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의 시작과 분포

 

모든 동물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듯 종교는 아기가 엄마에게 의존함에서 시작한다. 사랑이 있기에 목숨이 살고 있다. 사람은 가족과 모여 살면서 가족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의식을 배우고 가족의 혼을 섬기게 되어 조상종교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가족이 모여서 우리의 조상 영전에 제사장을 차리고 향불을 피우고 엎드려 절하였다. 의식을 마친 후 차려놓은 음식을 맛있게 나누워먹던 때도 즐거웠다.

그 옛날 아이들이 자라며 땅 위에 사는 모든 목숨이 서로 의존하고 함께 사는 큰 가정임을 알게 되고 어른이 되어 그 큰 가정의 부모를 찾으려 했다. 자연의 주인을 찾아 태양신을 숭배하는 자연종교가 시작하고 삶의 주위에 모든 생명의 혼을 존중하는 의식을 배웠다. 무서운 맹수들이 날뛰는 어두운 밤을 깨워 밝은 새벽을 데려오는 기적은 태양의 위대함을 알았고 모근 생명이 태양의 기를 받아 살아있음을 느끼고 태양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 뜨는 동쪽을 바라고 아프리카를 떠나 해변 길 따라 동쪽으로 이주해온 현대 인류가 우리의 조상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새벽에 일어나 동쪽에서 뜨는 해를 보고 엎드려 기도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마을 느티나무에 색종이 줄을 두르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제사지내던 모습도 생각난다.

어렸을 때 형제 중에 큰길 수챗구멍에 빠져서 파상풍에 걸린 일이 있었다. 병원에 찾아갔을 때 의사는 파상풍이라는 병으로 치료하는 약이 없다고 집에서 간호하라는 처방뿐이었다. 할머니를 따라 한약방의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환자의 몸을 음양오행으로 설명하고 한약 다섯 첩을 싸주었다. 환자는 체열에 부대껴 헛소리하고 온 집안이 근심 가득히 침울했다. 약을 세 첩 대려 먹은 사흘 후에 환자의 피부색이 밝아지고 열도 내렸다. 다섯 첩을 마저 대려 먹은 일주일 후에 회복하여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 의사는 현대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놀랐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끔 우리를 데리고 점쟁이를 찾아가 갔다. 가족의 생일을 말하고 운수를 물었다. 점쟁이도 음양오행 풍수지리를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음과 양은 밤과 낮, 여자와 남자, 물과 불, 사물의 대조를 설명하고 오행은 동서남북 사방과 중앙으로 다섯을 나누어 생명과 환경을 함께 설명하는 옛 사람들의 믿음이며 과학의 시작이었다. 한약방 할아버지가 생명과 몸의 구조를 음양오행으로 나누어 보듯 점쟁이도 사람과 자연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음양오행으로 설명하였다.

할아버지 책장에 주역(周易)이라는 책이 있었다. 3천 년 전에 선인들에 의해 쓰였으며 2천6백 년 전에 공자가 즐겨 읽었다고 전한다. 아버지는 주역이 유학(儒學)의 오경 중 하나로, 세상의 변화에 관한 원리를 기술한 책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음양오행의 사방을 다시 여덟 방향으로 나누어 팔괘로 표시하였다. 우리나라 태극기는 중앙에 음과 양이 동그랗게 그려졌고 네 모퉁이에 사괘를 표시하여 음양오행을 팔괘로 나타낸 도표이다. 주역은 여덟 괘의 의미마다 여덟 가지 더욱 자세한 시공간의 상황을 설명하며 하늘과 땅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경우를 64 경우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고구려 고분 내부의 벽화는 천정에 해와 달. 북두칠성을 그렸다. 주위 사방을 오행의 상징으로 동쪽에 청룡(靑龍), 남쪽에 주작(朱雀), 서쪽에 백호(白虎), 북쪽에는 현무(玄武), 그리고 중앙의 시신을 황금색으로 장식하였다. 흑백 삼원색으로 동서남북 사계절을 이루었고 작은 우주를 지어 생명의 환경을 이루어놓은 지혜이다. 음양오행은 조상종교와 자연종교의 융합으로 후에 유학(儒學)으로 이어져서 동아세아의 도교(道敎)와 유교(儒敎)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문화는 동아세아의 가장 오랜 부분을 순수하게 지켜온 기록이다.

최근에 사람의 유전인자를 연구하고 세계 인류의 혈연을 발표한 학설을 보면, 고구려의 선조(혈연학 M174)는 5만 년 전부터 만주 요하지역에 머물러 겨울 계절에 적응하기 시작하여 내륙의 몽골과 티베트에 이주해 들어갔다고 한다. 백제의 선조(혈연학 M130)는 4만 년 전부터 북미대륙을 지나 중미에 마야문화와 남미에 페루문화로 연결된다. 한편 고고학자들은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이 만주 요하지역에 홍산 문화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우리 민족의 핏줄은 현대 인류가 인도양과 태평양을 감고 돌아 아프리카에서 남아메리카에 이르는 대동맥의 줄기이다. 요동반도 지역은 동아세아 역사에 만리장성의 시작이고 아세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비단길(Silk Road)의 시작이다. 이 지역은 농경민과 유목민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종교가 성장한 곳이다. 인류 혈연과 세계의 문화, 문명, 정치, 역사, 등 통로의 교차점이다. 동아세아 역사에 상나라 문화는 동이족으로 알려진 우리 선조의 문화이고 3,080년 전에 중화민족의 주나라가 세워지는 때까지 세계 각 대륙에 금속문명과 피라미드를 세우는 문화를 전한 듯하다. 중국 동해안에 백제의 선조는 중국 산둥 성에 제나라를 유지하며 춘추전국시대의 문예부흥을 불러와 종교, 철학, 과학의 파도가 세계 각 대륙에 전해지게 된듯하다.

동남아세아의 원시자연종교는 동아세아의 천체, 선조를 숭배하는 도교와 동인도의 흰두교 형태로 수 천 년의 기반을 조성해왔다. 동아세아의 제후국이 천자국인 제국체재로 발전하면서 유학의 성장으로 유교가 나타난다. 도교와 제국주의 사상이 동인도에 전해져서 제국주의 종교가 결성되었다. BC600 년에 석가의 불교가 시작되었다. 인도의 불교는 일찍부터 동아세아의 종교처럼 경전을 만들어 생활의 기준을 세우고 자연의 질서를 설명해왔다. 불교가 왕성하게 서인도에 전해지자 지중해의 그리스 왕들이 인도와 동아세아의 불교사찰에 찾아와서 불교승려로 수련하고 아세아의 철학과 문화를 배워갔다. 이 사실은 중국과 인도의 불교기록에 동시에 나타난다. 600년 후에 기독교가 탄생하였기에 초기기독교인 천주교와 불교는 공통성이 많다. 유태교는 구약의 종교이며 다시 600년 후에 구약에서 회교도가 시작됨도 세계종교의 뿌리가 황하와 갠지스강 유역에 있음을 보여준다.

인도 동부의 갠지스 강에 정착한 동아세아 종교는 불교의 석가 탄생을 맞이하게 되고 서인도의 인더스 강을 지나 600년 후에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 문화에 예수가 태어난다. 예수의 기독교가 설립된 이후에 다시 600년이 지나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가 태어나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끊임없는 분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유럽과 러시아 정통 천주교로 이어진 기독교는 1520년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계기로 서유럽에 개신교가 시작했다. 영국의 개신교가 미 대륙에 전해지고 미국의 경제력에 힘 얻어 기독교는 드디어 원래의 종교 고향 동아세아를 찾아왔다. 지구의 회전을 역행하여 고향을 찾아 온 현대종교는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이르렀다.

과학의 발달로 지구 위에 생존경쟁을 이겨낸 현대인류는 인본주의 사상으로 자연에 모든 목숨을 지배하는 주인이 된 듯 착각하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 “사람은 조물주의 걸작”, “신은 죽었다.”이라고 말하며 자연을 인간 위주의 환경으로 조작하고 있다. 함께 살아 온 수많은 동물들이 땅과 바다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숨 쉬는 공기와 마시는 물이 오염되고 있다.

인류는 종교와 해어질 수 없는 운명이다. 진리를 찾고 꿈을 이루려는 삶의 길에 인간과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에 의지함은 무기력한 아기가 엄마에게 의존함이니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동아세아에서 시작된 종교와 과학의 원점을 되찾아서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연을 보호하고 이웃을 돌보는 믿음의 바탕으로 돌아가야겠다. 음양호행처럼 자연과 인류생활이 균형을 다시 이루어 인류와 지구를 구제하는 미래가 있어야겠다. 이러한 노력은 세계평화를 가져오며 인류의 다음 세대를 건강하게 기르는 틀이 아닐까.

7.1 음양 오행

동아세아의 종교와 과학의 시작이다. 사람의 감각은 대조할 수 있을 때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여자가 있기에 남자가 있음을 알고 밤이 있기에 낮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시간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달이 있기에 변화 없이 빛을 내는 해가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음과 양의 의미이다.

오행은 사람의 주위에 구비된 자연환경을 다섯 요소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다음 도표에서 구분하듯 사람이 사는 집 주위에 봄과 가을이 대조되고 여름과 겨울이 대조되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바뀌며 농사짓고 사는 동아세아의 시공간을 설명하였다. 사람은 중앙에 위치하고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정하고 윤회하는 시공간을 정의하였다. 사람 사는 흙이 있고 물 불 나무 금속이 구비되어 삶에 필요한 재료를 설명하였다.

사람과 함께 사는 모든 동물들은 물속에 헤엄치거나 공중에 날거나 네발로 뛰어다니거나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짐승들로 구분하였다. 빛은 색을 만들어 보이는데 밝아서 하얗거나 어두워서 검거나나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이 섞여서 모든 색을 만들어 보인다는 설명이다. 우리 선조는 이미 삼원색을 알고 있었다. 오행사상은 룡과 금속이 동아세아의 생활에 종교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존재한 이후에 나타난 사상이다. 룡과 금속은 오랜 세월 이전부터 생활에 적용되어 온 것이다.

밤마다 헤아리는 별들에 관한 지식은 인류의 지식에 가장 일찍 발달해 왔다. 태양계의 별들 중에 지구와 함께 윤회하는 천문을 이해하고 있었다. 동아세아의 지성인의 지식수준은 인류 문명과 문화를 이끌어 나간 첨단의 위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계절여름가을겨울
방향중앙
재료나무금속 (돌)
생물청룡 (물고기)주작 (새)백호

(네발짐승)

현무

(뱀, 거북)

사람
파랑빨강흰 색검은 색노랑
수성화성목성금성토성

한 해를 12달로 나누고 한 달은 7날을 3번 지나면 달이 보름달이 되는 음력을 보며 살았다. 3달을 지나면 계절이 바뀌고 4계절을 지나면 한해가 바뀌는 땅위에 시간과 별의 위치를 관찰하며 연구하였다. 신석기 고인돌 중에 가장 초기적인 평바위에 북두칠성 일곱별의 성혈을 새겼음이 인류 지식에 7 숫자의 처음이다. 땅위에 왕국이 있고 하늘에 북극성의 천궁이 있고 바다에는 룡궁이 있다고 믿었음은 해양민족의 지식이었다. 우주의 공간을 7등분하고 각 부분을 다시 3등분하여 우주의 모든 공간을 28등분하여 관찰하였다.

음과 양 그리고 오행을 합하면 7 숫자가 된다. 7 숫자는 성스러운 상징이다. 도교, 불교, 기독교로 이어지는 7숫자의 유래를 보게 된다. 해, 달, 5행성의 7별들은 음양오행의 사상으로 이집트. 마야, 그리스, 로마에 전해져서 여러 가지 유사한 신화와 종교의식으로 나타난다. 음력 7월 7일에 견우성과 직녀성이 은하수에서 만나는 전설을 비롯해서 종교 경전에 자주 보이고 성경에도 400여 번 인용되었다. 오늘의 모든 종교에 성스러운 “7”숫자가 적용되고 있다. (아래 사진은 북두칠성 성혈을 보존한 바위)

동아세아는 모든 문명의 어머니 7장

1년을 12등분하여 12개월로 나누며 하루를 12등분하여 다시 겹으로 나누면 24시가 된다. 동아세아 십이지(十二支)란 율력 체계에서 사용되는 간지에서 뒤쪽에 붙는 열두 가지를 말한다. 앞에 붙는 십간이 하늘을 의미한다고 하여 천간이라고 하는 한편으로 십이지는 땅을 의미한다고 하여 지지(地支)라고도 부른다. 12 지지는 子(자), 丑(축), 寅(인), 卯(묘), 辰(진), 巳(사), 午(오), 未(미), 申(신), 酉(유), 戌(술), 亥(해). 띠로 나누어 보면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12부분의 주기가 이루러졌다. 동아세아의 황도대는 모두가 동물이다. 서양의 황도대는 조디악의 어원에 동물의 뜻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개는 동물이 아니다. 동아세아의 황도대가 유럽에 전해지는 동안 변조된듯하다.

7.2 동아세아의 석굴과 조각

동아세아의 대표적인 석굴들은 운강석굴, 용문석굴, 돈황 막고굴이 있다. 이들 석굴들은 불교가 전해진 이후에 세워졌지만, 그 이전부터 셀 수없이 수많은 크고작은 석굴들이 동아세아 전역에 흩어져 있다. 석기시대 고인돌문화에서 시작한 금속 연장은 나무를 조각하고 옥돌을 다듬고 돌벽을 파고들어 조각을 시작했다. 상상을 그림으로 그리듯 조각으로 표현했다. 많은 시간과 인내를 겪는 노력이기에 상고시대에 대부분의 예술이 그랬듯이 종교적 활동이었다.

자연 동굴을 찾아 생활하면서 벽에 그림을 그리다가 금속 연장이 나타나면서 동굴을 파고 들어가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동아세아 조각은 동인도로 전해지고 동인도의 목조 조각예술은 오래전부터 번성하였다. 조각예술은 인더스 강을 지나 서남아세아로 전해졌다. 나무 건축물을 돌조각으로 모방했기에 석굴조각은 그 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석굴 조각이 서남아세아로 전해지면서 석조건축이 시작하고 그리스의 석조건축은 동아세아의 목조선축 양식을 본받아 도릭 건축양식으로 시작하였다. 그 후부터 아이오닉 양식으로 그리고 코린시안 양식으로 발전한 듯하다.

동아세아의 종교 건축물은 전방후원(前方後元)의 배치로 시작된다. 음양오행에서 사방형은 땅 위에 사람의 공간이며 원형은 우주 신의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한반도 남부의 분묘와 일본의 분묘들이 전방후원의 모습이며 통일신라 석굴암의 평면이 전방후원이다.

인도의 종교사원과 동굴평면에서 전방후원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아세아 전역에 석굴조각이 유행하였고 중국의 돈황 막고굴(敦煌 莫高窟), 운강석굴, 용문석굴, 그리고 인도의 아잔타 석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석굴들이 산재한다. 그리고 한국의 석굴암의 예를 들 수 있다.

아잔타(Ajanta)는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 북서부에 위치한 불교 동굴 사원 이다. 29개의 석굴로 기원전 1세기경부터 약 1세기 동안 지어진 전기 동굴과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지어진 후기동굴이 있다. 인도의 풍속이나, 불교에 관한 것들이 풍부하고 다채로운 필치로 벽면만이 아니라 기둥, 대들보, 천장 등 광대한 공간의 구석구석에까지 묘사되어 있다. 무불상 시대의 것부터 대승불교가 발전하던 시기의 벽화까지 다양하다. 특히 연화수보살도가 유명하다. 8세기 들어 불교가 쇠퇴함에 따라 약 1000년 이상 방치되었다. 1819년 영국군 병사 존 스미스 (John Smith)에 의해 발견되었고 1893년 퍼어슨 (Person)이 조사 발굴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돈황 막고굴은 속칭 천불동(千佛洞)이라고 하는데 감숙성 하서주랑(河西走廊) 서쪽, 돈황시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고, 명사산(沙山) 동쪽 산기슭의 50여 미터 되는 높은 절벽에 층층의 동굴로 배열되어 있다. 실크로드의 가장 중요한 점에 위치해 있으며 동서방 무역의 중개점이다. 불교와 연관된 모든 종교, 문화와 지식이 융합된 곳이다. 막고굴 492개의 석굴과 조각상, 벽화는 현재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제일 완벽한 불교 예술 보물창고이다. 신라의 명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운강석굴은(云冈石窟)은 중국의 산서성, 다퉁 시 서쪽 20km에 있는 약 40개의 굴로 형성된 석굴사원이다. 북위의 사문통인 담요가 문성제에 상주해 460년(평화 원년) 에 무주천의 절벽에 시작한 소위 〈담요5굴〉( 제16굴, 제17굴, 제18굴, 제19굴, 제20굴)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제 5굴의 거대한 석불은 태무제의 폐불 이후 불교 부흥사업의 상징적 존재가 이었다고 한다. 운강기(460년-494년)로 불리는 중국 불교조각사의 금자탑을 이룬 시기의 작품들이다. 운강의 양식은 양주(감숙성)의 석굴에 그 기원을 가진다고도 할 수 있지만, 운강의 영향은 용문·천룡산·남북의 향당산 등 광범위한 석굴사원에 미치고 있다. 백제 동성왕의 침략으로 석굴작업은 낙양에 옮겨져서 용문석굴로 이어진다. 백제의 동성왕은 불교를 백제로 통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용문석굴(龍門石窟)은 중국 허난 성 뤄양 시의 남쪽 13km 아래의 양쪽 언덕에 있는 동굴 사원이다. 백제에 침공된 북위의 효문제가 산서성의 다퉁에서 뤄양으로 천도한 494년(태화 18년)부터 시작된다. 역사상 운강석굴의 중단을 이곳에서 계속해서 건설한 석굴사원이다. 전대인 선무제의 계획을 수용하여 산과 들을 깎아 만든 3굴 가운데, 실제로 북위에 완성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대부분의 석굴이 완성된 것은 당나라 초기였다. 그 외 북위 시기의 대표적인 석굴로는 연화동을 들 수 있다. 북위 멸망 후에도 석굴의 축조는 대를 이어 계속되어 북제로부터 수나라에 걸쳐 축조된 석굴이다. 본존 비로자나불의 얼굴은 당시 이미 실권을 장악 하고 있던 측천무후의 용모를 조각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동아세아는 모든 문명의 어머니 7장

(사진은 경주 석굴암과 돈황 막고굴)

한국의 석굴암은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있는 석굴(石窟)로서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을 대표하는 이 석굴은 중국이나 인도의 석굴에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규모이지만, 동아세아 종교건축의 전방후원 평면으로 예술적 완성품이며 완벽히 보존된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굴 내부는 둥근 꼴이고, 천장은 돔형 석굴 위에 흙을 덮었다. 좌우 약 6.7미터, 전후 약 6.6미터, 입구의 넓이 3.35미터이며, 그 앞에 사방형의 전실(前室)이 있다. 중앙에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정교하고 기상이 넘치는 동아세아 석굴 중에 걸작이다. 본존불 뒤의 벽 한가운데에 반육각(半六刻)한 십일면관음보살상, 전실 양쪽 벽의 인왕(仁王) 및 팔부신장,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 입구 비도(扉道)의 좌우에는 사천왕상, 범천·제석천상, 석굴 벽면에 십나한(十羅漢)상, 본존불 윗쪽으로 10개의 감실에 8개에 불상, 그리고 벽의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속에 1체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7체의 보살상을 안치하였다. 선덕여왕 14년(645년) 신라의 수도 서라벌 황룡사(皇龍寺)에 세워졌던 ‘황룡사 9층 목탑‘은 79m의 높이로 당시 한반도의 불교문화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동아세아의 금속 연장이 신석기시대의 혁명을 일으키며 인류는 금속도구로 석벽을 조각하기 시작한다. 나무의 조각은 돌의 조각으로, 급속히 발전하여 동굴에 거주하던 습관으로 벽에 그림을 그리고 상징적 조각물을 세워서 보존하였기에 역사적 기록으로 중요한 자료들이다. 동아세아의 금속문화의 발달은 석물 조각을 시작하게 하고 불교를 통하여 인도 드라비디안의 목조조각과 연합하게 되었다. 아잔타 석굴처럼 인도의 석물 조각이 번성하는 무렵에 그리스의 왕들이 서인도와 중국에 이르러 불교와 석물 조각을 배워가서 그리스의 석조건축이 시작돈 듯하다. 그리스의 파르테논처럼 초기 건축양식은 도릭형식이라고 하는 동아세아 목조건축의 양식이다. 비쟌친 문화가 잘 보존된 그리스의 마테오라 사원에 비쟌친 벽화와 함께 잘 보존된 중국의 가구 조각물을 보면 그리스 석조 건축이 동아세아의 목조건축 양식을 본받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동아세아 유목국가의 건축양식에 궁전 앞에 삽살개 조각을 세우는 모습이 있었고 그 이후에 알렉산더 대왕의 사자조각을 수호신으로 문 앞에 세우는 모습으로 본을 받았다. 동아세아의 금속 기구는 인도의 조각예술을 부흥시키고 인도의 조각예술은 페네키안들에 의해서 그리스에 전해저서 그리스의 조각예술이 발달된 듯하다. 인도의 쿠샨제국시대에 불교예술이 극치에 달하고 로마국이 개발한 통로를 통하여 쿠샨국의 불교조각미술은 아프리카와 홍해연안에 석굴조각으로 연장되었다.

동아세아 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인도의 쿠샨제국은 지중해와 동아세아를 연결하는 계기가 되고 인류아동기 문화의 절정이 시작된다. 유럽의 미켈란젤로가 석조물을 조각하는 때 1천 년 이전부터 동아세아는 금속공예가 발달한 사실을 비교해보면 금속 산업혁명은 동아세아에서 시작하여 인류문명에 앞서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많은 예들 중의 하나이다.

8. 세계를 움직인 동아세아의 과학과 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