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를 움직인 동아세아의 과학과 발명

선조의 영을 모시는 묘지를 흙으로 동그란 모양으로 만드는 풍습은 한반도에서 시작하며 흙산을 짓게 되었다. 사람이 사는 구덩이 집은 풀이나 짐승 가죽을 깔고 지붕은 서까래를 걸치고 서까래의 끝을 중앙에 엮어 구조를 형성한 후 나뭇가지나 갈대 등의 마른 풀을 덮어 만들어 원추형이나 사각추형이 되었다. 후에 피라미드가 사각추형으로 지어짐은 선조의 무덤을 살아있는 사람의 집 모양으로 선조의 돌집을 짓는 의도에서 발달하였다.

벼농사를 위한 저수지와 관개 수리시설 기술의 발달은 땅을 파고 높은 둑을 쌓아 많은 물을 가두고 그 물을 물길을 만들어 유수량을 조절하면서 흘러나가게 하여 논에 물을 대는 시설을 만들었다. 수리시설과 연결하여 논의 면적을 크게 확대하였다. 성벽 축조와 교량가설, 궁궐과 사찰의 토목공사, 도시 건설 공사의 정연한 구획과 계획성은 최고의 기술이었다.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모았다. 흙 그릇을 불에 구워 토기를 만들었고 칼, 낫, 채, 돌갈판을 만들었다. 소가 끌어가는 쟁기를 만들어 밭과 논을 가꾸었다. 바퀴를 만들어 짐을 나르는 수레를 만들었다. 가락바퀴를 만들어 옷감을 짜고, 대나무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했고, 물에 빠지지 않는 짚배를 만들어 멀리 항해를 했다. 짚배를 크게 지으면 가족이 살림을 하며 풍향과 조류를 따라 원양항해로 섬나라에 이르렀다. 집배는 한반도의 초가집처럼 농경생활에서 시작되어 온 세계에 분포되어 각 대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제주고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황토벽에 굴을 파서 동굴 집을 지었다. 부엌 불길이 방바닥을 데우는 온돌방을 만들었다. 사람이 끌어가는 수레를 만들었다가 소나 말이 끌어가는 수레를 만들었다. 석탄불에서 쇠붙이 칼과 연장을 만들어 나무와 돌을 다듬기 시작하였다. 나무집과 돌집을 짓기 시작하고 가구와 살림을 차려 처음으로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찾았다. 쇠축과 쇠바퀴를 이어 붙여 말이 끌어가는 전차를 만들어 사냥과 전쟁에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바퀴 굴러다니는 격자형 도시계획을 시작하여 궁성을 짓고 성곽과 물길을 둘러 왕성의 모습이 처음 나타났다.

나뭇잎과 열매나 흙과 돌가루에서 염색을 만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글 모양을 만들어 뜻을 전하는 글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대나무나 짐승 뼈에 글자를 새겨 뜻을 전하였다. 옷감과 종이를 만들어 붓글씨로 기록하면서 시간이나 공간의 재한을 벗어나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전해주면서 학문이 발달하여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이곳 동아세아에서 시작하였다. 물물거래로 장날이 서고 돈의 매체가 금전거래로 진보하면서 산업이 발달하였다. 신라 지증왕 6년(505)에 처음으로 얼음을 저장하여 쓰게 하였다고 하고 한다. 얼음을 저장하는 氷庫를 축조했다. 5세기말에는 경주에 각종 공산품과 농산물이 거래되는 시장이 개설되었다. 시장은 산업을 자극하고 생산제품의 유통을 촉진했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조상의 혼과 자연을 관리하는 신의 신비를 느끼고 그 원리를 배우려 일찍부터 천문학이 발달하였다. 음과 양(I-Ching: Book of Transformations)의 균형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우리나라 태극기에 태극의 모양을 둥글게 그렸다. 원형은 신의 영역이고 방형은 사람의 영역으로 이해하였다. 동전의 둥근 모습은 신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그 안에 사각 구멍은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고리를 끼기에 우주 안에 사람이 살아가는 동아세아의 철학원리를 동전의 모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석탄불에서 시작된 금속문화는 일찍부터 동아세아 문화의 종교, 철학, 과학이었기에 다섯 손가락으로 오행을 세는 때에 이미 존재하였다. 금속표면에 해가 반짝이고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면서 동그란 청동거울은 신의 영이 머문 곳으로 여겨졌다. 동경은 집을 지키고 자신을 보호하는 보물이 되었다. 음양오행은 해 달 물 불 나무 금속 흙의 요소로 시간과 공간을 형성한 목숨을 지탱하는 환경요소로 여겨졌다. 우리나라 고구려 고분의 공간형성과 벽화에서 선명하게 보여준다.

찰스힉함(Charles Higham)은 이들이 쌀농사를 지었으며 이곳에서 양자강 하구에 이르는 생활지역을 설명하였고 윌햄솔하임(Wilhelm Solheim)은 이들 농업문화는 해빙기(12,000‐7,000년전)이전부터 생활에 적용되었다고 주장했다. 피터벨욷(Peter Bellwood)는 그의 저서(The Prehistory of the Indo‐Malaysian Archipelago,1985)에서 이들은 나무껍질을 두들겨 섬유를 만들어 옷을 짜서 입었고 종이를 만들었으며 대나무 가지를 입으로 불어 대나무 안에 독살이 짐승에 맞아 사냥을 하는 무기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영국해군선장출신 Gavin Menzies는 2003년에 저서에서 명나라의 해군은 1421년에 미 대륙을 방문하였고 세계해양지도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고증하였다. DICK TERESI는 2002년에 출판된 LOST DISCOVERIES에서 현대과학의 뿌리가 바빌로니아에서 시작하여 마야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중에 동아세아는 이미 대부분의 기술과 과학을 훨씬 오래전부터 보유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만주 들판에 야생말을 모아 길러 말이 수레를 끌게 되고 석탄불에 쇠붙이 바퀴와 축을 만들어 전차를 만들게 된 우리선조는 나무배를 만들어 바다를 항해하기 시작하였다. 10만년 전에 떠나온 해변길 따라 현대 인류의 고향 아프리카를 찾아가게 된다. 니무배를 타고 전차를 몰아 거침없이 아프리카 나일강에 나라를 세웠음은 우리 선조의 발길이었다. 전차를 달려 사냥하고 아랍인들과 흑인 원주민들을 정벌하여 노예로 부리는 그림과 조각물의 예들을 볼 수 있다,

아프리카 나일강 유역에 피라미드를 건조한 왕과 귀족들 중에 동아세아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장 큰 피라미드의 주인 쿠푸(고부)가 작은 체구에 동아세아인의 인상이다. 그와 함께 일한 건축가 헤무누 역시 얼굴에 광대뼈가 높은 동아세아인의 모습이며 그들의 후손들이 혼혈아의 특색인 아름다운 모습이며 동아세아에서 명명하던 4자 이름들이 많다. 우리나라 고구려에 연개소문, 을지문덕처럼 북미대륙에 원주민들의 이름과 같은 현상이다. 아프리카 귀족들이 사용한 가구들 중에 옥돌, 상아, 목재칠기등의 모양은 동아세아 제품들과 유사하다.

1986년에 중국의 서남부지역, 성도 시에서 발굴된 산싱두에이(삼성퇴)문화는 요동반도와 상나라 사이에 위치하였던 촉나라 씨족들이 주나라가 정복할 무렵에 거대한 청동가면들과 인체청동상 및 얇은 금박이 제품들과 수많은 옥돌제품들을 제작하는 문화와 문명을 동반하여 중앙아세아로 이주한 사실을 이해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들 문화는 에집트 문화나 그리스의 문화와 공통성을 볼 수 있고 후에 페르시아의 문화와도 공통성을 보게 된다.

안악 제3호분에는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과학의 모습을 보여주는 훌륭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외양간․차고․방앗간․부엌․우물 등 4세기 중엽의 고구려인의 일상생활과 주거시설을 생생하게 그려 놓았다.

동아세아에 강철생산은 기원전 4백년에 시작하였고 유럽에 전해짐은 14세기경에 몽골침략 이후에 알려진 듯 하다. 동아세아 군사무기중에 활은 나무와 짐승의 뼈를 합판하여 만들어졌고 금속 방아쇠를 각목에 설치하고 활을 얹어서 고정한 활총 (cross bow)은 동아세아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후에 삼족오 새가 해를 상징하는 의미와 함께 한나라에서 로마로 알려진 듯하다. 동아세아 유목민들은 일찍부터 말 안장에 가죽 발거리를 사용하다가 금속재품을 사용하였으나 세계의 다른 곳에는 최근에 들어 알려졌고 말이 이끄는 마차(chariot)는 소가 이끄는 나무바퀴 수래에서 청동바퀴축이 고속도의 회전을 감당하면서 마차에 구비되는 여러가지 철재도구들과 함께 동아세아에 군사장비에 사용되었다가 페르시아에 알려지고 지중해에 전해진 듯하다.

한나라 때 AD 130년에 만들어진 지진측정기는 해시계 물시계 천체관측기 그리고 여러 금속악기들과 함께 북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지진 측정기는 4마리의 용과 4마리의 게구리가 용기밖에 4방향에 장식되어 지진이 감지되면 용의 입에서 구슬이 떨어지며 용기 안에 추는 지진이 오는 방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동아세아인들이 금속을 생산하는 중에 발화물질과 폭팔 물질을 발견하고 일찍부터 화약(black powder)을 만들어 대나무에 넣고 폭탄을 발명하였다. 가벼운 대롱에 넣어 화살에 묶어서 로캣트를 만들어 먼 거리를 날고 폭발하면서 방화하는 위력있는 무기를 사용하였다. 고려 때 만주에 군사들은 1288년경에 처음으로 청동대포를 만들어 대포알을 쏘았으며 대포알 속에 화약을 넣어 도착지에서 폭발하는 무기를 만들었다. 화살을 연발하는 무기를 만들고 명나라 때에는 화약을 실은 화살 100개를 한 번에 쏘는 무기도 있었다.

산봉우리나 성루에서 검은 연기, 흰 연기 그리고 다른 색들의 연기를 올려 신호를 하였으며 군사작전을 총괄하는 손자병법은 현대강국들의 군사활동에 교과서가 되었다. 동아세아의 새로운 발명과 무기들은 훈족이나 몽골들이 세계침략에 나섰을 때에 짧은 기간에 거침없이 세계를 정복하는 능력이었다. 대부분의 동아세아의 발명과 기술은 16세기 이후에 나침판과 해양기술, 인쇄기술, 의약기술, 방직기술들과 함께 유럽에 전해졌고 세계현대역사가 비로소 시작하였다.

산둥성에 1000년 전에 세워진 87피트 높이의 칠층 철탑은 동아세아 재철문화의 상징이며 46톤의 무개를 가인 청동 종은 그 표면에 227,000개의 한자로 불경을 새겼다. 동아세아의 금속문화는 상나라(1554-1045 BC)때 대량생산된 청동제기들로 세계에 잘 알려져 있고 같은 때에 한반도 고조선과 상나라 사이에 촉( )나라가 있었다. 상나라와 촉나라가 주나라(1122-221 BC)의 침공을 당할 무렵에 촉나라민족은 중국내륙에 소금과 지하자원이 풍부한 사천성에 성도지역으로 이주한 듯하다.

소금은 생활에 필수품으로 인간의 소화기에서 곡식을 소화시키는 조미료이다. 무겁고 귀하여서 금과같이 여겼었다. 중원과 군륜산맥 사이에 위치한 사천성에 지하에서 나는 기름과 개스, 석탄과 소금 등을 채취하고 여러 가지 재품을 만들기 시작하였음이 오늘 날의 페트로니엄 산업의 시작이었다. 2200년 이전에 시작한 소금광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거대한 대나무 건축물은 수천 피트의 지하 깊이에서 오일, 개스, 광물들을 채취하여 생산물들을 재조하였다. 대나무를 연결하여 개스와 오일을 공급하였다.

종교문화와 산업문명은 사회질서를 따라 도교와 유학을 바탕으로 천문학과 철학이 발달하였다. 음과양의 이원론과 오행사상은 후세에 과학과 철학 그리고 모든 예술에 적용되었다. 1986년에 발굴된 삼성퇴문화는 금박이재품들과 청동조각물들, 거대한 청동금가면, 생명나무, 새를 존중하는 양식, 얼굴에 눈을 강조하는 표현, 날개달린 용, 수많은 옥돌재품들의 출토로 중앙아세아 성도시 일대에 문화는 동아세아에서 중앙아세아를거쳐 인도, 매소포타미아, 지중해여안으로 연결되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과거에 유럽 역사학자들이 발표한 바비로니아 문화가 중국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학설들은 중국의 역사에 관한 지식이 없는 상황이었다. 2014년에 켐브리지 대학에서 출판된 EARLY CHINA 37의 내용에 그들은 중국 역사학자 사마천의 사기 기록을 인용하였지만, 중국, 바비로니아, 그리스의 문화는 거의 같은 때의 문화라고 설명한다. 이제 중국역사가 활발하게 연구되면 바비로니아와 그리스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기원전 4천~3천년 경에 동아세아에서 숯불과 석탄불로 구리와 청동이 생산되면서 금속문화가 시작되고 인류역사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나무나 돌로 만든 도구들과 흙을 구어 만들었던 그릇들이 금속재품으로 바꾸어지면서 생활의 모든 면에 변화를 갖어 왔다. 곧 이어서 무쇠가 생산되어 청동과 무쇠는 남아세아 인도에 석굴조각이 시작되고 금속문화와 조각예술은 메소포타미아로 그리고 지중해로 전해진 듯하다.

동아세아의 발명은 인류문명을 발전해가는 원동력이었다. 생활개선, 건강과 질병예방, 정신과 신체의 균형, 수학과 과학, 종이, 옷감, 북과 종, 배의 키, 해시계와 물시계, 물건너는 다리 건설, 땅속 깊이 물 소금 금속을 찾아내는 기술, 지진 측정기, 나침판과 항해술 및 지도 만들기, 종이돈, 인쇄술, 연 만들어 띄우기, 불꽃노리, 차 술 국수 음식 만들기, ……. 등의 한없이 많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발명을 계속해 왔기에 1271년에 송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Marco Polo)는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선진문명이었다고 그의 동방견문록에 기록했다.

8.1 청동, 강철 무기와 도구

석기시대에 농사짓고 흙 그릇을 만들던 마을에서 고인돌을 짓기 시작하는 마을이 한반도에서 나타난다. 한반도 북부에 석탄이 풍부하여 돌가루에서 금속을 녹여내면서 고인돌 유물 중에 청동 칼과 장식물들이 출현한다. 비파모양 청동검에 이어서 출현한 한국형 청동검, 2개의 꼭지가 달린 굵은 줄무늬 청동거울과 가는 줄무늬 청동거울은 한국에 독특한 청동기이다.

금속도구로 나무집을 짓고 나무배를 띄우며 돌의 모양을 바꾸고 나무바퀴를 쇠바퀴로 만들면서 인류문명이 이곳에서 시작한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BC3,000년 전부터 금속문화의 주역이었다. 한반도의 청동기에는 초기의 것부터 구리․주석․납으로 된 청동기와 함께 아연-청동 합금으로 된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 장식용이나 의식용으로 쓰는 청동기를 황금빛으로 빛나게 하기 위해서 구리․주석․납에 아연을 섞는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동아세아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품들 중에서 튼튼한 무기․갑옷․마구․생산 도구 등은 그 질이 매우 우수하다. 고구려의 고분에 그려진 장수와 병사들이 사용한 여러 가지 무기들, 칼과 창, 활과 화살촉, 갑옷과 투구, 그리고 철제 마차(chariot)의 장식은 철의 생산과 기술, 등에 특히 철을 단련하는 기술자의 그림과 수레바퀴를 제작하는 기술자의 그림은 첨단기술 제품을 생산하는 창조적 과학의 증거이다.

일본 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 사신에게 철정(鐵鋌) 40매를 주었다고 한다. 한반도 남단에 가야국의 덩이쇠는 일본에 철기의 원료 철재로 대량 수출되어 일본의 철기 문화를 전개하는 바탕이 되었다. 수천년 동안 발달해온 백제의 금속문화의 칠지도는 75㎝길이의 철검으로 그 뛰어난 철의 단조기술과 61자의 금상감으로 새겨 넣은 명문, 사슴뿔을 형상화한 듯한 특이한 디자인 등으로 4세기초의 백제 금속기술의 우수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명문에 씌어 있는 것처럼 칠지도는 강철(鋼鐵)과도 같은 쇠로 만들었다. 고탄소강(高炭素鋼)과도 같은 쇠붙이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쇠도끼와 화살촉과 칼과 같은 날카로운 철기들과 칠지도는 그 당시 국가의 富와 첨단기술을 대표한다.

금속문화의 혁명은 전쟁과 농업에서 시작하였다. 생존경쟁에서 적을 물리치고 토지를 개발하여 생활이 융성해지면서 인구가 증가하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우수한 철제 공구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 도끼와 칼에서 망치와 끌과 대패, 톱의 강하고 예리한 철제 공구의 제작은 인류의 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동아세아에서 시작한 금속문화는 인간사회와 자연을 정복하는 과학문명의 첨단을 이루었다.

석탄불 1130 C to 950 C. 온도로 쉽게 강철(iron)을 생산하여 칼과 농사에 쟁기를 만들었지만 쉽게 녹슬어 보존되지 못했다. 동아세아에서는 BC 300년 진시황제 때부터 강철무기 생산은 일반화 되었지만, 유럽은 800년 후에 동아세아인의 필란드민족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이주해 강철무기가 생산되고 유럽에 막강한 바이킹 문화가 시작하였다.

8.2 천문학

동아세아의 농업이 발달하면서 천문을 관측하고 기후변화를 이해함은 필연의 과정이었다. 동아세아의 고구려 때 작성한 별자리 그림에 90개의 별자리에 1,467개의별이 그 밝기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그려져 있다. 북극을 중심으로 한 천구(天球)에 별자리들이 제 위치에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고, 적도원(赤道圓), 황도원(黃道圓), 북극원(北極圓)과 함께 경도선(經度線)도 명시되어 있고 은하계도 그려져 있다고 한다.천문관측자들은 강우와 강설현상, 바람의 강도와 방향, 구름, 기온, 지진, 해와 달의 무리, 안개, 서리, 무지개 등에 대한 관측을 하고 한국 천문연구원 연구위원인 박석재 박사의의 우주 이야기가 조선일보에 아레와 같이 보도되었다.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는 황보승 회원이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이 한 곳에 모이는 오성결집(五星結集) 기록을 배달국, 고구려, 고려 역사에서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나는 이미 2014년 10월 1일자 24번째 프리미엄 조선 ‘박석재의 우주 이야기’에서 고조선의 오성결집 기록 오성취루(五星聚婁)에 대해 기고했다. 그 칼럼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국사 교과서에서 BC 2333년 왕검이라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후 고구려가 건국될 때까지는 내용이 거의 없는 ‘블랙홀’이다. 그런데 그 역사의 블랙홀 한복판에 천문관측 기록이 있다. ‘환단고기 (桓檀古記)’의 ‘무진오십년오성취루 (戊辰五十年五星聚婁)’ 기록이다. 여기서 ‘무진오십년’은 고조선 건국 600주년이 되는 BC 1733년을 말하고, ‘취’는 모인다는 뜻이고 ‘루’는 동양 별자리 28수의 하나다. 즉 이 문장은 ‘BC 1733년 오성이 루 주위에 모였다’ 같이 해석된다.

(오성취루 상상도. 왼쪽부터 화성·수성·토성·목성·금성이다.)

천문 소프트웨어를 돌려봤더니 BC 1734년 7월 중순 저녁 서쪽 하늘에는,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화성·수성·토성·목성·금성 순서로 오성이 늘어섰다! 특히 BC 1734년 7월 13일 저녁에는 달과 해 사이에 오성이 ‘주옥처럼’ 늘어섰다. 오차가 1년 있기는 하지만 4000년 전 일을 추정하는 입장에서 보면 오성취루로 보게 된다.  하지만 이미 오성취루로 너무 많이 알려져서 오성취성으로 바로 잡히지는 않을 것 같다. 중요한 사실은 오성결집이 실제로 일어났고 옛 기록이 옳다는 것이다. 오성취루 같은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추거나 컴퓨터 없이 손으로 계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BC 1734년 우리 조상들은 천문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조직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천문대를 가진 고조선은 고대국가였던 것이다.

오성취루를 처음으로 검증해 본 천문학자는 고(故)라대일 박사와 박창범 박사다. 그 검증 결과는 ‘단군조선시대 천문기록에 관하여’ 논문으로 작성돼 1993년에 발행된 한국천문학회지에 실렸다. 이 논문에서 BC 2000년부터 BC 1450년까지 550년 동안 오성결집 현상이 BC 1953년 2월에 한 차례 더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오성취루 219년 전이었으므로 오성결집 현상이 최소한 200년에 한 번씩 일어난다는 편견을 심어줬다. 오성결집이 불과 1년 만에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공전 주기가 긴 목성과 토성이 하늘에서 모였다가 멀어지기 전에 수성·금성·화성이 신속하게 다시 결집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천문기상 관측은 신라, 고구려, 백제에서 이변에 특히 주목하여 천문관측이 이루어졌다. 일식과 혜성의 관측이 제일 많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도 다른 두 나라와 비슷하다. 일식은《삼국사기》에 기원전 54년 4월에서부터256년 10월까지 19회의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의 관측 기록 중에는 영류왕 23년(640) 9월 “해에 빛발이 없다가 3일이 지나서야 다시 밝았다”는 태양 흑점이라고도 여겨지는 태양 표면의 이변과, 양원왕 11년(555) 11월 30일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는 기사가 있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으로 유명한 조셉 니담(Joseph Needham)의 연구에 의하면 당대(唐代)인 754년에 설립된 한림원(翰林院)은 유럽에 존재한 어떠한 학술원보다 천년이나 앞선 것이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Eden in the East by Stephen Oppenheimer 1998”에 의하면 고고학자들의 최근 발굴보고에 태국에 농산물 유적은 15,000년전의 일이며 쌀농사의 유적도 9,000년전으로 추적되며 월남의 청동유물들은 6000년전으로 소급한다. 곡식을 갈아서 씨겁떼기를 벗기도 곡식가루를 만드는 둥근맷돌은 숫돌과 암돌사이에 마른 곡식을 넣으면서 돌리면 눌린돌 사이로 껍질이 벗겨진 곡식가루가 밖으로 밀려 나오기에 도릿개라고도 하는데 인도네시아 섬들의 고대유물들 중에 26,000년전에 사용되었으며 동남 아세아 국가들과 남북미 원주민들 생활에 필수품으로 최근까지 사용되어왔다. 이들 농사 도구는 에짚트와 서남아세아에서 12000년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8.3 음악과 악기

노래하고 춤을 추기란 감정을 가진 고등 동물이 가진 본능이다. 사람도 말을 배우기 이전부터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아기의 자라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다. 원시시대부터 인류의 단체생활에 반드시 필요했다. 동아세아의 국가가 설립되고 궁중의 음악이 형식화 되면서 음악 정책이 나타난다. 한나라 때 사학자 사마천은 그의 <사기>에 악서(樂書)를 서술했다. 음악이란 풍속을 바꾸는 근본으로 바른 음악은 바로 사는 환경에 있고 음란한 음악은 퇴패된 사회에서 보인다고 했다.

음악이 조화를 이루면 새나 짐승까지도 감동한다. 목축업에 소젖을 짜는 때 소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면 일이 수월하다. 하물며 오상(五常: 仁, 義, 禮, 智, 信)을 구비하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가진 사람에게는 시각과 청각을 동원하여 음악을 즐기는 환경은 중요한 정책이었다. 기원전 2070부터 시작하는 하은주 시대에 사람이 모인 곳에서 음악을 사용하여 인간 감정을 조절했다고 한다. 좋은 음악을 연주하면 좋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좋은 일들을 했고 정치가 안정되고 왕업이 성취되면 예악(禮樂)이 일어나 즐거움을 절제하고 예와 덕을 유지했다고 한다. 각 지역의 악사를 불러와서 좋은 음율을 모아 국가적으로 평준화하여 국민의 소통과 단결을 이루었다고 한다. 국가적 축제와 제사와 엄중한 행사에 따라 항상 음악이 함께 하였다.

요순시대(중국 역사 이전에 고조선 시대)의 순임금은 다섯줄의 거문고를 제작하여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노래했고 선왕은 금석사죽(金石絲竹)의 악기들을 제작하여 5음(音)과 12(律)을 따라 악보를 만들고 연주하였다. 70가수로 형성된 합창단을 이루고 음양간유(陰陽剛柔)의 융합으로 조화를 이루었다고 기록하였다. 술, 노래, 춤이 동반하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8.4 거마(車馬)이용과 도시계획

고구려 고분의 벽화는 수천년 이어온 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고구려의 무덤 벽화 중에서 요동성의 성곽도, 약수리 벽화고분 성곽도, 그리고 용강대묘 성곽도에서 볼 수 있는 도시 지도는 4∼5세기 고구려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내외의 지형, 도로, 성벽과 누각과 기와집들이 그려졌고, 하천과 개울, 산과 도로 등이 적․청․보라․백색 등의 안료를 써서 보여주고 있다. 3세기 중국의 유명한 지도 제작자인 裵秀가 제시한 지도제작의 6가지 원리가 갖추어졌다.

농경생활에 소가 이끄는 쟁기가 만들어지고 바퀴하나의 수레로 짐을 옮겼다. 바퀴 2개의 수레를 사람이 끌다가 소가 끌고 쇠바퀴가 만들어지며 말이 끄는 전차(Chariot)가 만들어진 유래는 동아세아에서만 보이기에 바퀴문화는 동아세아에서 시작하였고 바퀴문화에서 격자형 도시계획이 탄생하였다. 영국의 버밍헴대학 교수이며 역사학자 스티브 로버트(Stephen Roberts)는 1,300 BC에 이집트와 히티티(Hittites) 사이에 전차전쟁 (Battle of Chariots)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동아세아 하나라 2,100 BC의 전차전쟁은 아직 얼려지지 안했다고 2013년 9월 15일에 발표하였다.

장안(서안)은 동서 9,721미터, 남북 8,651.7미터에 이르는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의 격자형 계획도시이다. 외성의 주위는 37.7킬로미터에 달해 그 면적은 84.1 평방킬로미터였다. 인구는 약 100만 명에 달했다. 당시의 세계적 도시인 바그다드가 직경 2.3킬로미터이고 콘스탄티노플도 동서 5킬로미터인 것을 고려하면 장안의 거대한 규모는 선진국의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헨조다로(Mohenjodaro)유적은 BC 3000∼BC 1500년에 번영한 인더스문명의 중심을 이루는 도시유적이다. 1921∼1931년 J.H.마셜, E.마케이 등이 발굴하였고, 1950년에는 R.휠러도 조사하였다. 도시는 남북으로 주축이 된 큰 통로에 의하여 바둑판처럼 구획되었다. 동아세아의 바퀴문화로 평지에 격자형 도시가 발달하고 동아세아의 과학과 문명이 남아세아에 전해진 듯하다.

8.5 해시계, 물시계, 주판

낮에 해떠있을 때 바늘의 그림자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하루의 시간과 계절의 때를 기록함은 일찍부터 알려졌었다. 궁중에 물시계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하루의 시간을 알려주는 기록은 기원전 6세기 서주시대부터 나타난다고 한다. 지금 박물관에 전시된 물시계 유물들은 덕수궁의 자격루가 1536년(중종31)에 만들어진 것들을 비롯하여 중국 북경 자금성에 비루를 볼 수 있다. 북을 치거나 종을 울려 하루의 시간을 알려주었다.

주판은 현대세계의 컴퓨터 시작이었다. 두 손에 다섯 손가락이 계산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열손가락 십진법으로 계산해서 무한한 숫자를 더하기와 빼기를 할 수 있고 같은 주판에서 몇 가지 다른 계산을 동시에 할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후경부터 나타난다고 한다.

주판이 있기 이전에는 새끼줄에 마디를 만들어 숫자를 표현하였고 원시시대 계산 방법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주판을 사용함은 기호와 문자로 수를 표현하다가 기계로 계산하는 방법이 시작된 것이다. 농경생활에서 물물거래가 시작되면서 숫자 언어와 문자가 발명되고 수학이 시작되었다. 수학을 시작하면서 있다는 사실과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어 ‘0’은 없는 숫자를 표현하기에 ‘0’을 인식함도 수학과 함께 동아세아에서 시작하였다.

8.6 , , 그릇, 금속 , 청자와 백자

동아세아의 토기는 12,000년 전부터 생산되었고 하반도의 빗살무늬 토기는 8,500년 전부터 나타난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술병과 술은 펜실베이니아 대학 연구원들이 중국하남성에서 발굴한 9,000전의 유적이다. 5,000년 전의 주조장 유적의 술과 많은 술병들이 산동반도에서 발견되었다. 기록된 술에 관한 문헌은 4,000년 전에 종교적 절차에 사용된 음식으로 쌀, 옥수수, 조 같은 곡물이나 과일에서 술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었다.

일만 년 전에 곡물농사를 지을 때부터 곡물이 상하면서 남기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시고 취하는 습관도 그 때부터 존속했다. 토기 그릇을 만들어 음식과 술을 보관하고 그릇에서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다가 숟가락이 발달하고 젓가락이 나타남도 동아세아 문화에서 볼 수 있다. 처음 그릇은 대나무 통을 사용하기도하였다가 토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재기나 술잔으로 사용하다가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귀족들의 일상생활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농사짓는 정착생활은 식량을 오랫동안 저장해야 한다. 신석기인들은 곡물을 비롯한 식물성 식량을 잘 보관하는 문제를 ‘질그릇’을 만들어 해결하였다. 질그릇은 저장뿐 아니라 음식을 요리하였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질그릇 생김새가 겉면 꾸밈은 매끈하게만 다듬고 아예 무늬를 넣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점과 선을 배합한 기하무늬를 덧붙이거나 새기고 찍는 방법으로 처리한 예가 많다.


토기가 처음 재작될 때는 나무받침대에 올려놓는 축제용 제기로 만들어졌다가 밑이 평편한 바닥에 놓는 그릇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세다리 받침이 나오는 무렵에 삼족오(다리 셋 까마귀)가 나타나 종교적 안정을 상징하는 사상이 유행하였다. 청동 술잔이 만들어져 제기로 쓰였다. 요동문화에서 청동기가 나타난 후에 하나라(Xia BC 2,300) 경에 황하문명에서 나타나고 일반대중의 일상생활에 청동기가 사용됨은 춘추전국시대(BC470-221)부터이다. 한국의 청동기술이 중국과 다른 기술이라는 사실은 청동기의 합금 성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중국 청동기의 주성분은 구리․주석․납이지만, 한국인이 만든 청동기에는 초기의 것부터 구리․주석․납으로 된 청동기와 함께 아연-청동 합금으로 된 것들이다.

동아세아의 석탄불에서 금속문화가 시작했듯이 도자기는 가마에서 1,100~ 1,400℃의 고열에서 만들어진 사기그릇을 도자기라고 한다. 동아세아의 토기문명이 스메르 문명으로 전해졌듯이 동아세아의 사기그릇이 로마제국에 처음 전해지면서 중국을 차이나(China)라고 불렀다.

동아세아의 도자기는 1만년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양사오 문화기에는 표면에 색깔을 넣어 구운 도자기, 홍도, 백도가 제작되었고, 용산 문화기에는 흑도가 번성하였다. 상나라 때에는 원시청자라고도 불리는 회유도가 있다. 춘추전국시대 말부터 전국시대에는 도장같은 걸로 무늬를 찍어서 나타낸 후 질이 딱딱한 도기와 회유도가 제작되었다. 전국시대에는 진시황릉의 병마용으로 대표되는 잿빛을 띤 거칠게 만든 토기 그리고 죽은 사람과 함께 묻은 인형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한반도의 신라에서 특히 발달한 요업기술의 산물에서 유리구슬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는데, 4세기 이후의 고분에서는 유리 곱은옥도 적지 않게 출토된다. 이러한 유리구슬과 곱은옥은 목걸이, 귀걸이나 금관의 장식으로 쓰였다. 유리구슬과 곱은옥은 비취나 수정, 호박과 같은 옥류와 다른 다양한 색깔과 유리의 질감으로 삼국시대 장식품이었다. 삼국시대 유리기술자들은 유리 공예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금관총에서만도 130여 개의 유리옥이 발굴된 것은 5세기 후반 경에는 그 제조기술이 청자 재조의 준비단계에 이르렀다.

절강성북부에서 처음으로 청자가 등장하고, 삼국시대부터 남조에 걸쳐 청자의 생산이 번성하였으며, 북조 때에 연유도와 청자가 생산되어, 특히 북제시대에는 백자의 시작을 볼 수 있다. 당나라 시대에는 문양과 조형에 국제적인 문화의 영향이 보여진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는 백자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청자는 월요에서 생산이 이어졌고, 당나라 말기부터 최고급품은 비색 (秘色) 이라 불리며 청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북송시대에는 유색과 유려한 칼날을 옆으로 뉘어서 깊고 넓게 파내는 기법 등의 문양을 특색으로 하는 정요의 백자가 유행하여 각지의 가마에 영향을 주었다.

남송시대에는 수도였던 항주에 관요가 설치되어 두꺼운 유약과 검은 태토를 특징으로 한 청자가 만들어졌으며, 또한 일본에서도 전세품으로 많이 알려진 청백자 등 각지에서 특징있는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명나라 시대(1391)에는 경덕진에 궁정용 도자기가 구워졌다. 그 후에 유럽에서는15세기에 오토만제국에서 도자기를 생산하고 명나라 도자기가 유럽에 대량 전해졌다.


8.7 나침판                                                                                                                                                                                   

    

강철에 자석의 방향성을 얻게 하여 나침판을 만듬은 BC200년 한나라 때 나타났다. 강철 자석 숟가락을 청동판 위에 얹어놓으면 남북을 가르키고 청동판에는 음과 양, 동서남북, 8방, 16방, 24방, 28방 32방을 나누어 새겨놓았다.

동아세아의 항해술은 아프리카에 왕래하는 길을 열었고 세계지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명나라 정해제독은 미국을 왕래했다고 영국의 게빈 멘지스(Gavin Menzies)는 그의 저서 <1421>에서 발표했다.

8.8 청동금속

백제의 금속 주조기술과 도금기술은 7세기의 백제 불상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78호)의 제작기술이 대표적이다. 일본奈良 東大寺의 거대한 청동불상은 백제의 기술자들이 전수한 기술로 그 후손에 의하여 주조된 것이다. 그것은 밀랍 거푸집으로 약 490톤의 청동을 써서 주조된 것으로, 수은 아말감을 이용한 금도금법을 써서 완성한 8세기 최고의 금속기술이 결집된 최대의 불상이었다.

금으로 만든 장식품들은 가야의 금관은, 금․은․청동의 장신구들과 함께 동아세아의 높은 금속기술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다. 가야의 금속기술은 세계의 선진 첨단기술이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많은 불교의 불상을 비롯한 금속제품들은 신라의 조형미와 높은 기술의 조화를 이룬 여러 금관들은 순금으로 만든 것과 청동에 금도금한 것들이 있다. 청동그릇은 5∼6세기의 고분과 유적에서 여러 가지가 출토되었다.

조선시대 한국인의 대표적 식기로 발전한 이 청동그릇은 구리와 주석, 납을 주성분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일반적 청동합금이 아닌 구리와 주석만의 청동합금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 놋이라고 불리운 놋대접과 놋합은 가야에서 발전하여 신라로 이어진 첨단 금속기술 중에 또 하나 철의 단조기술이었다.

8.9 종이, 활자, 인쇄

위에 그림은 한나라 때에 종이를 만드는 상상도이다. 동아세아의 섬유문명은 삼배 옷과 비단옷으로 1만년 전에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짐승가죽옷을 벗고 삼배 옷을 만들어 입었다. 2,200 BC년에 이집트에 전해진 삼배는 파피러스(Papyrus)라고 일컬었으며 동아세아의 삼배옷과 종이 생산 기술이 전해진 것이다. 삼나무를 삶아서 섬유질을 솎아내어 실로 감고 옷감으로 짜면 옷을 만들어 입고 글을 써서 보관하는 문서가 되었다. 훗날에 비단이 만들어지면서 삼배와 비단을 서남아세아와 유럽의 후진국으로 수출하면서 비단길이 열렸다.

동아세아의 종이는 서기105년에 만들어져서 700년에 공문을 써서 세상에 알렸고 868년에 목판인쇄를 했다. 나무활자 활자는 1,041년에 만들어졌으며 금속활자는 한국 고려시대 1,234년에 만들어져서 14세기에 유럽에 전해졌다. 종이돈은 1024년에 송나라 때에 동전의 영수증 기록으로 시작하여 원나라 때에 종이돈을 만들어 유통하였기에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기록되었다. 1,200년대에 서남 아세아 회교도 국가에서 유행하였고 유럽에서는 1,400년대부터 유통되었다.

동아세아의 인쇄된 정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생각과 감정의 연결로 유럽의 문예부흥을 비롯한 현대문명 세계화화에 이바지하였다.

동아세아의 홍산문화(4700 to 2900 BC)에서 처음 상형문자의 모양이 나타난다. 사마리안 (BC3200-2000)의 문자보다 1500년 이전이며 이집트의 상형문자보다 500년을 앞섰다. 아래 사진들은 구글에서 모아놓은 홍산문화 유물에서 보이는 문자의 시원인 기호들이다.

8.10 석궁(石弓 cross bow), 화약(gunpowder), 대포(cannon)

인류역사에 전쟁의 무기는 칼, 창, 활이 대부분이었지만, 동아세아에서는 활시위를 손으로 당겨 화살을 쏘는 동안 활줄에 돌을 얹어 날리는 석궁이 있었다. 합성궁은 나무나, 동물의 근육, 뿔 등을 아교로 붙여 만든 활대를 사용했다. 기존의 활보다 짧아져 전차(chariot) 같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 사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 됐다는 것이다. 동물의 뼈나 금속을 합성한 활은 작고 강력하여 정확하고 멀리 나가서 칭기즈칸의 신무기가 되었다.

동아세아의 발화물질은 일찍부터 전쟁에 대나무 속에 넣어 폭발시키는 폭죽의 소리로 전쟁의 공포감을 유발하였다. 불꽃노리는 불꽃으로 하늘을 장식하는 축제로 생활을 즐겼다. 화약을 철통에 넣어 폭발하는 힘으로 쇠공을 멀리 쏘는 무기가 당나라(AD618-907) 때에 발달하여 송나라와 원나라 전쟁에 쓰였다가 칭기즈칸의 무기로 유럽에 알려지면서 유럽의 현대식 무기를 만들게 되었다.

8.11 , 옷감, 비단, 배틀, 우산(양산)

동아세아 사람들의 옷감은 비단․명주․삼베․가죽 등이었다. 고구려 무덤의 벽화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입은 옷은 색깔과 모양이 다양하다. 문헌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오색 비단과 푸른색․붉은 색 및 흰색의 모직물 등의 고급직물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주거 설비는 실림살이 공간과 응접실에서 침실에 이르기까지 음식을 마련하는 공간들이 근접해 있다. 수레와 수레를 끄는 소와 말이 있고 부엌시설도 훌륭하다. 화덕에 걸린 솥, 시루를 사용하였고 가축이 사육되었고, 육고에는 고기가 많이 걸려 있어 음식물이 잘 조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초의 옷감은 털가죽에서부터 풀로 만든 옷이 인류 공통의 옷감이었다. 농사를 짓게 되면서 실을 발명하게 되고 곧이어 원시 베틀도 고안하게 되는 과정을 거쳤다. 식물의 줄기나 껍질에서 뽑아낸 것으로 모시나 삼베가 있다. 동아세아의 비단은 석기시대 농경생활에서부터 발달하였기에 BC3,630년에 하남성의 고적 발굴 유적에서부터 나타난다. 누에를 길러 고추에서 실을 뽑아 배틀로 옷감을 만들어 물감들이면 비단옷이 만들어졌다. 바닷길 따라 지중해로 전해지다가 진시황제의 서역진출로 육로로 비단길이 열려서 훈족이 단숨에 유럽에 달려가 로마제국을 허물었다. 로마의 귀족들이 비단을 너머 좋아하는 사치로 로마가 망했다고 말이 나올 만큼 로마문화와 정치는 동아세아 영향권에 속했다.

대나무와 옷감을 합한 우산과 양산은 농경생활에서 만들어 널리 사용되었다. 개고 펴는 우산은 왕의 행진에 필수품으로 주나라(BC 6th century) 때부터 나타난다. 송나라(1270) 때에 오늘과 같은 우산과 양산이 나타났으며 서남아세아에는 페르샤에 전해져서 널리 알려졌다.

8.12 바퀴, 인력거, 달구지, 마차(車馬)

1만 년 전의 동아세아의 토기가 서남아세아보다 5,000년 이전의 역사로 나타나고 동아세아의 금속문화가 서남아세아보다 2,000년 앞서서 발달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바퀴문화가 동아세아에서 시작된 사실은 당연하다. 농사를 지으며 연자맷돌을 만드어 돌리고 무래바퀴를 돌리며 바퀴의 개념은 일찍부터 시작하였다. 바퀴 하나로 짐을 나르는 일륜차 (wheelbarrow), 바퀴 둘을 사람이 끄는 인력거, 바퀴 둘을 소가 끄는 달구지, 바퀴 둘을 말이 끄는 마차와 전차(chariot), 이들 바퀴의 진화가 존재하여 현대문명에까지 모두 전해진 지역은 동아세아 밖에 없다.

말이 이끄는 마차(chariot)는 소가 이끄는 나무바퀴 수래에서 청동바퀴축이 고속도의 회전을 감당하면서 금속문화의 첨단기술을 필요로 한다. 말과 함께 살아온 유목민이 오래 동안 농경생활에 쓰여 온 바퀴문화를 알게 되고 금속문화의 혜택을 가진 동아세아의 사회환경에서만 발명이 가능하다.

전호태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의 고구려 고분 안악 3호의 벽화에 관한 논설에 고구려의 전차(chariot)가 2곳에 그려져 있다. 행렬도에 주인공이 타고 가는 광경과 부엌 앞에 세워진 수레를 본다. 행열도 뒤에 따르는 양산을 든 호위병은 주인공이 수레에서 내릴 때를 준비하고 옆에 따른다. 커다란 쇠바퀴는 행렬과 사냥에 쓰임을 이해하게 한다. 부엌의 고깃간에 사냥해온 짐승의 몸들이 걸려있고 가마솟에서 음식을 만드는 모습이 그려졌다. 부뚜막 앞에는 개나 닭 같은 집짐승 모습이 어렴풋하다. 말을 타고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졌지만 전차를 타고 사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상상만 할 수 있다.

고구려 벽화는 기원후의 기록이지만 동아세아 고유의 오랜 전통을 고스란히 보존해온 문화사이다. 고구려 문화는 수만 년 수천 년의 인류문화 발생과 진화의 과정을 외래의 변질 없이 잘 보존하고 있다. 수레, 달구지, 마차, 전차의 진화 과정이 동아세아에 있음을 보여준다.

8.13 동아세아의 한의학

최근 한국에 대한한의사협회를 비롯하여 겨레사랑생활건강회나 한의학관련 전문웹사이트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신석기 시대부터 동아세아의 한의학 의술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발달해왔다. 음양(陰陽)학설은 동아세아 사상의 기본되는 자연철학(自然哲學)이다. 우리들은 우주 속에서 우주의 변화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한 환경에서 인체의 활동도 소우주(小宇宙)라고 부른다. 자연철학에 따르는 한의학(韓醫學)은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의해 발전되었다. 우리들의 인체도 우주와 같은 유기체로 보아 진단하고 치료하며, 인체기관의 활동과 작용을 음양의 균형으로 관리한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하나이면서도 두개의 면이 있다. 이 두 면을 각각 음과 양으로 분류하여 하늘과 땅, 해와 달, 바다와 육지,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 물과 불, 밝음과 어둠 등이다. 앞면이라는 것이 있어야만 뒷면이라는 것이 있듯이 이러한 음과 양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대립과 조화되면서 사물이 발전되고 변화된다.

남자는 여자와 비교해서는 양이다. 그러나 양의 남자인 경우에도 윗몸은 양이며, 아랫몸 음이다. 앞쪽은 음이요, 뒤쪽 등은 양이다. 앞가슴은 음중의 양(陰中之陽)인 셈이며, 아랫배는 음중의 음(陰中之陰)으로 존재하는 서로가 상대의 존재에 의하여 음이나 양이 된다. 몸 안의 생리적인 면에서 물질(理)과 에너지(氣)는 상호제약과 협조 작용이며 이를 통해서 음양의 평형이 유지되어 “음양의 소장(陰陽消長)”이라고 부른다.

동아세아에서는 아이들의 홍역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의학이 있었다. 왕단(AD 957 -1017)은 아들을 잃고 홍역의 질병에 관한 치료를 개발하고 예방하였다. 도교의 승려가 16세기에 다시 개발하여 아이들을 치료한 기록이 전해진다. 유럽에서는 1,800 년대에 루이스 페스터(Dr. Louis Pasteur)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동아세아에서 배워온 학문은 우리 것을 모르고 남의 것만 배웠다. 이제부터 우리 것을 찾아 남들에게 가르쳐야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한의학과 음양

음양의 기본철학으로 몸의 치료와 예방, 진단한다. 몸 안에 음이 넘치게 되면 음에 해당되는 몸 속이 차가워지고, 부족하면 몸에 미열이 발생한다. 조열(潮熱)이 생기는 것은 음이 너무 부족하기에 신체의 양, 또는 음을 북돋우는 음식이나 약재를 처방하여 신체의 음양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서양의학에서는 위장이 아프면 위장에 약을 직접 투약하고 직접적인 치료를 하지만, 동양의학인 한의학은 신체의 균형을 맞추어 줌으로서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여 치료하는 간접적 치료의학이다.

한반도의 백제의약은 중국과 일본의 여러 사서(史書)에서 논평되고 있다. 6세기의 중국 사서에 백제에는 의료기관이 있었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554년에 백제의 의박사(醫博士)가 일본에 건너왔다고 했다. 백제의 의사들이 6∼7세기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의료제도를 세웠다. 중국과 일본의 여러 의약서와 문헌들은 훌륭한 약재로 여러 가지 백제산 의약제가 그 효능이 좋다는 사실을 전한다.

한의학과 오행

한의학에서의 오행이론(五行理論)은 다섯 가지의 연쇄적 상호관계로 우주의 움직임과 시간의 변화, 계절에 따른 생물의 변화를 설명한다. 상생관계와 상극관계가 있다. 오행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이 다섯 가지 중에서는 서로 상생(相生) 관계가 있어 물은 나무를 키우므로 수생목(水生木)이요, 나무는 불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목생화(木生火)이며, 불이 사그라지면 흙이 되는 것이므로 화생토 (火生土)요, 흙 속에서 쇠(금)가 나오므로 토생금(土生金)이요, 금에서 물이 생성되므로 금생수(金生水)가 되는데 이를 상생관계라고 한다.

반면에 서로 반대로 제약하고 저지하는 관계로 존재하는 것를 상극(相克)관계라고 부른다. 나무가 흙보다 강하므로 목극토(木克土)이고, 쇠가 나무보다 강하니까 금극목(金克木)이며, 물에 의해 불은 꺼지게 되니 수극화(水克火)이고, 불로써 쇠를 녹이니까 화극금(火克金)이며, 흙으로 물은 막혀버리니까 토극수(土克水)가 된다고 이해한다.

오행과 신체의 기관

오장육부라는 용어에서, 장(臟)에 해당되는 기관은 생명이 출생하여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유지하는 장기를 이르고 부(腑)에 해당되는 기관은 필요할 때만 활동하는 기관을 말한다. 오장을 오행의 속성으로 분별하면 간(肝臟)은 목, 비(脾臟과 胃)는 토, 폐(허파)는 금, 신(生殖器官과 膀胱)은 수, 심(心臟)은 화이다. 몸 안에 오장의 생리활동이 서로 협조하기도 하고 억제하고 저지하여 균형을 이루고 있다.

오장(五臟)은 간(肝) 심(心) 비(脾) 폐(肺) 신(腎)이고 육부(六腑)는 담(膽) 소장(小腸) 위(胃) 대장(大腸) 방광(膀胱)이다. 오관(五官)은 눈 혀 입 코 귀이고 오체(五體) 근육 맥 살 피부 털 뼈이다. 오지(五志)는 화냄 기쁨 근심 슬픔 무서움이고 오기(五氣)는 바람 더위 습기 건조 추위이다. 오색(五色) 파랑 빨강 노랑 흰색 검정이고 오미(五味)는 신맛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이다. 오성(五星) 호(呼) 말(言) 노래(歌) 곡(哭) 신음(呻吟)이고 다섯 분비물은 호흡 눈물 땀 침 콧물이다.

오행과 사물의 속성

위에서 보여주는 목(木)에 속하는 간은 쓸개, 눈, 힘살, 화내는 일, 바람, 푸른색, 신맛, 내쉬는 숨, 눈물과 같은 칸에 있으므로, 이들은 같은 속성을 지닌 것으로 되어 있다.

간에서 분비되는 소화액인 담즙은 쓸개에서 갈무리되며, 만일 간이 좋지 않으면 목의 속성을 가진 눈이 벌겋게 되거나 노랗게 되든지 시력이 감퇴되기도 한다. 또 힘살의 떨림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 간의 기능이 나빠지면 화를 내기 쉽고, 간이 좋은 상태에 있다가도 너무 화를 자주 내면 혈당치가 높아지면서 간의 기능이 나빠진다. 같은 속성을 지닌 푸른 색깔을 가진 야채나 과일 및 곡식(껍질의 색깔)은 간을 보(補)해 주며, 맛 중에서도 신맛은 간을 보할 수 있다.

임신부가 임신 초기에 살구와 같은 신 것이 먹고 싶은 것은 태아의 발육으로 간기능이 허약해져 있으므로 본능적으로 신맛이 있는 음식을 먹어서 간의 기능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자연현상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신 것을 많이 먹으면 나무가 흙을 이기니까 흙에 해당되는 비장(脾臟)의 기능이 떨어진다. 또 간의 기능이 좋지 않으면 얼굴색이 검거나 누렇게 될 수도 있고 눈물이 많아진다.

음양오행과 자연건강

자연생활요법 역시 한의학과 마찬가지로 음양오행의 철학이다. 우리들의 건강한 몸은 몸 안의 모든 장기의 활동과 기능은 균형을 확보하는 것이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자연식과 적절한 운동, 평화로운 마음가짐을 기본으로 하는 자연생활요법에서 균형 있게 먹는 생활을 강조하고, 운동요법과 특수요법을 통해서 장기의 활동에 이상이 없도록 한다. 이러한 기본 조건을 늘 유지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평소생활에서 내적소인(內的素因)과 외적요인(外的要因)과의 인과관계에 남거나 모자람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한의학과 음양오행을 요약하였다.

침술

동아세아의 의술 중에 현대의학에 가장 많이 적용되는 부분이 침술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침술(鍼術)이란 가늘고 예민한 바늘이나 유사도구로 인체의 일정한 부위에 자극을 주어 인체의 기혈을 조절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말한다고 정의했다. 동아세아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유용된 의술로 침술의 침(鍼)자의 어원은 폄석(砭石)에서 잠석(箴石)으로, 잠석에서 침(鍼)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당나라 때 왕빙이 고려가 헌납한 황제침경(또는 침경)으로 몇권이 소실된 황제소문경을 보충하고 황제침경과 합본하여 황제내경이라고 명명하고 지금까지 전해져 온 것이다. 원래는 황제소문경과 침경으로 별도의 책이었다.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가공된 침으로 다할 함(咸)자에 쇠 금(金)이 결합된 글자로, 철기문화의 발달로 말미암아 비로소 철침이 완성된 형태이다. 즉 신석기시대의 돌조각인 폄석(砭石)에서 청동기시대의 잠석(箴石)으로 그리고 철기시대의 침(鍼)으로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침술의 시작은 유물과 문헌적 근거를 통해 알려진 바로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동아세아 문명과 함께 시작된 고대의술이다.

한국은 세계의 고인돌의 50%가 밀집된 지역이며 1923년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송평리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유물 중 돌침과 골침이 발굴되어 보물로 지정된 유물과 함께 침술의 발상지라는 것을 문헌과 유물이 증명하고 있다. 또한 2008년 6월18일 세계보건기구에서 침구경혈부위 국제표준을 대한민국 경혈방식으로 채택하였다. 대한민국의 침술전통과 역사가 유구함을 유물과 문헌이 증명하고 있다.

침술은 생동하는 에너지에 해당하는 기(氣)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소위 “기(氣)” 의학이라고도 말한다. 기(氣)는 “경락(經絡)”을 통해, 혈액 및 진액(津液)과 더불어 몸의 모든 곳을 순환하기 때문에 만일 이 기(氣)가 잘 순환되면, 건강한 상태이고 순환이 스트레스나 감정(感情), 잘못된 식습관, 기후 변화와 여러 다른 환경적인 요소 등에 의해 균형을 잃으면 병든 상태가 된다고 했다.

침술 치료는, 기본적으로 환자의 기혈(氣血) 순환 상태의 균형을 복원할 목적으로, 인체의 특정한 자리 ‘혈(穴)’에 미세한 침을 놓는다. 이 때, 침술에 쓰이는 ‘혈(穴)’ 자리들은 최상의 기(氣) 순환으로 “기(氣)의 균형” 상태를 되찾는다. 치료에 사용되는 침들은 화학적인 물질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은 금이나 은 혹은 청동금속을 사용하였다. 침술 치료 자체는 아프지 않으며 통상적으로 긴장을 풀어주고 편안하게 해 주는 진정(鎭靜) 효과이기에 치료는 당장에 효력을 얻는다. 지압과 뜸은 동아세아의 오랜 역사를 거쳐서 유용되어온 의술이다.

 

9. 칭기즈칸이 대려온 현대 인류의 사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