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단길의 시작과 만리장성

2008년에 발표되었던 세계 혈연학 지도는 발표 이전부터 인류의 고고학적 유적 발굴 자료들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호주의 고고학 발굴은 5만 년 전의 생활유적들을 보이고 북미 대륙에 4만 년 전의 인류의 생활유적들을 보여준다. 해양민족이 동아세아에서 내륙민족으로 적응변화하면서 현대 인류는 한반도에서 만주, 몽골, 티베트로 5만 년 전부터 이주해 들어갔다. 그 후 35,000년 전경에 아세아의 현대 인류는 유라시아에 분산했음을 보여준다. 아프리카에서 동아세아에 이르는 해로는 이미 열렸고 동아세아에서 아세아 대륙 내부의 인구 밀도가 낮은 서역으로 이주해가는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동아세아의 농업발달에 따라 인구밀도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그 세력이 서쪽으로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유라시아 대륙횡단 통로를 개발하고 소유하고 있었기에 동아세아는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유럽, 북시베리아, 북미북방은 2만년 전경에 기후의 온난화로 빙하가 제거되면서 처음으로 현대 인류의 생활권에 노출되었다. 이미 열려있는 한반도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로 연결되는 해변 통로는 분주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동아세아 사람들은 내륙을 통한 비단길을 개척하여 만주, 몽골, 티베트에서 터키 항가리 핀랜드까지 진출하였다. 기원 전후 경에 훈족은 계속해서 서유럽으로 이주해가서 로마를 압박하였고 천년 후에 칭기즈칸은 세계를 지배하는 통로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동아세아는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해왔다. 동아세아의 전국시대부터 시작한 만리장성도 교통수단의 통로로 동부지역에서 서부지역으로 연결하였다.

5.1 비단길(Silk Road)

한반도에서, 북경, 서안, 성도를 지나 티베트에 이르는 길은 인류혈연 M174 구룹이 한반도와 티베트를 연결하는 통로였으며 동인도와 동아세아를 연결하는 첩경이었다. 동인도에서 간지스강과 인더스강을 따라 간다라지역과 메소포타미아로 연결되고 드디어 지중해로 연결하는 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전에 동아세아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해양민족들의 내륙통로였다.

2천 년 전에 해안선 따라 동아세아에서 거대한 룡을 조각하고 미라미드를 세우는 기술이 중미에 이르는 해안교통 능력이 있었다면 동아세아에서 서남아세아에 이르는 해안교통 능력도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한서.지리지> (漢書.地理志)에 기록된데 의하면 기원 1세기 전후에 중국 한나라 때 중국 서북에서 시작하여 중앙 아시아를 거쳐 유럽의 육상으로 통하는 무역통로가 있는 동시에 해상무역통로도 있다고 했다. 이 통로는 현재의 광동성 서문현에서 시작하여 약 5달 동안 항행한 후 계속 항행하여 타이와 미얀마. 인디아. 스리랑카에 도착한다고 했다. 중국의 비단과 향료 같은 물품은 이 통로를 통하여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수송된다고 했다.

비단길(silk soad)은 3만 년 전부터 동아세아인들이 지중해로 옮겨간 길이며 대륙의 동쪽 끝에 한반도에서 유럽까지 대륙을 횡단하는 큰길이 되었다. 동아세아 사람들이 아세아대륙의 서쪽으로 진출하는 마당길이었다.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몽골 쪽에서 새로운 부족을 탄생 시키니, 그 부족의 이름이 “돌궐족”이다. 이 돌궐족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만드니 오늘의 터키가 되었고 터키가 한민족인 우리와 형제국이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터키의 역사에도 “우리는 아사나 민족(아사달 민족: 빛의 땅 민족. 태양족)”이라고 한다. 훈족이 대부분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만든 나라가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를 만들고 서쪽으로 계속 압박을 하니 ‘게르만 민족’이 대이동을 하게 된 듯하다.

56개 민족이 모여 사는 중국의 역사를 보아도 송나라 시대를 제외하고 북방민족이 정권을 지배하는 제국의 역사가 대부분이며 만리장성도 북방민족끼리 전쟁한 국경선이다. 이들 만리장성과 비단길이 동아세아의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던 한반도 주위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뻗어나갔음은 5만 년 전부터 시작된 동아세아 역사의 시발점임을 보여준다.

한반도에서 만리장성이 시작하듯 동아세아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비단길도 한반도에서 육로와 해로가 시작한다. 2만 년 전에 유럽에 기후가 따듯해지고 빙하가 녹기 시작할 무렵부터 동아세아 인들이 유럽 땅으로 이주해 들어간 길이다. 이태리와 동유럽 인들의 모습과 생활풍습은 금발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서유럽 사람들의 모습과 성격이 다르다. 훈족이 유럽에 이르는 길이였으며 몽골이 유럽과 서남아세아에 이르는 그들의 뒤안길이었다. 기원전 138~126년 전한의 장건(張騫,~BC 114)이 파미르 고원을 지나 대월지에 이르는 길을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길이 만들어졌다. AD 700년부터 비단길 관리는 동아세아의 교통망으로 우편전달과 물류통관의 안보를 보장하고 세금을 받아드리기 위한 중앙 조직망을 구축하고 유지해왔다. 쌀, 향료, 비단, 차, 등의 거래인들이 안전하게 여행하는 숙박시설을 설치하고 관리했다.

비단길(Silk Road)은 육상, 또는 해상을 통한 고대 동서 교역로이다. 이는 비단길이라는 언어의 기원 자체가 중국의 비단이 로마 제국으로 흘러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단길은 역사를 통해서 문화가 유통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비단길은 단순히 동서를 잇는 횡단축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남북의 여러 통로를 포함해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한 하나의 거대한 교통망으로 보며, 이에 따라서 비단길의 개념 또한 확대된다. 비단길은 3대 간선과 5대 지선을 비롯해 수만 갈래의 길로 구성되어 있는 범세계적인 그물 모양의 교통로 발전하였다.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를 동서로 횡단하여 한반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화북지방 과 몽골 고비 사막의 북단 오르혼 강 연안을 지나서 카자흐스탄과 알타이 산맥 이남의 준가리아 분지를 이른다. 아랄해 연안, 남러시아의 카스피해, 흑해의 동북편과 발트해 남단까지 이어진다. 일찍이 문명 교류의 처음은 1만 년 전에 이 초원로를 따라 동아세아 향료와 가벼운 견직물이 북방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지나 까지 널리 전파된 것으로 짐작된다. BC 4천~3천년 경에는 동아세아의 청동기 문화화와 석조건축 기술이 전해지고 BC 1천년경에는 철기 문화가 이 길을 따라 전파된 듯하다.

오아시스길이란 중앙아시아의 건조지대(사막)과 반사막에 점재하는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동서로 뻗은 길을 일컫는다. 사막을 비롯한 건조 지대의 군데군데에 항상 물이 고여 있어 수목이 자라고 인간이 생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오아시스다. 오아시스는 사막인들의 생활의 보금자리일 뿐만 아니라, 교역의 중심지로서 거기에서 문물이 집산되고 교통이 발달되어 왔다.

실크로드 중에서 가장 심장부에 위치한 오아시스길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역사시대 전에는 초원로가 많이 이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오아시스길이 동서교류의 주요 통로로 사용되었다. 1만 년 전부터 동아시아 지대에는 이미 상당히 발단된 교통로가 만들어졌으며 파미르 고원이 장애가 되었다가 기원전 138~126년 전한의 장건(張騫,~BC 114)이 파미르 고원을 지나 대월지에 이르는 길을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길이 만들어졌다고 기록이 전한다.

1986년에 발굴되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던 삼성퇴(싼싱두이) 유적은 사천성 성도시 지역 이었으며 거대한 청동가면과 동상들 그리고 나무와 새들의 청동 조각물들은 동아세아문화와 인도문화 그리고 지중해 문화를 연결하는 특성들이 충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원래 요동지역의 촉나라에서 이주해온 이들 민족은 한반도 문화의 가족으로 반월산(mound)과 방죽을 파서 물을 모아 치수하였으며 고구려 문화에서 보는 음양오행 사상이 보이며 얼굴은 눈에 양쪽 끝이 위로 오르고 광대뼈가 높다.

네발을 가진 룡의 모습도 나무의 동쪽에, 9마리의 새는 남쪽을 상징하여 물과 햇빛의 의미를 보였다. 어떤 가면은 눈이 튀어 나오 천리안을 가졌으며 네발 달린 날개가 펴진 룡의 눈도 앞으로 길게 나왔음이 특징이여서 이집트 문화에서 눈을 강조하고 시체에 가면을 덮는 풍습이나 여러 가지 예술적 표현에 공통성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생활풍습에 새들을 부려서 물고기들을 잡게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이러한 풍습은 일본과 중국의 계림에서 볼수있다.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때 까지 이 통로를 사용한 무리들은 소그디안 이라고 불리는 무사들이었으며 지나는 나라들의 왕족들의 후원을 받았다. 이들이 교통에 이용하는 소, 말, 낙타들은 나무방울이나 쇠방울을 달아 소리나게 하였고 절에 목탁 모양과 같다. 당나라 때에 4,000명의 외국 대사들이 세계 각곳에서 장안(서안)을 방문하였으며 그들 중에 중국에 채류 했던 부류들이 많았고 그들의 묘지들이 1999년에 발굴되었다.

진시황제는 동아세아를 통일한 세계 최초의 제국, 진나라(기원전 259년~ 210)를 세워 수도 서안에 자리를 잡았다. 실크로드 중앙에 위치한 서안의 문화는 그 기세를 실크로드를 따라 이태리 반도에 전하고 200년 후에 로마제국이 탄생한다. 동아세아 민족이 지중해로 연결되고 동아세아 문화가 지중해로 전해지는 길임을 증명하는 좋은 예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 문화에 고구려의 삼족오(다리를 3개 가진 검은 까마귀)와 음양오행의 풍습이 보임은 이를 증명한다.

당나라의 문화는 한나라의 문화와 크게 대조된다. 한나라문화는 해안 국가들의 문화에서 시작하여 유목 국가와 융합된 동아세아문화의 결집이다. 당나라 문화는 동아세아 문화가 동인도를 통하여 인도에 진출한 이후에 그리고 서남 아세아와 지중해를 통하여 유럽에 지출한 이후에 유라세아 대륙과 아프리카, 아메리카대륙에 연결되는 세계대제국의 문화와 문명이었다. 당나라가 300년을 집권한 후에 동아세아는 북에는 만주족이 지배하는 금나라, 그리고 남에는 송나라의 양자강 문화가 성장하였다. 북에서 금나라와 경쟁을 해오던 몽골국은 만주지역과 티베트 지역에 같은 혈연의 민족들을 통합하여 드디어 동아세아 세력이 세계를 정복하는 역사에 나선다.


명나라 왕조 시대의 장군이자 탐험가인 정화(鄭和) 제독은 영락제의 심복으로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해에 일곱 차례의 대원정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1405년 6월 제1차 원정을 떠났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전체 길이가 44장(丈; 약 137미터), 폭 18장(약 56미터)에 이르는 대형 선박이 포함된 함선 62척에 총승무원 2만 7,800명이 탑승했다고 한다. 훗날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는 120톤급 3척, 승무원 170명이었고, 콜럼버스의 함대는 250톤급 3척, 승무원 88명에 비교하면 동아세아 선진국의 항해지식과 기술을 겸비하여 엄청난 규모의 대함대였다.

소주(蘇州)에서 출발한 함대는 참파와 수마트라를 거쳐 팔렘방, 말라카, 실론 등의 항로를 거쳐 1407년 초쯤 인도 캘커타(Calicut)에 도달했다. 이 항해를 통해 명나라와 교류가 없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차례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4번째 원정은 약간 시간을 두어 1413년 겨울에 출발했다. 이번에는 좀 더 서쪽으로 나아갈 생각으로 준비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캘리컷에 도달한 후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와 아라비아 반도 남쪽의 아덴에 도달했다. 1415년 7월에 귀국했다.

5번째 원정은 1417년 겨울에 출발해 본대는 4번째 원정처럼 아덴까지 도달했으나, 도중에 나뉜 분대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해안의 마린티에까지 도달했다고 전해진다. 1419년 8월에 귀국할 때 사자, 표범, 얼룩말, 코뿔소 등 진귀한 동물을 데리고 돌아왔다. 영국의 해양역사를 공부하는 Gavin Menzies는 정화 제독이 1421년에 대서양을 횡단하여 남미에 도착하여 북남미 대륙의 태평양 연안을 탐험한 다음 태평양의 적도선 해류를 따라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그의 저서 “1421년 중국이 미대륙을 발견하다.”에서 주장하고 있다. 코럼버스의 1492년 보다 더 먼저 신대륙을 보았다고 한다. 중국 항해사는 이미 지구가 둥근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싶다.

로마가 비단에 취하여 망했다는 말이 전해지듯 비단길은 유럽이 태어난 젖줄기였다. 하지만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로마제국이 동쪽으로 진출한 길이라고 주장을 지금도 고집하고 있다.

5.2 만리장성

원래 동아세아의 남과 북은 농경민과 유목민의 경계를 황하로 나누었다. 후에 중국의 고대 진나라(시황제) 때 흉노와 몽골족 등의 북방 민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전국 시대 당시에 조, 연, 진 3국이 장성을 쌓음으로 시작한 성곽이라고 한다.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제가 연과 조의 장성을 연결하고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대비해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다. 하지만 진나라 시황제가 동이족문화권에 속하기에 만리장성 초기건축은 동이족과 동이족 사이의 분쟁으로 시작되었다.

“5,000년 중국역사를 보려면 산서(山西)로 가라”는 말이 있다. 북방민과 남방민이 융합된 산서성을 ‘중국 속의 중국’이라 말하는 황하문명의 발상지이다. 황하는 오랜 동안 남방민과 북방민의 경계선으로 분쟁과 전쟁이 자주 일어나 중국역사에 큰 사건들이 일어난 지역이다. 춘추전국시대의 12열국(列國) 중 하나인 진(晋)나라가 있던 곳이다. 유목 민족들의 나라들이 차례차례 통치했었다. 한족, 몽골족, 만주족, 후이족(페르시아와 연결되 회교도 민족)들 나라는 선비족의 북위(386~534)에 의해 통일되는데, 건국 초기에 북위의 수도는 산시 성 북부의 다퉁이었다. 북위는 후에 북중국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된다.

당나라(618~907) 시대 동안 이 지역은 황하의 동쪽이라는 의미에서 하동(河東)이라고 불렸다.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수많은 이민족의 각축지였다. 북방 민족들이 중국 대륙을 정벌하기 위해선 만리장성 아래인 산서성을 반드시 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역사 격변기마다 산서성은 후방 중심지 역할을 했기에 ‘중국 역사와 문화, 예술의 보고’라고 부른다. 산서성은 남쪽과 서쪽이 황하로 에워쌌고 북쪽은 만리장성으로 내몽골과 경계를 지었다. 평요고성, 왕가대원, 진사, 운강석굴, 응현목탑, 현공사 등이 이곳에 있다.

중국의 석탄광산이 제일 많은 곳이어서 일찍부터 재원을 확보하여 중국의 재정중심 지역이 되었고 부자와 정치가가 많아 생활수준이 높은 지역이다. ‘누들로드’의 시발점으로 알려져 있는 산서성(山西省)은 처음부터 황토동굴에 수만 년을 거주해온 동아세아인 지역이었다. 지금도 토굴을 파서 생활하는 주민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중앙아세아의 중국한족이 수천 년 전부터 황하를 건너 산서성에 이주해 들면서 두민족의 피가 섞여 미인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국의 4대 미인,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가 두 민족이 만나는 산서성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서시는 우물을 내려다보자 헤엄치던 물고기가 멈춰 섰다고 말하고 왕소군은 날아가던 기러기가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날개를 멈춰 땅에 떨어졌다고 말한다. 초선은 달이 그녀를 보고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껴 얼굴을 가렸다고 양귀비는 꽃들이 그녀를 보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고 말한다.

만리장성은 명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수하고 증축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동아세아의 남과 북을 나누는 상징적인 유적이다. 그 길이는 지도상의 연장은 약 2,700km이지만, 중첩된 부분을 고려한다면 총 길이 6,351km에 달한다. 동아세아 해양민족이 5만년 전부터 만주 몽골로 이주해 유목생활에 정착하면서 북방 내륙민이 된 이후부터 남방에 거주해온 농경민의 생활과 습관에서 거리가 생겼다. 한반도에 백제와 고구려가 다르듯 중국에도 남방민과 북방민의 분쟁은 중국역사를 가득 매웠다. 하지만 북방민이 지배하는 역사가 대부분이다.

1만 년 전부터 중아아세아 중국한족이 경제적으로 융성한 동북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와 남방해양민족과 혼합하면서 북방 유목민족과의 경쟁은 명나라의 만리장성을 낳게 되었다. 현존하는 장성은 역사와 위치에 따라 쌓는 방법도 다르게 나타난다. 북쪽에 위치한 부분은 흙으로 쌓은 초기 것이기에 후대의 만리장성과 달리 높이도 낮았다. 만리장성은 긴 장벽 형태의 성벽뿐 아니라, 군대 이동의 고속도로이며 국경 초소나 보루, 요새 등이 이루어진 구간도 다수 존재한다. 북방민족과의 경계가 아닌 요동 남부 등에 설치된 만리장성은 본격적인 성벽이라기보다 전진기지 요새가 대부분이다.

한대에 무제가 우웨이와 주취안에 장성을 연장시켰고 남북조 시대(420~589)에 북주와 북제가 성벽을 대규모로 축조하였다. 수의 양제가 장성을 보수하고 오르도스 남단에 새로운 장성을 쌓은 후에 금나라가 타타르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싱안링 산맥에 대규모로 장성을 쌓았다. 명나라의 영락제와 정통제가 북경 정면 부분의 2중으로 장성을 쌓았다가 명나라의 가정제가 대대적으로 장성을 개축하여 16세기에 완성된 모습이 지금의 만리장성이다.

동아세아의 역사는 북방 유목민과 남방 농경민 사이에 분쟁의 역사이다. 그 분쟁의 유물이 곧 만리장성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분쟁 경계선은 더욱 남쪽으로 내려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20~589)는 한족이 세운 남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여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한반도는 해양을 지배하면서도 항상 북방민과 연결해왔다. 이 시기 황하강남에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개 왕조가 차례로 흥망했는데, 이것을 가리켜 남조(南朝)라고 불렀다. 또한 같은 건강(建康; 건업(建業)의 새 이름)을 수도로 삼았던 삼국시대의 오나라와 동진을 합쳐 육조(六朝)라고 불러 이 시대를 육조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주로 문화사를 다룰 때 쓰이는 시대 구분이다.

이 시대 황하의 강남이 크게 개발되어, 이후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 강남은 중국 전체의 경제 기반이 되었다. 남조는 정치적 혼란과는 대조적으로 불교문화와 문명이 융성하여 육조 문화라 불리는 귀족 문화가 번영하였다. 도연명, 왕희지 등이 활약하는 때였다. 화북에서는 선비족 탁발부가 건국한 북위(北魏)가 오호십육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북방 유목민의 부족제를 해체하고 귀족제에 의거한 중국적인 국가로 탈피했다.

5.3 경항대운하

동아세아의 지도에 만리장성이 분쟁의 경계선으로 뚜렷하게 보이는 반면에 경항 대운하는 남과 북이 하나로 화합하는 상징적 목표물이 되었다. 주나라 때 기원전 486년에 양자강과 회하를 연결한 중국 최초의 운하 ‘한구(邗溝)’가 건설되었다가 서기 605년 수양제(隋煬帝)의 지시로 6년의 공사 끝에 건설됐다. 총연장 1764km로 부산∼신의주 철도 길이의 두 배에 가까운 대운하는 베이징, 톈진(天津),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장쑤(江蘇), 저장(浙江)의 6개 성·시를 지나며 하이허(海河) 황허(黃河) 화이허(淮河) 창장(長江) 첸탕(錢塘) 강 등 5대 강을 관통한다.

지금도 북방의 석탄을 남쪽으로 실어 나르고 남방의 쌀과 곡식을 북쪽으로 실어 나르는 한편 창장 강 삼각주 수출 경제의 핵심적인 수상 운송로로 사용 되고 있다. 2천 5백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 최대의 경항대운하 인공 물길이 북경(北京)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항주(杭州)를 잇는 수로가 되었다. 북경, 천진 등 6개 성(省)에 접해 있으며 황하(黃河), 회하(淮河), 장강(長江, 양자강) 등 5대 강을 연결하여 전체 길이 1,794km의 해운 통로가 되었다. 오늘의 중국에 북방을 대표하는 베이징(북경)과 남방을 대표하는 상하이(상해)를 연결하는 물길이다. 만리장성과 경항대운하를 보아도 동아세아의 문화와 문명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동아세아 문명의 역사와 규모를 보여준다.

5.4 훈족이야기

한반도와 요동반도에 처음 정착한 현대 인류는 만주지역에 오래 동안 서식해온 늑대와 야생마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늑대를 가정에서 기르기 시작하여 오늘의 가정에서 기르는 개가 되고 동남아세아 농경에 익숙해진 소와는 다르게 야생마를 가정생활에 드려와 유목민 생활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기마민족의 유목국가들은 계속해서 유동하였기에 역사상으로는 짧은 기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유럽 학자들에게 잘 알려진 카니슈카, 훈족의 아틸라, 칭기즈칸, 타머레인, 호랑이 바부르 등의 존재와 스키티아, 훈, 타타르, 투르크(돌궐), 몽골과 만주족들이 정복자의 부족으로 이름을 떨쳤다. 아시아 초원지대의 늑대라고 불리는 잔혹한 기마민족 정복자들은 중국한족과 인도, 그리고 유럽의 거주민들을 짓밟았다.

신석기 시대부터 발달한 금속무기와 말을 탄 훈족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기록은 많지 않지만 흉노는 선비와 후한과 남흉노의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 남흉노는 한족에 동화되었고, 북 흉노는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서쪽으로 진출한 흉노의 지도층이 우랄산맥을 넘어 정착했고, 약 2세기가 지나면서 이미 거주하고 있던 유목민들에게 동화된 후 유럽에 돌풍을 몰아온 민족을 훈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곳이 알타이지역이다. 알타이 카자흐 부족은 스스로를 케레이라 부른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 두개골과 신라 금령총에서 발견된 두개골에 나타나는 특징이 편두이다. 편두란 이마가 인위적으로 눌리고 머리 주위로 고랑 같은 주름이 둘러 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두개골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진한 사람은 머리를 납작하게 눌러 편두를 한다’고 썼다. 학계에 따르면 편두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 ‘흉노의 자취’처럼 나타난다.

삼국지에는 ‘부여의 건국자 동명은 까오리국 금와왕(金蛙王)의 시녀가 낳은 아들’이라고 돼 있다. 몽골의 대표적 사학자 수미야바아타르 교수는 ‘금와왕의 까오리는 고리국이며 이 부족은 8 세기 몽골의 건국신화에도 등장한다’고 했다. 또 ‘알타이인의 아버지 탄자강’ 설화에 따르면 금와왕은 알타이인의 시조다. 즉 금와왕-까오리-부여로 이어지면서 알타이는 한민족의 뿌리가 된 것이다. 중국 사가들은 알타이 거주 민족도 흉노라 불렀다. 한서는 ‘조선은 흉노의 왼팔’이라면서 ‘흉노를 이기지 못했으므로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고조선도 흉노로 간주한 것이다.”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이동을 하게 된 원인은 기후 변화에 따른 천재지변이었거나 인구 밀고 높은 곳에서 초원의 길을 따라 인구밀도 낮은 동유럽으로 이주했다고 추측한다. 유목민인 훈(흉노)족은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해 남부 사이베리아를 거처 중앙아시아 초원을 따라 대이동을 시작해 초원을 따라 북상해서 서쪽으로 이동했으리라. 미국에서 제작한 Atilla, The King of the Babarian 에서 훈족(흉노)의 대이동이 한반도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해와 추측은 충분하다. 독일방송에서 제작한 훈족 추적 다큐 <역사의 비밀> 제작에서 베린토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고증으로 한반도 남단 가야 지방에서 출토된 청동솥 유물과 훈족(흉노)이 서쪽으로 이동하며 거쳐 간 지역에서 발굴된 훈족(흉노)의 청동솥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아래 사진)

1924년 경주 노동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국보 91호 기마인물상에서 말 잔등에 실려 있는 청동솥처럼 훈족은 말 잔등에 청동솥을 싣고 다녔다. 훈족의 이동로에서 30여개가 발견된 이들의 청동솥은 훈족의 이동경로를 보여준다. 경주고분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은 전형적인 유목민의 차림이다. 삼각모와 말잔등에 실려 있는 동복(청동솥)은 훈(흉노)의 동복과 같은 형태다. 기마인물은 편두를 했다고 보고 있으며 금관의 직경이 작은 이유는 신라왕들이 마야 문화에서 보는 것처럼 편두를 했기 때문이라 한다. 기마인물상의 발이 등자를 사용하고 있다. 훈족이 사용하던 등자와 같은 형태의 등자는 유럽인들에게는 없었다. 등자는 말 탄 사람이 마상에서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가죽이나 신발주머니처럼 만들어 말안장에 연결시켰다. 등자는 훈족이 유럽을 점령(위에 사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승마 기술의 한 부분이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훈족의 유물은 북한과 중국 길림지역에서 발견되었고 북부중국 초원과 내몽고 오르도스지방, 남부소련, 헝가리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남부 깊숙한 한국의 경주고분과 김해의 가야고분인 대성동에서 발견되는 흉노의 유물은 북방계인 흉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물이다. 청동솥의 용도는 신석기 금속문화를 이어받은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용기로 제례의식에 사용하는 고기를 삶을 때 쓰는 용기다. 국보인 말을 탄 기마인물상이 쓰고 있는 삼각 모자와 복식은 전형적인 유목민이 사용하는 것이며 말안장과 등자는 훈족이 사용하던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사마천은 흉노를 머리는 큰 편이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얼굴은 넓고 콧수염은 많으나 얼굴에 난 수염은 많지 않고 턱수염은 없다. 눈썹은 짙으며 눈은 찢어지고 불타는 듯 강렬한 눈동자를 가졌다고한다. 사마천이 위에 묘사한 흉노의 모습은 그리스의 사학자 프리스커스(Priscus-Priskos)가 서기 448년, 현 헝가리 북쪽 다뉴브강가에 있는 아틸라의 궁정에 동로마 사절의 일원으로 방문해 남긴 아틸라의 모습에 대한 기록과 유사하다. 그 후에 고트족 출신 사학자 졸다니스(Jordanes)는 프리스커스가 남긴 글을 라틴어로 정리하면서 아틸라의 눈을 잿빛으로 기술했으나 유럽인들이 아틸라를 보는 눈은 아세아 사람을 보는 착시 현상이 아닐까 한다. 흉노는 로마를 세우는 바탕아 되었고 로마를 멸망하게 하는 세력이었다.

세계로 연결되는 교통망은 동아세아의 진시황제(BC 240) 때와 당나라(AD 618) 때에 장안(서안)을 중심으로 세계제국이 건설되었다. 이때 한반도에는 고조선 때이며 통일신라의 불교문화가 극치에 이르는 때였다. 백제가 이 무렵에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아소까문화를 이르킨 때다. 당나라세력에서 도피한 몽골계 훈족은 로마를 점령하고 같은 때에 인도에 들어가 쿠샨제국을 침공한다. 몽골계 훈족의 동아세아 문화와 전쟁문명은 동유럽에 전해지고 그들 중에 북유럽으로 이주하여 핀렌드의 바이킹해적이 된 듯하다. 이때 게르만 민족은 말을 타기시작해서 서유럽의 질서를 세운다. 훈족의 유족은 영국과 유럽의 해안을 300년 동안 공략하고 영국,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에 정착하였다.

일찍부터 만주에서 자라난 기마민족이 오랜 동안 초원의 광야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그들은 한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말을 타고 금속문화가 발전한 신라 문화를 일으킨다. 한반도의 경상도 언어는 발음이 억세고 북방 언어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일본의 원주민(아이누 해양민족)을 북해도 쪽으로 밀어낸 기마민족도 혈연M714가 대부분이어서 한반도의 민족이다.

존 코벨 박사는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 미국 오벌린대학을 나와 서구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941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15세기 일본 禪畵家 셋슈(雪舟)의 낙관이 있는 수묵화 연구’로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교토 대덕사(大德寺) 진주암에서 오랜동안 불교 선미술을 연구했으며 1959년부터 1978년까지 리버사이드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하와이 주립대학에서 동양 미술사를 가르쳤다.

존 코벨 박사와 그의 아들 알란 코벨 박사가 1978-1986년에 걸쳐 쓴 1천 수백편의 글 중에서 서기 369년경에 있었던 한반도 최대의 선박건조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그때 한국에서 건조된 배는 대마도에 중간 기착했다가 규슈로 기항했다. 당시의 대담한 부여-가야 인들은 이 배를 타고 가 후진국이던 왜, 일본 서부의 절반 이상을 정복하고 이후 1백년 넘어 일본 왕의 자리를 대이어 갔다고 여러 차례 발표했다

4세기 부여-가야족의 현해탄을 넘는 항해는 그보다 5백여년 후 바이킹들이 해낸 유명한 항해보다 훨씬 더 주목해 보아야 할 사건이라고 지적한다. 바이킹들은 대담하고 강인한 뱃사람들이었지만, 10세기 그들의 활동시기에도 말을 대동한 항해를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부여족, ‘기마족’들은 서양에서 로마제국이 ‘야만인’들에 짓밟혀있을 무렵 약동의 아시아에서 말을 섬나라에 데려가는 그 기록적인 항해를 성공적으로 해낸 것이다. 훈족의 후손으로 잘 무장된 부여족 전사들은 쉽사리 일본 땅을 정복했다고 서술한다. 제주도의 말들도 이때 옮겨졌을까 아니면 원나라의 침략 때 일일까 의문해 본다.

6. 미대륙 원주민의 문화는 동아세아에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