의 활발한 해양 활동을 인류 고고학적으로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세계에서 한반도 남단에 가장 많이(20,000) 모여 있으며 해안선 따라 동남아세아(10,000)와 서유럽까지 연결되어 모두 60,000여 곳에 분포되었다. 아프리카를 떠나 한반도에 이른 현대 인류가 해안선 따라 동쪽으로 남미에 이르고 서쪽으로 서유럽까지 해안선 따라 이동한 유적으로 보인다. (사진은 고인돌의 세계분포와 한국 대장간의 모습)
조선시대 화가 김득신의 그림 대장간에서 보이는 모습은 청동금속 도구가 사용되는 모습이며 처음에는 선사시대의 산업혁명이었다. 나무기구를 사용함은 모계사회의 가구였지만 금속도구가 사용되면서 산업이 발달하고 남자들의 사회적 기능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자연석을 편편한 석판으로 다듬게 되고 큰 돌을 6면 4각 돌로 만들어 운반하기 쉬워진다. 조상종교의 목관과 옹기 묘를 대신해서 석관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모계사회의 수집형 농경에서 금속연장으로 땅을 파서 산업형 농경으로 진보하는 부계사회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고인돌시대에 동아세아의 산업혁명은 인류의 역사를 돌연변이처럼 새롭게 시작한 듯하다.
인류의 선박건조 기술은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구어 먹는 일처럼 일찍 시작하였다. 물이 있는 곳에서만 살 수 있는 인류는 나무들을 묶어 물에 띄우기 시작하고 대나무를 엮어 배로 사용함은 지금도 동아세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금속 도구가 있기 전에 만들어진 배는 짚배다. 한국 주택에 초가지붕(아래 사진)처럼 해변의 농가에는 가을 곡식거둔 후에 남는 지푸라기나 갈대로 지붕을 씌웠다. 지푸라기와 갈대를 엮어 배를 만들었음은 한국의 제주도를 비롯해 동남아세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고 동남아세아 문화와 연결된 남미의 페루에서 흔하게 보는 인류역사에 가장 오래된 선박건조 방법이다. 짚배가 각 대륙에 남아있음은 금속시대 이전에 각 대륙을 연결하는 항해시대가 있었음을 상상하게 하게 한다. 한국의 초가지붕과 짚배는 석기시대 인류의 항해기술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금속기구로 나무를 조작하기 이전의 석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전해오는 주거건물과 선박 건조방식이 한반도에 잘 보존 되었다.
석기시대부터 선박을 건조하고 계절 따라 기상기후 변화와 해류의 유동방향을 이해하기에 원양항해를 할 수 있었다. 사계절에 익숙해진 동아세아 고대인들은 철새들처럼 장거리 여행에 익숙하였고 지금의 에스키모인들 보다 더 오랜 기간을 금식하고 동면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동남아세아 섬나라들에서 적도선에 병행하는 해류와 풍향을 이용하여 태평양을 횡단하고 남아메리카 태평양연안(페루)에 도달할 수 있는 지구력과 생존능력을 갖추었었다. 동아프리카 인들이 뉴기니아에 살고 폴로네시안들이 남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현상은 적도선 해류의 연결이다. 동아세아인들이 사모아섬과 통가 섬나라에 거주하기 시작함도 이때부터인 듯하다.
현대의 지식인은 유럽의 고인돌이 외계인(外界人)이 만든 유적이라고 말하고 지중해 문화는 아틀란티스(Atlantis)에서 왔다고 상상하는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 때가 왔다. 영국의 스톤핸즈(Stonehenge), 프랑스 브르따뉴(Bretagne) 지방, 스페인 등지에 흩어져있는 고인돌의 건축 양식은 한반도의 초기적인 양식에 비하면 시대적으로 훨씬 후기적인 진보된 모습이다. 유럽의 고인돌 연대가 지금으로부터 4-5천 년 전에 불과하다면 한반도 고인돌 연대는 8천년이전까지 올라간다. 동아세아의 신석기 해양민족이 해안선을 따라 서유럽 해안에 이주해 들어간 여러 곳에는 동아세아인의 언어와 풍습이 남아있다. 그러한 고증은 동아세아의 역사지식이 보급되면서 더욱 많이 나타날 것으로 추측한다.
석탄불의 고열에서 생산되는 철기문화도 만주지역에서 시작하고 자석의 철침이 북을 겨냥함을 일찍부터 알게 된다. 낮에는 해와 그림자를 보고 밤에는 북두칠성의 위치로 방향을 인식하던 동아세아의 해양민족이 나침반을 구비하게 됨은 동아세아의 문화를 뱃길 따라 세계 각 대륙에 전하는 능력을 갖기에 이르렀다.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의 생활변천과 문화발달은 오랜 세월을 거쳐 크게 달라졌다. 원시시대의 자연식품 수집에 의존하던 모계가정에서 생산 농경의 부계가정으로 변화한고 민무늬 토기에서 빗살무늬 토기로 산업화한다. 동아세아에 누워있는 여성 상징 고인돌에서 서있는 입석, 남성 상징 고인돌로 바뀌었다가 두개의 선돌위에 누운 돌(지붕돌)을 얹는 신전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없는 선사시대의 진화과정이다. 현대 인류의 가장 일찍 정착한 한반도에 선사시대의 변화가 한곳에서만 일어남을 보게 된다. 곧 이어서 남부의 흙산(Mound)문화가 고인돌 문화와 연합하여 돌산(피라미드)문화가 태어남도 이곳에서 본다.
지난 100,000년 동안 지구상에 기후변화를 보면 10만 년 전부터 8만 년 전까지 현재와 같은 더운 기후가 계속되었다가 7만 년 전부터 지구의 기온은 추어져서 유럽대륙, 아세아대륙의 서북편, 그리고 북미대륙에 빙하기가 시작된다. 그때부터 12,000년 전까지 빙하기가 계속되는 동안 바다물의 수위는 100미터에서 300미터가량 낮았기에 지금의 동남아세아 섬나라들(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은 아세아대륙의 한부분이였다. 특히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사이에 인도만큼 큰 대륙(Sundaland)이 있었다. 이제 바다 밑에 놓인 대륙에 숨겨진 고대동아세아 문화유적은 앞으로 전개되는 해저탐험에 크게 기대된다. 이대륙이 바다에 잠기는 과정 중에 그 문화는 동쪽으로 폴리네시아(Polynesla)에 도피하였고 그중에는 적도선의 해류를 따라 남아메리카에 도착하여 올맥(Olmec)문화가 시작되고 후에 동아세아 인들이 남미에 이르는 항로개척이 된듯하다. 올맥 문화는 남미에서 시작하여 중미에 나타난 전례 없는 고도의 문화이며 올맥 인들의 얼굴은 잎술이 크고 눈이 크고 넓은 코를 가진 포르네시안의 모습이며 하와이 원주민의 모습에 방불하다.
이들 동남아세아에서 인도에 정착한 민족은 드라비디안(Dravidian)들이며 북으로 해안선 따라 이동한 민족은 중국의 동해안과 한반도에 정착한 신석기시대 사람들이며 후에 만주, 몽골, 티베트에 정착하여 유목국가들을 세운민족이라고 본다. 아프리카에서 유럽대륙으로 7만년이전에 진입한 인류는 빙하기가 시작되면서 생존하지 못하였으나 동남아세아에서 기후의 변화에 적응한 후에 서남아세아에 정착하였다가 해안선 따라 유럽에 이주해 정착한 민족은 오랜 동계절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검은머리는 금발머리가 되고 파란눈 하얀 피부는 태양열과 자외선에 약하고 해빙기를 지나는 9,000년 전부터 아세아문화에 접하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뒤늦게 서남아세아에 이주해온 민족은 인구밀도가 높은 동남아세아에서 이주해온 민족들과 합하여 아랍인들이 되었고 내륙으로 진출하여 동아세아와 동남아세아에서 이주해오는 민족들과 합하여 중앙아세아인들이 되어 동아세아 인들의 압력을 받아 인도 북부에 이주하고 후에 중국 한족이 되어 중국의 주나라 때 중국동부에 이주하여 원주민과 결합한 듯하다.
소와 말이 끌어가는 수레
구석기 시대 농경은 서남아세아와 유럽에서 빙하기가 풀리면서 시작되었기에 1만년 전 경으로 보지만 동남아세아는 그보다 훨씬 이전 2만년 전부터로 상상하지만 아직 고고학적 증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동남아세아에 쌀농사는 9,000년 전의 발굴이 나타나지만 농기구 사용과 소의 노동력과 바퀴 이용은 누애 고치의 비단처럼 적어도 서남아세아보다 수천 년 앞서서 발전하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
소가 쟁기를 끌어감은 동남아세아에서 시작되었고 통나무를 굴려서 거석을 운반하는 생활도 동아세아에서 시작하였기에 바퀴의 역사는 동남아세아에서 세계의 언어가 시작하듯 인류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기슬인 듯하다. 인력거, 달구지, 마차, 전차, 등의 수레의 역사는 신석기시대 농경생활의 발달과 연결된다. 인력거는 사람이 끌어가는 두 바퀴의 수레이다. 수레의 가장 먼저 시작한 모습이며 동아세아에는 지금까지도 이용하고 있다.
동남아세아의 농경이 동아세아에 이르렀을 때 유목민의 말과 개의 생활과 혼합하면서 인류의 산업이 발달하고 생산에 따른 상업이 발달하여 금전거래가 시작하고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한 듯하다. 말과 당나귀 사이에 노새가 출현한다. 노새는 세상 짐승 중에 기운 좋기로 소문난 말 어머니와 끈기로 이길 자가 없는 당나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다. 게다가 나는 운수 좋게도 부모의 좋은 점만 닮아 기운이 좋고 인내심이 강하다. 외모가 아버지를 닮아 목이 짧고 우스꽝스럽게 생기기는 했으나 체격 조건을 보자면 나무랄 데가 없는 일꾼 말이다.
노새는 조금 춥거나 더운 날씨를 가리지 않고, 가파른 산을 넘고 길고 긴 행군을 하라 해도 잔병치레 없이 해낸다. 칭기즈칸이 유럽을 정벌하러 몰아간 기마병이 노새들이요.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타고 넘은 게 백마가 아니라 실은 노새였다. 하지만 수 천년을 살아오면서 노새가 자식을 낳은 일은 없었다. 노새는 부모보다 훨씬 수명이 길어 50년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새끼가 나고 크는 것은 보지 못한다.
소가 끄는 두 바퀴 수레에서 네 바퀴 수레로 발전하면서 농업은 산업화되고 바퀴의 축에 금속을 사용하면서 만주에서 시작된 바퀴 두개를 말이 끄는 수레가 나타난다. 소보다 속도가 빠른 말 수레가 나타나면서 괴력을 가진 전차가 무기로 나타난다. 진시황제 용갱에서 보여주는 전차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제국을 세운 기동력의 상징이다. 로마제국보다 250년 전에 제국을 세운 진시황제의 기마병과 전차를 보면 동아세아 문화가 지중해 문화보다 항상 앞서왔음을 상상할 수 있다.
기원전 700년에 기록된 손자병법에 경전차 치거(馳車)는 말 4마리가 끄는 공격용 수레이며 10만 명의 병사들을 대적한다고 했다. 치거 한대에 장교 한명, 기마병 10기, 전투요원 5명으로 구성된 전투부대이고 취사병 2명, 장비관리 1명, 마구간 관리와 사육 2명으로 말 4마리와 21명의 병사로 치거 소대를 이루었다. 중전차 혁거(革車)는 양식과 무기를 운송하는 수레이며 가죽을 덮었기에 혁거라고 한다. 소 1마리가 끄는 두 바퀴의 수레이며 장교 1명, 보병 10명, 비전투 요원 3명으로 구성된 혁거 소대라고 기록되었다.
1974년 이제까지 4개의 갱도가 발굴된 중에 8천 여점의 병사, 전차 130개, 말 520점, 기마병 150점이 발견됐다. 군인 외에 관료, 곡예사, 궁사, 음악가의 모습도 나왔
다. 1호 갱에서만 진용 6000구, 전차 40대 발굴. 제 2호 갱에는 기병과 근위대의 용병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BC 246년 시작된 지하 궁전으로 설계된 진시황릉 건축에 70만 명이 동원됐다고 기록되었다. 수은이 흐르는 강 100여개, 수십 개의 망루를 가진 도성에 보물과 병사. 완공된 후엔 도굴을 막기 위해 인부들을 생매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진시황릉은 높이 76미터 넓이 350 평방미터에 이르는 흙으로 조성된 피라미드로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을 받았다. 이러한 전술과 기동력을 갖춘 동아세아의 훈족 이 600년 후인 서기 453년 아틸라 장군이 로마를 정복하고 유럽을 지배했음은 만주와 몽골족이 기마병과 전차의 힘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절대적 강자였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후에 동유럽의 터키와 헝가리 민족을 남겼으며 북유럽의 바이킹 역사와 핀란드 족을 남긴 듯하다. 고대 상나라 때도 전차군단이 사용된 기록이 있다.
삽살개 모양과 사자 모양
동아세아 유목국가의 건축양식에 궁전 앞에 삽살개 조각을 세우는 모습이 있었고 그 이후에 알렉산더 대왕의 사자조각을 수호신으로 문 앞에 세우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동아세아의 옥돌 조각은 금속이 돌을 지배하는 혁명이었다. 동아세아의 조각 능력은 인도 드라비디안의 목조 조각으로 성장하고 동아세아의 목조건축은 지중해의 석조 건축의 어머니가 되었다.
진시황제가 주나라를 이어 통일제국을 세울 무렵에 요동지방에 유목국가 중에 하나인 예치족은 갠지스강 유역에 이주하여 쿠샨국을 세우고 팽창하여 북부인도 대부분과 동유럽에 카스피해까지 이르는 영토를 확보하는 대쿠샨제국을 건설하였다. 후에 중국의 당나라와 그리고 유럽의 로마와 교역하여 인도에 불교문화의 절정을 이루고 인도역사에 통일제국역사가 시작된다.
동아세아의 금속 기구는 인도의 조각예술을 부흥시키고 인도의 조각예술은 페네키안들에 의해서 그리스에 전해저서 그리스의 조각예술이 발달된 듯하다. 인도의 쿠샨제국시대에 불교예술이 극치에 달하고 로마국이 개발한 통로를 통하여 쿠샨국의 불교조각미술은 아프리카와 홍해연안에 석굴조각으로 연장되었다. 동아세아 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인도의 쿠샨제국은 지중해와 동아세아를 연결하는 계기가 되고 인류아동기 문화의 절정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