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고구려 선조와 백제의 선조

원래 사이트에서 비공개였던 글입니다.

동아세아의 농경문화와 유목문화는 유럽과 북미대륙이 빙하기를 격는동안에 이미 동남아세아 온대지방 전역에 분포되었기에 다른대륙 어느부분보다 수만년을 앞서 문화와 문명이 발달하였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지성은 빠르게 성장하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졌고 묻고 싶은 의문도 많았기에 이웃과 대화는 활발해져서 인류의 부락사회가 빠르게 도시국가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도시국가에는 왕위를 중심으로 주권이 있고 각기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국민이 있고 그들이 소유한 영토가 있었다. 도시국가들 사이에 협조와 경쟁이 있었고 때로는 알륵이 있었다. 아이들이 쉽게 필요에 따라 환경에 적응하듯이 협조와 분쟁은 더 자주 바뀌었다. 알륵을 피하고 협조하는 관계로 연결된 여러 도시국가들은 왕을 선출하여 작은 왕국을 세우는 때였다.

중앙아세아 유목민들이 인도의 동부에 갠지스 강과 서부에 인더스강 유역을 통하여 북인도 일대로 이주해 들어가 원주민 드라비디안들을 정복하고 동화되기도 하고 남쪽으로 축출하는 현상은 4천 년 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온대지방에 선진문화와 문명이 열대지방에 후진민족지역으로 이주해 들어가는 현상이며 아프리카 나일강 유역에도 동아세아인들이 아랍인들과 흑인들을 점령해 들어갔다. 이때 동아세아에도 내륙 유목민들이 해안농경국가들을 침략해 들어가는 동안 이들 해안 국가들은 세계에 여러 대륙의 해안지대로 분산되었고 동아세아의 문화와 문명도 세계적으로 분포되었다. 동아세아에서 동인도에 들어온 금속문명은 석굴조각문화로 발달하였다. 동아세아의 금속문화, 용의종교, 인도의 조각문화 등은 그 후에 서남아세아에 페네키안 문화로 이어진 듯하다. 후에 바빌로니아문화는 동아세아 영향으로 유럽문화의 기반이 된 듯하다.

최근역사에 이르면서 작은 왕국들 사이에 전쟁을 하여 통일하거나 혹은 제후들이 제왕을 선출하여 제국을 세우는 때로 이어진다. 동아세아에 나타난 제국은 하나라 이전에도 제국조건을 갖춘 국가들이 오랫동안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지금까지 역사문헌 기록으로 밝혀진 제국은 하, 상, 주, 진, 한, 수, 당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반도와 왜나라, 요동과 산둥 반도들을 지배했던 백제대국이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백제 이전에 있었고 그 이전에도 해안제국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동아세아에 제국들은 이미 수 천 킬로미터에 연결되는 군사용 고속도로 만리장성이 초원과 농원을 가르며 한반도에서 몽골을 연결하는 큰길을 만들었고 만주와 서안 일대에 피라미드를 세우며 황하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대운하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그 규모와 기술면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수십 배를 능가하는 인류문명의 거작들이 이미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하나라와 상나라가 자리한 양자강과 황하의 문화는 매소포타미아와 나일강의 문화를 갖어왔으며 지중해에 나타난 미노안, 미케네안, 유테인, 팔래스티안, 페니키안들의 문화도 동남아세아에서 서남아세아와 지중해로 연장되는 문화와 문명의 줄기다. 동아세아의 유목문화는 중앙아세아를 거쳐서 동유럽에 시씨안 문화로 연결되어 커다란 고분들을 만들었음을 볼수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문화가 있기전에 상나라를 비롯한 동아세아에 여러나라의 문화가있고 그리스의 알렉산더대왕이 서남아세아를 정복하는 능력도 주나라를 비롯한 동아세아의 유목국가들이 이미 동아세아에서 동유럽에 거치는 지금의 소련영토와 중국영토를 지배하는 능력에서 그리스에 전해진 문명의 한부분이다.

불교문화는 백제가 동성왕 때 산서성에 북위를 점령하고 북위는 불교사찰 윈강 석굴작업을 중단하고 황하남부 낙양에 용문석굴로 옮겼다. 이무렵(494년)에 북위의 불교문화는 한반도 남단 백제에 전해지고 후에 신라와 일본에 전해졌다

주거생활의 발전과 도시의 형성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만으로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한반도 전 지역에 고루 퍼져 있으며, 주로 큰 강 유역이나 해안 지역에서 발견된다. 연대가 가장 이른 곳이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다.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간석기와 낚시, 바늘 등의 뼈 도구가 있다. 그리고 빗살무늬 토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신석기시대주민들은 식량자원이 풍부한 큰 강가나 바닷가에 정착하여 살았다. 신석기시대의 집은 동굴을 이용하거나 바닥에 돌을 깔고 만든 것도 있으나 보편적인 형태는 움집으로 해안가 언덕이나 평지 위에 지었다. 움집은 지름이 4∼6m되는 원형이나 네모꼴의 구덩이를 50∼60cm정도 파서 바닥을 만들고, 바닥에 화덕 등 필요한 내부시설을 한 뒤 지붕을 덮은 것으로 별도의 벽체시설이 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꽂은 집이다.

바닥에는 진흙을 깔거나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풀이나 짐승 가죽을 깔것으로 하고 지붕은 움구덩이 주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서까래의 다른 한 쪽 끝이 중앙에 묻히게 하여 고조를 형성한 후 나뭇가지나 갈대 등의 마른 풀을 덮어 만들어 원추형이나 사각추형 이었다. 계단이나 경사면을 만들어 비가 내려도 물이 흘러들지 않도록 했다. 토기를 묻어 만든 저장시설도 있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집 내부를 적절히 사용하여 다목적으로 이용했다. 보통18㎡ 크기의 집을 짓고 평균 4∼5명으로 구성된 가족을 단위로 모여 산 듯하다. (아래 그림은 구글에서 퍼왔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짐승과 물고기를 잡아먹었으며, 식물의 열매나 뿌리도 채집하여 먹었다. 또, 계절에 따라 이동 생활을 하면서 동굴이나 강가에서 막집을 짓고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뼈낚시, 그물 등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였고, 돌창, 돌화살 등으로 사냥을 하였다. 한편, 식물의 열매나 뿌리를 채집하여 먹는 생활을 하다가, 차츰 농사를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되면서 정착 생활이 더욱 길어졌다.

농경 생활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돌괭이로 땅을 일구고 조, 피 등을 재배하여 돌낫, 뼈낫 등으로 추수를 하였으며, 돌갈판에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또, 가락바퀴로 실을 뽑고, 뼈바늘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다. 씨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나아가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즉, 이들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선석기시대 저습지 및 패총유적에서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8000년 전 통나무배가 출토됐다. 4m를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철기나 청동기 같은 금속기가 발명 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대단히 치밀하게 가공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했다. 배를 만들기 위해 당시 사람들이 통나무를 군데군데 불에 태운 다음 돌자귀 같은 날카로운 석기를 이용해 깎아내고, 다시 갈돌과 같은 기구로 표면을 정리하는 방식을 구사했음이 드러났다. 이를 증명하듯 선박 곳곳에는 불에 그을려 가공한 흔적인 초흔(焦痕)이 발견됐다.

대나무나 통나무를 묶어 물에 띠워 배를 만들어 타고 고기잡이를 하였다. 중국 계림에 리라강 고기잡이는 어부가 가마우지 다리에 묶었던 줄을 풀어 물속으로 출동을 시킨다. 줄이 풀린 가마우지는 순식간에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더니 잠시 후, 물 밖으로 불쑥 솟아올라 어부 앞으로 달려가 부리를 내밀며 머리를 조아리고 어부는 가마우지 입 속에서 한 뼘도 넘어 보이는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쑤욱 잡아 빼낸다.

가마우지를 며칠 동안 굶겨서 배고프도록 만든 후 큰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도록 목을 끈으로 묶어 놓은 다음 강 위에서 가마우지를 풀어 놓으면 배고픈 가마우지는 허겁지겁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순식간에 고기를 잡아 삼켜보려 하지만 목에 감겨있는 끈 때문에 뱃속으로 넘기질 못하고 주인에게 달려와 빼 달라고 사정을 하면 고기를 끄집어내주는 식으로 고기를 잡는다고 한다. 계림지역의 전통적인 가마우지 고기잡이 방법이다. 이러한 대나무 배와 고기 잡는 방법은 일본에서도 불 수 있기에 한국에서도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상고시대 생활 방법의 모습이라 추측된다. (구글에서 보여진 아래 사진)

씨족 사회가 성장하여 마을을 이루고 돌담을 쌓아 둘러서 마을을 보호함은 작은 도시를 형성하는 처음 모습이었다. 이들 사회에서는 경험이 많은 부족장이 농사, 사냥 등 생산 활동을 지휘하였다. 마을이 커지면 제후국으로 성장하고 도시국가와 왕의 지위가 형성된다. 돌담은 성곽을 이루고 왕의 주거지는 궁성으로 성장하게 된다. 거기에서는 노예를 제외한 자유민이 정치를 행하며 또한 귀족의 총회·정치·사교·교역 등이 전개되었다. 원시 사회에서 고대 국가에의 과도기에 나타난 정치 형태이다.

광대한 피정복민 지역에 왕실의 자제, 일족 및 동맹부족 출신자들을 파견하여 제후로 분봉, 배치하고 평민의 감시와 주변 이족의 반란에 대비하였다. 이런 제후에게 봉지를 분봉했던 봉건제도에는 당연히 제왕이 천하의 모든 토지와 인민을 소유한다는 왕토사상이 전제하게 된다. 봉건제후의 관계는 왕실인 대종에 대한 봉건제후인 소종의 혈연적 관계를 기초로 한 원래 부족사회 내에서 씨족조직이 발전, 변화되어 체계를 갖춘 종족제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의 성장은 세계역사의 첫 제국이 동아세아에서 탄생하기에 이르고 한결같이 적용되었던 도시 성장의 원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