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집트 문화는 동아세아에서 왔다.

이집트 문명은 인류문명에 기적처럼 나타나서 학자들은 아직도 신비스럽게만 이야기한다. 그 문화의 특징을 살펴보면 이집트를 지배한 피리오의 무덤이 땅위의 피라미드가 있고 또 다른 땅 밑에 지은 투탄카먼과 같은 귀족의 무덤이 있다. 고구려 영토였던 지린성주위의 피라미드와 한반도의 고분에서 보여주는 고구려 문화와 공통성이 많다. 동아세아의 피라미드는 흙산(Mound) 제사장과 선조의 돌무덤인 고인돌 (Dolmen)이 수천 년 동안에 함께 성장하면서 적석총이 나타나고 방추형 돌무덤(Pyramid)으로 진화해온 과정을 보여준다.

땅속에 지은 투탄카먼의 고분을 보면 고구려 고분처럼 전실과 후실로 나누어진 같은 양식이다. 전실은 생시의 모습을 남기고 후실은 사후의 모습을 보존하는 고구려 분묘의 형식과 같다. 1949년에 발굴 조사되었던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안악3호 고분의 벽화에는 고구려의 생활풍습을 잘 그려놓았다. 고국원왕 때인 서기 357년에 만들어졌지만 수천 년 이전부터 내려오는 생활환경을 보여준다. 전실의 벽화에 주인공이 수레를 타고 가는 행렬도와 사냥에서 잡아온 짐승들을 걸어놓은 부엌에 세워놓은 수레를 본다. 고구려와 이집트에서 귀족은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다녔던 공통성을 본다.

동아세아에서 농사를 지으며 연자맷돌을 만들어 돌리고 무래바퀴를 돌리며 바퀴의 개념은 일찍부터 시작하였다. 나무바퀴 하나의 일륜차(Wheelbarrow)에서 바퀴 두개의 손수레, 인력거, 달구지, 마차, 그리고 진시황제의 전차에 이르는 진화과정을 볼 수 있다. 동아세아의 수레 발전은 현대생활까지 보존되어 왔기에 지금도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 고인돌에서 나타난 금속 무기와 장식품, 그리고 금속 도구로 돌을 조각한 옥돌 유물들까지 북한과 만주지역에 석탄불에서 녹여난 강철 생산의 결과로 쇠바퀴가 생산되었다.

야생마를 집에서 기르는 생활도 만주지역에서 시작하였다. 만주 들판에 허다 많은 말 농장은 말 종류 중에 가장 일찍 나타난 종자라고 한다. 말과 당나귀 사이에 노새가 태어나는 오랜 세월을 볼 수 있다. 노새는 새끼를 낳지 못하지만 말이나 당나귀보다 힘이 세고 인내심이 강한 동아세아에서 태어난 말이다. 투탄카먼이 타고 다닌 말이 동아세아에서 온 듯하다.

투탄카먼의 전실은 두 개이며 파라오가 전차를 타고 흑인들과 아랍인들을 정벌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후실도 두 개로 나누어져 현실과 사당이 있다. 현실에 시신을 가면으로 덮는 풍습도 동아세의 상나라 고분에서 본다. 사당에 유골함을 지키는 소와 개도 동아세아의 가축이다. 소는 동아세아의 오랜 농경생활에 동반했고 개는 만주의 유목생활에서 함께 살아온 짐승이다. 한국에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이름이 없으면 “개똥아“나 ”소똥아“로 불러주었듯이 농경과 유목이 합하여 수만 년의 진화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동아세아의 문화이다. 아프리카의 환경에서는 이러한 진화과정을 볼 수 없다.

신석기시대 고인돌에서 청동유물이 처음 발굴되었기에 금속문화가 동아세아에서 제일 먼저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유적이기도 하다. 투탄카먼의 무덤전실에 강철단검, 전차(Chariot)의 쇠바퀴와 축도 동아세아의 금속문화의 산물이다. 고인돌시대에 석탄불에서 쇠와 청동을 재작하면서 동아세아에는 금속시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동아세아의 하나라 2,100 BC의 전차전쟁은 수천대의 전차들이 모여서 전쟁을 한 전차문화의 극성기였다. 그 때 패배당한 국가의 귀족들은 멀리멀리 도피하였다. 투탄카멘의 유골과 함께 보관된 원양항해의 나무배의 모형은 파라오가 동아세아에서 타고 온 돗단배가 아닐까 싶다.

혈연학자들은 5만 년 전에 현대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동아세아 지역에 도달했다고 하기에 아프리카와 동아세아 사이에 해변 통로가 이미 열려있어 문화의 교류가 있었다. 동아세아는 인류가 처음으로 겨울을 만나 농사짓기 시작하여 인구가 증가하였기에 지금도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1만 년 전의 동아세아의 토기가 서남아세아보다 5,000년 이전의 역사로 나타나고 동아세아의 금속문화가 서남아세아보다 2,000년 앞서서 발달된 역사적 사실을 볼 수 있다.

이집트의 유적은 기원전의 건축물이고 고구려 고분은 기원후의 건축물이지만, 이집트의 문화는 돌연변이로 잠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고구려 문화는 이집트 이전부터 멀리서 바위를 끌어와 시작한 고인돌이 피라미드로 성장하였고 수레, 달구지, 마차, 전차, 등의 수만 년 진화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수나라대군을 물리친 역사와 동아세아의 훈족과 몽골이 유럽을 침략해 들어간 역사로 이어진다.

동아세아의 홍산문화는 이집트 보다 2,000이천년 이전에 적석총을 짓기 시작했다. 투탄카먼의 이름도 을지문덕이나 연개소문처럼 고구려의 4발음의 이름이다. 전실에는 나전칠기 같은 동아시아의 가구들이 가득하다. 투탄카멘이 즐겨 타던 전차를 자세히 관찰하면 온 몸통을 동아세아의 청동기에서 흔히 보는 ‘감긴 실 무늬’로 감싸서 장식하였다.

투탄카먼의 묘를 발굴한 하와드 카터는 깨진 도자기에서 닭의 그림을 보고 파라오의 음식에는 아프리카에 없는 닭이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고구려 무용총 천정에 그려진 닭의 그림이다. 이집트의 문화는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토가 말한 것처럼 아틀란티스(모든 문화의 어머니)에서 온 외래문화이다. 역사학자들은 아직도 아틀란티스가 어디인지 찾고 있자만, 동아세아 역사를 배우고 이해하면 아틀란티스가 동아세아였음을 이해하기에 이를 것이다.

4.1 요동문명과 홍산문화

홍산 문화는 중국 만리장성 북동부에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처음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연대는 기원전 4700년 ~ 기원전 2900년 경으로 지금까지 츠펑(赤峰, 발견 당시엔 열하성), 링위안(凌源), 젠핑(建平), 차오양(朝陽) 등 500여곳에서 발굴한 유적이 있다. 인류의 혈연지도에서 보여주듯 현대인류가 처음으로 겨울철에 도전하여 해양민족이 내륙생활에 정착한 곳이다. 1만 년 전부터 농경생활하는 신석기시대를 지나서 8천 년 전부터 금속문화로 진입하면서 나타난 현대 인류문명과 문화의 첨단인 듯하다.

현재 중국정부는 적봉시 인근의 오한기(敖漢旗)· 임서(林西) 박물관은 신축을 마치고 2010년 후반기에 이전했고 극십극등기(克什克騰旗) 역사박물관과 파림좌기 (巴林左旗)의 요상경(遼上京) 박물관은 그전에 이미 신축해 개관됐다. 요하를 중심으로 발견된 홍산문화를 주로 하는 요하문명을 집중 전시하고 있다.

5만 년 전부터 수렵생활하며 소, 말, 개, 돼지, 양, 닭, 등의 야생 동물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곳이다. 흙산을 짓고 고인돌을 세우고 석탄불에서 금속무기와 도구를 만들어 혁명적인 생활개선이 시작된 곳이며 적석총(Pyramid)을 짓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금속바퀴와 축을 이용하여 수레를 만들기 시작하여 사람, 소, 말이 이끄는 교통수단이 시작한 곳이다. 오랫동안 천체종교와 조상종교를 신봉하고 신전을 짓고 가람(Site Plan)을 설계하는 습관으로 바퀴생활에 적합한 격자형 마을이 이곳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듯하다.

홍산 문화의 분묘에서 발굴되는 옥돌조각들, 돼지, 호랑이, 새 외에도 용을 새긴 동물형태로 조각한 장식품이 높은 공예의 수준이 특징이다. 홍산 문화의 옥용(용을 조각한 구슬)의 조형은 단순하며, 용이 원형으로 된 것이 후기로 가면서 반용(盤龍), 문용(紋龍)의 구별이 나타난다. 용의 숭배의 근원이라고 본다. 인류 문화에 처음으로 석기도구를 사용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와 금속도구로 석재인 돌을 조각하는 금속시대가 이곳에서 시작한다. 자연석을 쌓던 고인돌 건축에서 금속도구로 바위를 다듬어 층단식 적석총을 짓기 시작한다. 홍산문화에서 적석총이 다수 발견되는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한민족(韓民族) 또는 동이족문화의 근원이며 중화문명 이전에 시작된 현대인류 문화화 문명의 시발점이다.

1983년에 랴오닝성 링위안 시에서 발견된 《뉘우허량 유적》(牛河梁遺跡, Niuheliang)에서는 기존의 홍산 문화와 다른 거대한 제사 시설이 발견되었다. 돌 마루와 채색한 벽이 있던 신전이 발견되었고 모계사회를 대표하는《여신묘》라고 불리게 되었다.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선사시대의 수장국인 왕국이 있었다고 본다.

1982년에 적봉시 흥룡와촌에서 옥 귀걸이를 비롯해 수십 점의 옥기들이 발굴되어 BC 6,200경의 유물들로 판명되어 흥룡와 문화로 소개되었으며 한국에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패총에서 발굴된 것들과 같다고 한다. 암록강변 수암지역에 매장된 옥돌의 질이라고 한다. 요하 주위에서 발굴된 사해문화, 부하문화, 보조구문화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홍산문화(BC4500-BC3000)로 결집되어 요하문명을 대표한다.

홍산문화의 특징은 섬세한 토기문화를 비롯하여 금속도구로 멀리 백두산에서 가져온 옥돌을 조각했고 금속도구로 큰 바위를 필요한 크기와 모양으로 깨어서 멀리 끌어와 층단식 적석총 피라미드를 짓고 작고 섬세한 석관을 만들어 시신을 안장했다. 홍산문화의 옥돌조각은 황하문명보다 1000년을 앞섰고 층단식 석조 피라미드는 이집트보다 2000년을 앞섰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에 고인돌(Dolmen) 문화는 봉토(Mounnd)문화와 결합하여 만주에 층단식 피라미드 건설을 시작하였으며 중미와 서남아세아의 나일강 유역까지 피라미드 건설을 전하는 합리적인 상상을 하게 한다.

흥룡와 문화의 옥기는 한반도 여러 곳에서도 발굴되고 있다.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옥기 전문가, 홍콩 중문대학의 등총 교수는 “기원전 6000년께 요서지역 흥륭와 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기원전 5000~4000년께 장강유역에 전파되고, 기원전 2500년께 중국 광동성 광주 근처 주강유역까지 퍼졌다. 옥결은 기원전 2000년께 더 남쪽인 베트남 북부까지 전파되고 기원전 1000년께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 남부까지 시간차를 두고 확산되었다.”고 전해진다.

최근 일본, 한국과 중국 고고학의 발전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발굴된 유물들에 의하면 지금까지 서해안 북단에 위치한 요하 주위에서 동아세아 문화의 가장 오래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1987년 요하상류 적봉시 서북쪽 소하서촌에서 흙으로 만든 얼굴과 많은 유물들이 BC7000-BC6500 소하서 문화로 지금까지 발굴된 서남아세아 문화(BC4000)보다 3000년 앞선 문화로 소개되고 있다. 황하문명(黃河文明)에 비해서는 2000년이 앞서고 있다.

황하문명(黃河文明) 역시 한민족(韓民族)이 중국한족 이전에 중원(中原)과 황하강(黃河江) 유역에서 역법(曆法), 천문지리, 의학, 율법, 의식주 생활을 고도로 발전시켜 일으킨 문명이기도 하다. 동아세아의 신석기시대 토기문화는 해안선 따라 미대륙과 지중해에 전해지고 그리스가 토기문화의 절정을 이룰 때, 동아세아는 이미 금속문화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c. 550 BCE)에 문자가 새겨진 동전이 유통되었다.

 (그리스의 토기 사진과 상나라 청동기 사진)

중화인민공화국은 황하문명(黃河文明)보다 빠른 요하문명을 중화문명의 뿌리로 규정하고 동이족 역사를 뿌리로 하는 다음과 같이 동아세아의 유구한 역사를 정의하였다. (신석기/청동기 요령지역 문화와 주요 유적 발굴을 종합하여 1만 년전부터 지금까지의 기록을 위키백과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기원전 8000년 ~ 기원전 7000년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신낙 문화 유적(모계씨족의 정주 취락) 新樂 文化(신러) 랴오닝성 선양 시 북부 지역.

기원전 7000년 ~ 기원전 6500년 신석기시대 소하서 문화 유적 小河西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지역.

기원전 6200년 ~ 기원전 5200년 신석기시대 흥륭와 문화 유적 興隆洼 文化(싱룽와)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지역.

기원전 6000년 ~ 기원전 5200년 신석기시대 사해 문화 유적 査海 文化 내몽골 접경 사해 유역.

기원전 5200년 ~ 기원전 5000년 신석기시대 부하 문화 유적 富河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부하 유역.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4400년 신석기시대 자오바오거우 문화 유적 趙宝溝文化(자오바오거우) 내몽골 난하 계곡과 허베이 성 북부.

기원전 4500년 ~ 기원전 3000년 신석기시대 훙산 문화 유적 紅山文化(훙산) 내몽골 요동 하북 지방.

기원전 3000년 ~ 기원전 2000년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 소하연 문화 유적 小河沿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소하연 유역.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500년 초기 청동기시대 하가점 하층 문화 유적 夏家店 下層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맹극하(孟克河) 유역.

중국역사에 가장 길게 지속된 왕조이며 마지막 제국인 청나라도 한반도 백두산에서 자라난 누루하치가 세운 만주족의 국가이다. 중국의 성지로 장백산이라고 부르고 한반도와 접경하여 남쪽은 백두산이고 북쪽은 장백산이다. 중국 고고학계는 이미 한반도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문화가 황하문명보다 수천 년 먼저 발달한 사실을 인정한다.

4.2 상나라의 금속문화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고인돌 문화에서 시작된 금속문화는 북한과 만주 일대에 풍부한 석탄불에서 금속생산이 풍요로워지는 요동지역 문화로 이어진다. 고인돌 분포를 보듯 한반도와 서해주위에 중국 황하 양자강 하구에 거주해온 동아세아 씨족사회는 중국해안 일대 지역에 분포되어 중국 문화의 씨가 되고 뿌리가 되어 중국문화가 시작하고 세계를 일깨우는 동아세아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다. 금속문화는 인류생활에 폭발적 변화를 가져와서 인류문명의 산업혁명이 상나라시대에 이루어진다.

동아세아의 석탄 생산지역의 의 금속기술은 청동기와 철기시대 금속기술자들의 첨단기술을 이어받아 일찍부터 높은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한반도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는 청동기와 철기, 그리고 정교한 금 장식품들과 화려한 금도금 마구들이 보여준다. 금제품의 제작기술은 특히 우수하여 세계 어느 민족의 수준을 능가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6세기 중국의 유명한 박물학서인《本草經集註》에는 고구려의 금은 잘 정련되어 복용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고구려 금 정련기술의 우수함을 확인해준다.

호미와 괭이를 주로 쓰던 농업에서 금속기술을 바탕으로 철제 농기구를 만들어 소가 끄는 쟁기를 써서 논밭을 가는 기술로 농업발달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어냈다. 이렇게 새로운 개량 철제 농기구들이 개발되고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동아세아의 농업생산량은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인구폭발의 결과를 가져왔다. 인구밀도가 높은 동부해안에서 서부 내륙으로 확장해나갔다.

철의 생산은 동아시아의 매우 중요한 국가적 산업이었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풍부한 철광석의 산지들이 많았다. 세계에서 가장 일찍부터 철의 기술이 발달했다. 고구려 무덤 벽화는 과학기술의 역사를 그림으로 동아세아의 과학기술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철을 단련하는 기술자의 모습과 수레바퀴를 제작하는 기술자의 모습이 동아세아의 첨단기술을 보여준다. 철의 생산과 질이 좋은 철제품의 제조는, 동아세아의 무기․갑옷․마구․생산도구 등에서 나타나듯이 국가적 사업이었다.

철제 무기들과 마구는 특히 동아세아에서 시작된 세계를 침략하는 시원이었다. 나무를 다듬어 가구를 만들고 돌을 깎아 돌집을 짓고 말이 이끄는 금속 수레(chariot)를 만들어 사냥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번성을 가져온다. 가정에 살림살이 편리해지고 나라의 군대가 강성해져서 동아세아의 세계적 영향력이 확대된다. 북중미대륙에 동아세아 문화가 전해지고 5만 년 전에 이미 개통된 해안 길 따라 인도와 아프리카 나일강 유역에 문명의 파도가 전해진다.

금속문화의 고향인 요동반도의 랴오닝에서 세워진 상나라는 장강유역, 황하유역에 하나라(夏 ,Xia Dyhasty 기원전 2070년경 ~ 기원전 1600년경)를 정복하고 남쪽으로 이주해가서 안양에 이르렀을 때는 은나라로 이름을 남겼다. 기원전 1,600년경에서 기원전 1,046년경까지 400여년의 역사가 한대(漢代)의 사마천의 사기(史記) 기록과 상나라 유적 갑골문자로 전해진다.

하남성 안양에 1899년에 갑골문이 발견되어 1928년부터 1937년까지 15회에 걸쳐 발굴 조사된 은허 유적은 상(은)나라의 궁전과 주거지로 은나라 수도였음이 확인되었다. 토단(土壇)을 쌓아올린 궁전초석과 수혈식(竪穴式)으로 된 주거 유적이 있다. 큰 묘는 네모꼴이거나 아형(亞形)이며, 중앙의 관을 둘러싼 부장품으로는 청동의 용기, 무기, 악기, 옥으로 만든 장신구 등이 발굴되었다.

1976년에는 궁전 및 종묘 지구에서 처녀분인 부호(婦好)묘가 발굴되어 최고 수준의 청동기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부호는 동아세아 역사상 최초로 언급되는 여장군으로 그의 아들들은 무정의 사후 은의 왕위를 이었다. 이 무덤은 축조 연대가 확실하며, 피장자의 이름 역시 명확하여 은의 역사와 문화를 전해주었다. 수습된 유물은 1,928점인데 청동기 468점, 옥기 755점, 골기 564점이 발굴되었다. 16구의 인골과 6마리의 개는 상나라 문화에 순장재도가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위에 사진들은 상나라에 연관된 구글의 수집에서 퍼온 사진들이다. 금속제기의 고도의 생산기술, 눈을 강조하는 얼굴, 순장된 거마(chariot)들은 동아세아 문화와 문명의 수준이다. 상나라의 순장재도는 북남미의 마야. 잉카, 페루, 등의 문화로 이어진다.

4.3 인력거와 거마의 발달

일찍부터 발달한 농경생활과 요동지역 넓은 땅의 운송수단으로 수레가 이용되었다. 우차와 마차가 제작된 것이다. 견고하고 경쾌하며 넉넉한 짐을 실을 수 있는 수레의 제작과 힘센 가축이 끌기에 알맞는 수레장치의 개량은 중요한 기술의 영역이었다. 농사짓기 시작하면서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하는 연자매와 연자방아가 나타난다. 한반도 유적 중에 4세기 중엽의 안악 제3호분의 방앗간 그림과 5세기경의 무덤들에 그려진 수레의 그림이 있다. 방아와 연자매의 동력으로서 물레바퀴가 보급되었다.


고구려의 수레의 모습은 무용총 벽화에 그려진 소가 끄는 수레와 오괴분 5호분 벽화에 그려진 수레바퀴에서 볼 수 있다. 이 아름다운 그림은 5세기경의 고구려 수레가 훌륭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우리에게 그 시기의 수레와 멍에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수레바퀴는 철판을 테두리에 씌운 이른바 쇠바퀴가 등장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동아세아의 농경생활에서 쟁기를 만들어 사용하고 수레를 만들어 짐을 나르는 지혜는 일찍부터 시작하였다. 나무로 만든 바퀴 하나의 수레에서 시작하여 바퀴 둘의 수레를 만들게 되었다. 금속연장으로 둥근 나무바퀴를 만들다가 금속 축과 금속 바퀴가 만들어 지면서 사람을 태우는 인력거가 발달하였다. 동아세아의 인력거는 수천 년의 바퀴역사를 보여준다.

사람이 끌던 수레는 소가 끌기 시작하고 다음에는 말이 끌기 시작하였다. 수만 년 전부터 동아세아에서는 소, 개, 말을 가정에서 길러서 소는 밭을 갈고 짐을 나르며 개는 집을 지키고 말은 타고 먼 길을 다녔다. 세계에 다른 민족보다 일찍부터 시작하여 문화와 문명이 앞서는 원동력이 되었다. 말 중에 프레스왈스키 종류 (Prezwalski’s Horses)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만주지역에서 유목민들과 함께 생존해온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동아세아 기마민족은 일찍부터 말을 타고 세계를 누볐다. 그 말은 노새였다. 동아세아 인이 찾아낸 일꾼 말이다.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는 세상 짐승 중에 힘이 세기로 소문난 말이다. 몸짐 좋은 어머니 말과 끈기로 이길 자가 없는 당나귀 아버지 말 사이에서 태어난 말이다. 부모의 좋은 점만 닮아 기운이 좋고 인내심이 강하다. 외모가 아버지를 닮아 목이 짧다. 노새는 부모보다 훨씬 수명이 길어 50년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새끼가 나고 크는 것은 보지 못한다. 노새는 조금 춥거나 더운 날씨를 가리지 않고, 가파른 산을 넘고 길고 긴 행군을 해도 잔병치레 없이 해낸다. 하지만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노새가 자식을 낳은 일은 없었다.

소가 끄는 두 바퀴 수레에서 네 바퀴 수레로 발전하면서 농업은 산업화되고 바퀴의 축에 금속을 사용하면서 만주에서 시작된 바퀴 두개를 말이 끄는 수레(chariot)가 나타난다. 지급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전차는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지역에 발견된 안드로노보(Andronovo) 문명, BC2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차는 청동무기와 함께 두 마리의 말이 이끌었었다고 한다.

소보다 속도가 빠른 말 수레가 나타나면서 괴력을 가진 전차가 무기로 나타난다. 영국의 버밍헴대학 교수이며 역사학자 스티브 로버트(Stephen Roberts)는 1,300 BC에 이집트와 히티티(Hittites) 사이에 전차전쟁 (Battle of Chariots)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동아세아 하나라 2,100 BC의 전차전쟁은 아직 알려지지 안했다고 2013년 9월 15일에 발표하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의 말(馬)과 차(車)의 문자진화 과정을 보아도 문자가 있기 이전에 바퀴달린 수레가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기마민족의 유적은 허다하다. 말을 타도 전차를 몰아 아프리카의 흑인들과 지중해 연안의 아랍인들을 정벌한 이집트 제국의 왕족은 동아세아 사람인 듯하다. 훈족이 말을 타고 지중해를 찾아가서 로마를 정벌하였다. 칭기즈칸이 유럽을 정벌하러 몰아간 기마병이 노새들이요. 그런 후에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타고 넘은 게 백마가 아니라 실은 몽골군의 후예인 노새였다고 한다.

기원전 700년에 기록된 손자병법에 경전차 치거(馳車)는 말 4마리가 끄는 공격용 수레이며 10만 명의 병사들을 대적한다고 했다. 치거 한대에 장교 한명, 기마병 10기, 전투요원 5명으로 구성된 전투부대이고 취사병 2명, 장비관리 1명, 마구간 관리와 사육 2명으로 말 4마리와 21명의 병사로 치거 소대를 이루었다. 중전차 혁거(革車)는 양식과 무기를 운송하는 수레이며 가죽을 덮었기에 혁거라고 한다. 소 1마리가 끄는 두 바퀴의 수레이며 장교 1명, 보병 10명, 비전투 요원 3명으로 구성된 혁거 소대라고 기록되었다. 손자병법에서 손자가 춘추전국시대 각 나라의 치거(馳車)와 혁거(革車)는 모두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가리킨다. 중국 베이징대 리링 교수의 손자병법 강의에서 1천대씩은 보유하고 있어야 패권을 다투는 제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전차는 인류의 대규모 전투나 전쟁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최첨단 무기였다. 또 기원전 1500년을 전후로 인더스문명의 몰락, 중국 상나라의 몰락과 주나라의 건국,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역사적인 카데시 전투 등이 전차와 관련이 있다. 인더스 문명(BC 2500-1500)년은 아리안족의 침략에 무너졌다. 만주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던 유목민족이었던 아리안족은 전차와 초창기 철기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주(周)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징벌할 때 사용한 것도 우월한 전차였다. <맹자> 진심(盡心) 하편에서는 무왕이 혁거 300대와 용감한 병사 3000명을 거느리고 상나라를 정복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은허로 유명한 황하지역의 한 문명이 기능이 향상된 새로운 전차로 무장한 신흥 국가에 정복된 것이다.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가 맞선 이 전투에서 전차의 운용은 전황을 좌우했다. 서로 승리를 선언한 두 나라는 결국 기원전 1270년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고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인간은 곧 말이라는 더 신속성이 있는 가축을 발견하고 길들여갔다. 말의 빠른 속도라는 능력이 가축화를 추진했던 주요한 목적이었다. 이렇게 마차가 등장하면서 인류는 전차의 발명은 전쟁무기의 혁명을 가져왔다. 군사용으로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바퀴와 축의 발명과 함께 비로소 가능해졌다. <시경(詩經)>에 처음 만들어진 전차의 재료는 박달나무가 쓰였다고 기록돼 있다. 박달나무와 같은 단단한 재질의 나무를 불에 구워 구부린 뒤 결합시켜 둥근 바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활과 창은 전차 위에서도 표적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도록 개량되어 합성궁(合性弓, composite bow)의 발명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합성궁은 나무나, 동물의 근육, 뿔 등을 아교로 붙여 만든 활대가 기존의 활보다 짧아져 전차 같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 사용하게된 것이다.

동아세아 만주지역에서 기원전 2,000년께 만들어진 안드로노보 전차는 곧 각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됐을 것이다. 전차가 가진 빠른 속도와 공격력은 아라아인의 인더스문명 정복,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대결, 주나라의 상나라 정벌 등이 이루어졌다. 진시황제 용갱에서 보여주는 전차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제국을 세운 기동력이다. 로마제국보다 500년 전에 제국을 세운 진시황제의 기마병과 전차를 보면 동아세아 문화가 지중해 문화보다 항상 앞서왔음을 증명한다.

4.4 동아세아의 거마 (車馬 Chariot)

중국, 중동, 인도, 이집트 등 세계 문명의 초창기에 널리 쓰였던 인류 최초의 기동병기였다. 초원과 평야지대에서 현대전쟁의 전차(Tank)처럼 위력을 발휘했다. 중국 역사에서 전차에 대한 기록은 하(夏)나라 때(기원전 21~16세기)부터 발견되는데, 한나라 때 사마천의 사기에 하나라 우왕의 본기는 고대의 전투가 전차로 싸웠으며 전차에는 3인의 전사가 탔다고 했다. 중앙에 탄 전사는 말을 몰고 좌측에 전사는 활을 쏘고 우측에 전사는 창으로 찔렀다고 기술했다.

춘추전국시대 유가의 기록에는 전차는 앞에 말 2마리 혹은 4마리가 달렸고, 보통 3명이 탑승했는데 지휘관이 왼쪽, 무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이 오른쪽, 전차를 모는 사람이 가운데 위치했다. 전차를 몰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유가(儒家)에서는 전차 모는 기술을 ‘어(御)’라고 부르며 선비가 익혀야 할 여섯 가지 기예[六藝] 중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영국의 버밍헴대학 교수이며 역사학자 스티브 로버트(Stephen Roberts)는 1,300 BC에 이집트와 히티티(Hittites) 사이에 전차전쟁 (Battle of Chariots)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동아세아 하나라 2,100 BC의 전차전쟁은 아직 알려지지 안했다고 2013년 9월에 발표하였다. 이집트와 히티티(하나라 초원군?) 사이에서 전차전쟁은 6000여대가 맞붙는 초대형 전투로 벌어졌다. 양 군대 전차의 차이를 보자면 이집트 전차는 몸체의 중간이 아닌 뒤쪽에 있던 바퀴의 축이 좌우로 길어서 선회가 훨씬 쉬웠다고 하며, 히티티 전차에 탄 3사람들은 가죽갑옷을 입고 방패로 방어하면서 활과 창으로 상대편을 공격했는데, 먼 거리에서는 화살을 쏘고 가까이 접근하면서 두 전차가 지나쳐 갈 때 창과 방패로 서로 공격하는 방식이었기에 하나라 초원군이 더 선진적 차원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말 2마리가 끈다면 한두 명이 타며 1명이 타면 연락병 등의 단순한 이동용이고 2명이 타야 일반적인 전투용이고 4마리가 끈다면 3~4명이 탔다. 1명은 마부이며 자주 방패를 들고, 나머지는 활이나 창 등의 병기를 썼다. 4두 전차는 싸우는 자들보다 마부가 더 좋은 급료를 받았다는데, 여러 마리의 말을 한꺼번에 다루기가 힘들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해서였다. 한문에는 ‘사'(駟)라는 단어는 한문 이전부터 발달된 4두 전차를 의미한다. 이집트의 2인승 전차는 마부도 고삐를 허리에 매고 활을 쏘는 그림이 있는데, 이집트는 3인승 전차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동아세아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3세기)에 흥행했던 전술병기 전차는 수량이 국력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전차 1대에 탑승자 3명, 보병 72명, 지원병 25명을 합해 총 100명이 한 부대를 이뤘다. 역사기록에 나오는 천승(千乘)의 표현은 전차를 1000대 보유했다는 제후국 국력으로 약 10만의 병력을 거느린 큰 나라를 뜻한다. 손무는 자신의 저서 손자병법에서 천자는 만승(전차 1만 대) 병력 100만으로 규정하였다. 보통 갑옷 입은 병사 3인이 승차하고 공격용, 호신용 무기와 백패(白旆, 끝이 갈라진 흰색의 깃발)를 장착했다. 전차로 작전을 펼칠 때는 전투구성이 중요했다. 깃발과 북을 싣고 다니며 서로 연락하거나 지휘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했다. 산간 지역보다는 평야지대 전투에 주로 투입됐다.

중국 최초의 제국이었던 진시황제 용갱에서 보여주는 전차의 모습을 끝으로 한나라(漢, 기원전 206년 ~ 220년)에 접어들면서 전차는 점차 산간 지형에서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과 보병으로 대체되면서 전차는 역사 속으로 바퀴자국만 남기고 사라졌다.

만주초원의 유목생활 중에 야생마를 가정에서 기르기 시작하는 무렵에 만주지역 석탄불에서 시작한 금속바퀴의 발명으로 이루어진 동아세아 유목민의 전쟁방법인 듯하다. 동아세아에서 사계절 따라 평지농업이 발달하면서 바퀴문화가 발전하고 격자형 도시계획이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말 한 마리에 한사람이 시작하였다가 말 두 마리에 두 사람이 타게 되고 나라가 커지면서 전차도 커져서 말 4마리에 3사람이 타는 성장 과정이 동아세아에서 이루어지는 동안에 세계 여러 곳에 전차(戰車 Chariot) 기술이 분포된 듯하다.

4.5  투탄카먼과 이집트의 문화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웅장한 만큼 그들의 주인 된 파라오의 무덤은 더욱 깊이 숨겨있다. 지난 3,500년 동안 대부분의 무덤은 도굴꾼의 손을 탔지만, 1922년 11월 26일에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발굴한 투탄카멘의 무덤은 가장 완벽한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어있었다. 이집트 박물관의 12만점 고대 왕조유물들 전시 중에 가장 귀중한 중앙 위치에 전시한 1,300여점은 투탄카멘의 유물이다.

아세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의 국립과천과학관에서 2011년 10월에 전시하였다. 이들 전시품은 이집트의 전문 공예 수공가들이 가문에 대대로 물려오는 기술을 동원하여 유물 하나하나와 똑같이 재현한 복사품들이다.

전시된 투탄카멘의 무덤은 전실, 별실, 현실, 그리고 유골사당, 모두 4개의 방으로 나누어졌다. 입구에서 전실에 들면 입구 건너편에 별실이 연결되었고 2개의 전차(chariot)가 해체된 모습으로 여러 개의 바퀴들과 함께 흩어져 있다, 전실의 가구들은 궁전의식에 사용되는 가구들이고 별실에 아무렇게나 싸여진 가구들은 왕의 사생활 가구들이다. 고구려의 고분이 전실과 후실로 나누어지고 전실은 생시의 모습을 후실은 영생의 모습을 나누었다. 여기도 같은 배치이다.

현실은 투탕카멘의 미라가 보관된 방으로 전실에서 현실의 입구가 옆으로 나있어 현실과 유골사당은 일직선으로 방향을 맞추었다. 현실 안에 미라는 4중 외관으로 보관되었고 그 속에 3겹의 내관으로 모두 7겹으로 층층이 보호하고 있다. 내관마다 가면과 장식이 왕의 앞모양을 장식하여 다시 목숨을 얻어 살아남을 준비하였다. 현실의 발쪽에 유골사당은 미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거된 시신의 유골을 보관한 사당이다.

사당의 주위에 4여신이 지켜서있고 현실에 미라를 향하여 소의 신이 자리를 잡았고 그 앞에 개의 신이 함께 현실을 향하여 지켜보고 있다. 많은 동물들이 그림과 조각물로 장식되었지만 실재 무덤 안에서 사람과 함께 영생을 나누는 역할은 소와 개만이 동반자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한반도에 아이들 이름이 지어지기까지 “개똥아.” 혹은 “소똥아.”라고 불렀다. 여기에 똥은 아이 동(童)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소와 개의 문화는 농경과 유목이 합하여 수만 년의 진화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동아세아의 문화이다. 아프리카의 환경에서는 그러한 진화과정이 없다.

소는 농경생활에 오랫동안 사람과 동반자이고 동남아세아에서 일찍부터 쟁기를 끌고 수레를 끌어온 짐승이다. 개는 6만 년 전에 동북 아세아 사람이 늑대를 기르기 시작하면서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동아세아의 홍산문화는 요동반도의 남쪽에서 들어온 농경생활과 북쪽에서 내려온 목축생활이 융합되어 세계의 문화와 문명이 가장 일찍 형성된 장소였음이 세계 고고학계에서 최근에 밝혀졌다. 이집트 문화보다 2,000년을 앞섰다.

동아세아의 신석기시대 고인돌은 천체와 조상이 혼합된 종교양식으로 한반도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청동유물이 고인돌에서 발굴되어 금속문화가 동아세아에서 제일 먼저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유적이기도 하다. 동아세아의 흙산(mound) 짓는 풍습과 고인돌 문화는 적석총(pyramid)을 짓는 풍습이 홍산문화에서 시작된다.

요동반도와 한반도 북부에 석탄이 풍부하여 금속과 철기생산이 쉽게 이루어졌고 나침판을 만들고 말이 이끄는 전차(chariot)의 바퀴 축을 생산하였다. 투탄카멘이 즐겨 타던 전차를 자세히 관찰하면 온 몸통을 동아세아의 청동기에서 흔히 보는 ‘감긴 실 무늬’로 감싸서 장식하였다. 전차는 동아세아에서 가장 일찍 시작되어 상나라 때에 전성기를 지냈고 진시황제 용갱에서 발굴된 4 마리의 말이 끌어가는 완벽한 전차를 볼 수 있다. 이렇게 완벽한 전차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다.

투탄카먼의 묘를 발굴한 하와드 카터는 깨진 도자기에서 닭의 그림을 보고 파라오의 음식에는 아프리카에 없는 닭이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고구려 무용총 천정에 그려진 닭의 그림이다. 닭은 원래 동남아세아의 대나무 순에 자라는 벌레를 먹고 자라던 날지 못하는 새였다고 한다. 사람이 농사짓기 시작하는 날부터 농가에 들어와 사람이 먹는 곡식을 얻어먹으며 사람의 식탁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아프리카 음식에 아직 닭이 없을 때에 닭을 먹는 이들 왕족은 아프리카를 찾아 온 동아세아 인이었음을 암시한다.


파라오 가구와 그림에서 고구려 벽화에서 보듯 사슴사냥 하는 그림을 자주보고 전차를 타고 흑인과 아랍인들을 정벌하는 모습도 자주 본다. 소와 개의 신이 지키는 사당은 보물 방이라고 부른다. 가장 깊숙한 곳에 시신의 유골과 함께 가장 귀중한 보물들이 보관한 곳이다. 소와 개가 시신의 영혼을 동반하였고 보관된 유물들 중에 크고 작은 배들의 모형이 있다. 그중에 나무 돛단배는 금속도구로 나무를 다듬어 조선된 원양항해를 하는 배다. 투탄카멘의 유골과 함께 보관된 원양항해의 배는 그들의 고향이 소와 개들 함께 사는 머나먼 나라이었음을 상상하게 한다.

이집트 문화의 피라미드는 동아세아처럼 흙산을 짓고 고인돌을 세우는 피라미드의 성장과정을 찾아볼 수 없다. 고인돌에서 시작한 동아세아의 층단식 적석총이 지어진 다음에 동아세아의 삼각형 피라미드 모습을 본받아 피라미드를 지었다. 동이족의 상나라에 금속문화가 전성을 이루며 나전칠기 같은 동아시아의 가구들이 발달아였다. 투탄카먼의 가구들이 동아세아의 문명을 보여주고 있다. 말이 끌고 달리는 전차를 보면 말의 고향은 만주 벌판이고 전차의 금속 축과 바퀴는 동아세아의 금속문화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동아세아에서 사람이 하나의 바퀴 위에 짐을 실어 나르고 바퀴 두 개로 인력거를 만들고 말이 끄는 전차가 만들어질 때까지의 진화과정이 동아세아에만 있었다.

유럽의 고고학자들을 투탄카먼의 단검도 별에서 얻은 금속이라고 말하지만, 아프리카에서 볼 수 없는 동아세아의 금속재품이다. 파라오들 중에 동아세아의 얼굴들이 있고 동아세아인의 모습과 이름도 많다. 투탄카먼도 을지문덕이나 연개소문처럼 4발음의 이름이다. 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고 흑인과 아랍인을 정벌하는 그림들을 본다. 아래 그림처럼 상나라 청동재기에 눈을 강조한 예술과 갑골문자에서 발전한 이집트의 문자를 보아도 같은 근원을 본다. 금속무기와 금속연장으로 만든 나무배를 타고 5만 년 전부터 이미 열려서 통행하는 해변 길을 따라 가끔은 전차를 몰아 사냥하며 동아세아와 아프리카를 왕래함은 어렵지 안했다.

아프리카 나일강 유역에 피라미드를 건조한 왕과 귀족들 중에 동아세아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장 큰 피라미드의 주인 쿠푸(고부)가 작은 체구에 동아세아인의 인상이다. 그와 함께 일한 건축가 헤무누 역시 얼굴에 광대뼈가 높은 동아세아인의 모습이며 그들의 후손들이 혼혈아의 특색인 아름다운 모습이며 동아세아에서 명명하던 4자 이름들이 많다. 우리나라 고구려에 연개소문, 을지문덕처럼 북미대륙에 원주민들의 이름과 같은 현상이다. 아프리카 귀족들이 사용한 가구들 중에 옥돌, 상아, 목재칠기등의 모양은 동아세아 제품들과 유사하다.


(두 그림에서 보여주는 이집트의 눈과 상나라의 눈이 공통성을 보인다.)

집에서 개와 닭을 기르고 소와 함께 밭을 갈며 말을 달려 사슴을 사냥하는 동아세아 나라들의 역사에는 수많은 귀족들의 권력 다툼들이 이어져왔다. 전차를 달리며 싸우다가 필사의 도망을 쳐서 멀리 떠난 기록도 허다하다. 한반도의 왕족이 일본에 처음 국가를 설립했듯 동아세아의 왕족이 지중해에 나일강까지 찾아가 수만 년을 앞선 동아세아 인의 지혜가 흑인과 아랍인의 노동력을 만나 위대한 이집트 파라오의 화려한 역사를 일궈냈음을 이해하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아프리카 황무지에 돌연변이로 나타난 이집트의 파라오 문명은 동아세아에서 온 것이다. 플라톤(Plato)이 찾았던 세계 문명의 어머니 아트란티스(Atlantis)는 동아세아이었음이 분명하다.

10만 년 전에 태어난 현대인류가 5만년을 거쳐 동아세아에 이르는 동안에 동남아세아의 풍부한 음식을 먹고 정착된 가정에서 처음으로 현대인류의 언어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입고 온 짐승 옷을 벗고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동아세아에 이르러 죽음의 계절 겨울을 맞아 인간과 자연의 경쟁에서 석탄불의 혜택으로 겨울을 이겨내어 내륙생활에 익숙해지며 단련된 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석탄불에서 흘러나는 금속무기와 연장은 나무와 돌의 모양을 바꾸고 현대인류 생활에 혁명을 가져왔다.

피라미드를 지어 올려 하늘과 선조의 영을 모시고 말이 이끄는 금속바퀴 전차를 만들어낸 동아세아인은 5만년 전에 떠나온 길을 따라 어머니의 땅 아프리카를 찾아간다. 나일 강의 젖줄기를 다시 찾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현대인류의 금자탑 이집트의 문화를 이루었다. 이집트 문화는 동아세아에서 나일강 하구에 도착하여 시작하고 아프리카 내륙으로 깊숙이 옮겨 들어간 모습을 본다.

4.6 동아세아의 바퀴문화에서 시작된 도시계획

신석기시대주민들은 식량자원이 풍부한 큰 강가나 바닷가에 정착하여 살았다. 신석기시대의 집은 동굴을 이용하거나 바닥에 돌을 깔고 만든 것도 있으나 보편적인 형태는 움집으로 해안가 언덕이나 평지 위에 지었다. 움집은 지름이 4∼6m되는 원형이나 네모꼴의 구덩이를 50∼60cm정도 파서 바닥을 만들고, 바닥에 화덕 등 필요한 내부시설을 한 뒤 지붕을 덮은 것으로 별도의 벽체시설이 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꽂은 집이다.

바닥에는 진흙을 깔거나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풀이나 짐승 가죽을 깔것으로 하고 지붕은 움구덩이 주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서까래의 다른 한 쪽 끝이 중앙에 묻히게 하여 고조를 형성한 후 나뭇가지나 갈대 등의 마른 풀을 덮어 만들어 원추형이나 사각추형 이었다. 계단이나 경사면을 만들어 비가 내려도 물이 흘러들지 않도록 했다. 토기를 묻어 만든 저장시설도 있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집 내부를 적절히 사용하여 다목적으로 이용했다. 보통18㎡ 크기의 집을 짓고 평균 4∼5명으로 구성된 가족을 단위로 모여 산 듯하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짐승과 물고기를 잡아먹었으며, 식물의 열매나 뿌리도 채집하여 먹었다. 또, 계절에 따라 이동 생활을 하면서 동굴이나 강가에서 막집을 짓고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뼈낚시, 그물 등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였고, 돌창, 돌화살 등으로 사냥을 하였다. 한편, 식물의 열매나 뿌리를 채집하여 먹는 생활을 하다가, 차츰 농사를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되면서 정착 생활이 더욱 길어졌다.

농경 생활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돌괭이로 땅을 일구고 조, 피 등을 재배하여 돌낫, 뼈낫 등으로 추수를 하였으며, 돌갈판에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또, 가락바퀴로 실을 뽑고, 뼈바늘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다. 씨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나아가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즉, 이들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선석기시대 저습지 및 패총유적에서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8,000년 전 통나무배가 출토됐다. 4m를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철기나 청동기 같은 금속기가 발명 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대단히 치밀하게 가공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했다. 배를 만들기 위해 당시 사람들이 통나무를 군데군데 불에 태운 다음 돌자귀 같은 날카로운 석기를 이용해 깎아내고, 다시 갈돌과 같은 기구로 표면을 정리하는 방식을 구사했음이 드러났다. 이를 증명하듯 선박 곳곳에는 불에 그을려 가공한 흔적인 초흔(焦痕)이 발견됐다.

제주도 박물관과 세계 여러 곳에서 보는 집배는 우리나라 초가지붕처럼 짚과 마른 줄기를 엮어 배를 만들어 물에 띄웠다. 대나무나 통나무를 묶어 물에 띠워 배를 만들어 타고 고기잡이를 하였다. 중국 계림에 리라강 고기잡이는 어부가 가마우지 다리에 묶었던 줄을 풀어 물속으로 출동을 시킨다. 줄이 풀린 가마우지는 순식간에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더니 잠시 후, 물 밖으로 불쑥 솟아올라 어부 앞으로 달려가 부리를 내밀며 머리를 조아리고 어부는 가마우지 입 속에서 한 뼘도 넘어 보이는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쑤욱 잡아 빼낸다.

가마우지를 며칠 동안 굶겨서 배고프도록 만든 후 큰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도록 목을 끈으로 묶어 놓은 다음 강 위에서 가마우지를 풀어 놓으면 배고픈 가마우지는 허겁지겁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순식간에 고기를 잡아 삼켜보려 하지만 목에 감겨있는 끈 때문에 뱃속으로 넘기질 못하고 주인에게 달려와 빼 달라고 사정을 하면 고기를 끄집어내주는 식으로 고기를 잡는다고 한다. 계림지역의 전통적인 가마우지 고기잡이 방법이다. 이러한 대나무 배와 고기 잡는 방법은 일본에서도 불 수 있기에 한국에서도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상고시대 생활 방법의 모습이라 추측된다.

씨족 사회가 성장하여 마을을 이루고 돌담을 쌓아 둘러서 마을을 보호함은 작은 도시를 형성하는 처음 모습이었다. 이들 사회에서는 경험이 많은 부족장이 농사, 사냥 등 생산 활동을 지휘하였다. 마을이 커지면 제후국으로 성장하고 도시국가와 왕의 지위가 형성된다. 돌담은 성곽을 이루고 왕의 주거지는 궁성으로 성장하게 된다. 거기에서는 노예를 제외한 자유민이 정치를 행하며 또한 귀족의 총회·정치·사교·교역 등이 전개되었다. 원시 사회에서 고대 국가에의 과도기에 나타난 정치 형태이다.

기원전 1,136년에 조성한 주 왕조의 풍경(酆京)과 기원전 1,133년에 조성한 호경(鎬京)이 있다. 선사시대 주거지의 유적을 발굴하여 박물관으로 조성된 반파촌은 신석기시대의 앙소(仰韶)문화에 속하는 마을 유적으로, 탄소 측정에 의해 지금으로부터 6,000년 이상 된 주거지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알지만 아버지를 모르는’ 모계 씨족사회의 절정기에 농업의 발달을 바탕으로 조성된 50,000 제곱미터 면적의 주거지인 반포 유적지에는 씨족 우두머리의 집이자 씨족 구성원들의 집회 장소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남북 12.5미터, 동서 10미터의 ‘큰 집’을 중심으로 집들이 분포한다. 80만 년 전의 남전원인(藍田原人), 6천 년 전의 반파인(半坡人)은 모두 서안의 동쪽 산하(滻河) 부근에서 모계 씨족사회를 영위했다.

광대한 피정복민 지역에 왕실의 자제, 일족 및 동맹부족 출신자들을 파견하여 제후로 분봉, 배치하고 평민의 감시와 주변 이족의 반란에 대비하였다. 이런 제후에게 봉지를 분봉했던 봉건제도에는 당연히 제왕이 천하의 모든 토지와 인민을 소유한다

봉건제후의 관계는 왕실인 대종에 대한 봉건제후인 소종의 혈연적 관계를 기초로 한 원래 부족사회 내에서 씨족조직이 발전, 변화되어 체계를 갖춘 종족제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의 성장은 세계역사의 첫 제국이 동아세아에서 탄생하기에 이르고 한결같이 적용되었던 도시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종교적 성지의 평면을 보면 성전을 가운데에 두고 동쪽, 남쪽, 혹은 서쪽을 향하여 문을 세우고 문은 성지에 들어가는 경계를 상징했다. 문과 성전은 축을 이루고 양쪽에 음과 양을 상징하는 좌우 대칭되는 평면을 만들었다.

처음 문은 두 개의 기둥으로 시작하여 나중에 보를 얹어 일본 신사의 문은 그때의 전통으로 남아있다. 문 앞에는 층계를 만들거나 물을 건너는 다리를 만들어 성지를 속세에서 분리시켰다. 성전 앞에 층계를 만들어 더욱 높은 위치를 강조하였다. 성지가 발달하고 성장하면서 사방에 문을 세우고 회랑을 둘러 격자형의 평면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격자형 평면은 살아있는 왕의 위치를 종교화하여 굴궐과 궁성 건축에 적용되었고 궁성 주위에 성곽 배열과 도시계획에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농경생활에 소가 이끄는 쟁기가 만들어지고 바퀴하나의 수레로 짐을 옮겼다. 바퀴 2개의 수레를 사람이 끌다가 소가 끌고 쇠바퀴가 만들어지며 말이 끄는 전차(Chariot)가 만들어진 유래는 동아세아에서만 보이기에 바퀴문화는 동아세아에서 시작하였고 바퀴문화에서 격자형 도시계획이 탄생하였다. 영국의 버밍헴대학 교수이며 역사학자 스티브 로버트(Stephen Roberts)는 1,300 BC에 이집트와 히티티(Hittites) 사이에 전차전쟁 (Battle of Chariots)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동아세아 하나라 2,100 BC의 전차전쟁은 아직 얼려지지 안했다고 2013년 9월 15일에 발표하였다. 그는 동아세아의 전차문화는 하나라와 상나라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설명한다.

동아세아 해안의 농경문화와 내륙의 유목문화가 융합되는 요동반도에 인구가 집결되고 동아세아에서 제일먼저 경쟁사회가 형성된다. 씨족사회는 도시국가 체제로 성장하다가 크고 작은 도시국가 왕들이 모여서 제후를 선출하여 제후국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에 그 지역의 지하자원 중에 석탄은 금속을 대량생산하는 능력을 갖게 하고 여러 가지 금속기술과 재품들은 생활도구와 군사무기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와서 도시계획이 필요하게 되었다. 금속연장으로 큰집을 짓고 금속 축을 넣은 바퀴는 빠르게 멀리 달리는 전차를 대량생산하였다. 큰 짐을 나르는 마차를 만들어 운송산업과 함께 모든 산업이 부흥하였다.

동아세아의 건축 및 축조기술은 궁궐과 성곽 및 무덤 등에서 그 양상을 가늠할 수 있다. 유적과 유물에서 미루어 그 설계와 시공이 높은 기술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장안성과 국내성, 장군총과 같은 유물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궁전과 사찰의 건축기술은 거대한 규모의 집터들과 여러 고분의 벽화에 그려진 건물의 그림들, 유적들에서 발견되는 벽돌과 기와들과 석재들, 그리고 그 밖의 건축자재들에서 그 발전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602년에 중 관륵이 천문지리서(天文地理書)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와서 書生 24명을 선발하여 가르쳤다는 기사가 있다. 지도의 제작과, 도시의 조성 계획 설계, 토지 측량 및 정비 등과 연결된다. 일본의 도성경영에 정연한 도시계획은 백제에서 건너간 과학자들의 지도이다. 백제 지리학과 지도제작 수준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계획과 설계를 밑받침하는 백제의 지리학을 보여준다.

장안(서안)은 동서 9,721미터, 남북 8,651미터에 이르는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의 격자형 계획도시이다. 외성의 주위는 37.7킬로미터에 달해 그 면적은 84.1 평방킬로미터였다. 인구는 약 100만 명에 달했다. 당시의 세계적 도시인 바그다드가 직경 2.3킬로미터이고 콘스탄티노플도 동서 5킬로미터인 것을 고려하면 장안의 거대한 규모는 동아세아의 선진국의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안성에서 구현된 왕성 배치의 기본 형식은 만주지역 발해의 상경부(上京府), 한반도 고구려의 장안(長安; 평양), 신라의 왕경(王京; 경주), 일본의 평성경(平城京; 나라)과 평안경(平安京; 교또) 등의 도시와 미국 원주민의 고대 도시 팔렝케와 테오티후아칸의 도시계획으로 동아세아 도시들의 고통성이다. BC 3000∼BC 1500년에 번영한 인더스 문명의 모헨조다로(Mohenjodaro)유적의 도시계획도 같은 모형이며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이 동아세아 인의 것으로 추정되어왔다.

모헨조다로(Mohenjodaro)유적은 BC 3000∼BC 1500년에 번영한 인더스문명의 중심을 이루는 도시유적이다. 1921∼1931년 J.H.마셜, E.마케이 등이 발굴하였고, 1950년에는 R.휠러도 조사하였다. 도시는 남북으로 주축이 된 큰 통로에 의하여 바둑판처럼 구획되었고, 서쪽의 중앙에는 높게 기단(基壇)을 쌓은 성채가 있다. 동쪽의 시가지는 4개의 큰 통로에 의해 9블록으로 구획되었고, 다시 각 블록은 몇 개의 직교하는 작은 길로 나누어져 각 호(戶)가 배치되었으며, 가옥은 벽돌로 지었다. 성채는 성벽으로 둘러싸였는데, 높이는 최고 12 m이고 남북으로 긴 모양이며, 규모는 430×230 m 정도이다. 성채 안에는 사원으로 생각되는 대규모의 건물, 큰 욕장(浴場) ·곡물창고 ·회의장으로 추정되는 건물 등이 있는데, 특히 욕장은 욕통의 크기가 19×7.5 m, 깊이 2.5 m이다. 배수는 지하의 배수로에 의하여 큰길의 하수도로 흐르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도시의 구역을 살펴보면 요새유적과 그 밑의 도시유적 노동자 거주유적 등이 기능에 따라 배치되어있다. 이들 구역의 모든 건물은 구워 만든 붉은색 벽돌로 지었다. 그리고 우물을 파고 원형으로 벽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우물은 7백개나 되었다. 방수처리한 상하수도에도 역시 벽돌을 사용했다. 도로는 오늘날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정확히 동서와 남북을 이었다. 도시계획은 물론 도시토목을 맡은 전문 엔지니어가 설계한 도시가 바로 모헨조다로인 것이다. 이 도시를 건설할 때 엄청난 분량의 벽돌이 들어갔다.

이 면밀한 도시계획은 벽돌의 크기(규격벽돌; 길이 28cm, 너비 14cm, 높이 18cm)나 자 ·저울추의 출토에서 볼 수 있는 도량형의 규격화와 함께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졌음을 추측하게 한다. 그 밖에도 토기 ·동기(銅器), 아직 해독되지 못한 문자를 새긴 인장(印章), 장신구 등의 유물이 동아세아의 것들과 유사하다. 이러한 큰길은 바퀴가 굴러가는 길이며 동아세아에서 일찍부터 소와 말을 이용하고 금속 축을 사용하는 바퀴가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종교건축에서 궁성건축으로 궁성건축에서 성곽도시 건축으로 성장한 동아세아 도시성장 과정이 세계 여러 곳에 전해진 현상이다. 한필원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의 보고서(Xian, the Model of the East Asian Cities)에 의하면 『주례』「동관 고공기」의 도성 모델에 나타나는 (九宮格局) 중국 상고시대의 경작제도인 정전법(井田法)은 주대에 와서 완성된 듯하다고 설명했다.

캄보디아 앙고르왓트 사원 건축에서 보듯 8갈래의 물길이 장안을 둘러싸는 입지조건으로 댐을 만들어 수량을 확보하고 도시용수를 정원용수의 급수 시스템을 완성했다. 조운을 개통하여 수로를 통해 물자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사방을 9리로 하고 각 면에는 세 개의 문을 설치한다. 도성에는 남북 동서로 각각 9갈래의 길을 내고 길의 폭은 9궤(軌; 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폭, 1궤는 8주척(周尺))로 한다. 궁성을 중심으로 왼쪽에 조상에 제사하는 건축을, 오른쪽에는 사직에 제사하는 건축을 둔다. 앞에 조정을, 뒤에 시장을 둔다. 시장과 조정은 한 쌍이다.

서안시 장안의 도시계획을 보며 동아세아의 도시건설과정을 정리하면 가장 먼저 방위를 확정한 후 궁전의 위치와 궁전에서 남쪽으로 향한 왕도의 의례선이 정해진다. 즉 궁전을 왕도 건설 예정지의 정중앙에 두고 궁성의 중핵을 차지하는 대흥궁의 남문인 소양문(당의 승천문)에서 정남쪽으로 성 안을 관통하는 남북 축선을 길게 낸다. 이 남북축은 소양문가(당의 승천문가)에서 .주작문가로 뻗어 외곽선 남문인 명덕문을 거쳐 진령 종남산의 석별곡에 이른다. 이 축은 하늘의 자오선에 대응하여 왕조 의례의 축선 기능을 했다.


황성의 조영과 더불어 외곽성의 성문 사이를 잇는 주 간선도로가 건설되었다. 남북대가 셋, 동서대가 셋 등 대가가 여섯인데 이것을 육가(六街)라 부른다. 대가를 결정한 뒤대가 사이의 좀 더 작은 도로, 곧 소가(小街)를 정하였다. 외곽성에 접한 도로를 제외하면, 남북도로는 모두 아홉 개, 동서도로는 열두 개가 된다. 왕도 건설의 마지막 단계는 외곽성의 성벽을 건설하는 것이다. 장안성은 궁성 ∙황성 ∙외곽성을 관통하는 남북 축선, 곧 주작대로를 중축선으로 하여 대칭적으로 정연하게 구성되었다. 축선을 중심으로 궁전, 관청, 유교 ∙불교 ∙도교의 종교건축물, 시장 등이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었다. 시가지는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동서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주례(周禮)는 유가가 중시하는 경서이자 13경의 하나로 6관 가운데 동관사 (토목공사)를 소관한 고공기가 있다. 도성 양식에서 설명하는 모형은 동아세아 전역과 인도, 그리고 북미의 고대도시에서 보여주는 도시계획 (City Plannimg Manual)로 일찍부터 동아세아에서 조성되어 온 듯하다. 동아세아의 농경사회는 성장이 빠른 경쟁사회에 였고 신석기시대부터 바퀴달린 수래가 움직이는 큰길 도시를 계획한 것이다. 금속문화의 절정을 이룬 상나라는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권을 이루어 주나라에 전해주었다.

주례 동관 고공기에 기록된 도성 모델은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북미대륙에 고대 도시, 등의 도성을 건설하는데 음양오행 철학에서 가장 오래 발달되어온 형식을 따른 듯하다. 장안의 도성 모델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굴된 도시나 북미대륙의 고대도시처럼 격자형 규칙적이고 표준화된 도성 공간구조이다. 거대한 도시를 이렇게 신속하게 건설하는 방법으로 동아세아에서 시작된 도시계획으로 추정된다.

4.7 세계 제국 진나라와 진시황제(The first Emperor, Qin Shi Huang)

위키백과에 의하면 진시황제(秦始皇帝, Qín Shǐ Huáng Dì)는 BC 259년 1월 ~ BC 210년 음력 7월 22일까지 전국시대 7나라 중에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전국시대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 시행으로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고 한다. 대규모의 역사, 의술, 농경에 관한 유서들을 불태우고 460명 학자들을 생매장한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초래하여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BC 230년부터 소한, 조, 연, 위, 진, 초, 제, 등의 나라를 차례로 정복하고 역사상 최초의 통일중국을 수립한 왕이 되었다.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호를 택하여 진시황제가 되었다. 한반도와 만주, 몽골로 이어지는 흉노를 두려워하여 만리장성을 쌓게 하고 아방궁을 세우고 자신의 능묘를 건설하는 대토목공사를 진행하여 1974년에 한 농부가 우연히 발견한 서안시 근교에 진시황릉의 병마용갱을 현재 우리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진시황릉은 높이 76미터 넓이 350 평방미터에 이르는 흙으로 조성된 거대한 피라미드이다. 중국 정부는 능묘발굴을 앞으로도 10년을 더 기다려 학문적 준비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능묘에서 약 1킬로미터 거리에서 발굴된 용갱은 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그리고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고 한다.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 종류의 틀이 사용되었고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를 조합하여 다양한 형태의 병마용을 제작한 것이다. 다리 부분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로 같은 틀을 사용하여 대량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결과로 기와의 생산과 같은 일상생활 용품의 제작에서도 같은 방법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1974년 이제까지 4개의 갱도가 발굴된 중에 8천 여점의 병사, 전차 130개, 말 520점, 기마병 150점이 발견됐다. 군인 외에 관료, 곡예사, 궁사, 음악가의 모습도 나왔다. 1호 갱에서만 진용 6000구, 전차 40대 발굴. 제 2호 갱에는 기병과 근위대의 용병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BC 246년 시작된 지하 궁전으로 설계된 진시황릉 건축에 70만 명이 동원됐다고 기록되었다. 수은이 흐르는 강 100여개, 수십 개의 망루를 가진 도성에 보물과 병사. 완공된 후엔 도굴을 막기 위해 인부들을 생매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산시 성 시안 시 린퉁 구에 있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은 한 농민이 1974년에 밭에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지금까지 4개의 갱도가 발굴되었다.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는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사, 말, 전차, 등의 흙으로 빚어진 모형이 보존된 갱도이다.


진시황릉은 높이 76미터 넓이 350 평방미터에 이르는 흙으로 조성된 피라미드로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을 받았다. 이들은 후에 동유럽의 터키와 헝가리 민족을 남겼으며 북유럽의 바이킹 역사와 핀란드 족을 남긴 듯하다. 병마용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의 등신대로 제작되었으며 얼굴 부위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다. 병마용의 존재는 진시황제의 강력했던 권력을 상징한다. 그는 불노초를 찾지 못하고 임종했지만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은 세계사와 동아세아의 역사에 훌륭한 마디를 남겼다.

5만년 전부터 내륙으로 아주하기 시작한 동이족은 만주, 몽골, 티베트를 지나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출하여 지금의 비단길을 개척해 나갔다. 동아세아의 동이족이 진나라 제국을 세울 무렵에 비단길은 드디어 지중해와 동유럽에 이르러 유라시아 대륙의 내륙통로(intercontinental rout)를 이루어 냈다. 동아세아와 지중해 동쪽의 민족이 지중해 서쪽으로 이주해 들어가며 동아세아 문명의 파도가 이탈리아 땅에 이르고 진나라가 제국을 세운지 200년 후에 로마제국이 설립된다. 동아세아의 전술과 기동력을 갖춘 동아세아의 훈족이 453년 아틸라 장군이 로마를 정복하고 유럽을 지배했음은 만주와 몽골족이 기마병과 전차의 힘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절대적 강자였음을 보여준다.

진시황제가 주나라를 이어 통일제국을 세울 무렵에 요동지방에 유목국가 중에 하나인 예치족은 갠지스강 유역에 이주하여 쿠샨국을 세우고 팽창하여 북부인도 대부분과 동유럽에 카스피해까지 이르는 영토를 확보하는 대쿠샨제국을 건설하였다. 후에 중국의 당나라와 그리고 유럽의 로마와 교역하여 인도에 불교문화의 절정을 이루고 인도역사에 통일제국역사가 시작된다. 로마제국 이후 유럽의 중세기 침체는 1229년에 몽골의 칭기스칸이 유럽을 깨울 때에 까지 계속된다. 유럽은 다시 동아세아의 원나라 제국의 문명을 얻어 자립하기 시작하여 세계의 현대사는 칭기스칸 때부터 판도가 바뀌었다.

4.8 일주일이 7일된 유래

인류역사에 가장 일찍 ‘7’ 숫자를 표현함은 한반도의 신석기시대에 고인돌의 평바위에 북두칠성의 일곱 별자리를 구멍 내어 새겼던 때로 여겨진다. 고인돌 문화는 한반도에서 신석기 시대에 나타났으며 청동 칼과 도구가 고인돌에서 처음 나타났기에 동아세아의 금속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일찍 발달하여 현대 인류의 생활혁명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석기시대 문화가 고구려 문화로 상속되어 고인돌은 적석총(Pyramid)으로 발달하여 이집트 문화보다 2천년을 앞선 홍산문화를 이룬다. 만주 지린성 일대의 적석총과 고구려 고분에 남겨진 음양오행의 사상은 동아세아의 종교이며 과학이었다. 고구려 고분 안에 천정에는 해와 달을 그리고 시신을 중앙에 안치하고 동쪽에 파란 색 룡을, 남쪽에 붉은 색 새를, 서쪽에 하얀 색 나무를, 북쪽에 검은 색 뱀과 거북을, 그리고 중앙에 시신은 노란 색 옷을 입혔다. 살아서 경험하는 자연환경을 무덤 안에 영생의 분위기로 만들어놓았다.

해와 달은 음과 양을 상징하고 동쪽에 물, 남쪽에 불, 서쪽에 나무, 북쪽에 금속, 중앙에는 흙으로 오행을 상징하여 음양오행은 7개의 요소를 이루어 우리문화에 ‘7의 숫자는 성스러운 숫자가 되었다. 음력 7월 7일에 소를 몰아 밭을 가는 총각 견우성과 배틀 돌려 옷감 짜는 처녀 직녀성이 은하수에서 만나는 전설이 전해진다. 동아세아에는 오랫동안 달의 음력을 사용해왔다. 한 달이 28일이며 매달 3번, 일곱 날마다 장마당이 서고 모여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교환하는 생활 풍습이 이루어져 왔다. 동아세아의 음과 양 오행으로 합하여 만들어진 7숫자는 고구려 문화에서 보여주는 도교 철학이다. 동인도 간지스강의 불교로 전해지고 불교는 서남아세아의 기독교로 전해져서 성경에 7숫자가 4백여 번 이상 나타나는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진시황제가 기원전 216년에 제국을 세우고 세계역사에 처음 황제로 등극한 다음 200년이 지나서 지중해에 로마제국이 나타난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제왕은 기원후 325년에 스스로 기독교를 공인하고 7일주기 사바스 신봉제도를 선포하여 그 때부터 일주일이 7일로 정해졌다. 일주일에 Sunday는 해의 날, Monday는 달의 날, Tuesday는 불의 날, Wednesday는 물의 날, Thursday는 나무의 날, Friday는 금속의 날, Saturday는 흙의 날이 됨도 이들 단어가 로마시대 해 달 불 물 나무 금속 흙을 상징하는 신들의 이름이었다.

이미 동아세아에서 전해오는 문물은 해로와 육로의 비단길 따라 물밀 듯 흘러들어오는 시대였다. 로마가 세워진지 400년이 지나서 AD 430년에 동아세아에서 노새(말과 당나귀의 합종)를 타고 달려와 지중해까지 찾아온 훈족의 아틸라가 로마를 정복하기도 했다. 동아세아의 음양오행의 다섯 요소가 로마 언어에 신의 이름으로 등장하여 일주일의 이름으로 불러졌음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4.9 사마천 <사기>의 중국역사 시작

한나라 때(206 BC- 9AD)에 하은주 나라들의 역사기록을 <사기>에 담아 편찬한 사마천은 중국역사가 훈족의 후예를 이어받았다고 믿었다. 고구려 고분의 천정에 그려진 북두칠성의 이야기를 <천관서>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하늘의 궁 중앙에 태일성(북극성)은 황제로 주위에 왕기와 후궁 별들과 왕자 별들이 왕가를 이루었다. 그 옆에 북두칠성은 천제(天帝) 수레(車馬)라고 하였다. 천제가 수레를 타고 하늘의 중앙을 한 바퀴 돌면 일 월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이 음양을 구별하고 사계절을 나누며 24절기를 꾸려서 하늘과 땅 위에 질서를 세워간다고 했다. 하늘의 신화로 이야기하는 내용에 만주 유목민의 말이 이끄는 수레가 있고 음양오행이 있고 금속문화가 있는 고구려 문화가 보인다. 고조선(고구려) 문화는 하나라 세워지기 이전에 이미 완성된 문화임을 보여준다.

사마천 <사기>의 오제본기에 하북 하남에서 산동반도에 이르기까지 중원의 대부분을 순임금이 다스렸으며 농업과 어업으로 성읍을 세우고 도기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문화의 다양한 업적을 이루어 문명을 크게 일으켰다는 기록을 남겼다. 후에 고고학적으로 요순임금 시대의 홍수기록을 비롯하여 룽산문화 (3000~2000BC)의 발굴 작업으로 확인되었다. 황제를 표상하는 용의 근원이 훈족의 고향인 홍산문화(4700~2900BC)에 처음 나타나서 음양호행의 구성을 이루고 중국 황실의 전통이 된 사실을 보아도 황하의 문명은 요하문명을 이어받은 사실을 보여준다.

은(상)나라의 갑골문자 발견과 해독으로 은나라의 존재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 하나라의 존재도 세계가 인정하게 되었다. 고대문자와 청동기와 옥기 부장, 고분건설과 수리 배수사업, 순장제도, 수레의 운송으로 발달된 도식계획이 산서성 혼합문화로 시작하는 하나라의 특성으로 후에 이리두 문화로 연결됨을 본다. 하나라와 은(상)나라로 연결되는 북방 금속문화는 종화민족과 혼합된 주나라가 설립되면서 복방민족의 대이동이 <사기>에 기록되어있다.

춘추전국시대에 북에는 연(燕)나라만이 남고 동으로 제(齊 백제), 남으로 초(楚), 서로 진(秦)으로 흩어지면서 중원은 주나라의 후예들이 차지하였다. 이 때 남으로 내려온 금속문화 민족은 사천성 성도시 주위에 삼성퇴 문화(三星堆,Sānxīngduī 3500~1000BC)로 계승하여 하나라 때부터 이어온 지중해 이집트 문화와의 연결을 지속한다.

중원의 세력을 물리치고 서쪽 서안시 주위에 진(秦)나라 시황제가 세계 역사에 처음으로 통일제국을 설립하고 유럽에 이르는 비단길이 열린다. ‘진’이 유럽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이름인 시나(Sina)가 이 때 시작하여 차이나(China)의 어원이 되었다. 동아세아 정치여파는 지중해에 전해져서 500년 후에 로마제국이 일어서지만 100년 후에 훈족의 아틸라(라틴어: Attila)는 비단길 따라가 로마와 유럽을 침공한다. 서안시 주위에 진시황제의 병마용갱은 1974년에 발굴되어 유럽은 동아세아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되었다. 진(844~206BC)나라는 중원의 주나라 후예 한(漢)나라에게 중국역사의 주도권을 내어주어 사마천의 <사기>는 하은주와 한나라의 기록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역사는 북방민족과 남방민족이 산서성에서 융합하여 아름다운 혼혈아들이 태어난다. 중국역사의 4대 미인,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가 두 민족이 만나는 산서성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산서성을 지나는 만리장성은 세계역사의 세계 최강 나라들 사이에 최장기간의 분쟁을 상징한다.

4.10 중국의 동북공정

중국의 역사는 한, 수, 송, 원, 명, 청으로 이어져서 청제국은 장백산(백두산)에서 자라난 누루하치가 중화한족의 명나라를 정복하고 가장 거대한 영토와 가장 오랜 제국을 유지하였다.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이 서안시 외곽에 진시황제의 무덤이라고 전해진 거대한 피라미드를 발굴하였다. 발굴 유물들은 진시황제의 무덤이 아니었다. 황하문명이 아닌 동이족 고조선의 유물임을 알게 되었다. 1973년에 시도된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진시황제 보다 수천 년 이전의 유물임이 밝혀졌다. 그 때까지 만리장성 북부에는 문화가 없는 야만족인 동이족이나 훈족으로 알려진 지역문화가 중국 황하문명보다 더 일찍 더 훌륭하게 존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진시황제의 무덤을 포함한 그 일대의 모든 발굴조사나 학구적인 연구를 금지하고 동북공정 정책을 발표하였다.

중국 공안 당국은 한국민족의 역사와 분쟁이 되는 모든 역사유적을 폐쇄하고 접근을 금지하고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 56개 소수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고 규정하고 지금까지 지켜온 중국한족의 제한된 역사관을 탈피하고 중국보다 앞선 동이족(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문화도 중국의 문화라는 학교 교과서를 발부하여 학교 교육부터 시작하고 있다. 마치 일본이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교과서를 발부하여 학교 교육에 사용하는 정치적 교육과 같은 것이다.

한국의 위키백과의 설명에 의하면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 동북부 지역의 동북 3성(헤이룽 장성, 지린성, 랴오닝성)에서 일어난 과거 역사와 그로 인한 현대사와 미래사의 현황에 관련하여 2002년 초부터 2004년 초까지 그리고 2007년 이후 지금까지 변강사지중심 (邊疆史地 硏究中心)에서 실시된 연구 작업을 포함한다. 정식 명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 (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다. 동북공정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에 의한 국책사업이며,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한다고 했다.

동북공정은 만리장성 외곽에 홍산문화와 서안의 진시황제 무덤에서 시작된다.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蔵)에 의해 발견되어, 1935년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나 미즈노 세이치(水野清一) 등에 의해 대규모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전쟁 후에 각지에서 발굴이 잇달았다. 이 문화는 원래 1954년 홍산(紅山) 뒤쪽에 있어 ‘홍산후'(紅山後)라 하였는데 차즘 홍산후를 기념하여 ‘홍산문화’라고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1984년에 흙으로 빚은 여신의 얼굴상이 출토되었다. 랴오닝성 차오양시(朝阳市, 조양시) 뉴허량(牛河梁, 우하량) 여신묘 (女神庙)로 중국 1급 역사 유물로 지정되어 랴오닝성고(辽宁省考古) 연구소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2년 64건의 금지출국 전람문물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황하문명이 중국문명의 주인으로 자부해 왔다. 그러나 동이족의 영역이던 요령성에서 황하문명보다 1000∼1500년이나 앞선 제대로 갖춘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서 ‘범민족적 문화발전론’을 내놓았다. 홍산문명이 동이족의 것이라는 사실은 감추고 ‘중국의 요하문명’이라고 했다. 중국의 고대문화가 세계 최고最古라고 주장하고 있다. 홍산문화에 대해서는 2003년 6월부터의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란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요하문명이 황화문명과는 처음부터 이질적인데도 중화문명의 시발점으로 만들어서 홍산문화든 북방 고대민족의 고대사든 모두 중국사로 쓸어 넣겠다는 중국정부의 노력이다.

서안의 진시황제 무덤지역 역시 동이족의 문화이기에 발굴을 중단하고 동북공정에 관한 교육을 서둘고 있다. 이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요하공정(遼河工程)은 중화인민공화국 동북부 요하지역의 역사와 현황에 관련하여 제시된 공정의 하나로 일명 뿌리 찾기 운동을 말한다. 하지만, 황하문명이 만주문명의 뒤를 따라 이루어진 사실을 외부에 발표하기를 꺼려한다. 발표하기 이전에 처음부터 중국문화며 중국역사라고 주장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5. 비단길의 시작과 만리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