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미국 유학 (1)

최용완

1966년 5월 28일 나는 미국으로 가는 판 아메리카 에어라인 제트엔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 김포공항은 작은 시골학교 이층건물 같았고 운동장에 활주로를 깔아놓은 듯 조촐한 모습이었다. 비행기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자동차 엔진을 사람이 꼬챙이를 꽂아 돌려 시작하듯 비행기 프로펠러를 손으로 돌려서 비행기 시동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 때였다.

공항의 이별

평생 처음 층계를 밟고 오르며 설레는 가슴을 누르고 신비의 세계에 발을 드려놓는 마치 촌놈 서울 가는 기분이었다. 정해진 의자에 벨트를 여미고 과거를 털고 달리는 활주로 폭음소리에 그동안 발붙여 살던 땅에서 드디어 헤어지는 느낌과 뒤에서 손 흔드는 가족과 친구들의 이별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리라 약속하고 떠나는 발길에 지난날과 다가올 날의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점술가의 예언

아버님의 뇌졸중 병세로 앞이 막막해진 어머니 옆에서 유학을 한해 미루었다가 가족의 권유로 드디어 출발하기에 이르렀다. 그 전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유명한 백운학 점술가를 찾아갔다. 문을 열고 온돌방 방석 위에 앉았을 때, 어머니가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하자, 그는 대뜸 “미국에 잘 가는 거여. 여기 있으면 동생 죽여.”라고 말을 했다. 어머니와 나는 내심 매우 놀랐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부터 예언자(?)의 말을 믿지 않고 듣지도 않고 다음날 출발 준비에만 몰두하였다.

숭례문 중수공사 현장 뙤약볕에서 2년 동안 실측과 제도를 마치고 25세 새파란 나이에 문교부 문화제 전문 위원으로 여수 진남관 보수공사를 하는 동안 신문 기자와 승강이도 많이 했다. 미국에 형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국에 골동품 건축만 연구하지 말고 미국에 와서 넓은 세상눈을 뜨라는 편지를 보내와 선배와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미국 가서 공부하고 온다고 짐을 꾸렸다.

비행기는 일본 동경에 멈추고 하와이, 센 프란시스코를 거쳐서 목적지 미네아폴리스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표값은 $550.00 막대한 비용이었지만, 다행히 나보다 2년 전에 미네소타대학교에 유학을 간 형이 보내주어 천만다행 호강하게 되었다. 호주머니에 돈은 박정희 군사정부의 규칙에 따라 외국에 출국하는 여비, 고작 $50.00이고 가진 짐은 비행기회사의 표에 딸려 온 하얀 가방 하나 어깨에 달랑 멘 것 하나뿐 있었다.

동경의 키다리 넨시

동경에 도착했을 때 교토에서 일본역사 공부하는 키다리 낸시가 마중 나왔다. 낸시는 내가 숭례문 중수공사 현장에 일하고 있을 때 카메라를 메고 현지답사를 와서 우연히 만나게 된 미국 유학생이다. 집이 미니애폴리스에 있고 한국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나는 서울 근교에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곳을 안내했었다. 영어에 익숙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옳다구나 하고 낸시와 함께 고향 광주에 우리 집을 찾아가서 부모님을 만났다. 여행하는 동안 모든 경비를 내가 감당했었다. 그 여인은 나보다 나이가 2살 더 많은 30세이고 키가 훨씬 더 컸기에 우리 집에서 잠잘 때, 두 다리가 이불 밖으로 튀어나와 그때부터 어머니와 동생들은 키다리 낸시라고 불렀다.

낸시는 공항에서 나를 보자 땀 냄새난다고 목욕탕에 먼저 데리고 갔기에 조금 창피했지만 고마웠다. 대학 다닐 때부터 하숙집에 세숫대야에만 신세를 졌지 목욕탕에 주는 돈이 아까워 모욕을 주저하는 버릇이었다. 그 통에 아버지는 나를 ‘중국 꾸리’라고 놀리기도 했다. 옷을 벗고 목욕탕에 들려는데 남녀가 섞여있어 당황스러웠다. 일본은 일곱 살 되면 남녀를 가린다는 유교도덕이 미치지 못한 곳임을 알았고 모르는 여자 알몸을 쳐다보는 내 얼굴이 뜨거웠다. 그들은 나를 유심히 보는 것 같아 안절부절 뛰어나왔다.

교도와 나라의 역사탐방

낸시가 교토와 나라에 백제역사 건물들을 보여주는 동안 같은 방에서 자고 지냈는데 여행에 몰두해서인지 서로 이성이라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내가 갖고 싶어 하는 사진을 계속해서 찍어주었다. 나라에 이세 신궁은 일본의 성지로 촬영금지 지역인데도 카메라를 치마 속에 숨겨서 주위 사람들 눈을 피해 정성스럽게 찍어주었다.

일본은 서기676년에 신라와 당나라군에 쫒긴 백제 인들이 세운 나라이며 지금까지도 백제문화와 건축물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한반도는 고려 때 원나라의 영향으로 문화의 변질이 왔었지만 일본은 세 번 불어온 가미가제(신의 폭풍) 덕택으로 몽골의 침략을 면했기에 한반도의 삼국시대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다. 공무원 교육원에서 가르치는 동안 공부한 덕이 있었다.

만나는 일본 사람들은 검소하고 친절하였기에 내 마음에 침략자 일본인의 기억이 차츰 사라지는 듯했다. 낸시가 나를 그들에게 미국 유학생이라고 소개할 적마다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고 그들이 미국을 동경하는 겸손한 국민임을 알 수 있었다.

하와이의 에버트

하와이는 태평양 건너는 비행기가 연료를 공급하러 멈추는 곳 이였다. 파란 눈 Mr. Evert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역시 숭례문 공사장에 찾아온 미국 라이프 잡지의 사진기자이다. 그의 아내는 하와이 원주민 추장의 손녀이다. 그의 조부가 하와이를 어느 나라에 소속할까 결정하는 무렵에 일본에 속할 수 있었지만 미국에 속하도록 결정한 사실이 천만 다행이었다고 하와이의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주민 박물관을 구경하고 한국 사람이 사탕수수 밭에 일하며 60년 전에 처음으로 미국에 정착하게 된 역사도 알게 되었다.

미국에 첫발 딛고 하루 지난 동안 모든 환경이 낯설었다. 내가 말하는 영어에 yes와 no의 분간이 가장 어려웠고 고깃살, 빵, 버터, 치스의 음식 냄새에서 벌써 김치가 그리워졌다. 백인들 중에 동양인을 처음 만나는 듯한 눈빛에서 호기심도 보였지만 낮춰보는 느낌도 들었다.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갈등을 느낄 수 있었다. 공항에서 변소를 찾는데 영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사고 낼 번한 순간도 있었다. 돈 환율계산이 항상 힘들었고 $50을 거의 다 써서 호주머니가 달랑달랑해졌다

종착지 미네아폴리스 도착

비행기는 센 프란시스코와 씨아틀을 거쳐 새벽 4시에 미니애포리스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형과 닥터 골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닥터 골트는 의과대학 부학장으로 그가 서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왔을 때 형을 만나 우리 가정을 알게 되었다. 유네스코 교육 재정을 감독하는 직책으로 한국에 공립대학들을 도와주었다. 형과 누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개학하는 9월까지 그이 댁에 머물러 미국 생활을 시작하였다.

미국은 영화에서 보았듯이 물자가 풍부하고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이기에 내가 떠나온 모국은 사람값이 싸고 물건 값이 비싼 얼마나 가난한 나라인지 처절한 느낌마저 들었다. 좋은 음식을 대할 적마다 한국에 두고 온 가난한 가족 생각을 자주하며 가슴이 쓰렸다. 집 사이에 담장이 없고 도둑이 없어 밤에 문을 잠그지 안했다. 이름도 성씨가 뒤에 오고 숫자를 세는 손가락 순서도 반대이고 아이들과 여자가 어른보다 먼저이고 지금까지 내가 자란 한국의 문화와 습관에서 거꾸로 된 것들을 하나씩 배워갔다.

학교와 직장 일을 정확하게 아침 8시에 시작해서 5시면 문을 닫는 기계적인 삶이기에 사람인가 기계인가 조금은 답답하고 냉정해 보였다. 직장에서 집에 가는 길에 동료들과 만나 빈대떡집 일차와 이차하던 낭만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곳 전문인의 삶은 낮 사람과 저녁 사람으로 완전히 분리되는 이중인격 생활이다. 사회의 직책에 기능역할은 하루에 8시간이고 저녁과 밤 16시간은 평등한 바닥에 시민으로 돌아와 가정 일하며 가족과 즐기는 건실한 사회임을 실감하였다. 토요일 일요일을 모르고 24시간 공부하고 일만하던 나의 습관에서 갑자기 둔갑하는 환경에 어리둥절했다.

미네소타대학은 모교 서울대학과 자매결연

이차대전 전쟁 중에 아버지 직장 따라 가족이 만주로 이사했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염불하고 합장 기도하는 습관을 가르쳐 주셨기에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교회에 다니는 때도 아침에 일어나면 염불 먼저 했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일요일에 교회에 다니는 습관을 배우게 되었다. 미국은 기독교 이념에서 세워진 나라임을 이해하게 되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친구들 모여서 성경공부도 시작했다.

미네소타대학교는 서울대 모교와 자매결연하였기에 한국 학생이 무척 많았다. 한국에서 하나같이 똑똑하고 수제라는 학생들이 미국에 와서 언어 불편으로 잔뜩 풀이 죽어 살았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은 사람마다 달랐다. 어떤 학생은 어딘지 제정신이 아닌 듯 행동마저 이상해지고 작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워 옆 사람을 불평하게 하는 경우도 자주 보았다. 한국 부모에게서 학비를 받아와서 공부하다가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낙제한 학생 중에 자살까지 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서울공대 화공학과의 수제들은 미국대학 중에 앞서가는 미네소타대학 화공학과 대학원에 상위권을 차지했다.

한국 학생들이 모여서 학생회를 조직하고 우리끼리 서로 도우며 멀리 두고 온 모국의 향수를 달랬다. 지금처럼 라면이라도 있었으면 얼큰한 한 그릇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일본 사람 부부가 자기 집 가라지에서 몇 가지 동양음식 재료를 팔아주는 곳이 고작이었다. 이미 학교를 졸업하고 가정을 이루어 직업이 안정된 한인 가정에서 처녀총각 파티를 열어주면 오랜만에 한국 음식도 먹고 제일 즐거웠다. 그런 모임에서 눈이 맞아 결혼하는 축복된 부부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도움 요청

매년 4월이면 미니애폴리스와 세인트폴 두 도시의 축제가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참석하는 문화 축제에 한인회가 없었기에 학생회가 주축이 되어 한국문화를 알리고자 뜻을 모았다. 먼저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띄우고 도움을 요청했다. 아슬아슬하게 축제 며칠 전에 전깃줄에 매달린 종이 색등과 태극기 수십 개가 장식물들과 잘 포장되어 도착하였다. 여학생들과 유학생 아내들이 한복을 입고 전시물 차에 타서 색등에 불을 켜고 태극기를 흔들어 한국의 위상이 돋보이는 성공한 행사이었다. 그 후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현구 학생회장에게 감사장을 보내왔다.

아르바이트와 학교 공부의 톱니바퀴

그때는 유학생들에게 직장을 허용했기에 새벽에 일어나 아침 7시부터 11시까지 건축 사무실 직장에서 일하고 기숙사에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오후 1시부터 강의실에 들어갔다가 강의 끝나면 곧 건축과 설계실에서 밤늦게 설계숙제를 하는 날이 2년 동안 기계 속에 톱니바퀴처럼 돌아갔다. 주말에는 이웃 동내 마당에 풀을 깎아주고 몇 푼 받아오기도 했다. 시간당 $1.25를 받고 시작했지만, 그때 25센트는 밥 한 끼를 넉넉히 먹을 만큼 여유 있었기에 아끼고 아껴서 저축하면 간신히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학생이 교수 어깨 위에 팔을 얹고 농담하는 것 처음봐

대학원 담임교수 월터 바이브레트는 외국학생들에게 친절하지만, 우리가 조심스럽고 어려워했다. 한국에서 교수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넥타이만 보는 한국식 겸손이 미국에서는 통하지 못했다. 눈을 마주치고 웃지 않으면 죄지은 사람처럼 의심스러운 눈초리만 받았다. 미국 학생들이 교수님 어깨에 팔꿈치를 얹고 농담하는 것을 보았지만 우리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었다. 교수님은 정드는 재자들을 좋아하는 듯했기에 나도 그렇게 노력했지만 도저히 미국 학생들처럼 건방진 행동을 할 수 없었고 손해만 보는 듯 했다.

미네소타 주는 미국에 겨울이 가장 길고 겨울 기온이 가장 낮은 곳이다. 내가 4살에서 8살까지 중국의 만주 북방에서 살았기에 그때의 겨울을 기억한다. 눈 폭풍에 집 한쪽이 눈으로 덮이면 지붕 꼭대기에서 썰매타고 마당까지 내려오던 기억을 한다. 미국의 다른 주 친구들에게 “우리도 사계절이 있어요. 7월 8월 9월과 겨울.”이라고 농담도 했다. 여름 계절이 짧지만, 일만 개의 호수가 널려있어 수영과 낚시도 쉽게 즐길 수 있다. 타주에서 친구들이 찾아온다고 전화하면 모기장 들고 오라고 농담할 만큼 모기도 많다. 세인트폴과 미니애폴리스는 미시시피 강 유역에 8마일 간격의 쌍둥이 도시(twin city)로 알려졌다.

미국 북방에 우일한 성장도시지역

두 개의 대도시가 어울려서 젊은 세대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었기에 미국의 북방도시로 유일하게 성장하는 추세를 유지하는 지역이다. 다운타운은 불록마다 실내로 연결하는 브리지가 설치되어 겨울에 밖에 나가지 않고 사업과 문화 활동의 도시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겨울의 출근길은 시내버스를 이용했지만 추운 날에 밖에 나가면 코와 손발에 동상 걸리는 위험이 있고 아차하면 응급치료를 받아야 한다.

미네소타 대학교에 캄스탁 홀 기숙사는 6층 건물이며 560여 명의 학생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5층과 6층은 대학원생에게 배당되었고 모두 독방이 주어졌다. 주말에 가족 방문은 허용했지만, 여학생은 들어오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식사시간에 기숙사 식당에 모여 앉아 고국소식을 나누고 국제우편으로 전해진 한국음식을 나누어 먹는 재미가 제일 좋았다. 누군가 고춧가루를 가져와서 음식에 뿌려먹었을 때, 주위에 미국 학생들이 제체기를 시작하고 모두 도망가거나 피해가는 모습도 우리를 웃기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우리는 조금씩 조심스러워졌다.

창 밖게 매달아둔 김치병

마른 오징어와 문어는 우리에게 소중하게 아껴먹는 고향 맛의 절정이었지만, 외국 학생들에게는 여자 음부의 고약한 냄새로 비유하기도 하며 싫어했다. 우리는 지네들 썩은 치스 냄새가 더 고약하다고 대들기도 했다. 어느 우체국 집배원이 한국에서 소포가 왔는데 너머 많이 썩은 것 같아,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통보한다. 찾아보니 아슬아슬하게 포장된 김치와 몇 가지 젓이었다. 조심스레 다시 잘 싸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며칠 후에 청소부가 모두 치워서 다시 쓰레기통 신세를 지며 수모당하는 음식이 되었다. 구조해서 이번에는 마지막 격리 보관처인 유리창 밖에 매달아 두었다. 그 후부터 기숙사 건물 밖에서 보면 김치 병 매달린 유리창이 제법 많아졌다. 어딘지 부끄럽고 창피했지만, 문화의 차이는 해결이 없는 도전이다.

미국은 자동차의 나라다. 미국생활에 신발과 같다. 자기 신발을 갖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지만, 자전거타고 다운타운 직장에 다니는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자동차 값 저축은 여간 힘들었다. 어느 날 다운타운에서 학교 교정에 거의 도착했을 때 경찰차가 길을 막고 빨간불 파란불을 번쩍이고 있었다. 길가에 두 학생의 시체들이 누워있고 파손된 독일제 폭스바겐은 두 동강이 되어 뒹굴어져 있었다.

두 대의 차가 정면충돌한 사고였다. 아주머니가 운전한 링컨 커티넨탈 차는 아무러치도 않고 값싸고 가벼운 학생들 차는 심하게 망가져 있었기에 차를 갖고 운전함도 두렵고 조심스러워 졌다. 미국의 지엠과 포드 자동차는 세계의 자동차 산업을 장악하고 미시간 주에 디트로이트 시는 자동차 산업의 왕국으로 뽐내는 전성기였다. 일본의 혼다 모터싸이클과 독일의 폭스바겐 둔버그가 학생들에게는 가장 안성맞춤이었다.

한번은 기숙사 친구가 폭스바겐 둔버그를 사들였기에 네 사람 타는 작은 차에 아홉 사람이 탔다. 무릎 위에 어깨 위에 허리를 걸치고 그 위에 포개 눕고 아홉 사람은 미니애포리스 국제 공항에 몰려갔다. 한사람의 발끝이 창밖으로 나왔기에 교통경찰의 눈에 띌까 봐 조심스럽게 운전하고 갔다. 고국을 떠나서 이곳에 첫발을 내려딛는 곳, 하늘로 치솟으면 고국으로 찾아가는 그곳, 꿈속에 그리는 고국으로 날아가는 듯 땅에서 바퀴를 접어 올리며 떠오르는 비행기 꼬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눈물 글썽한 가요를 부르며 밤이 새도록 향수를 달래는 때도 있었다.

건축과 친구 중에 식당에서 접시 닦는 일을 하며 대학 다니는 어려운 친구가 대학원 설계실에 자주 들렸다. 이야기 나누다 알고 보니 서울 운동장에서 고려대 운동선수로 뛰던 친구였다. 시합 도중에 서울 공대 선수들에게 거칠게 굴어 내가 동료들을 대신해 목숨을 걸고 태클 한번 날렸던 친구다. 그런 추억을 기억하며 둘이는 서로 가까워졌다. 어느 날 밤늦게 설계실에서 한국어로 이야기하다가 때마침 미국학생들이 들어오기에 그 친구들도 우리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우리 이야기 듣는 듯하더니 한마디 던진다. “너희 한국말이 영어같이 들린다.”고 그때 우리의 영어가 그들에게는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식 영어였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 와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미국 말만 하고 양담배만 피는 미국사람 뿐이었다. 유학생으로 기숙사 식탁에 모여앉아 한국말을 떠들어대는 즐거움은 삭막한 이국땅에 오아시스였다. 고향 소식 나누고 기쁜 소식 슬픈 소식 함께 나누는 친구들이다. 한국과 미국의 정치이야기는 그칠 줄 모르는 토론이며 기독교인과 무신론자의 토론은 핏대 올리는 열변을 토하는 말싸움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우리는 보통으로 이야기하는 말도 외국인에게는 무척 시끄러운 것임을 모르고 떠들어대다 나중에 중국 사람들 모여서 떠드는 모습을 보며 알게 되었다. 한국대학 병원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정신과 의사가 우리와 함께 기숙사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한사람 한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며 우리 안에 절반 이상의 유학생들이 스트레스로 정상적인 정신에서 균형을 잃고 있다고 나에게 귀띔하였다.

극심한 정시적 스트레스

모국에서 똑똑하고 천재라고 칭찬받던 자부심과 자존심이 이곳에서 의사소통을 못하고 새로운 환경에 익숙하지 못해 병신취급을 받는 수난을 겪어야만 한다.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여 군사훈련 받을 때 전혀 교육 받지 못한 시골 청년을 ‘고문관’이라는 존경스런(?) 이름으로 왕따 시키던 기억이 난다. 주위에서 박수 받으며 존경받던 위치에서 격리되고 불상한 동정심의 대상이 된 느낌은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쓰레기로 버려진 듯한 두려움과 멸시받는 눈초리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잠을 자지 못해 무척 피로해 보이고 신경이 예민해진 학생들이 정신과 의사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귀국하는 학생도 종종 볼 수 있었고 심지어는 자살하는 경우까지도 보았다. 그중에는 몇 사람이서 일부러 여학생들과 밤에 강가에 모여 떠들기도 하고 웃기는 시간을 만들어 도움이 되는 듯 했다.

한인 학생회장으로 선출

나는 한인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나누며 내 자신의 인생 공부도 하는 듯했다. 학생회장 선출된 며칠 후에 평양에서 인쇄된 북한신문이 우편함에 배달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 온 외국 학생이 많았기에 누가 북한과 연결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한 달에 한번 오는 인쇄물인데도 김일성 찬양이 눈에 거슬렀다. 한국에서 새로 입학하여 입국하는 학생의 통고를 대학에서 받으면 비행장에서 학교로 안내하는 일도 했다. 푼돈을 모아 올스모빌 헌차를 구했는데 다행히 똥차보다는 조금 고급스럽다고 친구들이 놀려댔다. 나의 학과과정은 거의 마쳤고 건축 역사학과 논문만 남았기에 설계사무실 경험을 쌓고 미국문화에 익숙해지고 싶어졌다.

골프에 입문

미네소타 대학교 교정 안에 골프장이 있었기에 신기하고 호기심에 견디지 못했다. 석사학위 학과과정 마칠 무렵에 싸구려 헌 장비를 구입하여 코치의 지도를 받고 긴 겨울 동안 실내에서 연습했다. 1960년대에 한국에는 미군 팔군 장교들을 위한 골프장이 하나 있었기에 대학 다니며 지나는 길에 눈여겨보았었다. 너머 한가해 보이고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운동이었다. 등록하고 두해 지나서 1968년 봄을 기다려 헌 클럽을 어깨에 메고 골프장을 찾아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클럽하우스에 들려 학생증을 보여주고 얼마냐고 물었다. $37.50 이라고 하기에 당황했다. 실망해서 돌아 나오는데 내 등 뒤에서 “일년에.”하고 소리친다. 그도 웃고 나도 웃으며 내 인생에 골프와의 인연은 이때부터 맺어졌다.

그때 함께 시작한 네 사람은 모두 평생 골프 꾼이 되었고 그중에 한사람은 한국 프로골퍼로서는 처음으로 시니어 프로골퍼의 자격을 취득하였다. 세계에 이름난 선수들과 경쟁을 하며 한국인 골프 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지금은 은퇴하여 후배들을 지도하며 미주 한국일보에 골프 요령을 연제하는 현준선 프로이다. 나와 골프는 평생을 함께하여 사업의 도구였으며 부부 동반 운동이 되었다. 아내와 친구들과 4시간 함께 걷는 운동으로 고생스런 즐거움을 한평생 붙들고 지낸다.

유도 평생교사 자격증

가난한 시절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맨발로 연식 정구공을 차고 다니며 축구를 시작했다. 해방 직후 고국에는 고무신이 고작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야구를 배우고, 중학교 때 농구를, 고등학교 때 유도를, 대학 다닐 때 럭비를, 학교 선수로 뛰었지만 우리 팀은 맨 날 꼴찌만하고 다녔다. 공부만 하는 학교들이였다고 변명도 하고 부모님께서 공부가 중요하지 운동선수는 별로 바라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핑계해야 될지. 미국에 와서 YMCA에 들려서 유도 기술을 보여주었더니 평생 교사 자격증을 주며 학생들을 지도해 달라고 부탁을 받았기에 우쭐했다. 한달 동안 열심히 지도했지만, 보수는 교통비 정도였기에 미국에도 깍쟁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 교정 안에 수만 명의 좌석을 갖춘 축구장이 있음이 신기하게 보였다. 대학 미식축구는 해마다 수만 관중이 열람하고 응원하는 운동이며 겨울철 TV프로그람에 가장 인기가 있다. 체구가 남달리 크고 힘이 세고 몸짓 빠른 선수들의 시합은 마치 로마시대 네로 왕 앞에서 벌어지는 격투사들의 싸움처럼 치열한 흥밋거리다. 한 번의 기회로 승부를 가리는 경기의 특징은 우리의 감각에는 불공정해 보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 땀을 쥐는 아슬아슬한 경기이다. 작전은 경험이 많은 코치가 짜고 선수들은 작전에 따라 각자의 재능과 체력을 실행하는 경기이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를 부여하여 성공하도록 하는 사회 체험을 운동경기에서도 볼 수 있다.

대학원 건축설계 과목

대학원 건축설계 과목은 한국의 교육과 크게 비교되었다. 5학생에게 하나의 설계과제를 맡겨주었기에 한국에서 나 홀로 내 성적을 만들던 습관으로서는 어쩔 줄을 몰랐다. 다행히 5학생이 각각 맡은 부분에 좋은 아이디어와 노력을 실천하여 낙제 점수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보았다. 미국 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 형제 사이에 이야기 많이 하며 자랐고 우리는 어른 앞에서 말없이 조용히 자라서 그들은 의견 소통이 원활하고 우리는 말하기 전에 감정이 먼저 앞섰다.

미국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그리기를 배우고 함께하는 운동 연습에 익숙해서 동양 학생들 보다 예술적이고 team work을 잘해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기관차 운전사가 되기 원하고 소방대원 되기를 꿈꾸는 아이들은 하나밖에 없는 왕위를 바라고 대통령을 꾸꾸는 우리 나라 학생들과 무척 다른 분위기임을 보았다. 우리는 독불장군 되는 경향이 있어 개인운동을 잘하고 그들은 함께하는 운동을 잘하는 듯 보였다.

숙부님의 권총

미국은 자동차 흔하듯 집집이 총기를 갖추고 있다. 농촌의 농가에 짐승들의 침입이 잦은 곳에 총기는 필수품이다. 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때 여름방학을 맞아 대전 육군 병원장 하시는 숙부댁을 찾아갔다. 숙부의 권총이 신기해 보여 숙부 출근하신 사이에 권총을 분해하고 조립하며 만지작거리기 좋아했다. 어느 날 숙부가 감추어둔 자리에 다시 넣으려는 순간 청소부 아저씨가 방에 들어왔다. 그가 총기를 만지는 순간, “빵!”하고 발사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내가 맞았을까, 청소부 아저씨가 맞았을까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총알은 문을 뚫고 길 밖으로 날아갔다. 곧 맨발로 길밖에 뛰어 나갔다. 길에도 다친 사람은 없고 총알은 길 건너 가게의 얼음과자 기계 속에 작은 총알구멍을 남기고 살아졌다. 기계는 붕붕 소리 내며 잘 돌아가고 있었기에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얼음과자를 사 들고 와서 청소부 아저씨와 나눠 먹으며 비밀을 약속했던 기억이 난다.

일본 유학생의 비극

총기 사고는 미국에 어디서나 아무 때고 일어나고 있다. 일본 유학생이 밤에 길을 잃고 헤매다 어느 집 차고 문이 열려있음을 보고 길을 물으려 캄캄한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술 취한 집주인이 더 가까이 오지 말고 멈춰 서라고 소리쳤어도 영어를 못하는 유학생은 계속 다가갔다. 주인은 벽에 걸린 총으로 어둠 속에 움직이는 무서움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아들 잃은 일본 부모는 미국에 찾아와서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고발했다. 미국 헌법에 정당방위라는 판결로 부모는 빈손으로 귀국했고 그 후부터 미국에 오는 일본 유학생 수가 줄었다고 한다.

총을 가진 사람은 든든한 마음으로 벽난로 위에 걸어놓고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기도 한다. 미친 사람이 총으로 이웃을 살해하고 조폭을 구성하여 마약을 드려오는 무서운 범죄를 저질러도 총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함이 미국 사람의 사고방식이다. 하루에 33명쯤의 목숨이 총 앞에서 희생된다고 한다. 사람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취하면 술이 술을 마시고 더 마시면 술이 사람을 마시듯, 오늘날 사람이 만든 기계는 편의를 주다가 기계가 기계를 만들게 되었고 이제는 기계가 사람을 먹는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미국은 매일 33명명씩 총기로 사망

세계에 총의 역사를 보면, 11세기에 몽골의 칭기즈칸이 유럽을 점령하고 세계역사에 제일 큰 몽골제국을 세웠을 때, 동아세아의 폭죽에서 시작되었다. 유럽인이 가장 무서워한 무기는 파죽지세로 터지는 대나무 속에 화약의 폭파였다. 놀라운 소리로 폭발하면서 불이 붙는 무서움에 떨던 유럽인은 문예부흥과 산업 혁명을 거치는 동안 총을 발명하였고 곧 대포를 만들었다. 총과 대포를 앞세운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동아세아의 나침판과 명나라의 항해 지도를 배운 후부터 배를 타고 신대륙을 찾아 나섰다. 아프리카와 인도를 비롯한 동남 아세아를 정복하여 식민지국으로 다스렸다. 동아세아인이 지배하던 세계는 유럽인의 총의 발명과 함께 유럽인의 지배를 받게 되며 오늘의 현대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총으로 시작된 정복의 역사

총과 대포를 앞세워 활을 쏘며 대항하는 원주민을 몰아내는 침략행위가 시작하면서 아세아의 시베리아, 호주대륙, 우리의 혈연인 북남미 대륙에 원주민을 몰아내어 땅을 빼앗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오고 카우보이의 권총이 사회를 지배하는 근대 역사가 있었다. 일차와 이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큰 무기 생산국으로 최대강국이 되었다. 미국의 총을 소유한 국민연합회(national rifle association)는 오늘의 미국사회에 막강한 정치력을 자랑한다.

대학원을 마칠 무렵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음으로 멀리 미국에 왔는데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 며칠 후에 귀국한다며 다음날 만나자고 한다.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뉴욕에 있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다. 미니애폴리스와 뉴욕의 거리는 서울에 있는 친구가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친구에게 다음날 만나고자 하는 거리라고 설명해 주니 실망하고 전화만 하고 돌아갔다. 서울에 도착해서 대전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하듯 작은 나라로 생각한듯하다.

우리가 대학 건축과 졸업할 무렵에 정주영 회장이 현대 건설을 창업하는 때였기에 인제를 모집하는 때였다. 그때 발탁된 친구들이 십여 년이 지날 무렵에 한국의 건설회사가 중역이 되고 외국 건설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동 건설업에 진출한 친구 중에 미국 건설회사와 계약하러 미국에 들르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동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다.

중동건설 붐 시절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국가의 건설공사 입찰을 하게 되면 미국과 유럽의 회사들과 경쟁하게 되고 한국회사의 입찰가격이 월등한 위치였다고 한다. 한국의 노동자는 월남 전쟁을 경험한 강인한 청년들이기에 외국의 노동자처럼 하루에 여덟 시간 근무조건, 침대와 냉장고 있는 숙박시설, 고향에 다녀오는 휴가 조건, 등을 따지는 일이 없이 오직 나라와 가족을 위한 충성스런 일꾼들이라고 한다. 한국 기업은 명철한 두뇌와 민감한 판단력으로 경험 많은 외국 기업을 이겨내며 투기적 사업으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한 결과라고 한다. 한국의 세계화는 박정희 정부의 월남전쟁의 참전에서 시작하여 독일의 광부와 간호사 지원, 그리고 중동국가들의 건설업에서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중동건설 일화

중동 여러 국가의 건설 사업에 참여하여 한국의 급작스런 경제성장이 있는 동안 그 과정에서 들려오는 일화는 무궁무진했다. 그중에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한국의 한 사업가가 영국 런던에서 달라 현찰을 지불받고 미국 센 프란시스코의 호텔에 들었다. 객실 안내원에게 팁을 주며 여자 불러주기를 부탁했다. 잠시 후에 금발 아가씨가 찾아왔다. 아가씨에게 위스키 한잔 따라주며 곧 몸을 씻고 나오겠다고 샤워장에 들어갔다. 샤워하다가 갑자기 현찰 가방이 걱정되어 방문을 열어보았을 때, 아가씨가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현찰 가방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 곧바로 홀 밖으로 쫓아 나갔다. 방문은 닫혀서 잠겼고 옷 벗은 알몸으로 승강기를 타고 대합실까지 달려 내려가 객실 안내원을 찾았다. 영어가 서툴고 알몸으로 소리치는 흥분한 사람을 붙들려 하자 태권도 발차기로 얼굴을 차버렸다. 곧 경찰이 쫓아와서 짐승을 잡는 그물로 덮어씌워서 잡혀갔다는 일화도 들려준 것이다.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함께 다닌 친구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함께 다닌 친구가 찾아왔다. 대학에 가는 무렵에 해어지고 25년 만에 다시 보는 친구다. 친구는 내가 오래전에 잊어버린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용완아, 너는 서울에 대학 다니러 가라. 나는 어머니 모시고 여기 있을 거야.”
친구는 철봉에 매달린 채 섭섭한 마음으로 옆에서 운동하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친구에게 어머니께 아들이 4년 동안만 서울에서 대학 다니고 오면 어머니 더욱 잘 모실 거라고 말씀 잘 드리라고 했다. 친구는 철봉에서 내려와 더욱 침울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나, 국문학에서 낙제했어.”
둘이서 한참 동안 조용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일 우리 시장에 가서 선생님 선물 하나 사자”
다음 날 둘이서 선생님께서 좋아하실 선물을 예쁘게 싸서 들고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나는 국문학이 재미있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선생님은 내가 쓴 시를 학교 교지에 꼭 실어주시며 총애해주셨다.
선생님 댁을 찾았을 때에 옛날에 천자문 배우는 서당 방 같은 인상을 느꼈다. 대문에서부터 둘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서 대청 앞 디딤돌에 서서 고개를 다시 숙이고 인사했다. 선생님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들어오라 하셨다. 두 사람은 다가가서 선물을 드리고 다시 큰절했다. 선생님은 심상치 않은 듯 왜 왔느냐고 물으셨다.
“선생님 친구가 공부를 덜 해서 낙제점수를 받았나 봅니다. 제가 책임지고 졸업하는 날까지 저 자신이 공부한 만큼 친구도 공부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화를 잔뜩 내신 듯 “미친놈들, 어서 나가” 외치셨고 두 사람은 뒷걸음질 쳐서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같이 공부해서 함께 졸업했다. 단임 선생님이 친구의 성적으로 서울대학 응시하지 못한다고 하셨지만 그때도 나는 이제 처음으로 설치된 치과대학은 응모자가 많지 않다고 단임 선생님을 설득하고 친구는 치과대학에 응모하였고 입학하게 되었다. 그런 후 25년의 세월이 한순간처럼 지났다. 나는 잊어버렸지만, 친구는 잊지 못하고 나를 찾아와 다시 들려주니 참 감개무량하고 고마웠다.

친구의 행운과 불행

친구가 고향 광주에 차린 치과병원은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한국 치과 의사 중에 맨 처음 치아이식 기술을 시카고와 도교를 다니며 배워 왔다. 광주 사람 금니는 거의 자기가 끼웠다고 농담도 했다. 함께 플로리다 올란드에 오렌지 밭을 경영하는 친구를 찾아 아놀드 파머 골프장에서 골프도 치고 디즈니 월드를 구경하며 아이스크림도 먹으며 같이 걸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간 몇 달 후 어느 날, 친구가 간암 초기라는 소식을 들었다. 술 담배 끊고 음식 가려먹고 매일 가벼운 운동하며 규칙적인 생활로 바꾸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친구는 충고 받은 대로 행하고 건강이 회복되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다시 술과 담배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크게 실망했다. 친구는 곧 이어서 서울삼성병원에 입원했고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나는 간곡한 편지를 썼다.

–끊임없이 투병하는 친구에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말로 다할 길이 없을 거야. 태평양 건너 멀리 있는 내 마음은 요즘에 항상 네 옆을 떠날 수 없구나. 우리가 자랄 때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 나눠 먹고 학교에서 집에 가는 먼 길을 같이 걸어주던 어린 시절을 회상할 적마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이 없구나. 내가 고국을 떠나온 뒤에 한참 동안 소식이 끊겼었지, 하지만 다시 만난 그날 밤 우리의 우정은 더욱 뜨거웠고 밤을 새워 이야기하며 비워두었던 지난날들을 모두 매워 넣었던 기억이 어제 일 같아. 금이나 은으로 장식해도 더 고울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이었어.

지난 성탄절 카드에 썼듯이 나는 가끔 네가 행운이 많은 친구라고 생각해. 옆에서 혼을 다해 정성껏 돌보는 아내의 손길, 동창 친구 원장님의 지휘 아래 한국 최고의 삼성의료진, 그렇게 유명하신 치과의사의 회복을 기다리는 광주 시민들의 기원, 매일같이 기도하는 천주교 교우들, 우리나라 어느 임금님도 아프셨을 때 그런 대접을 못 받았을 거야.

친구야, 아무리 힘들어도 떠날 생각은 하지 마. 어떤 좋은 천당이 우리를 기다려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조금 더 같이 살자. 웃으며 아픔을 묻어버리고 편한 마음으로 두려움을 초월하자. 우리 앞에는 패배가 있을 수 없어, 오직 승리하는 길만이 있어, 우리가 학교 운동선수 때도, 우리 사회의 전문분야를 개척할 때도, 여기까지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기에 앞으로 그렇게 살 거야.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친구야. 이제 내가 다시 글을 써서 너에게 보낼 때는 너의 치료가 끝나고 회복하여 고향 집에 돌아가서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기를 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오늘의 우리를 다스리는 신령하신 하늘에 눈물로 기도드리며 이글을 줄인다.–

-태평양 건너편에서 친구 용완이가-

간절한 기도에도 세상 떠나

얼마 후에 친구는 세상을 떠났고 나는 장례식에 시간을 맞춰 대한항공편으로 서둘렀지만, 간신히 묘지에 하관하는 때 도착하였다. 내 손을 관 위에 얹고 친구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며 눈물로 작별하고 관을 내렸다. 주는 이는 잊어도 받은 이는 잊지 않는다는 옛말처럼 내 행동은 내 기억에서 까맣게 사라졌는데 친구는 그 시절을 다시 불러 아름다웠던 우리의 추억을 내 마음에 새겨주고 떠나갔다.

아메리칸 드림 50년 (2)

친구와 함께 한반도보다 조금 작은 플로리다를 방문했을 때, 미네소타 주와 대조되는 점이 많았다. 마이애미 공항에는 그곳이 미국인지 멕시코인지 혼돈할 만큼 남미의 외국인들이 북적댔다. 80년도에 플로리다 경제개발 정책으로 미국 내에 은퇴연금을 저축한 노인 가족 인구와 중미와 남미에서 노동력과 생산력을 갖춘 인구를 이주해 오도록 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름 8–9월은 덥고 습기가 많아 견디기 어렵다고 친구가 들려주었다. 방울벌레를 비롯한 여러 가지 벌레들이 사람과 함께 산다고 한다. 우리가 대서양 어느 해변의 맥도날드에 들렀을 때, 부엌에도, 계산대에도, 탁자 치우는 사람까지 모두 노인들이었다. 지구 위에 오래 사는 사람들만 남는다면 이렇게 될까 하고 두려운 상상도 해보았다. 추위를 이겨내고 사는 미네소타와 더위를 견디며 사는 플로리다는 이렇게도 다를까.

양키와 힐리빌리

캘리포니아보다 작은 한국 안에서도 북한과 남한이 다르듯 땅이 큰 미국은 더 말할 것 없다. 북쪽 사람을 양키라 부르고 남쪽 사람은 힐리빌리라고 부른다. 한국 전쟁처럼 여기도 남북전쟁을 치렀다. 양키는 이성적이고, 사회적이고, 행동이 빠르지만 힐리빌리는 감성적이고, 개인적이고, 생각이나 몸 움직임이 느리다. 동서로 나누면 뉴욕이나 보스턴은 유럽식이나 서쪽에 엘에이와 센 프란시스코는 아세아나 멕시코식이어서 재미있다. 중국에 56개 민족이 자기 문화를 따르며 살 듯 미국은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여 산다. 동쪽에 뉴욕 주민들은 캘리포니아를 동물원이라고 부르며 백인 우월주의는 유색인종을 꺼리고 낮추어본다. 하지만 그러한 구시대 경향은 빠르게 퇴색되고 있다.

고국의 개고기 문화

1988년에 한국과 일본에서 세계 올림픽을 개최할 무렵 미국과 유럽의 동물 애호가들이 한국의 개고기 먹는 풍습을 고쳐보려고 노력하였지만 별로 효력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침 뱉는 버릇, 줄서는 버릇, 교통질서, 등의 많은 습관에는 좋은 발전을 보였다. 미네소타 대학교에 유학 왔을 때였다. 한 교수 부부가 착실해 보이는 한국유학생 두 명에게 휴가기간 동안 집과 강아지를 맡기고 떠났다. 휴가 마치고 집에 와보니 강아지가 보이지 않았다. 교수 부부는 단순히 강아지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함께 강아지를 잡아먹은 한국 유학생 친구는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다니는 학교 학생회장에게 귀띔했다. 이 일로 두 학생은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멀리 텍사스로 전학했으나, 결국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귀국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떤 아내는 개고기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식품점에서 개 사진이 붙어 있는 통조림을 사서 매운탕을 끄려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버린 음식들을 상하지 않게 가공해서 통조림으로 만든 개밥이었다나. 남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혼자 속이 쓰렸단다.

수년 전 여름, 누렁이 보신탕을 즐겨 먹던 두 젊은이가 더운 여름철에 미국을 여행하게 되었다. 미국은 세계에 모든 문화가 미국에 모여 있다는 곳이니 개고기를 먹는 문화도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그러든 어느 날 미국의 농민들 풍습으로 매년 한여름 팔월 말경에 농민들의 박람회 행사가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이 축제는 한 해 동안 농장에서 수확한 가축과 과일 채소를 수집해서 온 가족들이 큰 도시에 나들이했다. 약 보름 동안을 즐기며 매년 이 때만 만나는 친구들과 어울러 한 해 동안 농장 이야기 나누고 가지각색 흥미로운 행사를 치르는 흥겨운 축제였다. 두 젊은이가 이 소식을 듣고 박람회장 (Fair Ground)를 찾아갔다.

Hotdog 이야기

행사 중에는, 소, 돼지, 가구, 고물 자동차 등을 사고파는 거래들도 있었다. 두 젊은이는 우연히 핫도그(Hotdog)이라는 큰 간판을 보게 되었다. 그 앞에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음식을 사먹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따끈하게 덥혀주는 보신탕을 상상하며 쫓아가서 줄서서 기다렸다. 이윽고 그네들의 차례가 되었다. 키가 큰 앞 사람이 아직 자리를 뜨기도 전에 큰 조각을 달라고 주문하고 돈을 냈다.
주문을 받은 사람은 석쇠 위에 데워진 소시지를 빵에 넣고 노란 겨자를 발라서 종이에 잘 싸서 앞사람 어깨너머로 전해주었다. 배고픈 젊은이들은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종이를 열어보고 크게 실망하는 듯 자기들은 개의 이 부분을 한 번도 먹어본 일이 없다고 중얼거렸다.

동물 연구하는 학자들은 오만 년 전에 동아세아에 유목민들이 늑대를 집에서 기르는 때부터 개가 사람과 같이 살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동아세아에 귀족사회에 애완견의 이야기는 삽살개를 소개하는 기록으로 오래전부터 전해온다. 주나라의 기록 서경에 상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주위의 부락민에게서 개를 말처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발바리라는 개 이름도 오래된 우리말이다. 동양에서는 개와 돼지를 길러서 먹는 음식습관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서양에서는 개와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가족처럼 살아온 습관이 있기에 먹지 않는다.

음식 문화도 서서히 변한다. 미국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음식은 날 소고기를 구어 먹는 스테이크인데 최근에 동물성 지방이 심장마비에 영향이 많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고기 소비량이 줄어드는 실정이다. 수년 전까지 날생선을 먹는 일본식당을 야만인들처럼 생각하던 미국인 음식습관이 건강음식을 찾아 서투른 젓가락질을 배우며 한국의 건강음식도 찾게 되었다. 이제 한국사회도 애완동물의 습관이 늘어나고 다른 좋은 음식들이 소개되면서 개고기 찾는 이들이 줄어듦은 기쁜 소식이다.

미국 유학은 나보다 2살 위인 의과대학 졸업한 형이 먼저 왔고 이듬해에 간호학과 전공한 누이가 그리고 1966년에 내가 왔다. 모국에는 어머님과 두 남동생과 여동생이 남아 있었다. 형은 대학원 박사과정 하는 동안 사귄 유럽계 미국여학생과 결혼했고 누이는 대학 수영장에서 운동하는 동안 수영을 가르쳐주던 토목 공학도와 결혼했다. 나는 대학원 졸업하고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아내를 맞을 계획으로 결혼을 늦추고 미국 여학생들과 데이트 연습도 가끔 했다. 우리 부모는 일제하에 전남 순천에서 백화점을 경영하시는 할아버지의 큰아들로 목포상업학교를 나오신 아버지와 제주도에 사시다가 광주여고보를 졸업하신 어머니가 중매결혼으로 가정을 이루셨다.

우리 가족이 만주에서 해방후에 필사의 탈출

해방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만주 무순 시에 살고 있었다. 그때는 무순 노천탄광이 세계에서 가장 큰 석탄 생산지였다. 1945년 8월 15일부터 소련군들은 밤낮없이 우리 마을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몹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군인들 모습이었다. 어느 날 이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일본의 금융회사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를 대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 나이 7살에 어머니의 두려움을 함께 느꼈다. 형은 9살, 누이 4살, 막내딸 한살, 사남매를 데리고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셨다. 어느 중국인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며칠 후에 집에 돌아오셨지만 어머니와 만날 곳을 약속하고 곧 집을 떠나셨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집에 모든 것들을 시장에 들고 가셔서 팔고 금반지, 금 목걸이, 금 팔지를 사오셨다.

만주의 무순에서 우리 가족이 떠나 며칠 후에 압록강 가까운 시골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다. 신의주 건너편에 단동에 머물며 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찾았다. 소련군들이 국경을 봉쇄하였기에 물길을 아는 나룻 꾼은 값을 많이 주어야 찾을 수 있었다. 새벽 일찍이 나룻 꾼은 우리를 깨워 배를 타도록 서둘렀다. 형과 나는 금들을 안으로 꾀매 숨긴 외투를 입고 아버지는 짐을 메고 어머니는 막내를 업고 작은 나룻배 바닥에 모두 엎드리고 위에 포장을 덮었다.

압록강을 건너서

배꼬리에 노가 물을 젓는 소리만이 들릴 뿐, 안개 낀 압록강 수면 위로 두 시간쯤 지났을까. 홀연히 소련군 따발총 소리가 따따따 멀리서 들리기 시작하였고 가끔 장총 소리도 따쿵 따쿵 울렸다. 형과 나는 가느다란 포장 틈새로 밖을 보았지만, 칠흑같이 어둡고 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안 했다. 머리 위를 지나가는 총알 소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요란하였다. 가끔은 총알이 물위에 떨어져 물 튀는 소리도 들렸다. 아버지는 한 살 된 딸과 어머니의 머리를 이불로 감싸고 엎드려 기도하고 계셨다.

총소리는 차츰 조용해졌고 새벽 동틀 무렵에 우리는 북한 땅에 발을 드려놓았다. 우리 가족은 달구지에 몸을 실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하여 이틀 후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 기차역 앞에 광장은 넓고 쓸쓸해 보였다. 가까운 여관에서 우리 가족은 몸을 풀었다. 며칠 머무는 동안 아버지는 개성 쪽으로 가는 기차 편을 알아보시고 우리 형제와 누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소련군과 인민군의 축구시합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 뒤에서 젊은이들이 앞으로 밀려들어 누이가 앞으로 넘어지며 울었다. 어디선가 소련 헌병이 달려와서 북한 젊은이의 뺨을 때렸다.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 우리 민족 젊은이의 뺨을 때리는 순간 내 어린 가슴에 아픔을 느꼈다.

피난민 기차

기차는 평양역을 떠나 남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데 기차 안에 설 자리도 없고 기차 옆에 매달리고 지붕 위에도 타고 기차 몸통은 온통 사람들로 감쌌다. 우리는 다행히 기차 안에 의자에 앉았지만, 바닥에 앉고 선반 위에 눕고 무더운 땀 냄새는 숨이 막혔다. 얼마 후에 몇 자리 건너편에서 어느 여인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렸고 창밖으로 하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이 던져졌다.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에게 그것은 죽은 아기를 며칠이고 안고 우는 젊은 엄마를 옆 사람들이 보다 참지 못해 죽은 아기를 빼앗아 창밖으로 버렸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기차는 말없이 철길 따라 달려만 가고 있었다.

삼팔선이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며칠 동안 시골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드디어 인민군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산길에서 우리는 인민군들에게 잡혀갔다, 아버지는 사 남매를 데리고 조용하셨고 어머니는 그들 중에 제일 우두머리인 듯 한 장교를 붙들고 교섭을 하셨다. 어머니 손가락에 금반지를 빼주는 듯하였다. 장교는 우리를 인솔하고 계곡에 내려왔고 계곡 건너편에 초록색 군복을 입은 남한 군인들과 미군들이 멀리 보였다. 장교는 우리에게 잘 가라는 듯 손짓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는 서로를 감싸 안고 조심스럽게 계곡을 건넜다. 기다렸다는 듯 미군 헌병들이 우리를 검색하고 곧 우리 몸에 디디티 살균 가루를 몸 안팎으로 뿌려 덮어씌웠다.

38선을 넘어 남한의 품안으로

하얗게 눈사람 된 우리는 까만 눈만 깜박였고 어머니와 아버지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목숨을 걸고 소련군의 경계선을 넘어 만주를 탈출하고 북한 인민군이 경계하는 38선을 넘어 북한을 탈출한 부모님의 안도하는 웃음을 처음 보았다. 서울에서 기다리시는 할아버지를 만나고 며칠 후에 전남 순천에 도착하였다. 그때까지 두 달 동안 목마르고 영양실조 된 2살 된 막내 누이는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어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 전란을 겪은 어린 시절, 4·19 학생혁명 때 대학 졸업, 5.16 군사정변,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한국, 숭례문 복구공사와 문화제 전문위원, 미네소타 주 유학생활까지 20여 년이란 폭풍 같은 세월이 지나갔다. 아버님은 해방 후에 경리 직책에서 일하시다가 경리에 부정이 많은 사회를 싫어하시고 교육 공무원으로 바꾸어 종사하시다가 여생을 마치셨다.

유학 중 부친 임종도 못해

내가 유학 오기 전에 중풍으로 반신불수 되신 아버지는 우리가 유학하는 동안에 돌아가셨다. 우리는 비행기 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아버님의 장례식은 어머님과 아우들의 몫이었다.

미국의 대학 기숙사 생활은 우리가 졸업한 1970년대부터 남녀 혼숙으로 바뀌었다. 가장 보수적인 미시간 대학에서 시작되어 미국에 많은 대학 기숙사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남녀 혼숙 기숙사가 되었다. 내가 기숙사 생활하는 4년 동안 여학생을 내방에 데려올 만큼 용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말에 미국 여학생들과 사귀는 대학생활은 바쁘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다. 영화 구경하거나 공원을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동안 영어도 쉬워지고 미국의 사생활 문화에 익숙해졌다. 내 나이 30 가까이 되도록 여자 친구가 없었기에 남자와 여자가 다른 점도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만난 여자 대학생들은 함께 유흥소를 찾아가서 술 마시고 춤을 춤도 보통이었다.

여학생 버나딘

그중에 나이 24살인 버나딘은 우리 관계에 적극적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며 어학전공 학사과정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서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 했다. 검은 옷을 좋아해서 하얀 살결에 대조를 보이며 운동신경이 있어 나하고 취미가 맞았다. 검은 색 차 운전을 빠르게 하며 활동적이어서 한국 여학생과는 크게 대조되었다. 고등학교 때 이미 사랑하는 남학생과 연애하다 결혼했고 아이 없는 부부 생활 2년 만에 이혼한 후에 대학에 다시 학사학위 마치려 돌아왔다고 한다. 남자의 마음을 잘 알고 이해가 빨랐다. 담배를 피우며 나에게도 권했지만 내가 거절한 이후부터 다시 권하지 않았다. 반듯이 내 양해를 얻고 피웠다.

놀기 좋아해서 함께 마시고 주말에 고고 춤추는 유흥업소를 자주가게 되었다. 몸을 비비고 춤을 추게 되면 내 얼굴이 붉어져서 남자가 수줍다고 나를 놀려댔다. 한번은 기숙사에서 양말 구멍 바느질이 귀찮아서 헌 양말 두 켤레 주며 고쳐 주기를 부탁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꿰맸다며 다음 날 들고 왔다. 어머니에게 사귀는 한국 학생과 결혼하면 어떠냐고 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대학 졸업 기다려 결혼해도 좋다고 기쁜 소식인 듯 나에게 전해주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살며 자기 학비를 부담하는 부호가정의 자손이라고 한다. 며칠 후 아버지를 찾아가 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 나이 29살인데 한국에 아내도 있고 자식들도 있을 사람이라고 결혼은 적극 반대라고 실망하는 듯 소식을 들려주었다. 나는 한 번도 미국 아내를 갖겠다는 생각하지 안 했기에 그때부터 우리는 차츰 멀어졌다. 남자는 여자를 재미있어 사귀고 여자는 남자와 결혼하려고 사귀는 사이임을 처음 알게 되었다.

태능 공대 재학시절

서울 공대 교정이 태릉에 있었기에 졸업할 무렵에 학교 부근 마을에 하숙생활을 했었다. 학교와 마을 사이에 공동묘지가 있고 묘지 밖으로 돌아가는 길이 꽤 멀었다. 밤을 새워 설계과제를 마치고 새벽에 오는 길을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짧은 거리를 택했다. 처음에는 머리털이 뾰족 서고 무서웠지만, 며칠 후부터 익숙해지고 적막을 즐기며 쉬어가는 묘 옆자리도 찾았다. 어느 날 새벽에 달빛이 밝은데 아기 우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면 소리 나는 곳도 옮겨 갔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달빛에 도망가는 여우를 보고 안심하고 돌아왔다.

하숙집에 매일 내 밥상을 들어다 주는 부엌 아가씨가 있었다. 어느 날 새벽에 묘지 길목에서 아가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내에서 이 집 하숙생이 밤에 묘지를 도굴한다는 소문이 돈다고 일러주며 자기는 그 소문을 믿지 않으려고 나를 보러 왔다고 한다. 용기에 감탄하며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다음날은 초저녁에 일찍 돌아와 잠이 들었다. 자다가 새벽에 잠이 깨었을 때, 내 옆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아가씨를 보았다. 나는 당황했지만, 조용히 껴안아주고 절대 비밀을 약속하며 돌려보냈다. 몇 달 후에 아가씨가 떠나고 하숙집 아주머니가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아가씨가 시집가고 싶어 해서 그렇게 해보라고 허락해 주었다고. 나는 지금도 가끔은 그 아가씨와 버나딘을 생각해보곤 한다.

빼어난 미인이었던 숙자

미네소타 건축과 학사과정을 마칠 무렵 역사 논문만 남았다. 기숙사를 떠나 세인트폴 도시 근교 직장 가까운 곳에 방을 얻어 이사했다. 직장에서 영주권을 얻어 주었기에 수년 동안 실무 경험을 쌓고 귀국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올즈모빌 새 차도 구입했다. 총각에게 차가 생기면 여자 친구가 따른다고 했다. 삼십 넘은 노총각을 누가 좋아할까 생각했지만, 그곳 한인회장 사모님의 누이동생이 미국에 온다고 비행장에서 마중하고 데려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한국에서 영주권 받고 언니와 함께 살려고 이민 오는 길이었다. 숙자는 부모를 일찍이 잃고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지 못했지만 빼어난 미인이었다. 몸매에서 손결까지 내가 본 한국 여인들 중에 제일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수년 동안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지만, 여러모로 간격이 있어서 손에 쥐어줘도 모르는 사이, 결국에 해어지고 말았다.

내가 방을 얻은 작은 집 2층에 미국 여학생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두 여학생 모두 남학생 친구들이 있어 주말이면 밤새워 놀다가 자고 가는 날을 자주 보았다. 어느 날 병원 구급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 내며 우리 집 앞에 섰고 피를 많이 흘리는 여학생을 실어갔다. 며칠 후에 회복해서 돌아왔지만, 다른 여학생이 나에게 귀띔해 주었다. 철삿줄 옷걸이로 낙태를 시도한 후에 출혈이 심해지자 구급차를 불렀다고 한다. 평생 다시 임신하지 못할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하는 당시 유행했던 여학생들의 낙태방법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짝을 만나다.

석사 학위 마치고 건축가 면허시험 합격했을 무렵에 드디어 내 짝은 이렇게 찾았다. 콜럼버스 오하이오에서 직장 생활 중에 한인들의 모임에서 만났다. 내가 운동을 좋아하기에 골프, 스키, 테니스를 모두 즐겼는데 취미가 같았다. 함께 운동하며 알게 되었다. 년 말 성탄절의 춤을 추는 모임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탱고 춤을 추자고 요청했다. 잠깐 기다리라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춤을 못 추나 보다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어디서 장미꽃을 입에 물고 요염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우리는 동호세와 칼멘처럼 춤을 추었고 관중은 열광하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 후부터 우리는 약혼하고 주말여행을 함께 다니기도 했다. 몇 달 후에 뉴욕에 여행 가서 맨해튼 5가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갑자기 내가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고 한다. 잠시 후에 지나가는 불쌍한 노인을 도와주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그 순간에 내게 좋은 성품을 볼 수 있었고 나와 결혼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다짐했다는 이야기를 결혼한 후에 나에게 들려주었다. 아내는 내가 미국에 온 다음 해 1967년에 의학전공으로 미국에 와서 의사가 되었고 나는 대학원을 마친 후에 곧 미국의 건축가 되었다.

우리는 1남 3녀를 두어

우리는 1남 3녀를 두어 아이들도 모두 대학을 마쳤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시민이기에 자라나는 아이들 함께 나도 드디어 미국시
민이 되고 말았다.

나는 대학원 다니는 동안 일하던 엘러비 건축 사무실에서 계속해서 일했다. 제도판에 엎드려 설계도면 그리는 일은 건축설계의 중노동이었다. 지금처럼 컴퓨터의 도움이 없었기에 연필이나 잉크로 매일같이 제도하다 보면 손가락이 휘어지고 눈도 나빠졌다. 사무실 일에는 백인들의 텃세가 대단했다. 궂은일은 모두 내게 밀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경향은 백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초년병들이 겪어야하는 노장들의 텃세이기도 하다. 그들 사이에 낄낄대며 주고받는 농담을 알아들을 길 없고 함께 웃지 못하기에 소통이 안 돼 답답했다. 사람들은 동정심을 갖는 눈으로 쳐다보는 듯하고 자기들의 사투리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는 나 자신이 안타까웠다.

GOOD SAMARITAN HOSPITAL 설계

하지만 설계하는 실력과 부지런함에는 인정받는 듯했다. 직장에는 윗사람을 잘 만나야 출세한다. 멀리 캘리포니아의 LA에 굿 사마리탄 병원 설계 청탁이 들어왔을 때, 인도 출신 노장 건축가와 젊은 한국 건축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비행기 대륙횡단 여행 6시간이 몹시 지루했다. 여러 차례 오가며 하늘에서 대도시 건물들이 모여 있는 도심을 내려다보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건축기술이 이루어놓은 걸작들을 보는 듯 감탄했고 구름 아래 내려다보며 조물주의 창작품 대 자연의 예술도 감개무량했다.

병원은 윌셔 길에 있고 지금처럼 멕시칸, 흑인, 에이시안이 눈에 띄지 않고 모두 백인들의 도시였다. 병원 직원들과 설계 내용을 상의하고 미네소타 회사에 돌아오면 약 10일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설계가 끝나고 공사가 시작할 무렵에는 캐나다 출신 건축가를 보조하며 함께 여행했다. 현장에서 회의 마치면 캐나다 건축가와 함께 라스베이거스에서 밤을 지내고 다음 날 본사로 돌아갔다. 공사가 성공적으로 마칠 무렵에는 겨울철이어서 주말을 콜로라도 스키장에서 지냈다. 미네소타에서 스키 친구들이 몰려오는 때는 함께 겨울 나라 미네소타의 스키 실력을 뽐내고 일요일 밤 비행기로 돌아갔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에 아무 일 없는 듯 출근했다.

내 사무실을 열고 내 사업을 해야지

어느 날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주는 숨어서 돈을 벌고 고용인은 평생 노예처럼 살다가 꿈꾸는 것들 이루지 못하고 직업을 마치는 미국의 자본주의 현대사회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남을 위해 돈 벌어 주는 자는 3년을 빌어먹는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나는 그때부터 내 실속을 차리며 회사에 도움 되는 일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머지않은 장래에 나 자신의 건축 사무실을 차리려는 장거리 계획을 세웠다. 10년 후에 내 사무실 이름으로 건축 설계하는 꿈의 도표를 그렸다. 집 책상머리에 부쳐놓고 가끔 아내와 함께 드려다 보았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아내의 격려는 항상 나의 힘이 되었다.

550명 일하는 미네소타 주의 엘러비 회사에서 120명 일하는 칼스버거 회사로 옮겨 오하이오 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는 동부에 뉴욕 근교나 보스턴에 설계 일들을 맡아 하게 되었고 미국의 동부와 서부의 다른 점을 알게 되었다. 뉴요커는 유럽 사람의 전통을 이어받아 백인들의 자존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서부의 흑인, 히스패닉, 아세아 인들과 함께 사는 곳을 몰아 잡아 동물원이라고 부른다.

엘러비 회사가 남부 뉴올리언스에 분점을 차렸을 때 지사에서 6개월 동안 머물러 일하였다. 미국 내에 프랑스 전통을 이어받은 색다른 지역이다. 미국의 선진 사회에 비하면 후진성이 짙게 풍기는 사회 풍조이다. 프랑스 전통 음식점은 미국에서 제일 좋은 맛을 내지만, 프렌치쿼터 길을 걸어가면 쩨스뮤직과 유럽풍의 빈민가를 구경하는 호기심 가득한 관광객들로 붐빈다. 과거에 남부에서 인종차별 범죄를 저지른 백인들은 모두 중서부 시카고나 클리브런드 근교에 숨어 살다가 수십 년이 지나서 체포되는 신문 기사를 가끔 본다.

마침내 창업

120명 직원을 가진 칼스버거 회사에서 5년 근무하는 동안 건축 전문가의 기능을 거의 배웠지만, 사무실 운영에 관한 지식은 별로 없었다. 마침 데이튼 오하이오에 40명 직원을 가진 레빈포터에서 회사의 파트너를 찾고 있기에 파트너 계약하고 그곳에 이사해 갔다. 3년 동안 파트너로 일하며 회사 자금 관리와 세칙, 고용인법, 고객의 법적 계약관계, 등을 배워 고용주의 경험을 쌓은 다음 곧 서둘러 내 사무실을 차렸다. 미네소타에서 세운 10년 계획이 약 15년쯤 걸렸다. 드디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인 직책을 벗어나 고용주가 되었다. 하지만 경쟁자들은 이미 그들 나이 30대에 창업하여 꾸준히 성장해온 기업들이다. 나는 10년 뒤떨어진 40대 중반에 창업하였기에 나는 내 나이 30대였던 정열을 쏟아 이민생활 속에 뒤처진 10년을 만회하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백인 건축가와 흑인 건축가 동료들을 구하여 세 사람이 함께 일을 시작했다. 회사 이름은 Architects Associated로 정하고 206 South Ludlow Street, Dayton Ohio 45402에 사무실을 차렸다. 자본과 고객은 내가 맡고 설계는 백인이, 공사감독은 흑인이, 각각 나누어 시작했다. 전문가 사업을 혼자서 하기에는 너머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일을 찾아 고객을 드려오는 마케팅이 제일 어려웠다. 미국의 도시마다 30개 또는 150개의 건축 사무실이 경쟁하기에 생존경쟁은 치열하다. 나 같은 한국인이 중서부 백인들의 보수적 사회 안에서 서투른 영어실력으로 일과 고객을 찾아오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다행히도 미국 연방 정부에서 어려움 속에 창업하는 작은 회사를 지원하는 보조 정책이 있어 연결을 만들고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작은 관공서 건물 설계부터 시작하였다. 시간이 가면서 과거에 내가 설계한 건축물 주인을 찾아가서 좋았던 경험을 상기하고 다시 연관을 맺기 시작하였다. 회사는 비교적 순조롭게 안정되고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기업 관리에 사람 관계가 제일 어려웠다. 나도 모르게 우리 문화의 전통적인 권위주의 개성이 나타날 적마다 미국 고용인들은 딱 질색을 하였다.

문화의 차이는 만만치 않아

40년 넘은 고질병을 고칠 수 없었었다. 한번은 직원들이 무더기로 회사를 옮겨 떠났다. 어떤 직원은 내 방에 들어와 내게 욕을 싫건 하고 사표를 내놓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 분노를 느끼기보다 분명히 내게 잘못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 자신의 인간개조가 필요했다. 지도자 훈련도 받아보고 아이들이 선생님 되어 어떻게 미국사람이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 가르쳐 주기도 했다. 옆에 듣기 싫던 아내의 잔소리도 이제 귀 기울여 들어보면 고마워졌다. 곱슬머리 최 씨 고집이 차츰 무릎 꿇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회사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귀중해졌고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목숨처럼 여겨졌다. 산에 가서 도를 닦는 수련을 직장과 가정에서 겪는 듯했다. 이웃과 동화되어 내 자신을 내려놓는 실습을 했다.

함께 생각하고 같이 행동하는 한 묶음이 되기 시작하면서 회사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다운타운에 3층 사무실 건물을 구입하고 내부 구조를 개조하였다. 주소는 11 South Wilkinson Street, Dayton Ohio 45402이다. 대학교 건축, 병원건축, 교도소, 공공시설, 공원, 야구경기장, 등의 큰 설계계약에는 직원이 50여 명까지도 필요했다. 토건, 구조 기술, 냉난방, 수도하수, 기계기술 회사, 실내 디자인까지 하면 약 100여 명의 직원과 그들이 거느린 가족 400여 명의 생활을 보장하는 사업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93년에 나이 61세의 짐 스나이더가 한국 참전용사 기념비를 세우려는 계획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나는 공산군 침략에서 구해준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누를 길 없어,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짐 스나이더는 18세 젊은 나이에 인천 상륙으로 한국 땅에 발을 붓치고 장진호까지 진군하였다가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15,000명 미군해병대원, 2,000명의 미국육군, 200명 영국해병, 그리고 한국군 800명이 약 12만 명의 중공군에 의해 발이 묶였다. 이들 미군 대부분은 캠프 캘리포니아 펜들턴에서 훈련을 받고 파병되었다가 1,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고 살아남은 사람 중에 6천 명이 추운 겨울의 동상으로 손발 얼굴에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고위 장성을 비롯한 수천 명이 잡혔다가 후에 포로 교환으로 귀향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축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자진해서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2년 후에 보이나비치, 오하이오 주지사 후원으로 1995년에 오하이오 주의 한국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완성되었었다. 데이턴의 마이애미 강변에 매년 수만 명의 방문객이 발길을 잇고 있다.

막내딸과 함께 고향 무등산에 올라

다른 회사와 합작하여 한국과 유럽의 건축설계에도 쫓아다녔다. 어느 한국의 병원설계 여행 중에 개인 시간을 얻는 기회가 있었다. 막내딸이 대학 졸업하기를 기다려 딸과 함께 비행기로 13시간 태평양 구름 위를 날아 고향을 찾아갔다. 함께 무등산에 올랐다. 산 중턱에 원효 사는 아버님의 장례를 치른 곳이다.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 가족이 한국 전쟁에서 안전하도록 미국에 이민하기를 바라시던 아버지는 평소에 기도하시러 원효사에 자주 들리셨다. 돌아가셨을 때 절 주위에서 풍장 해주기를 원하셨다. 후에 육 남매와 함께 이민 오신 어머님은 미국에서 돌아가셨고 어머니의 뜻에 따라 태평양에 풍장 하였다. 바람결과 물결이 만나는 곳에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재회하는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었다.

어렸을 때 무등산에 소풍 가서 좋아하는 여학생과 시간을 잊고 노는 동안,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두 우리를 찾고 있었다는 이야기에 아버지와 딸은 함께 웃고 즐거웠다. 산을 스치는 바람은 예처럼 시원하고 바위와 숲의 경치는 세월의 주름살을 보이지 않았다. 초등학교와 가까운 곳에 우리가 살던 옛집도 찾아보았다. 아이가 자라서 미국에 유학해서 건축가 되는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딸에게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고향이었다. 하지만 머리 한곳에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깊숙이 잠겨있었다.

6.25 동족상잔의 비극

초등학교에 국군부대가 주둔하고 무등산에는 후퇴하지 못한 공산군 빨치산이 숨어 살고 있었다. 총성이 요란하고 수류탄 폭음과 화염에 잠 깬 새벽, 치열한 살인의 절규, 목숨의 마지막 비명, 창밖에 보이는 지옥은 12살 된 나에게는 너머나 눈물겨웠다. 아침 길에 군인들의 시체를 치우고 포로 열 사람은 끈에 묶여 무등산 기슭에 이르렀다. 헌병은 포로에게 삽을 주어 땅 구덩이를 파게 하고 불 뿜는 총 끝 연기에 한 사람씩 목숨이 사라졌다. 제 무덤을 파고 그 자리에 쓰러진 시체들을 흙으로 덮고 헌병들은 떠났다. 잠시 후에 가족과 동료인 듯한 사람들이 찾아와 소리 내어 울며 흙 속에서 찾은 시체를 등에 메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딸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찾아온 바다 건너 평화스러운 마을, 아름다운 산, 뛰놀던 운동장, 아버지의 그리운 고향은 정겨워 보였다. 내 마음에 숨겨있는 아픈 상처를 딸의 아름다운 기억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전쟁 동안 죄 없이 희생된 많은 고인의 영혼에 묵도하는 한순간을 딸 모르게 나 혼자 눈을 감고 고개 숙였다.

장대한 무등산은 우리가 모르는 긴긴 백제역사를 혼자서 기억하고, 태극기 흔들며 온 민족이 기뻐하던 해방, 한 민족이 서로 싸우며 죽어가던 뼈아픈 한국전쟁, 경부선에서 격리된 호남을 묵묵히 가슴에 품고… 옛날에나 오늘에나 한결같은 부모님의 마음처럼 다정하게 우리를 끌어안아 주었다.

미국 이민생활의 비결

이민생활 중에 사업하고 싶어 하는 이웃에게 말해주는 비결이 있다. 미국에서 미국인 고객을 상대할 때 한국인의 자부심을 겸손하게 보여주면 그들의 관심은 더욱 커진다. 내가 엘러바마주 버밍햄에 처음 갔을 때 백인이 사용하는 엘리베이터와 흑인이 사용하는 엘리베이터가 구분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백인이 나에게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한국인 미국 건축가라고 웃으며 답했을 때, 나와 그는 친구가 되었다. 아무리 유색인종을 낮추어 보는 백인도 웃는 기싸움으로 반듯이 이겨내면, 서로 필요한 친구 사이가 되기 마련인 듯하다. 건축가로서 자기 사업하면서 다섯 손가락으로 다섯 부문을 항상 쥐고 살았다.

첫째

첫째는 사람, 둘째는 돈, 셋째는 상품의 질, 넷째는 마케팅, 다섯째는 계획이다. 첫째 사람 관계는 가족에서 이웃이나 친구 혹은 낯선 사람들까지도 좋은 관계로 지내도록 노력하고 사업에서는 직원, 고객, 그리고 소비자와의 관계를 관리하는 일이다. Team을 이루어 더불어 일하는 관계를 만들어야한다. 가정에 의사가 필요하듯 전문직에는 변호사, 경리사, 은행이 함께 일한다. 모든 연락은 문서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모든 약속은 법적 책임과 질서를 따르기에 미국의 건축가 협회 (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는 모든 계약서의 본보기를 준비해 놓았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 이전에 인간적인 관계에서 서로 존경하는 분위기를 유지함이 더욱 긴요한 듯하다.

둘째

둘째 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관리는 사람 관리만큼 중요해 보인다. 돈을 가져야 존재하고 돈이 있어야 기능을 다 할 수 있다. 돈 때문에 가정이 파탄하고, 회사가 멸망하고, 부자가 거지 되는 소식을 매일 듣는다. 쓰는 돈보다 버는 돈이 더 많으면 부자가 되고, 버는 돈이 더 적으면 거지가 된다고 말한다. 나의 경우는 내가 대학 학비를 걱정하고 육군 사관학교를 가겠다고 서울에 왔을 때, 일선에서 육군 병원장 하시는 숙부가 찾아와 “용완아, 대한민국에서 교도소와 군대생활에 드는 돈이 학교에 드는 돈보다 더 많기에 너는 대학에 가라.”하고 대학 입학시험에 원서를 내도록 격려해주셨기에 나는 공대 건축과를 가게 되었던 기억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돈을 벌려고 일하면 돈의 노예가 되지만, 사회에 필요한 일을 찾아 봉사하면 돈이 나를 찾아온다.”고 말한다. 숙부와 형과 아내가 의사이고 누이가 간호사이며 주위에 의학 분야의 관련이 많았기에 나는 의학 전문 분야의 건축을 택하였다. 미국 대도시의 병원에 응급실, 수술실, X-ray, 병리 검사실, 응급 환자실, 진료실 등의 특수 분야 설계에 앞장을 서도록 노력하여 지식을 얻고 경험을 쌓도록 했다. 사회에 필요한 역할을 찾아 하려고 노력했기에 돈은 뒤따라 왔다.

셋째

셋째는 상품이나 전문직의 품질이다. 건축이 내 전문 분야이기에 나의 상품은 질이 좋은 건축설계이다. 한국의 4년제 대학 건축과를 졸업했을 때, 건축 구조학적 지식은 강했지만, 예술적 설계는 약했다. 미국의 5년제 건축 대학은 창작예술에 치중했기에 대학원 입학하기 전에 1년 동안 창작 예술에 전념했다. 그 한해가 나의 건축 인생에 가장 많이 배운 한해였다. 나체 스케치 시간에는 젊은 전문 모델이 실오라기 하나 몸을 가리지 않고 예쁜 자세를 취하여 15분마다 자세를 바꾸면 학생들은 15분의 스케치를 그려놓는다. 한 시간 동안 그린 4장 중에서 하나를 교수님에게 제출했다. 나는 평생 처음 보는 천상의 여인처럼 아름다운 나체에 황홀해서 첫 시간에는 한 장도 제대로 그려보지 못했다. 나는 미술공부를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다. 건축의 질은 느낌이 좋고 기능이 편리하고 공사비와 운영비가 경제적이면 성공한 작품이 된다.

넷째

넷째 마케팅은 생산품이나 전문가 사업의 생명줄이다. 경쟁자보다 앞서 정보를 얻어 새로운 고객을 찾고 고객과의 연줄을 튼튼히 지켜야한다. 시간 안에 설계 응모하면 수십 개 건축회사 중에 몇 개의 회사를 선택하여 면담을 요청한다. 45분 동안에 회사의 능력을 소개하고 주어진 project를 어떻게 설계하고 싶다는 설명을 마치면 15분 동안 질문에 응답한다. 그런 후에 건물 주인은 응모회사의 실물 경력을 조사하고 2-3주 후에 최종 선택을 발표한다.
면담 시간의 자료를 준비하고 설명하는 연습은 교회에 목사님이 설교 준비하듯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실수 없는 발표를 해야 한다. 고등학교 때 유치진 작품, 원술랑 연극을 한 경험이 내게는 큰 도움이 된듯하다. 자연스럽게 웃기기도 하며 편한 마음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해답을 진지하게 교감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어하는 미국인이 2-3번 연습하면 한국식 영어 하는 나는 5-10번을 연습해야 했다. 회사를 계속해서 사회에 알리고 사회 안에 흔들림 없는 회사의 명성을 지켜야 한다. 부지런히 새로운 지역을 개발함이 마케팅이다.

다섯째

다섯째 계획은 시간과 함께 일하는 선견지명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때를 맞추면 척척 진행되고 때를 놓치면 모든 것이 허탕이 된다. 따라서 미리미리 계획하고 준비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기에 그 순서도 미리 준비해 놓음이 계획의 이득이다. 이들 다섯 가지, 사람, 돈, 질, 연관, 때, 등에 관한 사고방식은 나의 사생활에도 적용되어 나 자신을 항상 쉴 틈 없이 바쁘게 만든 듯하다. 후에 쉬려고 은퇴했을 때 백수가 과로사할 만큼 더욱 바빠졌음도 이 다섯 가지에 익숙한 생활 습관 때문이었으리라.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 따겠다.

형은 미국에서 의사가 되었지만, 생화학연구의 길을 택하여 노벨의학상을 받은 연구소에서도 일했다. 우리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둘째로 태어나 손해를 많이 보며 자랐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모의 첫아기는 딸, 다음 아기는 아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후에 모두 8 남매가 되었지만, 큰딸은 해방되기 이전에 결핵성 관절염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섯째 딸은 해방 직후에 만주에서 북한으로, 북한에서 남한으로, 두 달 동안 우리 가족 필사의 탈출을 마쳤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태어난 2남 1녀는 나와 동생들의 나이차가 커서 어머니를 도와 내가 동생들을 돌보며 키운 듯하다. 동생들 우유먹이고 지저귀 빨래는 내 몫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장남에 장녀이셨기에 큰아들의 장래에 가장 큰 기대와 관심이 쏠린 듯했다. 그러기에 나는 항상 형의 그늘 속에서 형의 헌옷을 입고 자랐다. 형은 공부 잘하고 나는 아이들과 놀기 좋아했다.

해방되었던 1945년 나는 8살이었다. 7살부터 일본말과 일본글을 배우다가 해방된 후에 처음으로 우리말과 한글을 초등학교 일 학년부터 배운 해방둥이다. 광주에 무등산을 바라보는 서석 초등학교는 우리 형제자매가 자라난 보금자리다. 내가 6학년 때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상공회의소 주최 운동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내 나이 13살에 어른들 뛰는 마라톤 26마일에 참가했다. 아버지가 자전거 타시고 내 뒤를 따랐고 교정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른들이 모두 돌아온 후에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확성기에서 장래의 손기정이 나타났다고 떠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형은 공부 잘하기에 노벨상 받고 나는 운동으로 올림픽 금메달 받겠다고 떠들며 부모님의 웃음을 만들던 때가 이곳 초등학교 시절이다.

아메리칸 드림 50년 (3)

학생운동 기념탑의 노래

광주 서중학교는 일제 강점기에 학생 독립을 거친 전통이 있다. 광주 제일 고등학교와 같은 교정이다. 1919년에 삼일운동이 있었고 10년 후에 1929년에 서중일고 선배들이 항일독립운동을 일으켰음은 내가 다닌 학교 교정에 참으로 뜻 깊은 역사가 있다. 우리가 졸업하는 1957년에 기념탑이 세워져서 내가 졸업하면서 기념탑을 위한 시(노래)를 써서 졸업 행사지에 출판했음은 내 인생에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글을 쓰기 좋아했다.

뿌리 깊은 기념탑/ 꿋꿋이 솟아 있네/ 화랑의 혼 움직이어/ 피 끓은 가슴에
/ 목숨도 청춘도 모두 바쳤네/ 바람 앞에 깜박이는/ 내 나라 구하려.
백의민족 흐르는 단군의 피는/ 왜네 들 총칼로도 범치 못했네/ 방방곡곡 삼천리
/ 독립만세 울붖어/ 무궁화 대한민국 온 세상에 전했네.
오늘은 학생의 날 십일월 삼일/ 희망에 복받치는 젊은 힘 모아/ 선배의 뒤를 이어 줄기차게 나가자/ 바른길 우리의 길에 횃불은 타오른다.

내가 서중 일고를 다니는 동안에 우리 가족이 전쟁의 가난을 극복하는 어려운 기간을 지냈다. 아버지는 가끔 “우리나라가 응급실에 누워있는 형편이고 미국이 꽂은 영양주사의 힘으로 간신히 살아 있다.”고 표현하셨다. 어머니는 여학교 층층대 밑에 가게를 차리시고 나는 아침저녁으로 짐을 옮겼다. 그러한 어려움에서도

형은 문리대 수석입학

부모님은 나에게 다양한 활동을 하도록 격려하셨다. 매일 신문을 읽는 습관으로 세상을 보도록 해주셨다. 학교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반장을 하고 중고등학교 때부터는 학생대표로 교무회의에 참석하여 선생님들의 도우미도 했다. 학생 대의원, 군사훈련 중대장, 학교유도 대표선수, 합창대원, 연극반장, 등의 활동이 기억난다. 졸업식 때에 나는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하러 이미 서울에 와 있었고 부모님만 졸업장 받으려고 참석하셨다가 8번 호명을 듣고 8가지 상을 받으신 후에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보는 졸업식장에서 두 분이 많이 눈물 흘리셨다는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형은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수석 합격하여 지방고등학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기록을 세웠다.형은 문리대 의예과를 마치고 의과대학을 졸업할 무렵 나는 공과대학 건축과를 마쳤다.

4.19 학생혁명

우리가 졸업할 무렵에 4·19혁명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자유당 부정선거에 반대하여 서대문 길에 이기붕 국회의장 댁을 점거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댁을 점거하려 광화문 길을 행진하다 경찰의 총탄에 맞아 젊은 생명을 잃어야 하는 비극을 우리 눈으로 보았다. 이기붕 가족은 대통령 저택에 은둔했다가 육군사관학교 생도 큰아들의 권총으로 가족 모두 자살하는 비극도 후에 보도되었다. 나는 군중 속에 밀려 거리를 행진하고 형은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진 학생들의 응급치료를 맡았던 시간도 있었다. 결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한마디 남기고 하야하여 하와이로 떠났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수습에 나섰고 윤보선과 장면 정부를 지나 박정희의 5·16군사혁명으로 이어졌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미국에 유학 온 후에 모국을 돌아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졌다. 안정된 사회에서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격동기를 겪는 한국, 그리고 분단된 조국을 좀 더 냉정한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처참하도록 가난한 남한이 민주사회의 초석을 다짐하는 몸부림과 절규가 내 젊은 눈에 보였고 철두철미하게 독재 정치하는 북한은 빠르게 안정되어 감을 비교할 수 있었다. 6·25 한국 전쟁 이후에 공산주의 사상을 선택하여 월북한 남한의 저명한 인사들은 한사람한사람 조용히 숙청되고 김일성 독재를 신봉하는 사람만 살아남게 됨을 볼 수 있었다.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

함께 유학 와서 북한 함경도에 가족을 그리워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친구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에 나는 다음과 같은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보관하고 있었다. 여러 해 지나서 1993년 9월 18일 시카고 한국일보에 보도되었다.

“김일성 주석 들어보시오.”
“나는 북조선의 가족을 찾는 사람이오. 독일과 일본이 2차 대전을 저질러 놓고 전쟁을 마칠 무렵에 미국, 소련, 영국의 세 사람이 한반도의 우리민족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소. 독일을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 듯 일본을 북일본 남일본으로 나눌 것이지 왜 죄 없는 한반도를 두 동강이로 쪼개놓았느냐 말이요. 내가 분통 날 때 당신은 얼마나 고심했겠소. 생각 끝에 스타린과 모택동에게서 도움을 약속받고 한반의 통일을 이루어 보리라 결심한 당신의 용단에 나도 감탄하오.

하지만 젊은 용기만으로 세계정세를 모르고 6월 15일에 38선을 넘어와 수백만 우리 동포가 목숨을 잃고 수만 명의 외국 젊은이들의 목숨이 이 땅에 자유를 지키려 희생되었소. 얼마나 많은 우리 조상의 유물을 불태우고 전쟁의 가난 속에 허덕이고 가족이 나누어져 살게 된 민족의 뼈아픈 비극을 저질렀소. 돌이켜 보면 우리가 싸우는 동안에 한반도 전쟁 덕을 본 일본은 미국 돈으로 장사하고 부자 행세를 하게 되었소.

잠자는 사자로 불리던 중국은 모택동 혁명에 성공하고 이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듯하오.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은 세계를 앞서가는 나라가 될 것이오. 이렇게 다가오는 장래를 위해 하루속히 남과 북이 같이 앉아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 사랑과 온정을 베푸는 일이 시급하오. 당신이 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정일이 한테 꼭 일러주오.

당신이 저지른 전쟁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족이 부모 형제 보지 못하고 죽어갈까 두렵소. 다시는 이땅 위에 전쟁이 없고 다른 나라의 지배 받는 일이 없어야지오. 다음 세대에 자라나는 훌륭한 동포 모두가 당신이나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네 인생과 세계복지를 위해서 살아야지요. 찾아가서 얼싸안고 울고 웃고 내가 평생 동안 그리워하며 살았노라 알려주고 고향 땅에 묻히는 염원을 들어주시오. 위대하신 수령님! 심금을 울리는 당신의 형제들의 가족 찾는 노래를 들으심네까!”라는 기사가 났었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 가슴 속에 가족 찾는 이 절규는 아직도 끝없이 메아리친다. 북한 동포는 자유를 얻지 못한 채 가족 보지 못하고 공개처형 공포 속에 살고 있다. 어서 빨리 자유의 세계로 구출되어 우리와 함께 평화 속에 살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첫 모국 방문 때

80년대 중반에 대한항공이 서울과 LA를 직항하는 항로를 열었을 때 나는 고국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모국 방문길에 올랐다. 기내 방송에서 한국어, 영어, 일본어 방송을 하고 마지막 인사말로 “Thank you for assistance.”라고 말하기에 나는 승무원을 찾아가 “Thank you for your corporation.”로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에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고쳐서 말하기에 안심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친구들은 강남에서 제일 높은 63 Building 맨 상층 식당에 데려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점심 먹으며 회의하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대기업 중역이 좋으냐? 혹은 자기 사업하는 사장직이 좋으냐? 하고 물었다. 현대, 동아, 대우 회사들 중역으로 일하는 친구들이 ”우리는 풍전등화.“라고 대답하였다. 일하다가도 나이 40 중반이면 밀려나가는 한국 기업의 실정이란다. 이곳 미국에서는 전문가의 지식과 기술의 황금기가 45세부터 55세라는데 그 귀중한 인재들의 지식과 경험이 버림받는 한국의 실상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전혀 홍보없던 대한민국

캐나다 밴쿠버의 인류 박물관에 세계 각국의 문화를 전시하고 있었다. 일본은 큰방 전시실 하나를 가득 채웠고 이름 모를 여러 나라가 이렇듯 진열장을 매웠는데 한국은 방 모퉁이 작은 서랍 속에 옛 부채와 버선 한 켜래 숨겨있었다. 대학의 아세아 연구 웹에 들어가 Korea를 찾으면 김일성 선전뿐이었다. 영국에서 발행한 중국 역사책에는 고구려의 문화가 중국의 문화로 알려지고 고구려 고분 벽화는 중국의 회화로 설명 되었다. 책에 따라 한국은 일본과 중국 혹은 미국과 소련의 전쟁 완충지로 역사도 문화도 없는 나라로 설명하고 6·25전쟁과 박정희 군사혁명만이 소개되었다.

한국은 80년대부터 고개를 들었다. 1984년 미국 로스엔제레스에서 올림픽 하는 동안 우리는 밤잠을 설치고 한국을 응원하였다. 양궁, 권투, 레스링, 유도에서 금메달 받고 애국가 울리며 태극기 오를 적마다 얼마나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는지 그 감개무량한 순간은 잊을 수 없다. 재외 동포의 조국사랑은 내국민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더욱 뜨겁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때 시작된 한국의 여자양궁은 지금까지 금빛을 반짝이고 있다. 1988년 한국 올림픽은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말한 것처럼 올림픽 사상 올림픽 이념을 실현한 가장 훌륭하고도 가장 세계적인 경기였다고 한다. 6ㆍ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은 동서(東西) 진영의 장벽을 초월하여 12년 만에 미소(美蘇) 양국을 같은 대회에 참가시킴으로써 한국이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를 맺게 되었다고 했다.

한국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고 국제적 지위를 끌어올린 전환점으로 정치, 이념, 인종, 빈부, 종교 등을 초월한 범세계적인 인류애를 실현한 문화, 예술, 평화의 올림픽이었다고 평가되었다. 이때부터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 나와 한국의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기 시작한 듯하다.

가슴 뿌듯한 우리 조국

요즘에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서울의 남산에 올라 한강을 내려다보면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나이 백 살 다되어가는 한강대교 건너편에 땀 흘리는 젊은 새마을, 강남의 품에 내 마음이 눕는다. 잠실대교 건너편에 세계의 눈길이 몰렸던 88올림픽 공원, 한남대교 건너편에 IT산업의 심장이 뛰는 신도시의 위용, 반포대교 건너편에 한류가 자라난 예술의 전당, 동작대교 건너편에 모교의 터, 관악산, 원효대교 건너편에 한국 현대사의 분기점을 상징하는 63시티 그리고 국회의사당, 남산 발밑 가까운 곳에 5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국립박물관, 강 하구에 인천 국제도시와 함께, 흐르는 한강은 반세기동안 세계경제의 기적을 일구어낸 내 집 안방이다.

한강은 기억한다. 6·25전쟁 휴전 이후 약 5년이 지났을 무렵에 나는 대학 시험공부에 바쁜 때였다. 흑석동 한강 둑 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홀연히 땅 밑에서 내게 말을 거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앉은 바로 앞에 검은 군화 끝이 조금 나와 있었다. 나는 무심코 내 발끝으로 차서 파보았다. 중공군의 신발 속에서 발가락뼈들이 나오지 않는가. 나는 소스라쳐 놀랐지만 곧 마음을 진정하고 그 영혼을 위해 잠깐 기도한 다음 다시 흙을 곱게 덮어주었다. 한강 다리 무너지고 도하작전 중에 수만의 전사자 중에 몇 명의 시체가 그 밑에 누워 있을까 생각하며 떨리는 가슴으로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왔다.

얼마나 많은 적과 우방의 목숨이 이 땅에서 전쟁터의 연기 속에 사라졌는가, 한반도가 신음하는 동안 모든 사람은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기며 살아남지 않았던가. 살생과 포탄이 남긴 빈 땅에 가난을 헤치며 하루살이 하던 세월이 엎드리면 코에 닿는 반세기 전의 짧은 시간이다. 이 나라에 어르신과 세계에 흩어져 여생을 돌이켜보는 참전용사의 기억에는 아직도 어제 일처럼 눈앞에 선명히 그려진다. 죽을힘으로 살아난 목숨이 내 집을 짓고 내 고향을 다시 찾아 세웠다. 새마을 운동, 현대 자동차, 삼성 전자, 세계를 주름잡는 여러 물결이 한강에서 시작되어 태평양에 오늘의 파도를 이루었지 않는가.

나의 뿌리내린 고향

고향을 찾아가면 가족, 친척, 조상의 묘지, 그리고 함께 자라난 이웃이 있어 내가 자라난 뿌리를 본다. 내 몸의 채취가 스민 집안에는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키워준 부모님의 향기가 가득하다. 가족은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 고장 나도 언제나 고칠 수 있는 사이, 사는 동안 항상 마음을 함께하는 사이다. 모든 사람에게 꿈이 있고, 그 꿈의 고향이 내 집이다. 사람 몸의 기능은 멈추어도 그 영혼은 꿈의 고향을 찾아가 이루어놓은 전설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영생은 그런 모습으로도 존재하는 것이 안일까. 사람은 죽어 사라져도 꿈은 영원하다.

내 고향은 한강, 흐르는 강물이다. 떠오르는 희망이요, 떠나가는 추억이다. 바다와 땅이 뒤섞여 흔들리는 진통을 겪은 후에 산과 계곡이 주름잡고 강물이 흐르게 된 태곳적부터 우리의 숨결은 이 땅에 보금자리 쳤다. 이태조가 고려의 도읍, 개성을 떠나 한양에 도읍을 천도할 때, 서울이 태어났고 오늘의 한강 기적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26전쟁을 신음하며 홍역을 치렀지만, 나라를 지킨 선열의 희생으로 발판을 짜고 그 위에 딛고 선 자손들의 강렬한 정기는 빛을 냈다.

한강은 땀 흘려 젖 줄기 뿜어내어 훌륭한 민족의 슬기를 키운다. 북악산 너머 저쪽으로 대동강은 아직 반세기 지나도록 묶여있지만 우리가 찾은 자유는 가족형제의 사랑으로 항상 동포들을 껴안는 내일의 그리움에 꿈이 부푼다.

고향집에 싸리문 먼저 열리면 지난밤 찬바람의 어둠을 깨우는 태양의 얼굴은 새벽닭 홰치는 소리에 가슴이 뛴다. 희망의 무지갯빛이 하늘 높이 타오른다. 산과 바다를 다스리는 옥황상제의 뜻 따라, 용꿈 태몽 첫아기 울음소리가 천지를 흔든다. 온 누리 찬 눈 속에서 솟아나는 새싹들이 삼백 예순다섯 발자국 한해를 그려, 세계 방방곡곡에 씨 뿌리러 간다. 태양계가 광막한 우주 안길을 열어, 사이버 공간으로 질주하는 계절에 우리 기술의 명석한 혜안이 지구를 이끌어, 한류는 오대양 육대주에 넘쳐흐른다. 목청 올려 부르는 오! 찬란한 이아침의 찬가, 관악산 횃불이여 세계 평화의 선봉이어라.

스포츠는 내인생의 동반

미네소타 대학원 다닐 때 일하며 공부하는 시간을 어렵게 쪼개어 어렸을 때부터 즐기는 운동 시간을 잊지 안했다. 6개월이 겨울철인 미네소타에서 스키와 스케이팅을 빠트릴 수 없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유도 배우러 오면 땅에 넘어지는 방법부터 배운 후에 남을 넘어뜨리는 기술을 연마한다. 넘어졌을 때 다치지 않고 다시 잃어서는 기술은 한평생 동안 나에게 도움이 된듯하다. 눈이나 얼음위에서 뒹굴어도 지치지 않고 계속하기에 스키와 스케이팅을 빠르게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면 특이한 기술은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야 함을 알게 되었다.

미국은 세계 각국에서 인제들이 모여든 무대이기에 특출한 재능을 가친 친구들을 가끔 만난다. 스케이팅을 타다 만난 친구가운데 자기나라 학기 팀의 대표선수였음을 알게 되었다. 5살 때부터 한평생 빙판 위에서 살아 왔음을 이야기 들으며 참으로 감탄하였다. 스키를 배우면서 모글을 만나면 나는 예외 없이 넘어졌다. 모글은 급한 경사에 많은 스키가 지나가는 동안 자연히 생기게 되는 작은 눈 언덕들이며 마치 공동묘지처럼 보인다. 어떤 토요일 오후에 시간 내어 혼자서 모글스키 연습은 어두워지도록 노력해 보았다. 수십 번 넘어진 몸은 멍들고 배도 고팠다.

스키장에는 전깃불을 밝혀 낮에 일하는 사람들이 저녁 운동을 하도록 해놓았다. 나는 스키를 벗어 어께에 매고 나오려는데, 모글스키 경사 위에서 새처럼 눈을 타는 선수를 보았다. 모글 마다 발로 찬 눈발은 바람에 날리고 전깃불에 비추어 환상의 아름다움을 보였다. 나는 경사 밑에서 기다려 그를 붙들고 자초지종 내 경우를 설명하였다. 한국식 영어하는 나를 측은하게 보았는지 나를 데리고 리프트 타고 경사 위로 올라갔다. 그는 먼저 조금 내려가서 나를 기다리며 내게 내려오라고 손짓을 했다. 모글 두개를 지나고 나는 보기 좋게 넘어져 뒹굴었다. 그는 나에게 모글 스키 배울 수준에 와있지만 요령을 모른다고 설명하고 다음의 다섯 가지를 기억하여 모굴 하나하나를 정복하라고 일러주었다.

첫째 어께와 얼굴은 항상 경사 아래쪽만을 향하고 내려갈 것, 둘째 체중은 발레리나처럼 항상 앞 발가락 끝에 서서 몸을 굽히고 펴는 자세를 반복할 것, 셋째 모글 꼭지에 이르렀을 때 몸을 낮추고 두발을 모아 스키를 180도로 돌려서 다음 모글을 향하여 준비할 것, 넷째 다음 모글 꼭지를 향해 내려가며 스키를 경사의 대각선으로 유지하며 모굴 아래 눈을 힘껏 밀어붙여 다음 모굴 위에서 속도가 거의 정지되는 균형을 찾을 것, 다섯째 모글 하나하나에 호흡을 조절해 리듬을 만들어 내려가는 것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중에 그가 스키장의 학교 교장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서 고마운 인사를 다시 했던 기억이 난다.

잘하려면 미쳐라

“잘하려면 미쳐라.”는 어렸을 때 유도 선생님 말씀이 생각이 났다. 나는 그 후부터 친구들과 코로라도 주의 가장 어려운 스키장을 찾아다니며 다리뼈에 금이 나도록 즐겼으나 결혼한 후에 아내의 충고를 받아드려 스키를 멈추었다. 그 때 한국에는 대관령 스키장 하나 있었다. 40년이 지난 최근에 한국의 k-shuttle을 타고 4년 후의 올림픽을 준비하는 평창 스키장의 설비를 방문하였을 때, 한국의 발전상을 실감하였다.

의학박사 학위 마친 형이 이태리 로마에서 국제 의학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나는 휴가를 내어 함께 떠났다. 플로렌스에 로마 시대 사찰건축과 레오나르도 조각물들은 유럽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 건축가인 나에게 감명 깊었다. 로마 도시에 로마제국의 콜로시움을 구경하면서 그 웅장함 뒤에 숨겨있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인을 학대하는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사자들의 발톱을 상상하기도 했다.

로마오페라극장 표를 얻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시간 안에 도착하려고 강행군하는 중에 낯선 다섯 집시 젊은이들이 길을 막아섰다. 손짓으로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한 순간에 누군가 뒤에서 내 왼쪽 팔꿈치를 강하게 쥐어 잡기에 나는 뿌리치며 돌아섰다. 돌아서는 순간에 바른쪽 호주머니에 손이 스침을 느꼈다. 그 순간에 바른쪽 호주머니 속에 내 돈지갑을 빼어간 것이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는 중에 나는 내 뒤에 섰던 괴한을 쫓아 번화가에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로 바짝 다가서 달려가며 길을 건너갔다. 필사의 도망자와 목숨 건 추적자의 영화 장면을 찍는 듯한 순간이었다.

로마의 집시들

홀연히 건장한 청년들이 나를 둘러섰고 길을 지나던 모든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나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달아나던 괴한이 한 젊은 여인 뒤에 멈춰 섰고 그 여인은 웃는 얼굴로 자기 가슴의 브래지어에서 내 지갑을 꺼내주는 마술을 보여준다. 순간적인 요술을 보는 듯 놀라웠다. 지갑 속에 현찰은 사라졌지만, 요행이라고 할까, 내게 꼭 필요한 크레디트 카드와 운전면허 등의 내용물은 고스란히 남겨있었다. 나는 내 지갑을 높이 들어 구경하는 모든 사람에게 흔들어 보여줬다. 큰길, 네 모퉁이에서 서부활극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이 손뼉을 치고 소리치는 동안에 집시 괴한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탈리아 관광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흥분된 경험이었다.

미국 오하이오 주 사무실에 돌아와 직원들이 이제 막 설계를 마친 사무실 건물 주인을 만났다. 계약에 따라 설계비를 시간 안에 지급해줄 것을 부탁하며 악수를 하고 그는 떠났다. 해어진 다음 계약서를 다시 보니 건물 주인이 너머 많이 지급하게 됨을 느끼면서도 나는 서둘러서 테네시 주에 네시빌로 떠났다. 그곳은 미국 컨트리 뮤직의 본산지다. 유명한 가수의 노래가 이곳에서 음반으로 제작되는 때였으며 엘비스 프레슬리나 달리파튼 같은 컨추리뮤직 거장들이 사는 문화 도시였다.

권총 강도

초청한 친구와 점심 먹으러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 문을 열려는 순간, 내 뒤에서 누군가 “너도 손들어!”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권총이 나를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내 친구는 벌써 지갑을 차위에 내놓고 두 손을 번쩍 들고 멀찌감치 서 있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내 지갑 속에 든 돈을 기억했다. “내 지갑에 38불 있는데 20불은 너에게 주고 나머지 18불은 내 친구와 점심 먹게 해줄래?”라고 물었다. 강도는 뜻밖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술이나 마약에 취하지 않았고 눈을 반듯하게 내 눈에 맞추는 정신이 말똥말똥한 친구였기에 나는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강도는 총을 흔들어 내 이마에 가까이 가져오며 급한 모습을 보였다. “오케이 오케이!”하며 나는 두 손가락으로 천천히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손에 쥐고 돈을 꺼내어 내밀었다. 그는 물러서며 그 돈을 자동차 후드 위에 놓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내가 태권도 발차기라도 할까 무서웠는지 나더러 뒤로 물러서라고 손짓했다. 갑자기 얼굴에 웃음을 띠며 고맙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돈을 움켜쥐고 달음질쳐 사라졌다.

6·25 전란을 겪은 가난 했던 우리나라 길가에 거지들이 많았고 소매치기는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었다. 나는 논산에서 군사훈련을 거쳐 의무병으로 목숨과 주검 사이에 군복무 하는 동안 세상 삶에 여물어졌는지 이런 일을 당해도 당황하지 않았든 듯싶다. 어쩌다 그해에 그런 끔찍한 사건들이 한꺼번에 있었는지 지금도 궁금하고 아찔하다. 하지만 어느 영화에서 보았듯 집에 강도가 들어왔을 때 놀래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우리 집에 처음 찾아온 손님이신데 좋은 대접해드리고 싶소.”하며 강도를 달래어 이야기 나누며 친구가 되는 경지까지 갈 수 있을까 하고 혼자서 상상해보기도 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부득이한 형편에 어쩔 수 없이 하면서 사는 듯하다. 어떤 경우는 자신이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도 많다. 내가 건물 주인에게 남은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달에 직원들에게 줄 월급이 모자라 그냥 지나갔다. 미국에는 화투로 짓고땡이나 고스톱을 칠 기회는 없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카드로 포커게임은 자주했다. 하면서도 지고 싶지 않아서 친구의 돈을 훨씬 많이 뺏게 되는 때도 있었다. 친구는 나를 보고 “너는 강도야.”라고 했다. 부득이 하였을 때 나는 도둑도 되고 남들이 말하는 강도질도 했음이 분명하다.

도둑과 강도는 경찰에 붙잡히고 교도소에 가는 사람만의 소행이 아니고, 내 삶 속에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알게 모르게 죄짓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문을 읽으며 사회의 분위기와 풍조에 따라 크고 작은 죄짓는 경우도 다양해 보인다. 그 죄를 갚으려고 그만큼 좋은 일을 많이 하여 갚고 돌려주며 살아가야 하는 생각을 자주한다. 옳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참으로 옳은 삶을 살아감은 얼마나 어려운지 인생은 끊임없이 빼앗고 돌려주는 자신의 도전이라고 할까.

애국심과 우리의 국력

자본주의 사회가 자유경쟁을 기반으로 세워졌기에 인류의 생존경쟁 본능이 사회 발전을 이루어가는 것인가. 그러한 능력으로 인류가 지구 위에 만물의 영장이 되었을까. 올림픽 때가 되면 본능적인 애국심이 발동한다. 뛰어난 체력과 기술을 4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으로 세계의 정상에 도전하는 열망의 순간이며 세계의 모든 나라가 참여하는 인류의 큰잔치이다.

밴쿠버 동계 올림픽의 쇼트트랙 우리 여자 선수들이 금메달 빼앗기는 반칙으로 중국이 가져갔고 소치 올림픽에는 우리가 금메달을 되찾고 중국이 반측으로 벌을 받는 경우도 보았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질서와 규칙을 따라 인간 최첨단의 능력을 보여주는 개인기의 경쟁이며 여러 선수가 팀을 이루어 진행하는 조직력의 발휘이다. 정상에 이르면 그 나라의 국기가 오르며 국가를 연주하고 금빛으로 빛나지만 뒤지면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목에 건다.

어느 땐가 오래전에 동네에서 맨발로 뛰고 맨몸으로 씨름하며 시작한 구경거리가 꾸준히 자라서 나라 사이에 경쟁으로 성장하고 이제는 전 세계의 흥행으로 펼쳐졌다. 경쟁종목이 다양해지고 의상과 운동기구의 발달로 스포츠 과학이 동원되는 경제적 뒷받침도 한몫한다, 운동 종목에 따라 일등과 이등의 차이를 사람의 감각으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미소하여 첨단 기계에 의존하여 판별하고 3등과 4등의 차이가 거의 같지만, 3등은 메달을 받고 시상대에 오르고 4등은 경쟁에 참석한 영예로만 만족하기에 더욱 관심을 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체구가 작고 체력이 약한 동양인들이 서구의 장신 선수들과 시합하면 어른과 아이가 경쟁처럼 보였을 때도 있었다. 콜럼버스 오하이오에서 세계 고등학교 야구시합의 마지막 경합이 있었다. 일본과 브라질 팀을 각각 꺾은 한국과 미국의 선수들이 결승에 이르렀다. 고등학교 후배인 선동열 투수를 앞세워 결승전에서 미국 팀을 이겼던 날에는 온 가족과 동포가 목이 쉬도록 응원하였다. 좁은 우리 집에 몰려와 냉면 먹으며 승리를 축배 했던 때가 엊그제같이 기억된다.

반세기 지나는 세계 경제의 변화 속에 우리나라 젊은이도 체구가 성장하고 이제는 우리의 경쟁력을 어디에나 내놔도 보라는 듯 국력상승을 뽐내어 보여준다. 월드컵 경기 때 서울광장에 모여 뜨겁게 응원하는 붉은 악마의 열기는 경기장 밖에서 보여주는 우리의 자랑이었다.

건축 양식

올림픽의 근원은 약 3천 년 전에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그곳 신을 섬기는 종교적 행사로 시작되었다고 역사책은 말하지만, 그리스의 석조물 조각이 인도의 목조 조각에서 유래되었고 석조건축양식도 동아세아의 목조건축양식에서 발달되었음을 고려하면 그 근원이 동남아세아에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 고대건축의 둥근 기둥 위에 사각 주두(기둥머리 쟁반)이 있어 그리스의 도릭 건축 양식이 되었으며 후에 아이어닉 형식과 코린시안 형식으로 발전하는 역사적 유래를 보면, 역사에 관한 견해가 다르다. 그러한 종교적 행사의 근원도 신라의 화랑정신과 같은 그 뿌리가 동남 아세아의 어느 곳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유럽의 역사는 2만 년 전에 빙하기 이후에 시작하였고 동남 아세아는 6만 년 전부터 시작된 인류학을 보아도 이해된다.

올바른 경쟁은 성장의 원동력

경기를 보는 흥분과 감동의 짜릿한 설렘은 우리가 타고난 본능적 경쟁의식인가보다.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뿌린 수억의 정자들이 어머니의 몸 안에서 필사의 수영 경쟁을 하여 제일 먼저 도착한 정자 하나가 기다리는 난자의 품에 안기는 치열한 경쟁에서 우리는 태어났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고 세상에 왔다. 그러기에 한목숨이 제각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존엄과 귀중한 가치이기도 하지 않을까. 한 목숨이 세상을 살아감도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경쟁 속에서 새끼 낳아 씨앗을 이어가는 운명이기에 살아있어 건강한 목숨으로 경쟁함은 얼마나 귀한 삶인가.

남자와 여자로 다르게 태어나 남자의 가는 길은 더욱 험한 길인 듯하다. 여자가 항상 좋은 씨앗을 찾아 능력 있는 후손을 이어가기 원하기에 남자는 황소의 머리에 뿔이 솟도록, 독수리의 부리가 사납게 굽도록 싸움하여 생존경쟁에 제일 강한 씨앗을 가졌음을 증명한 후에야 비로소 여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존재다. 그러기에 목숨은 곧 올림픽 경쟁이다. 정당한 경쟁은 사회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기에 경쟁하지 않고 정부에 의지하는 사회주의 구소련의 정치는 무너졌다. 경쟁에서 승리하면 명예와 물질적 혜택이 있어 동기를 부여하고 생산의 질과 양이 성장하여 국가와 사회가 함께 성장한다. 정부나 개인 기관에만 의지하려는 안이한 노동조합은 쓰러진다. 그뿐만 아니고 일찍 은퇴하고 삶 속에 도전을 잃은 후에 곧 사망하는 사람도 가끔 본다.

후진국에서 태어난 우리 세대가 선진국에 이민 왔을 때 균등한 경쟁의 기회가 있었기에 언어와 문화의 격차를 극복하고 각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한길에서 현대나 기아차를 보면 친구처럼 반갑고 세계 각국의 벽에 붙은 삼성이나 엘지 티브이를 보면 가족 얼굴 보듯 기쁘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일본의 소니 전자제품이 미국의 시장을 석권하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지금은 삼성이 유럽과 세계 각 지역에서 소니를 추월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가 참으로 대견스럽다.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버둥거리며 이불 덮고 흐느끼던 외로움, 자나 깨나 해바라기처럼 모국에 살아계신 부모님 생각, 내 나라 내 민족 그리움에 몸부림치던 시절, 가족 친척 향기가 물씬거리는 어린 시절 고향 생각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기에 우리 선수의 올림픽 메달 소식이 이렇게도 기다려지는 것일까. 태극기 오르고 애국가 울리면 눈물 펑펑 쏟는다.

동성애자 스티브

미국에 살다 보면 언젠가는 동성애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대학원을 마칠 무렵에 시작한 엘러비 건축 사무소는 직원 550명이 일하는 미국에서 제일 큰 건축 설계 사무실 중에 하나다. 내가 일 시작하기 얼마 전에 다른 주에서 이사해온 독신 건축가 스티브가 나보다 상급 직책에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스티브와 나는 같은 건물을 설계하는 임무를 갖게 되었고 그는 설계 감독을 하고 나는 도면을 그리는 일을 하는 직책이었다, 그는 나에게 매우 친절하였고 자주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서 민간인 건축가로 3년 동안 근무하였다고 한다.

한국 동두천에서 근무하는 동안 한국인 김동철과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며 내가 김동철을 닮았다고 한다. 나는 김동철이 누군지 모르고 어딘지 스티브의 행동에서 조금은 이상한 태도를 볼 수 있었다. 스티브와 나는 시카고의 건축물 현지답사를 함께 가게 되었고 그날 밤을 같은 호텔에서 머물게 되었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그는 나를 데리고 술 마시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은 동성애 하는 사람들만 모여 친구가 되고 술 마시고 춤추는 곳이었다. 여자는 없고 모두 남자들이었다.

유도 덕분에 위기 모면

나는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도 술을 배우려했지만 체질이 맞지 않았는지 술꾼이 되지 못했다. 술 마시고 남자가 남자를 끌어안고 춤을 추는 모습에 낯설고 소름이 끼쳤다. 내 체질에는 딱 질색이었다.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혼돈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나를 감독하는 직책이기에 나의 직장을 위해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이런 곳이 있는 사실이 내게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했다. 스티브는 김동철과 동성애 관계였음을 나에게 고백하는 듯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술을 마시는 척하고 취하는 척하면서 춤을 추자는 스트브를 잘 달래어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다.

방문을 잠그고 잠들려는 무렵 스티브가 내방 문을 두들기고 잠옷을 입은 채 들어왔다. 그리고 내 손을 붙들고 자기 말을 들으라고 간절히 부탁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빠르게 몸을 피하고 방에서 나가주기를 청했다. 그는 나를 겁탈하려는 듯 대들었다. 그 순간 내 유도 실력이 나왔다. 두 남자가 잠옷을 입고 한바탕 붙었지만, 그는 침대에서 내 발에 걸려 방바닥으로 꺼꾸러졌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하게 유도의 목을 조르는 기술에 관하여 말해주었다. 숨이 끊기고 정신을 잃게 됨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얼굴색이 파래지고 조용히 방을 나감으로 하마터면 동성애자 될 번한 위기를 모면했다.

다음 날 그는 내가 유도 몇 단이냐고 물으며 자기 허리를 다치게 했다고 불평을 했지만, 나는 모르는 척하고 우리는 웃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을 마치고 본사에 돌아왔다. 미국 사람들은 우리보다 시치미 떼는 단수가 높은 듯하다. 스티브는 친절하고 책임진 일에 충실함에 변함이 없었다. 나도 입을 꼭 다물고 조금도 남에게 기색을 보이지 않았기에 아무 일 없이 지냈다. 놀라운 사실은 직원들 가운데 여러 명의 동성애 직원들이 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집에 아내가 있고 밖에 동성애 남자가 있는 경우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정상적 안정된 생활상이 아니었기에 스티브도 그 직장에서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게 됨을 보았다.

돌이켜 보면 동성애 부부는 과거 인류 사회에 오랫동안 지속하여 왔다. 과부가 많은 동네에 맷돌 부부가 있고 교도소나 군대 생활에 오랫동안의 외로움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동성애 부부는 존속해 왔다. 현대인의 생활환경은 개개인의 고독을 더욱 증폭하였다. 외로움 속에 사랑의 갈증을 이성과 풀지 못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로 동성과 동반 생활하게 됨은 날이 갈수록 쉬워지고 있다.

도면을 오래 그리다 보면 시력이 약해져서 안과 의사를 찾게 된다. 의사가 나의 바른쪽 눈은 원시이고 왼쪽 눈은 근시라고 하기에 나 자신이 신기롭고 놀라웠다. 그때부터 나는 내 주위를 한쪽 눈으로 본 후에 다른 쪽 눈으로 다시 보는 버릇이 생겼다. 운전하다가 옆에 운전사를 한쪽 눈으로 보고 눈을 감고 떴던 모양이다. 자기에게 윙크하는 줄 알았는지 내 차를 따라오기 시작하는 듯했다. 분명히 동성애인임을 알고 나는 때어놓으려다 교통사고 날 뻔도 했다. 다음 신호등에서 간신히 때어 놓고 도망쳐 왔다.

온 인류의 숙제

지구 위에 인류의 인구 폭발 때문에 수억 년 동안 사람과 함께 살아온 수없이 많은 동물의 생명이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환경은 지구 표면에 기후의 변화를 가져오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이상기후까지 여기저기 나타나며 자연의 모든 생명에 생태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 가정은 남의 아이를 입양해 기르지만, 아이를 낳지 않기 때문에 인구증가를 늦추는 결과도 있을 수 있겠다. 그리고 자라난 아이들이 부모와의 관계를 본받아 그들은 동성애 부부를 다시 이루며 살게 되지 않을까.

지구 위에 인류는 풍선처럼 커질 만큼 커져서 이제 터지기만 기다리는 위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 선진국의 결혼 결핍에 따른 인구증가 속도가 줄어든다거나, 중국처럼 한 가정에 한 아이만을 갖게 하는 정책 등은 세계적 인구증가를 다소 늦출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후진국의 인구 증가를 억제하지 못하기에 인류의 지구표면 파괴는 멈추지 않는다. 최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애 결혼의 합법성을 거론하여 지금까지 지켜온 가정의 도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성애 가족처럼 이러한 비정상 가족이 많을수록 인류의 인구증가를 조금은 늦출 수도 있지 않을까.

아메리칸 드림 50년 (4)

논산 훈련소

나는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미국에 왔다. 18개월 학도병과 36개월 일반병의 선택이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학비가 떨어져서 논산 훈련소에 혼자 내려갔다. 일반병으로 근무하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원입대했다. 입대한 첫날에 삭발한 머리에 군복을 입고 배당된 막사에 찾아갔다. 충청도 시골에서 징병으로 소집되어온 훈련병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기차나 버스를 평생 처음 타고 논산에 왔다는 산골에서 농사만 짓다가 온 청년들도 있었다. 낯선 분위기였지만 마음에 준비하고 왔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다음날 군번을 받아 목에 걸고 군화신고 철모를 쓴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니 며칠 전까지 학생이었던 내 모습과 전혀 달랐다. 우스꽝스럽고 귀엽고 조금은 씩씩해 보이기도 했다. 30명이 한 막사에 자고 아침 여섯 시 나팔소리에 깬다. 세수를 마치면 막사에 15명씩 서로 맞보고 앉아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밥과 국이 담긴 냄비를 앞에 놓고 소대장의 “식사” 호령을 기다린다. 잡곡이 섞인 밥에 쇠고기 콩나물국이 하루 3번 먹는데 가끔 김치가 따라 나오면 큰 경사였다. 군대생활 3년 하고 먹은 콩나물을 한 줄로 이어놓으면 지구를 한 바퀴 돈다는 농담이 실감 났다.

가끔은 재미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30개의 밥 냄비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 졌는데 마지막 훈련병의 밥 냄비가 도착하지 안 했다. 식사 당번 사병과 소대장은 모든 사병을 세워놓고 온 막사를 뒤졌지만 숨겨진 밥 냄비를 찾지 못했다. 냄비 하나 더 만들어 식사를 마친 후에 돌아온 냄비는 31개이다. 두 줄로 서로 마주보고 식사했는데 누가 마술 부려 한 그릇 더 먹었는지 알 길이 없다.

대학 재학생의 혜택

소대장 박 대위는 내가 서울대 재학생임을 알고 소대장 보조병으로 발탁하고 사무실 청소와 심부름을 시켰다. 소대장 밥 냄비는 장교식당에서 내가 배달하였고 소대장이 외출하면 내가 먹었기에 가끔은 내 옆의 훈련병과 나눠 먹는 재미가 대단했다. 박 대위는 나에게 여러가지 특권을 부여했다. 우리 소대에 배달되는 담배와 건빵을 내가 소대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소대원들은 나의 공정성을 보았는지 나의 의견을 따르게 되고 질서가 유지되는 듯했다.

하지만 말썽꾸러기는 어디나 꼭 있었다. 화를 자주 내고 내 평생 처음 들어보는 시골 사투리 욕은 말끝마다 튀어나왔다. 드디어 다른 소대원과 싸움이 터졌다. 말리던 소대원 중에 한사람이 대검(총에 꽂는 칼) 두 개를 들고 와 쌍방에 하나씩 주며 나가서 남자답게 싸우고 오라고 막사 밖으로 쫓아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 욕하고 화낸 병사는 피를 흘리며 끌려 들어왔다. 곧 위생병을 불러 상처를 치료하고 끝냈다.

당시 훈련과정은 일제강점기의 2차 대전 군대훈련 방법으로 인권유린이 심했다. 훈련 중에 두들겨 맞는 경우가 심했고 변소에서 타살된 시체가 발견되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뜻밖의 위기

1958년 1월 13일 새벽에 나에게도 그런 위기가 일어났다. 북한 최전방 일선에서 트럭을 타고 훈련병을 실어가는 전투복 헌병들이 나타나 나를 찾고 있음을 알았다. 학도병들을 일선으로 데려가는 과정이다. 내가 학도병으로 잘 못 알려진 것임을 알고 나는 곧 훈련소 사무실 마루 밑으로 몸을 숨겼다. 몇 시간 후에 학도병 여러 명을 태우고 트럭은 떠났다.

어둠 속에 숨어 들어간 마루 밑은 몹시 춥고 그곳은 병원 쓰레기로 가득 싸인 곳이었다. 아침에 박 대위가 출근하는 때까지 그 속에서 기다리려고 마음을 다졌다. 잠옷만 입고 잠들면 얼어 죽을까 두려워 유리조각으로 손바닥을 찌르며 아픔을 참았다. 새벽빛이 들며 주사기 깨진 것들과 바늘, 피 묻은 수술 방 쓰레기 위에 내가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사실을 보았다.

평생 처음 당한 엄청난 구타

잠시 후에 청소 병사가 쓰레기 한 바켓을 구멍 속에 버리는데 그 쓰레기 모두 내 얼굴과 머리에 덮어썼다.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기어 나와 헌병대를 찾아갔다. 헌병들은 모두 경비에 나가고 술에 취한 듯한 헌병 혼자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훈련병임을 알고 내손에 수갑을 채우고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과 배를 감싸고 한사코 피했지만, 코피 터지고 숨이 막히고 얼마 후에 정신을 잃었다. 내 평생 그렇게 심하게 매 맞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헌병 장교가 방에 있었다. 그는 내가 혼자서 자진 입대한 사실을 알고 혹시 간첩이 아닌지 심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온몸이 피투성이고 얼굴이 멍들어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대답하다가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모양이다. 얼마 후에 다시 정신 들었을 때는 막사 안에 내 침대에 누워있었고 박 대위가 옆에 있었다. 누군가 사무직원이 내 등록을 일반병 아닌 학도병으로 잘못 취급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다행히 큰 상처없이 회복되었고 훈련소에서 훈련을 톡톡히 치른 셈이 됐다.

어느 주말에 어머님이 방문하러 오셨다. 훈련소 입구에는 면회소가 있고 가족 면회는 방을 내어 주었다. 나는 어머님을 보자마자 울음만 터트리고 할 말을 잊었다. 어머님도 형의 의과대학 학비에 쫓겨 나의 학비를 도와주지 못함에 죄스러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어머니와 가족 친척들의 소식을 나누는 동안 옆방에서는 남녀의 황홀한 비명이 시끄러웠다. 어머니 떠나시고 나는 헌병에게 이 방들이 어떻게 쓰이느냐고 물어 보았다.

나이 30대 헌병은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시골에서 장가들고 논산훈련소에 오면 신부가 주말에 신랑 보러 온다고 한다. 면회소는 낮에만 허락되기에 방이 모자란다고 한다. 어떤 경우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신부가 신랑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면회소의 헌병들이 남자노릇을 해주는 말 못할 어려움도 숨겨있다고 했다. 매일처럼 피땀 흘리는 훈련소 한 모퉁이에 본능적 사랑이 살아있음을 세삼 처음 알게 되었다. 결혼을 생각해보지 못한 나에게 박 대위는 누이동생을 소개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곧 훈련 3개월을 마치고 숙부가 병원장 하시는 대전 63 육군병원에 배치되었다.

처절한 삶의 목격

나는 위생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는 곧 환자들의 음식을 나르고 침구를 치워주는 동안 그들과 친구가 되었고 병든 몸으로 고통 받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처음 알게 되었다. 그들 중에 어떤 환자는 참으로 비참하였고 조금은 건강이 회복된 듯한 환자들과는 친한 친구가 되기도 했다. 병이 회복되어 퇴원할 때는 기쁘고 헤어짐이 섭섭하였다. 하지만 간절히 회복되기를 고대했지만 끝내는 목숨을 잃는 환자도 있었다. 내 손으로 담요를 펴서 시체를 감싸서 침대 위에 누이고 다음날 화장지에 운송되는 때까지 나는 그 시체 옆에서 밤을 새웠다. 그때처럼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종교를 갈구하는 심정은 내 젊은 시절의 인생관이 요동치는 경험이었다.

어느 날 지뢰 폭발사고로 두 발과 한쪽 팔을 잃고 후송되어온 환자를 보았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이후에 일선에서 가끔 보는 지뢰 사고였다. 나는 그 환자를 볼 적마다 가슴이 아프고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 일선에서 동료 친구가 찾아 왔다, 측은한 마음으로 찾아온 친구를 보자마자 “야 내가 큰일 날 번했어, 살아서 널 보니 얼마나 반갑냐.” 하며 남은 손 하나로 친구의 목을 끌어안는다. 그 순간 그 환자의 희망을 보았고 생명의 의욕을 보았다. 아! 살아 있는 목숨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런 후에 살아가는 길에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 나를 찾아와도 이 환자를 기억하여 자신의 삶에 감사하며 용기를 다시 얻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문학에 심취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문학에 취미를 얻었던 때가 있었다. 군복무 하는 동안 시를 쓰고 일기 쓰는 시간을 다시 얻게 되었다. 21살 내 나이에 내 나름대로 인생관을 찾아 헤매는 귀중한 경험을 거쳤든 듯하다.

군의관들은 내가 병원장의 조카이며 서울대학 재학 중임을 알게 되어 더욱 친절해졌다. 숙부는 내가 군복무 하는 동안 공과대학 학점을 받도록 배려해 주셨기에 대학은 6개월 늦어 1961년 9월에 졸업하고 일반병 군복무도 무난히 마칠 수 있었다. 의과대학은 6년제이고 공대는 4년제여서 형과 나는 같은 해에 졸업했다. 내가 훈련을 마친 2년 후에 형이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다. 형이 훈련 받는 동안 내가 방문하였을 때는 논산 훈련소가 미국식 군사훈련으로 개선되어 내가 겪은 훈련소 분위기와 크게 대조되었다. 인권보장이 향상되고 막사 설비와 식당 분위기가 대학 숙소 같은 인상을 받았기에 백선엽 삼군사령관의 현대식 군부 개조 노력을 한눈으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일본식 군국주의 군사 훈련을 겪었다면 2년 후에 형은 미국식 민주주의 군사 훈련을 받는 대조된 모습이 한국 군부 현대역사의 단편을 보여주었다.

갑자기 찾아온 질환

미국에 올 때 호주머니에 박정희 군사정부에서 허락한 $50과 미국에서 형이 마련해준 비행기 표에 딸려온 어께 가방하나 매고 이국땅에 찾아와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은 이러한 군사 훈련 덕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는 때도 있었다. 우리 형제는 비교적 만리타향 이국생활에 적응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원을 졸업하고 여러 해 미국의 초년병 건축가로 설계와 제도에 몰입하는 동안 내 몸에 나쁜 버릇과 질병이 자라고 있음을 몰랐다.

직장시간 후에 집에 오는 길에 운동을 좋아하는 나는 친구들과 정구를 치고 왔다. 땀 뻘뻘 흘리고 몸을 씻고 나면 그렇게 상쾌할 수 없고 직장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듯했다. 어느 날 운동하고 집에 왔을 때 바른 팔이 재리기 시작했다. 재려나서 풀리면 아프기까지 하였다. 밤에 자다 깨면 바른팔에 감각이 없고 움직이질 못해 왼팔로 들고 놓아야 할 만큼 심해졌다. 아내는 빨리 의사를 찾아가도록 재촉을 했다. 친구 외과 의사를 만났을 때 그는 곧 입원하도록 하고 엑스레이 혈액검사를 마친 후에 신경외과 의사를 만났다. 뒷목 척추에서 신경이 눌린 듯 하다며 다음 날 혈관에 색소를 넣어 엑스레이로 정확한 장소를 확인한 후에 곧 수술한다고 한다.

그날 밤 나는 병실에서 한잠 자지 못하고 고민하였다. “혈관에 색소를 넣어 검사하고 목에 척추 수술을 한다?” 친구 의사의 말이 내 귀에서 비명을 친다. 다음 날 새벽에 친구 의사에게 “집에 가서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는 글을 남기고 병원에서 도망쳐 나와 곧바로 정구장 사우나에 들어가 내 방식의 열 치료를 하고 있었다. 도면을 그리고 글을 쓰고 정구치는 바른팔이 고장 났으니 앞이 캄캄했다. 그 순간 나에게 기대하지 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위급한 상황에 나에게는 구세주처럼 천사가 찾아왔다.

키가 건장한 독일계 중년 남성이 벌거벗고 걸어들어 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왜 병원에서 나왔는지 묻는다. 나는 소스라쳐 놀랐다. 내가 병원에서 나온 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손목에 병원 밴드가 있어서 정신병원에서 도망쳐 온 정신병 환자인가 궁금해 했다. 나는 웃으면서 자초지종 내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도 웃으면서 몇 달 전에 허리에 신경이 눌려 다리가 몹시 아파서 허리 척추 수술을 할 뻔 했는데 닥터 어네스트 존슨이 구해 주었다고 말해준다. 오하이오 스테이트 병원 의사로 물리치료 두 주일 받고 체조를 따라 하면 한달 안에 낳는다고 알려주었다.

구세주 닥터 존슨

나는 곧 집으로 달려가 닥터 존슨에게 전화했다. 그의 사무직원이 환자가 너머 많아 앞으로 2년 동안 새 환자 받지 못한다고 한다. 나는 절망하지 않고 의사의 조수를 불러 내가 건축가이며 가정과 아이들이 있고 이 병은 운동하다 갑자기 일어난 내 생애에 치명적인 병이기에 닥터 존슨을 꼭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약 10분 후에 닥터 존슨이 전화했다. 혈액검사 보고서와 엑스레이 사진을 가지고 다음 날 아침에 찾아오라고 한다. 내가 그의 사무실에 도착해 기다리는 동안 그는 세계 의학 잡지와 미국의 타임지에 그의 얼굴과 글이 실렸음을 보고 그가 세계적 명의임을 알게 되었다.

타임 잡지에 그의 말이 이렇게 인쇄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운전하는 중에 차 안에 벌 한 마리가 날아다니면 벌을 때려죽이려고 차 사고를 낸다.”고 했다.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열어 벌이 나가도록하는 간단한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 환자가 아픈 곳을 치료하는 쉬운 방법을 찾으려 하기보다 서두러 수술을 받게 되면 더 큰 상처를 받는 줄 모른다.”고 했다.

그는 나를 진찰하고 가져온 기록을 검토한 다음, 내가 사무실에서 앉아 일하는 모습과 제도판에 엎드려 일하는 자세, 그리고 차를 운전하는 자세를 보여주도록 했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은 수백만 년 전까지 4발로 기어 다니던 체구인데 어느 땐가부터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쓰던 근육을 쓰지 않게 되었기에 두발로 서서 걸어다니는 현대인의 열사람 중에 한사람은 목과 허리에 병을 갖고 산다.”고 했다.

나를 찾아온 천사

그의 제자들이 일하는 물리 치료소를 알려주어 찾아갔다. 뜨거운 타올로 목과 등을 덮어 근육이 누그러지도록 한 후에 목에서 내려온 신경과 근육을 더듬어 굳어진 마디를 찾는다. 찾은 마디를 치료사의 엄지손가락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눌러서 마디를 풀었다. 누르는 마디가 얼마나 아픈지 소리 지르려는 충동을 참고 견뎌냈다. 뒷목 근육을 보강하는 운동과 체조를 배워서 반복하였다. 사우나 안에서 만나 사람의 이야기 그 데로 한 달 못되어 완치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몇 달 후에 허리척추에 신경이 눌려 좌골 신경통이 왔다. 나는 닥터 존슨에게서 배운 원리로 아랫배 근육 운동하여 혼자서 치료하고 곧 회복하였다. 신체장애로 역경에 처해서 정구장 사우나에 앉아 있을 때 나를 찾아와 닥터 어네스트 존슨을 소개해준 백인 중년 남자는 누구였는지 모른다. 그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천사였다고 감사히 생각하며 나도 남에게 천사가 되기를 노력하며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가끔 근육 마사지를 받았다. 내가 한국에 가면 친척이나 친구 댁에 머물기보다 호텔에 머물었고 그때마다 나를 찾아 와 마사지를 해주는 사촌 동생이 있었다.

고숙의 인생

그는 고등학교 때 갑자기 장님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내 고숙에 관하여 나에게는 전설처럼 신비스럽게 기억되는 이야기가 있다.

1945년 해방 직후에 고숙은 젊은 나이에 경찰 훈련을 받았고 곧 경찰전투단에 배치되었다. 강력범을 단속하는 책임을 지고 일하는 동안 24살에 고모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여수⦁순천 반란사건과 6⦁25전쟁 이후에 고숙은 전투부대장에 승진하고 지리산 주위에 공산군 유격대 토벌을 지휘하는 직위까지 승진하였다.

인민군 잔류와 지방 공산당원으로 조직된 빨치산들은 낮에 숨어있고 밤에 활동하기에 토벌전투는 지리산 마을들의 주변에 옮겨 다니며 밤마다 계속되었다. 경찰 측은 전투설비와 장비를 잘 갖추었지만, 빨치산들은 장비가 부족하여 전투마다 빨치산 측 피해가 항상 컸다. 고숙은 경찰 총경으로 진급하고 지리산 주위에 진주, 남원, 김해, 등의 도시에 경찰서장의 직책으로 승진하였지만, 항상 전투에 몰두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에 여름방학 동안 고숙과 고모 그리고 사촌 동생을 보러 들렀다. 며칠 지나는 동안 고숙의 부하 경사가 여러 가지 고숙의 전투 이야기를 하는 중에 놀라운 사실을 들려주었다.

전설같은 이야기

“그날 밤 정 총경은 20여 명의 무장유격대를 포위하고 직접 진두지휘하여 다섯 명을 생포하고 나머지 빨치산은 모두 사살하였어요. 하지만 그 전투에서 정 총경의 십여 년 동안 자기 몸처럼 아끼고 형제처럼 사랑하는 부하가 빨치산의 총탄에 맞아 숨졌어요. 밤새 슬픔과 분노에 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다음 날 그의 시체를 산에 묻고 그는 온종일 술을 마셨지요. 그리고 밤에 혼자서 평소에 벽에 걸어둔 일본도를 빼어들고 생포한 포로들을 한 명씩 밖으로 끌고 나와 다섯 명 모두 목을 쳐서 죽였어요. 피가 지리산 계곡을 붉게 물들였지요. 그리고 사흘 동안 혼자서 자신을 방안에 가두고 먹지도 말하지도 안 했어요.”

그날 밤 이야기를 듣고 괜히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 열여덟 고등학교 나이에 우리 편과 남의 편의 남은 가족의 슬픔을 함께 느끼며 시대가 가져온 어쩔 수 없는 처절함에 혼자 울 수밖에 없었든 듯싶다. 그 후에 고모와 고숙은 두 딸을 출산하여 다섯 가족이 됐다. 김해 경찰서장이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을 태운 열차가 김해 부근을 지나는 중에 술 먹은 한 농부가 철길을 머리에 베고 잠들었다가 기차에 치여 죽었다. 영문 모르는 고숙은 해고 통지를 받고 그날부터 실업자가 되었다.

고숙은 가족을 대리고 서울에 이사했고 여기저기 직장을 찾아서 일 해봤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고 집에서 고모 얼굴만 보고 살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혼자서 사라졌다. 가족들은 남편과 아버지를 찾기 시작했고 많은 친척이 세상 방방곡곡에 모든 곳을 다 찾아다니며 삼 년이 지났다. 그동안에 고모는 속병을 앓다가 돌아가시고 아들은 갑자기 눈이 멀어서 장님이 되고 집에 재산은 모두 사라졌다. 그러든 어느 날, 친척 중에 한 분이 강원도 어느 깊은 산골 암자에서 삭발하고 사는 고숙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소식이 끊겼다.

전쟁의 이산가족

해방 후 격동기에 우리가 지냈던 뼈아픈 기억이 반세기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지금도 가족들이 남과 북으로 해어져 다시 보지 못하고 한평생 그리워하며 살아온 부모⦁형제⦁자매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가슴 깊이 피맺힌 한을 품고 세상과 작별해간다. 풀리지 않는 운명을 체념하듯 역사는 느리게 개으름을 부린다. 지금도 북한 땅은 세상 밖을 보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 못하고, 가족 친구 만나보고 싶어도 찾아가지 못하는 자유 없는 나라. 무자비한 공개처형으로 동포를 공포 속에 떨게 하며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여 계속해서 남한을 위협하는 세계 유일한 히틀러나 스타린 식의 독제국가이다.

세계의 자유인이 반세기 지나도록 북한 동포를 자유의 세계로 구출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느낄 적마다, 그날 밤 지리산 토벌대의 슬픈 눈물은 반세기 지나도록 내 마음에서 마르지 않는다. 우리가족이 잃어버린 숙부를 끝내 찾지 못하듯 남한과 북한은 영영 통일하지 못하고 두 나라로 나누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세월이 갈수록 더욱 가난해지는 북한 땅과 세계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남한 땅 사이에 벽은 자꾸만 높아져 보인다. 그러다 그 벽이 무너지면 동독과 서독의 경우일까, 일본에 쓰나미처럼 큰 혼란이 될까. 살아 있는 동안 죽도록 기다린 가족을 만나고 눈물이 웃음으로 승화하는 날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과테말라의 새로운 계약

미국의 도시, 네쉬빌은 테네시주의 수도이고 그곳에서 1982년에 이여욷 존슨 사무실의 콘설탄트로 계약을 맺고 중미에 과테말라 국립병원 설계를 하게 되었다. 과테말라 도시는 바다수면에서 1.500미터 높이의 화산지대 복판에 위치해 있다. 도착하는 날 우리 일행이 대절한 비행기가 절벽 끝에서 시작되는 비행장 활주로를 내려갈 때 조종사는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과테말라 도시는 주위에 활화산으로 포위되어 매일 검은 연기를 품어내고 있으며 수년전 1976년에 대 지진으로 23,000여명의 희생자를 낸 도시이다. 이곳의 아침인사는 화산이야기로 하루가 시작된다.

1960년부터 내전이 계속되어 우리는 군사정권의 보호를 받고 육군병원 설계를 시작하였다. 지진에 대한 심리적인 공포감 때문에 3층 이상의 건물은 지을 수 없고 일층은 장교들과 고급 인사들의 병실, 2층은 장병들과 공무원의 병실, 3층은 일반 환자의 병실로 분배하였다. 우리가 데려간 통역은 멕시칸인데 도착한 이틀 후에 군부에서 의심받고 추방당했다. 통역 없이 회의를 중단하게 된 처지에 우리 일 행중에 외국어 경험 있는 나에게 통역 책임을 맡겼다. 나는 스펜니쉬 단어 하나도 전혀 모르는 데도 일본, 중국, 미국 등의 외국 생활 경험으로 손짓 발짓하며 눈치껏 이틀 동안 통역해냈다. 다음 날 새 통역이 도착하여 정상적인 회의를 진행할 수 있었다.

평생 처음 경험한 지진

우리가 머문 카미노 로이얄 호텔은 미국에서 설계한 16층 건물인데 우리는 14층에 머물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 우리 일행이 14층 회의실에서 다음 날 설계준비를 상의하고 있었다. 6 사람이 큰 테이블에 청사진을 펴놓고 둘러 앉아 회의하는데 갑자기 지진이 세상을 흔들었다. 땅 밑에서부터 저음괴성이 크게 울려오며 우리는 약 2 피트 아래로 내려앉는 듯한 다음, 좌우로 2피트씩 기울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일생에 처음 경험이었기에 어쩔 줄 모르고 테이블을 두 손으로 붙들고 앉아 있는 동안 나머지 5 사람들은 모두 층층대로 도망치고 없었다. 고층건물에 지진 만나면 층층대와 엘리베이터 주위가 덜 위험하다는 지식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주택건축은 흙벽돌을 쌓아 지었기에 지진이 나면 모두 무너지기 마련이기에 모두들 집 밖으로 대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도시에 지진이 나면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하지만 경제적으로 지진대비를 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지진지대에 세워지는 현대건축은 두 가지 지진방지 설계를 한다. 하나는 건축물 기초와 상부 구조사이에 흔들림이 전달되지 않는 조인트를 설치하거나 두 째는 철골 구조를 바구니 짜듯 진동을 흡수하는 설계 방법이 있다. 우리가 머물었던 고층건물은 유연성 있는 철골 구조였기에 그렇게 크게 흔들렸어도 건물에 피해도 없고 우리는 모두 안전하였다.

과테말라는 1960년부터 내전 중이었기에 우리나라 박정희 군사정부처럼 군정시대였다. 밤이면 가끔 총성이 들리고 매일 신문의 표지에는 게릴라 전투 소식이 실려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영문 신문의 한 이야기에 아버지와 아들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논길을 달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아들에게 모터사이클에서 내려 빨리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아들은 도망쳐서 집으로 찾아 왔지만 학교 선생님인 아버지는 괴한들에게 붙들려 돌아오지 못했다. 다음날 가족이 찾은 아버지의 시체는 손발뼈마디를 모두 꺾고 손톱 발톱을 모두 뽑아놓았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우리가 겪은 6⦁25전쟁보다 더 무식하고 잔인함을 느꼈다.

우리 일행 중에 처음 보는 지진과 사회 환경이 무서워서 일을 그만두고 떠나는 대원도 있었다. 나는 집에 아내와 유치원 다니는 딸이 있었지만, 멀리 외국에 출장 와서 일하며 배우고 싶은 일들이 많아 이러한 환경에도 별로 두려움이 없었다. 설계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시간을 내어 과테말라 역사의 마야유적지를 탐방하기 시작하였다. 약 6개월 동안에 국립병원의 기본설계를 마치고 본설계는 멕시코 건축회사에 넘겨주었다. 나는 2주 동안 휴가를 내어 유카탄 반도 일대에 마야문명 연구에 몰두하였다.

마야문화 유적탐방

마야문자들이 중국 한자처럼 하나의 단어로서 의미를 보이고 네모 안에 들어있는 모양이며 좌우로 혹은 상하로 읽는 형식을 보고 기원전 한나라 때 정립된 한자 이전의 모태였을 가능성을 상상하였다. 상나라 때 갑골문자와는 다르지만, 주나라 때 주역에서 숫자를 표시하는 방법으로 점과 직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짐에 한자와 마야문자의 공통성을 보았다. 그때부터 지난 20여 년 동안 그 일대의 국립박물관과 중미 유카탄반도 일대에 올멕, 테오티와칸, 아스텍, 마야 등의 문화 유적지들을 답사하였다. 많은 책과 학회자료와 학회모임에 참석하는 동안, 동 아세아 문화와 미 대륙에 원주민 문화의 공통성을 찾아보았다.

마야 석조 건축물의 아치는 고구려 고분에서 보는 층단식 지붕(corbel arch)과 같은 양식이다. 마야 석탑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듯한 높은 층계는 중국의 사찰 입구에 그리고 일본 신도사찰에 남아있는 고대 동아세아의 종교 건축양식과 유사하다. 우리나라 불국사 층계와 다보탑에 축소된 층계도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유카탄반도에 엘 타진 석탑은 규모와 모양이 백제 미륵사지 석탑을 연상하게 한다.

유카탄 반도의 마야문화

멕시코 테오티와칸 유적에 건축된 용(dragon)의 모습은 동아세아에 용의 모습과 꼭 같고 다만 고기 비늘대신 새 깃으로 몸을 이루었다. 유카탄 반도에 치첸이트사에는 기둥을 감고 도는 용의 모습도 본다. 용의 얼굴, 귀면은 우리나라 신라건축 지붕기와에서 보는 모습으로 상나라의 청동유물들 조각에서 흔하게 본다. 동아세아 상고사의 금속무기 창시자 치우(蚩尤)의 얼굴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명나라 때 향로에 조각된 코끼리 코를 가진 귀면을 마야건축물 입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음과 양의 종교적 개념과 오행의 개념이 있듯 음력과 양력 같은 두 개의 달력을 사용하며 동아세아의 십이지와 60년 윤회가 있는 것과 같이 13년의 개별 상징과 52년 윤회가 있다. 사람을 희생물로 바쳤음은 동아세아 유교이전에 고대 역사에 오랫동안 존재하였다. 마야 성전(temple)의 가람배치(site plan)가 남북을 축으로 탑을 중앙에 두고 사방에 문을 두는 형식이 동아세아의 궁궐이나 사찰배치와 유사하다. 전쟁에 임하여 높은 장소에 봉화대를 세우고 불을 피우고 검은 연기를 하늘에 올려서 신호하고 북을 쳐서 소리 내어 멀리 신호를 보냄도 동아에아에서 유적에서 흔히 보는 현상이다.

오행의 상징인 다섯 동물은 뱀, 독수리, 표범, 악어, 두꺼비, 등으로 표시하여 우리나라 고구려 문화에서 흔히 보는 청룡, 주작, 백호, 현무, 황인, 등의 오행상징과 상통하는 현상이다. 고대 중국인들이 옥돌을 동전 모양으로 동그랗게 만들고 가운데 동그란 구멍을 만들어 장식물로 몸에 달고 타오티 라고 부르며 잡귀신을 막는다고 한다. 마야 귀족의 의상과 장식에서 타오티를 흔하게 본다. 상나라 왕의 시신을 옥돌 조각으로 몸과 얼굴을 덮었듯 마야왕의 시신을 옥돌 조각으로 몸과 얼굴을 덮었다. 마야인들의 평민 의상은 일본 사람의 하의(훈도시)와 비슷하다.

맷돌과 절구를 사용하여 곡식을 빻고 껍질을 바람에 날릴 때 키를 사용함도 우리와 같고 도리께 질을 하고 디딜방아도 사용하며 삼나무를 말려 깃저고리를 입고 옷감을 만드는 베틀도 우리 것과 유사하다. 중미지역풍습에 개, 닭, 돼지들을 기르고 먹는다. 우리가 매운 고춧가루 음식을 즐겨먹듯이 그들은 매운 토바스코를 즐겨 먹는다.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고 피리를 즐겨 분다. 우리나라 제주도 돌하라방과 비슷한 모자 쓴 인상을 지금의 생활방식과 조각물들의 모습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문화의 연장

동아세아 지역에 그리고 우리나라에 아기머리를 납작하게 변조시키는 편두습관이 중미에서도 있었음을 박물관전시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옛 풍습에 보이듯이 새의 깃으로 장식을 많이 하고 색색이 화려한 옷을 입는 풍습이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에 기록되었듯이 궁중에서 공차기를 하였는데 중미에 공차기 행사도 궁중 행사 중에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동아세아 문화와 미 대륙 원주민 문화의 연결은 세계 역사에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러한 연구는 백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그들은 아직도 미 대륙에 원주민 문화도 아세아의 문화가 유럽 문화에서 시작되었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 식민사관의 교과서로 공부한 지식인의 후손이며 백인들의 침략역사관을 학교에서 공부한 세대이기에 배운 데로만 믿으려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음 세대에게 편견 없는 바른 역사를 찾아 보여줌이 우리의 할일이 아닐까.

북남미 대륙의 원주민이 우리와 같은 혈연이며 동아세아 동이족의 부류임을 증명하는 논설은 1990년대 중반부터 발표되었다. Scientific American. 책자 2008년 7월호에 Gary Stix의 논문은 그전에 1995년 출간된 Cavalli-Sforza의 저서 ‘The Great Human Diasporas’의 내용을 더욱 발전시켜 정확하게 전개한 논문이다. 아래 도표는 National Geographic에서 발표한 인류의 핏줄 속에 감추어진 혈연의 역사를 보여준다.

우리 민족의 혈연은 M174와 M130으로 나누어져서 M174는 만주, 몽골, 티베트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선조로 보이고 M130은 시베리아, 알라스카를 지나 북미, 중미, 남미에 이르는 백제의 선조로 보인다. 현대 인류는 발원지 아프리카에서 10만 년 전경에 서식하다가 해 뜨는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떠난 후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도양과 태평양을 끼고 돌아온 6만 년 전경에 동남아세아에 머물러 모여 살면서 사회생활이 형성되고 언어가 발달하였다.

5만 년 전 한반도 서부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겨울철을 맞은 듯하다. 김치, 곡주, 발효음식을 개발하고 온돌방을 지어 겨울을 이겨내는 우리 민족의 뿌리는 이때부터 영글었으리라. 인류 혈연역사에 가장 오래전에 내륙으로 침투하고 해안선으로 연결된 인류 혈연의 대동맥이 우리의 핏줄이다.

동아세아의 고대문명

세계에서 가장 일찍 9천 년 전쯤에 요동반도 홍산 문화와 문명은 석조성곽을 짓고 토기를 만들고 옥돌 조각물 재작이 시작되었음이 중국의 가장 최근 고고학 발굴에서 발견되었다. 층단식 돌무덤을 세워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동아세아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하나라 은(상)나라로 이어지는 고조선의 역사는 중화 문명의 기반이 된 듯하다. 만주지역에서 시작한 우리 선조는 수만 년 전부터 말과 개를 가정에서 기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나라의 기록 서경에 은(상)상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주위의 부락민에게서 개와 말을 선물로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삽살개나 발바리라는 개 이름도 오래된 우리말이다.

양자강과 황하 중류에서 3만 5천년 전에 성장한 중화 민족의 주나라가 은(상)나라를 비롯한 동이족의 나라들을 점령하는 5천 년 전쯤에 약 25만명에 이르는 민족이동이 해외로 분산되었다고 사마천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동이족의 금속 문화, 조상 종교와 천체 종교로 시작된 피라미드 문화는 나침판을 만든 항해 기술과 함께 전 세계 각 대륙에 전파된 듯하다. 동아세아에서 필사적으로 도피하여 아프리카 나일 강변과 중남미 대륙에 흘러간 것이 아닐까.

마야는 동아세아 문화의 가지

멕시코의 수도 외곽에 테오티와칸의 해와 달의 피라미드는 아즈텍 민족의 유적으로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미국 원주민 문화의 절정기를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로마시대 로마의 도시보다 더 큰 인구와 도시규모를 갖추었던 곳이다. 이 도시 문명이 후대 멕시코 문명의 초석인 아즈텍과 마야문명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테오티와칸은 멕시코에서 가장 잘 보존된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도시로 손꼽히며 AD 150년경에 세워졌다고 한다. 태양의 신전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3번 쩨 크기의 70m높이에 248계단이 있는 피라미드이다.

태양과 달의 신전에서 내려다 본 광장은 축제의 행진이 개최되는 약 2마일 길이의 거리가 남쪽으로 열려있다. 14세기에 침략한 스페인 사람들은 “사자(죽을자)의 거리인바 제물로 바칠 사람을 묶어서 끌고 가던 거리”라고 비하하는 설명을 한다. 거리의 남쪽에 거대한 용의 피라미드와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용의 조각을 보며 동아세아의 문화와 연결됨을 증명한다. 해와 달이 함께 세워졌음도 동아세아의 도교에 음양철학이 연결되었음을 느낀다. 달 신전 피라미드에서 남쪽으로 뻗는 축제의 거리가 시작되며 조금 동쪽으로 위치한 해 신전 피라미드와 만나는 광장은 주위에 여러 개의 작은 층단식 피라미드들이 세워졌다.

이들 기원전후경의 피라미드문화가 시작되기 이전에 한반도 남단에 못을 파고 흙산(mound)을 짓던 풍습은 미시시피 강변을 따라 3,000여개의 흙산들로 연결되며 한반도 남단과 서해주변에 중국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다. 동아세아의 금속문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큰 돌을 멀리서 끌어와 세우는 종교의식으로 피라미드가 세워지기 이전의 진화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피라미드의 진화과정은 아프리카 나일강이나 중미 유카탄 반도 주위에서 볼 수 없다. 동아세아에서만 볼 수 있다.

하바드 대학교 교수 Robert M. Schoch는 2003년에 출판된 저서 VOYAGES of the PYRAMID BUILDERS에서 중미의 마야문화가 동아세아 상나라문화의 연장된 문화임을 시사함으로서 피라미드건축기술의 근원이 동아세아에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만주 지린성 일대에 수천 개의 석조 층단식 피라미드 유적들이 있고 장군총이 사진과 같이 완성된 모습니다.

마야의 저지대와 산악지대에 처음으로 사냥을 주로 하던 유목민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전 11,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시베리아에서 알라스카로 넘어와 북미대륙에 퍼진 주민들의 일단이 멕시코를 거쳐 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석판에 새겨진 마야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113년에 세계가 생겨났고 기원전 2600년경에 마야문명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는데 걸프연안의 벨리즈(Belize)에서 발견된 유물의 방사선연대측정결과 기원전 2000년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마야인들의 농촌부락들이 생겨나면서 마야문명이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기원전 700년경에는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고 기원전 400년 경부터는 돌에 새긴 태양력 칼렌다가 사용되었다고 고고학자들은 설명한다.

(해 신전 피라미드 앞에 축제의 광장)

세계 인류분포에 가장 선진지역인 동아세아는 사계절 기후변화에 맞추어 6만년동안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하는 동안에 생활에 질서가 서고 해양활동과 내륙활동의 융합된 장소, 농경민과 유목민이 경합하는 지점이었을 듯하다. 세계의 선진 국민으로서 자랑스러운 우리의 뿌리를 찾고 인류 문화와 문명에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 방문

1980년대 중반 대한항공 보잉 747로 한국 직항 운행이 시작하였을 때 나는 한국을 떠난 지 거의 20년 만에 모국을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대학 졸업할 때 현대 건설에 취업 시험에 합격한 친구들은 이미 현대건설의 상무나 전무로 승진하여 한국의 국내 건설업과 중동 국제건설업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설계사무소를 시작한 친구들은 우후죽순처럼 치솟는 아파트단지 건설사업 부터 시작하여 한국 내에 중요한 건물 설계를 도맡아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내가 골프를 시작한지도 벌써 20년 가까이 되는 줄 알게 된 친구들이 나를 안양골프장에 데리고 갔다.

이병철 회장이 설립한 안양골프장(현 안양베네스트GC)은 한국의 첫 개인기업 골프장이었으며 그곳에는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1967년에 오픈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병철 회장이 지인들과 골프를 치고 있었다. 그날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은 그는 골프를 멈추고 서두러 클럽하우스로 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온 것이었다. 이 회장과 박 대통령이 함께 라운드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며 이 회장과 박 대통령은 9홀을 돌고 나서 저녁식사 자리로 이어졌다. 박 대통령은 그 후부터 자주 안양골프장을 찾아와 친분을 나눴다고 한다.

서울대 관악 켐퍼스

내가 처음 서울대학 관악 켐퍼스를 찾아갔을 때 그곳은 원래 삼성회사소유의 ‘버들골’의 골프장인 관악 컨츄리클럽 이었다고 들었다. 당시 교수회관으로 쓰이고 있는 옛 클럽하우스의 발코니에 이병철회장이 자주 앉아 골프장을 내려다보며 혼자의 생각을 즐겼다는 의자가 아직 있었다. 나도 그 의자에 앉아 이병철회장의 체온을 느껴보았다. 박정희, 정주영과 함께 한국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위인들임을 생각하게 했다. 그가 작고하기 며칠 전인 1987년 10월 27일경에 이회장이 골프카트를 타고 마지막 골프를 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어두워졌는데도 더 치고 싶어 하는 그분을 위해 일하는 직원들이 골프장에 사용하는 모든 차들을 동원하여 라이트를 켠 채 생애 마지막을 라운드를 했다는 이야기를 귀국 후에 듣게 되었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의 소니를 앞지른 아들, 이건희를 길러낸 한국 전자기술의 아버지요, 최근에 세계 여자골프의 선봉을 지켜가는 박인비가 태어나도록 한 한국 골프 운동의 원조이기도 하다.

관악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관악산에 와서 연주봉 절벽 위에 의상대를 짓고 수행하기 위해 골짜기에 절을 건립한 후 관악사라 이름 지은 데서 비롯됐다는 기록이 있다. 예부터 개성의 송악산(松岳山), 가평의 화악산(華岳山), 파주의 감악산(紺岳山), 포천의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오악(京畿五岳)의 하나로 산봉우리와 바위가 빼어난 명산으로 꼽혀왔다. 산봉우리는 불 모양이므로 풍수상 형세(形勢)는 화성(火星)으로, 경복궁의 ‘왕도남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화기(火氣)의 산으로 보았다. 내가 60년대 초반과 2010년부터 이해까지 일해 온 숭례문의 현판이 가로 쓰이지 않고 세로 쓰여진 뜻도 관악산 화기를 재우기 위한다는 풍수해설 이었다고 들었다.

서울대는 해방 직후인 1946년에 10개의 독립된 대학을 미군정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을 발표해 하나로 묶어 만든 연합대학이었다. 해방 전 조선 땅에 있던 유일한 종합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모두 10개 대학을 합친 것이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대는 1954년 군사정부 아래 ‘미네소타프로젝트Minnesota Project)’라는 이름의 미국원조 계획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1969년 겨울, 박정희 대통령은 홍종철 당시 문교부장관, 최문환 서울대 총장을 이끌고 일찌감치 눈 여겨 봐뒀던 관악골프장을 찾았다고 한다. 1971년에 박대통령은 “한강을 굽어보는 언덕에 문화의 유산을 이어받을 사랑스러운 아들딸들에게 진리 탐구의 전당을 마련해주고자 한다”는 요지였지만, 박정희 정부가 4대문 안에서 서울대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비공식적인 추정이 오랫동안 존재했었다. 학생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강하게 반발했고 1975년 봄 관악 캠퍼스의 설립과 동시에 정문 입구엔 전투경찰 병력 1개 대대를 지휘하는 세계 최대 파출소가 들어서면서 관악캠퍼스는 그렇게 탄생했다고 한다. 관악캠퍼스 마스터플랜은 1971년 완성되었고 기공식 또한 당해에 서두러 이루어졌다. 그 후 1단계 이전은 1974년에 이루어졌고, 1979-1980년에 4단계로 공과대학이 이전하였다고 했다. 서울대 의과대학 외에는 모두 관악구 봉천동과 신림동 일대의 관악산 아래에 모여 있었다. 20년 만에 찾아온 내 눈에 비추는 모국의 변화는 젊은 피가 끓는 듯 가난과 후진사회에서 벗어나는 격동기를 거치며 성장과 발전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음을 보았다.

내가 살던 오아이오주

그때 나는 오하이오주에 살고 있었다. 내 나이 28세에 미국 미네소타 주에 유학 와서 나이 30 중반부터 내 가정을 꾸리고 40 중반부터 내 사업을 시작한 곳이 오하이오 주이다. 이곳은 미국 대통령 5 사람을 배출한 본향이며 지금도 대통령 선거철이면 오하이오 주의 결정이 전 미국 선거에 지대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동부처럼 유럽의 경향이 없고 서부처럼 아세아나 멕시코의 영향이 없는 지리적으로 미국 중앙에 위치한 미국사회의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다. 북쪽에는 디트로이트 시의 미시간주, 서북쪽에는 시카고 시의 일리노이 주가 있다. 1979년에 나의 사업을 시작하여 2005년 은퇴할 때까지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동안 미국의 역사를 바꾼 이곳 출신의 위인들에 관하여 알게 되었다. 데이튼 시는 주청사가 있는 콜럼버스에 가깝고 신시네티에도 가까워 오하이오 서남부에 3 도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1865년에 미국역사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경제적 어려움에서 이제 막 안정되고 회복되어 이민인구가 증가하는 때였다. 스팀엔진으로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유럽에서 자동차를 스팀엔진이나 전기 엔진으로 만들어보려는 무렵이었다.

오하이오 데이튼

우리 가족이 사는 데이튼 시의 윌버와 오빌 라이트 형제는 1860년대에 태어나서 1870년대 초반부터 이곳 바쁜 길가에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며 장난감 비행기를 만들어 날리는 취미를 일삼았다. 북쪽으로 약 200마일 되는 곳에 디트로이트에서는 아직 자동차 생산이 시작되기 이전이었다.

이들 형제는 프로펠러를 돌려 공중에 날아가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형제가 낮에는 가게에서 자전거를 고치고 저녁이면 모형 비행기를 만들어 들판 위를 날아 가도록하는 취미에 몰두하였다. 나무와 종이로 만든 비행기 모형에 프로펠러 돌리는 모터를 설치하고 조금씩 날기 시작하였다.

인류 최초의 비행

1903년 12월 17일에 처음으로 사람을 태우고 엔진 힘으로 날았다. 그들은 노스캐롤라이나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처음으로 1분 동안에 650피드를 날아서 착륙한 사실이 1905년에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실이 인류가 하늘을 날아가는 처음 시작이 되었다. 이 무렵에 디트로이트에 자동차 생산이 시작되고 1914년의 세계 1차 대전에 공급되면서 자동차와 비행기의 생산이 본격적인 괘도에 오르게 되었다. 미국에서 두 번째 큰 라이프 페터슨 공군기지와 공군 박물관이 데이튼 시에 있게 된 유래이기도 하다.

데이튼에서 발명된 세계적인 상품 중에 NCR (National Cash Register) 계산기가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내면 가게 주인이 요란한 소리 내는 기계에서 잔돈을 돌려주던 기억이 난다. 곧 이 기계가 세계에서 가장 일찍 제일 많이 쓰인 현금계산기다. 잔 페터슨은 1884년에 이 계산기의 공장을 세워 세계적인 사업운영으로 약 2만 명의 직원이 하루에 수백 대의 계산기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2차 대전 중에 미국 해군의 위탁을 받고 독일과 일본의 군사통신 암호를 해독하였다.

2차 대전 중에 독일군 움직임의 암호를 미리 알아서 적군을 섬멸하였다. 일본재독 야마모도 이소로구의 비행정보를 암호 속에 미리 탐지하여 필립핀에 도착 직전에 추락시켜 암살하는 등의 2차 대전 승전을 이루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NCR의 암호해독 책임자 조세프 데쉬 (Joseph Desch)는 본인의 암호 해독으로 그렇게 많은 독일과 일본군의 목숨이 희생됨이 후회스러워 혼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후에 미국 정부에서 평화적 노력만을 약속 받고 다시 돌아와 컴퓨터 발명에 헌신하였다. NCR의 계산기 기술이 IBM 컴퓨터로 이어지며 세계적 IT 기술계 혁명으로 이어짐을 바로 이곳 데이튼 시에 사는 동안 알게 되었다.

아메리칸 드림 50년 (5)

한국 참전영사를 위한 자선봉사

흑인건축가와 백인건축가를 동행하는 AAI 건축사무실을 창업한 1986년 6월에 후에 8년쯤 지나 1994년에 데이튼 상공회의소에서 그해의 스몰비지내스로 입상하면서 더 큰 프로젝트를 얻기 시작했다. 데이튼 VA를 포함한 병원건축설계를 하던 중에 한국 전쟁 참전용사들을 만나면 한국이야기에 꽃을 피웠다. 1995년에 오하이오 주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프로젝트에 설계비와 공사감독비 12만 불의 비용을 무료봉사를 하였다. 한국전쟁기념 공원에 세워진 비석에 회사이름과 내 이름이 새겨짐을 보고 살아있는 사람의 비석을 보는 이상한 느낌마저 들었다.

1999년에 데이튼 한인회가 약 2,300명 교민의 관심을 잃고 일할 사람이 없어 위기에 봉착하여 문을 닫게 된다고 들었다. 식당 사업하는 손상현 회장에게 금년도 일을 맡기고 나는 부회장으로 다음해의 행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 회장직을 이어받았을 때 당시 한글학교를 구해낸 우기희(현 중앙일보 ‘이아침에’ 칼럼리스트)의 한글학교 모금운동으로 한인회와 한글학교는 다시 튼튼한 기반을 쌓기 시작했다.

그해에 한인축제는 데이튼 한인회 역사에 가장 큰 행사였다. 나는 한국에 연세대학 건축과에서 한국 온돌주택 건축연구 자료를 얻어와 온돌방 모형을 만들었다. 볶음밥, 불고기와 김치가 제일 많이 팔렸다. 한국정부와 현대건설의 지원을 요청하며 한국의 문화를 미국 중서부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한국 정부가 참전용사를 위한 행사를 알려왔다. 40명을 수용할 능력을 가진 한인회는 클리브렌드, 신시네티, 콜럼버스, 대도시의 한인들이 감당할 수 없고 데이튼 한인회만 할 수 있다고 한다. 선발된 대학 학생들과 유명한 인간문화재들을 포함한 연예예술인단이 오하이오 주의 한국 전쟁 참전용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미군 재향군인 회장과 나는 데이튼 시장을 찾아가 데이튼 컨벤숀센터를 무료로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대학생 모두를 이박삼일동안 무료 숙박하도록 미국가정과 한국가정에 분배하였다.
한국에서 준비해온 무대공연과 전시장을 보는 참전용사와 가족의 눈에 눈물이 고이도록 감동을 선사했다. 참전용사 한사람씩 무대에 올라와 한국 국방부에서 준비한 메달을 목에 걸어주었을 때 가난하고 비참했던 한국전쟁의 기억을 씻기고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얼을 그들의 마음에 한사람 한사람 심어주었다.

오하이오 각처에서 찾아온 75명의 참전용사들과 100여명의 가족들 그리고 미국 오하이오주 고위인사들이 참관하는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협조해준 교민과 미국 가정에 감사했다. 젊은 나이 목숨을 바쳐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한 그들에게 참으로 고마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같은 해에 한인회관 설립 모금 음악회를 개최하고 한국에서 김성길 오페라가수 및 국내외 음악인들을 초청하였을 때, 필요한 여비와 숙박비도 자진해서 부담하였다.

국회위원 토니 홀

그곳에 국회위원 토니 홀은 매번 선거철마다 당선되어 반평생 민주당 자리를 지켜온 미국 정치계에 토주대감이었다. 1973년 그가 미국 국회의 국가안전보장 위원장으로 일할 때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에 닉슨 대통령을 방문하여 경제 지원 약속을 받은 때였다. 박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백악관에 직통전화를 설치하고 27살 젊은 정보원이 박대통령의 자제들 영어교사로 수행해갔다.

그때부터 25년이 지났을 때 필자가 1997년에 데이튼 한인회장으로 일하는 무렵, 국회위원 토니 홀은 항상 한인들 사회에 관심이 많았고 내가 다니는 한인 침례교에 가끔 들려서 우리들과 함께 한인들과 예배를 함께 보고 교인들과 이야기 나누기도 했다. 나는 옆에서 통역을 하기도 하고 선거철이면 한인들 모금운동을 하여 그의 재당선을 지원했다. 나의 건축설계 사무소에서도 선거자금을 지원을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토니 홀과 점심을 같이 하는 때가있었다. 그때 그가 김대중 대통령의 목숨을 구해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73년 늦은 밤에 잠들려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미국정보국장이 일본 동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김대중씨 납치사건에 관한 보도였다. 의심스런 몇 사람이 김대중씨를 결박하고 동경 앞바다에 대리고 나간다는 보도였고 미국 정보부 요원들이 멀리서 주시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당시 김대중씨는 한국의 민주화노력에 유일한 희망으로 미국 정보원의 감시와 보호를 받도록 배치된 상황이었다.

그는 즉각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했다. 박대통령은 사건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느꼈다. 박대통령은 즉시 김대중씨를 구출하기로 의견을 함께 했다. 토니 홀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장 지시가 미국정보 부장을 통해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김대중 씨는 팔과 다리가 묶기고 눈을 가린 체 바닷물 속에 잠기려는 순간 이였다. 미국 정보부 요원들로 하여금 박정희 대통령의 구출 명령을 일당에게 전하도록 하고 그들과 함께 김대중 씨를 다음날 자기 집 대문 앞에까지 동행하여 눈가림을 풀어주도록 지시했다.”고 이야기하며 미국과 한국 관계에 매우 긍정적인 국제사회의 장래를 설명해주었다.

나는 며칠 후에 한인회장 명의로 한국 청와대 김대중 대통령께서 토니 홀 국회위원께 감사장 보내주면 한인회가 전달하겠다고 서면으로 신청했다. 그런 일이 있었던 며칠 후에 시카고 총영사가 데이튼 한인회를 찾아와 김대중 대통령과 토니 홀 국회위원은 이미 절친한 친구관계임을 설명하고 이제 와서 감사 할 사이는 지났다고 알려주고 돌아갔다.

필자가 한인회장직을 마치고 이사회장직에 있을 때 민주평통위원으로 청와대에 김대중 대통령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런 대화를 나눌 틈은 없었다. 김대중 회고록의 내용에는 당시 이후락 정보부장이 박정희의 승인을 받고 실행한 일로 추측한다고 기술되었다. 그리고 토니 홀 외에도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 닉슨 대통령 보좌관 까지도 막후 행동의 한 부분으로 활동하였다고 기술되었다. 후에 데이튼 국회위원 토니 홀은 죠지 부쉬 아들 대통령이 유엔 식량기구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이태리 로마로 이사했다.

그 후부터 나와 연락이 끊겼지만 그가 한국역사에 끼친 영향은 한국 사회에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되었기에 이 내용을 교민신문에 기고도 했다. 그는 그렇게 유명한 미국 정치계에 거물 이었지만 항상 비행기 일반석의 좁은 자리에 끼어 앉아서 여러 사람들과 검소하게 대화하는 그의 모습은 내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고 존경스럽다.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

나는 미중서부 민주평통위원 지부장으로 임명을 받고 중서부 13개주 한인회장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을 받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데이튼 한인회는 시카고 총영사관의 관할구역이기에 시카고에 자주 들렸다. 6시간 운전하면 이르는 거리다. 어느 날 시카고 한인이 북한에서 반입한 그림을 판다고 알려왔다. 20여장의 유화를 전시하고 있었다. 그중에 금강산 풍경화가 눈에 들었다. 폭이 180 CM 높이 150 CM 크기의 그림은 금강산을 보는 듯 장관이었다. 중앙에 귀면암이 우뚝 서있고 멀리 만물상이 펼쳐져 하늘과 구름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금강산 풍경의 일품이었다. 그림 모퉁이에 “금강산 귀면암 97년 5월 로성근”이라고 쓰였다. 김일성 주석이 뽑은 젊은 화가로 알려졌다고 한다. 우리 집안 파이어플레이스 위에 딱 알맞은 그림이었다.

금강산 관광

서울대학교 미주 동창회의 총회에 오하이오주 대표로 참석하는 중에 북한에 금강산 관광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로성근 화가와 귀면암을 보고 싶었다. 북한 국경을 지나며 우리의 여권을 가져가는 인민군을 보며 마음이 설레고 두려움마저 느꼈다. 경관이 좋은 곳마다 김일성을 선전하는 문구를 바위 깊게 새겨놓아 통일되면 어떻게 지워서 경관을 다시 회복할까 부터 걱정되었다. 동해에 해금강이 멀리 보이고 10월의 단풍은 우리를 뜨겁게 환영하는 듯하지만, 가난한 동포들은 웃음 없이 살고 있으며 “우리는 이대로가 좋다.”고 관광객이 보도록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북한 여자안내원은 김일성 뱃찌를 달고 우리를 인도하며 감시하였다. 사진촬영 금지구역이 많고 북한 수공예품 판매 구역에 자주 들렀다. 길가에서 그림을 파는 화가들을 만났을 때 로성근을 찾았다. 나는 $300.00을 주며 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다음 날 같은 곳을 찾아가 다시 그를 찾았을 때, 그는 멀리 있어서 오지 못하지만 수채화 한 폭을 전해 받았다. 로성근의 “선죽교” 수채화 이었다.

귀면암 건너편에 바위에 앉아 안내원과 이야기 나누는 동안 안내원은 노래도 잘 부르고 시조를 읊고 춤도 추어 다양한 재주를 보여주어 나는 놀랐다. 전국에서 선발되어 평양에서 훈련받은 기쁨조 요원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계곡 따라 하루 종일 걸어서 구룡폭포까지 올라가는 동안 목마르면 계곡에 흐르는 물을 마셨다. 오염되지 않은 환경은 참으로 고마웠다. 금강산 관광호텔은 현대건설에서 설치하였지만 삼류수준 호텔 정도로 유지되며 전깃불이 자주 꺼져서 엘리베이터 타기가 두려웠다.

새벽녘에 잠들려는 무렵, 건물 밖 멀리서 인민군 군가가 들려왔다. 발코니 밖에 나가보니 내 귀에는 씩씩한 군가라기보다 침울하게 들리는 슬픈 합창이었다. 방마다 김일성/김정일 얼굴을 벽에 걸어두고 자유를 빼앗긴 공포의 삶 속에 장송곡처럼 슬피 들려왔다. 다음날 남한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술에 취해 유행가 부르는 남한관광객과 저만치 철조망 건너편에 영양실조로 자라지 못하고 여윈 체구의 인민군이 헐렁이는 군복을 입은 모습은 눈물겹도록 대조되었다. 투덜대며 끌려가는 버스엔진 소리는 시간이 멈춰선 계곡의 가슴을 치며 언젠가 햇볕 비추는 날 있을 거라고 길섶에 바위의 침묵은 눈물겨웠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이런 글을 썼고 그해 미주 조선일보 5005년 12월 3일에 인쇄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께

“김정일 국방위원장께, 우리 민족의 자유북한연합이 당신에게 구합니다. 북한 인민에게 자유를 허락하십시오. 인간 도살장 같은 정치범 수용소를 치워버리고 인민이 각자의 능력으로 먹고 살 수 있게 해방시켜주시오. 그들이 당신만을 위해 살다가 생을 마치는 불행한 인생이 아니고 각자 생명의 가치를 동등한 사회 안에 공정하게 평가 받는 권리를 보장해 주시오. 수천만 우리 동포의 목숨을 당신의 손아귀에 쥐고 권력과 부귀를 세습적으로 누리려는 생각은 우리 민족 앞에 용서받지 못합니다. 자유 민주 시대의 흐름을 막겠다는 착각을 버리십시오. 국방위원장님, 사회주의 이론이 비과학적임은 이미 증명된 사실입니다. 북한이 체제를 개방하고 인권을 보장하여 정치범과 탈북자 처형을 중단할 것을 강구합니다. 당신 아버지의 남침 전쟁으로 생사기로에서 벗어나려는 우리민족 모두가 바라는 바요. 용단을 가지시고 대담하게 인민을 배려해주시기 부탁합니다.”

우리 어머니

내가 미국에서 직업생활과 사회활동을 하는 동안 나는 우리 어머님을 많이 닮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주도 여자로 일제강점기에 광주여고보에서 교육을 받고 목포 상업학교를 졸업하신 아버지와 결혼하여 8남매를 두셨다가 두 딸을 잃고 지금의 6남매를 기르셨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식 정구 운동과 피아노 오르간 연주를 즐기던 어머니는 육상선수이시며 하모니카를 대중 앞에서 연주하시는 아버지와 잘 어우러져 우리에게도 자주 가르쳐주었다.

동내 반장, 학부모회장, 동창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시며 항상 사회활동을 즐기셨다. 위에 3남매를 먼저 미국에 유학 보내고 중풍으로 반신불수 되신 아버지를 6년 동안 집에서 치료하셨다. 아래 3남매를 시집 장가보낸 다음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미국 이민 가도록 주선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한국을 떠난 지 20여 년 동안에 이사를 3번이나 하시면서도 자식들의 학교 기록과 내가 대학 졸업하고 일했던 숭례문 자료는 잘 보관하였다가 그것들을 들고 가족이민의 제일 끝으로 미국에 오셨다.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고 노인 아파트에 살며 노인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과 회담 후에 LA에 들렀을 때 태극기를 허리에 묶어세우고 노인회를 대표하여 공항에 나가 환영을 했다.

내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내 아이를 기르며 어머니의 모습을 본받았다.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화를 내지 않고 아이들의 잘못을 지적해서 설명해주었다. 사회에 나가면 잘못의 값으로 벌을 받기에 우리 집안에도 벽에는 매가 항상 걸려 있지만, 내가 어머니에게서 매 맞은 일 없듯이 나도 내 아이들에게 매질하지 않았다. 하지만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매를 들고 몇 차례 맞을 실수였는지 논쟁을 하다가 함께 울고 웃으며 수습하는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자라난 하늘이며 땅이시다. 보름달이 열 번 비추는 동안 우리는 어머니 몸 안에 바다가 있어 헤엄치며 꿈틀거리는 벌레 모양, 지느러미 흔드는 물고기 모양, 팔과 다리 움직이는 짐승 모양으로 자라다 탯줄 끊겨 소리치며 세상 밖에 태어난다. 우리가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라는 동안 네발로 기기 시작하고 드디어는 두 발로 서서 걷는 인류의 진화과정을 재연한다. 처음에는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다가 그다음에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어머니의 몸 안에 단세포 생명체가 한사람으로 자라는 과정은 자연이 억만년의 아련한 추억을 띄워 보이는 길고 긴 실타래가 아닐까.

조건없이 주시는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몸 한 조각이 자라서 아기가 되고 아기에게 주는 그지없는 정성은 모든 목숨의 뿌리이며 삶의 바탕인 듯하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거침없이 주는 사랑이 없었으면 이 땅 위에 어떤 목숨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기르는 동안 어머니는 새벽에 목욕하시고 뒤뜰 바위 앞에 정화수를 떠놓으시고 엎드려 기도드리며 마음은 하늘을 우러러보셨다. 어머니가 엎드려 기도드리던 하늘의 영(靈)은 내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항상 마음속에 느끼면서 함께 사는 듯하다.

삶 속에 흐르는 시간은 눈물과 웃음을 데려오고 빠르기도 늦기도 하지만 지구는 한결같은 속도로 공전과 자전하여서 해가 오고 달이 가듯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어른으로 자라서 세상 삶에 어려움을 겪는 때가 오면 어눌한 생각에 두려움이 덮치고 외로움이 구덩이를 깊이 파서 죽음의 속도보다 빠르게 쓰러뜨리려 하는 역경이 온다. 이 순간에 어머님이 내 안에 심어준 하늘을 보게 되고 나를 붙들어 올리는 손길을 느껴서 외로운 길 허덕임에서 헤어나게 한다. 수렁에서 건져낼 뿐 아니라 하늘이 마음의 벗이 되어 그 힘으로 세상이 깜짝 놀라도록 기적(奇蹟)을 만들기에 사람들은 만리장성을 쌓고 피라미드를 세워 올렸다.

진정한 고마움을 얻고 고개 숙여 기도하며 눈물 흐르는 경지에 이르기도 하지만, 어머님의 하늘 없는 사람은 하늘이 사람을 잊었는지 사람이 하늘을 버렸는지 파란만장의 외로운 길을 걷다가 한세월 텅 빈 무덤으로 홀로 떠나는 사람도 있다. 사형수 중에 형장에서 마지막 남기고 싶은 한마디를 물으면, “어머니“라고 힘껏 외쳐 교도소 벽을 울리고 삶의 부조리에 막을 내리는 인생의 막장도 있다. 싸움이 멈추지 않는 이 땅 위에 어머니는 평화의 여신으로 모든 목숨이 다시 돌아가는 꿈속의 고향 땅이라 할까.

믿음은 사람이 사는 동안 언제나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믿음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겠는가.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있어 생성이 있고 노래와 춤으로 보여주는 감성이 있고, 더불어 살며 말을 하기 시작하여 지성이 따라왔기에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서게 되었다. 사랑이 있기에 목숨이 있고, 삶 속에 종교가, 예술이, 과학이 있다. 그 사랑과 믿음은 하늘에서 어머니의 옥합에 담겨 우리에게 전해진 삶 속에 가장 고귀한 유산이리라.

우리 어머님께서 막냇동생 가까이 로스앤젤레스 요양원에 계시고 나는 오하이오 주에서 건축설계 사업에 바쁜 날들을 보내던 때였다. 83세 나이에 아이들과 가족 친척들 이야기로 한 참 꽃피우는 중에 나는 문득 어머니께 여쭈었다. “어머니 80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였어요.” 어머니는 조용히 생각하시는 듯했다. 그리고는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이제 막 걷기 시작하고 재롱부리는 때였지.” 이렇게 뵙고 난 얼마 후 막냇동생의 어머니 위급한 소식에 서둘러서 찾아왔을 때는 이미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몸이 잿가루 되어 태평양에 뿌려지면 물결 따라 고향 찾아가 아버지 뵙고 바람 따라 아이들 찾아보시겠다고 유언하신 그 날,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대화는 내 마음에 메아리 울린다.

이 세상에 가장 큰 힘

내가 어렸을 때 수풀 속에 새끼 새들의 둥지를 발견하고 신기해서 더 가까이 가보려는 순간 어디선가 어미 새가 날아와서 내 얼굴에 부딪혔기에 놀라서 도망쳤던 일이 있다. 그 작은 어미 새의 필사적인 용기는 그 순간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었음을 나는 상상한다. 1945년 해방 후에 우리 가족이 만주에서 북한으로, 북한에서 남한으로 탈출한 우리 어머니의 용기와 슬기는 우리 6남매를 전쟁과 가난 속에 구해낸 커다란 능력이었음을 나는 잘 기억한다.

낳으시고 길러주신 우리 어머님, 언제나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함께 웃음 짓고 눈물 흘리시는 우리 어머님. 지금도 보고 싶은 어머니! 어머니!

동부의 보스턴에 출장 가면 항상 들리는 식당이 있었다. 유니언 오이스터 하우스 식당은 부두에서 머지않은 해물시장 가까이 있고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이다. 병원설계 회의를 마치고 직원 3사람과 찾아갔을 때 1〜2층은 이미 만원이고 우리는 3층 지붕 밑에 조금 컴컴하지만 아늑한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잠시 후에 웨이터가 와서 내가 앉은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대답하자 의자 등바지에 붙어있는 글씨를 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잔 케네디가 대통령될 때까지 즐겨 찾아온 자리라고 작은 동판에 새겨진 글씨가 있었다. 나도 여자 친구와 저녁 먹으러 이런 방을 찾은 일이 있기에 그도 그랬으리라 상상할 수 있었다.

대통령도 줄 서서 기다리는 나라

아들 조지부시 대통령이 데이턴을 방문했을 때 그 곳에 유명한 스테이크 식당에서 저녁 식사하고자 했다. 보좌관이 주인에게 전화하고 예약하려는 때 주인은 식당 규칙에 예약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대통령과 보좌관이 줄에 서서 기다렸다가 식사를 마쳤다. 이것이 자유와 평등의 미국 사회이다. 대통령이 떠난 후에 주인은 그 자리에 조지부시 미국 대통령이 식사했다고 동판에 새겨 붙쳤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했고 식당은 더욱 알려졌다.

이차대전 후에 미국에 보스턴 바닷가재가 식도락가의 입맛을 끌기 시작하면서 유럽 식당에도 바닷가재 요리가 시작되었다. 출장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살아있는 가재 두 마리를 해물 시장에서 사서 상자에 넣어 손에 들고 왔다. 부엌 바닥에 풀어 놓아 뻘뻘 기어 다니자 아내와 두 아이는 소리를 치며 좋아 했다. 하지만 큰 냄비에 물을 끓여 익힌 후에 검은 색 가재는 빨갛게 색이 변했고 축 늘어진 채 접시 위에 올려놓았을 때는 온 가족이 나와 가재를 외면하였기에 나는 당황하고 실망스러웠다. 뻘뻘 살아있던 생물에 정든 아이들이 살생한 아빠를 잔인하게 보는 듯 했다. 결국에는 며칠 동안 혼자서 얼려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나와 아내는 별로 싸울 일이 없었다. 나는 집밖의 일에 충실했고 집안일은 거의 아내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남의 집은 돈과 아이들 때문에 가끔 싸운다는데 나는 생활비와 아이들 교육은 아내가 주인이었고 나는 옆에서 보조하며 협조하는 노력했을 뿐이다. 한번은 아내가 신발 모으는 취미가 있었기에 차고의 가구마다 신발이 가득 채워졌다. 나는 참다못해 아내가 집에 오기 전에 모든 신발을 차고 바닥에 늘어놓고 벽에 “필립핀 대통령의 아내 아멜다의 신발”이라고 써 부쳐놓았다. 아내가 집에 와서 성난 고양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기에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이 다시없었다.

첫 중국 방문

우리 부부는 데이튼 시청 초청으로 중국 방문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People to People’s Ambassador Programs 으로 데이튼 City Manager Valerie Lemmie가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우리 부부와 동행하기를 요청하였다. 북경, 서안, 계림, 상해를 방문하고 그곳의 지방정부, 학교, 병원, 등을 방문하여 직원들과 소통하고 관광도 하게 되는 14일 기간의 여정이었다. 1945년 해방되는 해에 나는 만주를 떠났고 이제 다시 중국을 찾아가는 가슴 뿌듯한 여행이다.

1997년 10월 26일 우리 일행은 북경에 도착하였다. 공항 신축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누추한 시설을 보며 택시에 나누어 탔다. 낡은 유럽 차에 합승하는 불편은 관광객을 맞을 준비가 전혀 없어 보였다. 운전기사는 화난 사람처럼 불친절하여 우리와 커다란 여행 가방들을 호텔 가까운 큰길가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비탈길을 끙끙거리며 간신히 호텔 대기실에 도착하였을 때 침울한 분위기는 1945년 해방되었을 때에 보았던 중국과 달라진 게 없었다. 벽에 걸린 중국지도에 북한의 도시들을 명시하였고 남한은 공백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침 식사는 우리가 한국이나 미국에서 먹는 중국음식과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큰 접시에 담은 음식을 각자가 먹는 젓가락으로 가져다 먹기에 위생관리가 전혀 없었다.

자금성과 만리장성

천안문 광장에 모택동의 얼굴이 크게 걸렸고 경비는 삼엄하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미국에서 왔다고 하면 적국에서 어떻게 여행 왔는지 궁금해했다. 돌다리를 건너 천안문 안에 들면 자금성 궁궐에 든다. 원, 명, 청시대의 24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자금성은 그 방수가 9000여 개에 달하여 갓난아기가 궁내 방에서 하룻밤씩 자더라도 27살이 된다는 세계에서 제일 큰 황궁으로 알려졌다. 궁궐의 오래된 북쪽 부분은 원나라의 건축양식이기에 명, 청 궁궐을 짓기 전에 원나라 왕궁이 있었을 듯싶었다.

도시 외곽 가까운 곳에 만리장성이 있다. 산을 넘고 계곡 넘어 끝없이 쌓아 올린 벽돌 성벽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포함한 ‘세계의 7 기적 건축물’ 중에 가장 큰 규모이다. 성벽 위에 큰길은 병사들이 이동하는 통로이며 곳곳에 병사들이 머무는 누각이 세워졌다. 지도를 보면 한반도의 서부에서 시작되어 대륙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뻗어 나갔다. 기원전 400년경에 춘추전국시대부터 북방민족이 두려워 세워졌지만, 중국은 몽골에 지배되었고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나라가 중국역사의 가장 오랜 왕조가 되었다. 만리장성 남과 북이 서로 경쟁하며 56개 민족이 섞여 살면서 고대부터 12세기까지 세계 문화와 문명을 지배한 대국이었음을 볼 수 있다.

서안

서안은 실크로드를 따라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와 교역을 하던 주, 진, 한, 당, 나라들의 수도였으며 진나라 진시황제의 본향이다. 보존된 문화 양식이 한반도의 백제, 신라, 일본의 나라시대 문화와 연결된다. 서안의 도시 평면을 보면 옛 경주와 일본의 교도의 가람과 공통성을 보이며 동서와 남북을 축으로 사각형의 성곽을 건설하였다. 명대에 개축된 현재 성곽은 잘 보존되어있다. 서안 11,000년의 역사 속에서 모계사회에서 부계 씨족사회로 변천하고 고대 왕조의 기록이 잘 보존된 아세아 문화사의 보고이다. 흙으로 지은 피라미드도 산재하여 피라미드의 고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세계 8대 기적중의 하나인 진시황 병마용갱은 1974년에 한 농부가 땅을 파다가 발견하였으며 우리 일행은 그 농부와 만나 인사도 하였다. 진시황릉에서 야 1km 되는 거리에 8,000명 군대와 130개의 전차, 520마리 말의 모습을 흙으로 빚어 실물 크기로 각각 다르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이 거대한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계림

중국의 계림은 월남과 가까운 지역으로 하천과 산의 모습이 동양화에서 보는 수려한 경치의 근원지인 듯하다. 우뚝우뚝 선 산봉우리들은 신의 조각처럼 특이하고 아름답다. 봉우리마다 이름이 있고 전설이 있어 4시간 배를 타고 흘러가는 동안 이야기와 그림책을 보는 듯 넋을 잃고 도취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처럼 맨몸으로 개울물에 헤엄치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다. 밤이면 어부들이 대나무 배 위에서 새의 목을 묶어 생선을 물어오기만 하지 삼키지 못하도록 하여 고기 잡는 풍습도 구경하였다. 일본사람들은 자기 나라 고유의 풍습인 줄 알았다가 이곳에서 유래된 연줄임을 후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독사를 술에 담아 오래 보관한 후에 마시는 술맛을 이곳에서 처음 맛보았다.

상해는 중국에 우리나라의 부산과 같은 역할의 도시이다. 북경은 북방을 대표하고 상해는 남방을 대표하여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우리 일행은 병원과 학교를 방문하였다. 중국은 인구 폭발을 방지하러 ‘한 가족에 한 아이’ 정책을 세웠기에 그 귀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최선을 다하는 듯하다. 유치원 학생들에게 외국인 선생이 영어를 가르치고 서구식 교육을 모방하여 공산당 이념을 어렸을 때부터 훈련하고 있었다. 병원 설비는 크게 실망하였다. 시설과 의료시술이 미국에서 보는 현대의학에 이르기에 요원함을 보았다. 도시의 교통은 보행자와 자전거가 대부분이며 가끔 보이는 모터사이클과 자동차는 그 안에 섞여 교통질서는 혼잡할 뿐이었다. 공산당 정책으로 부자는 모두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가난한 살림에 부엌과 변소 설비가 모두 공용으로 지저분하고 비위생적 환경이 대부분이었다.

잠에서 깨는 사자

우리 일행의 1997년 방문은 중국의 1984년 덩샤오핑 주석에 의한 개혁개방정책 이후에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외국인 방문이 이제 막 시작하였기에 여러 면에서 불편하고 후진성을 경험하였지만, 이차 세계대전 때 ‘잠자는 사자’로 불렸던 중국이 이제는 분명히 잠에서 깨었음을 보았다.
아내는 어린 시절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자랐다. 아군과 미군의 수천 명이 한국전쟁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살해되고 부상당했을 때 가까운 흥남부두에서 퇴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장인 장모와 8세 된 아내는 마지막 배에 올라 거제도를 거쳐 남한으로 옮겨왔다. 부산에 사는 동안 엄마와 딸이 길을 가며 나눈 이야기 중에 “너는 커서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돌봐라.”하신 말씀에 아내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의과대학을 마친 후 미국에 유학 와서 의사가 되었다.

네 아이들이 대학 다니러 집을 나간 이후부터 아내와 나는 함께 여행 다녀오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장인 장모가 서울에 살아계시는 동안 해마다 찾아가서 제주도 구경도 다녀오고 미국에 모셔와 건강관리도 해드렸다. 장모님의 파킨슨 신경질환은 80세를 넘기시며 갑자기 심해졌다. 83세에 서울 삼성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아내는 병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운명을 앞둔 며칠 전 중환자실에서 딸을 깨운 어머니는 딸에게 “여보여보 저 아름다운 구름을 봐요. 저기가 천당인가 봐요.”하시며 손짓을 하셨다.
어머님 돌아가신 9개월 후에 장인마저 떠나시고 어머님이 평생 동안 권사로 봉사하신 불광동 은평교회 장지에 함께 모셨다. 아내는 55세 되는 해에 30년의 마취의사 직업에서 은퇴하고 곧 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60세 되는 해에 아내는 미국 감리교의 목사 안수를 받고 나는 장로 안수를 받았다. 아내는 남가주 뉴포트비취 감리교 부목사직을 봉사하기 시작했고 부모님 떠나신 후 매년 성묘하러 한국에 다녀왔다. 어느 해 성묘하러 한국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고 저녁 식사하러 서대문 부근의 식당에서 나오는 길에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다.

불의의 사고

친척들과 함께 저녁을 마친 아내는 돌층계 셋을 남기고 바닥에 얼굴을 부딪치며 넘어졌다. 놀란 친척들과 함께 아내에게 급히 뛰어갔을 때는 입과 코에서 흘러내는 피가 앞가슴까지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강남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 담당의사는 아내의 얼굴이 왼쪽 눈에서 턱까지 광대뼈가 함몰되었다고 했다. 아내의 뇌와 눈 그리고 치아 등을 진찰하는데 꼬박 6시간이나 걸렸다. 강남에서 성형외과를 개업하는 사촌 동생이 급히 달려와 아내에게 정신적 안정감을 주었다. 의사들과 사촌 동생은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서 48시간 이 내에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그 이유는 파괴된 연골이 굳어지면 수술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란다.

또한, 이곳에서 수술하게 되면 치료기간이 두어 달 넘게 되어 타국에서의 불편함이 클 것이니, 차라리 귀국하여 거주 지역의 병원에서 치료받는 게 아내에게 더 편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의 모든 여정을 취소했다. 우리 부부는 병원에서 주는 시디 디스크 한 장을 소중히 들고 다음 날 아침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여인

얼굴 한쪽에 붕대를 감고 먼 창공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에게서 처음 만났을 때의 웃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창밖의 뭉게구름처럼 아름답던 추억이 뭉실뭉실 떠올랐다. 만날 때면 언제나 다소곳이 웃고 있는 아내의 얼굴은 세상 어느 여인보다 아름다웠다.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고, 아기들을 향해 웃는 아내의 얼굴이 바로 사랑이란 것을 새롭게 느끼면서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은 손녀들을 보고 오는 날이면 아내의 혼자서 웃는 얼굴을 자주 보게 된다.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나에게 아직 웃음을 아끼지 않는 아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인이다.

여자는 아이 때부터 거울 보는 것을 좋아한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화장을 하고 밖에 나가기 시작한다. 집안에서는 생 얼굴, 밖에서는 화장한 얼굴 사이를 오가며 한평생을 그려 넣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날마다 가꾸어야 할 소중한 아내의 얼굴인데, 상처가 난 아내의 속 사진을 한 장의 시디에 담겨 아내의 핸드백 속에 처박혀 있다. 가슴이 허허로워져 자꾸 아내의 붕대 감은 얼굴을 쳐다보게 된다. 그 곱디고운 아내의 얼굴이 본래대로 돌아올까 걱정도 되었지만, 그보다 말없이 회복의 기도를 하고 있는 아내를 보는 것이 더 괴로웠다.

본래 인간의 피부는 털로 덮이어 있었다. 그런 인간에게 옷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면서 털은 빠지고 그 자리에 솜털로 자리바꿈이 되었다. 이렇게 형형색색의 옷에는 자신의 얼굴도 옷에 맞게 치장을 하며 살아간다. 그게 어쩌면 인생살이 중 하나이지만 말이다. 아내는 30여 년을 병원의 수술실에서 환자들의 마취를 담당했다. 지금은 미국 감리교 부목사로 시무하며 동시에 가정상담소에서 목회자와 의사로서 가정상담을 하고 있다. 이런 아내의 생활이니 화장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비행기는 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집 부근의 오렌지카운티 병원을 찾았다. 50세 전후의 한국인 2세 성형외과 의사에 의해 수술이 시작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대학 병원에서 가지고 온 시디 디스크 한 장이 놀랍게도 미국 수술실 절차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컴퓨터 스크린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1960년대에 한국을 떠나온 우리 부부는 한국의 경이로운 의료기술 발전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수술은 아침 8시에 시작하여 11시 반경에 환자는 회복실로 옮겨졌다. 얼굴 반쪽이 퍼렇게 멍들고 부어 있지만, 옛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의식을 회복한 아내는 내게 물었다.
“얼굴 어때요? “
“다친 쪽이 안 다친 쪽보다 더 예뻐.”
얼굴 피부는 움직이지 않지만, 아내의 웃는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의사는 수술과정을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다. 얼굴의 세 곳을 열고 타이타늄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들어 올렸다고 했다. 얼굴에 흉터가 보이지 않도록 입안과 귀 뒤로 수술했고 가장 작은 흉터를 남기려고 온 정성을 쏟았다는 곳은 눈 아래에 작은 주름살 부분이었다고 했다. 나는 감사한 마음에 울컥했다.

50대 중반의 혈전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전혀 예기치 못하고 깜짝 놀라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난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지 묻기 전에 앞을 보고 더 낳은 미래로 연결되는 기회였다고 보면 회복이 빠른 듯싶다. 지구의 저쪽에서 일어났던 사고를 지구의 이쪽에서 수습했다. 사람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당할 적마다 우리 부부는 서로 의지하며 온 정성을 모아 회복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내가 40대 중반 나이에 목과 허리의 척추에 신경이 눌려 치료받고 회복한 후에 50대 중반에 몸에 혈전이 생겨 위기를 넘겼다. 한국과 중국을 다녀오는 긴 비행기 여행 을 마치고 귀가한 후에 곧 센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하였다. 다음날 오하이오 직장에서 집에 오는데 왼발이 붓고 걷기가 어려웠다. 아내는 이미 저녁상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운동하다 나도 모르게 다쳐서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밥 먹으려는 데 의사인 아내의 눈은 유심히 관찰한 다음 차려놓은 밥상을 뒤로하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서둘러 직행했다. 의사가 나를 진찰하는 위급하고 심각한 모습을 보고 나는 이 병의 위협을 처음 느꼈다. 왼쪽 발목에서 혈전이 생겨 허벅지 안에 혈관을 막았다고 한다.

혈전은 발이나 발목부근의 정맥 안에서 작은 핏덩이가 생기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고 한다. 그 작은 핏덩이가 정맥의 흐름을 따라 올라 머리의 뇌에 들면 뇌졸중, 심장에 들면 심장마비, 허파에 들면 폐경색으로 급사하는 질병으로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이다. 약 1,000명중에 한사람이 혈전을 가질 확률이라고 한다. 현대의학에서도 예방하는 차원으로 아스피린 먹는 길밖에 없다.

다행이도 혈전이 뇌, 심장, 허파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몸 안에 피를 묽게 하는 치료를 계속하였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일주일 후에 다시 재발하여 이번에는 대정맥 하단에 앞으로 사는 동안 영구적 필터를 설치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는 걱정스러웠다. “골프는 계속해서 칠 수 있어요?”하고 물었다. 의사의 대답이 명답이었다. “골프 역사에 유명한 벤호간도 대정맥에 필터를 넣고 세계선수권을 몇 번이고 했다오.”하며 웃는다. 의사가 골퍼였기에 내게 가장 시원한 답을 들려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수년 후에 집 뒤뜰 발코니 아래 온도계를 달아놓고 싶어 의자를 끌어다 올라섰다. 높이가 조금 모자라 등바지 위에 올라서려고 생각하며 의자가 넘어지면 붙들 곳까지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올라서는 순간부터는 기억하지 못한다. 깨어나 보니 콘크리트 바닥끝에 머리를 부딪쳐 피투성이 된 채 바른손에 아직 장도리 들고 엎드려 있었다. 내 비명을 듣고 달려온 아내는 내 머리를 묶어 피를 멈추게 하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가는 동안 내가 정신 잃지 않도록 계속 말을 시켰다. 구급차 불러도 언제 올지 모르는 때였다.

나는 정신 오라가락하며 응급실에서 치료받고 5시간 잠든 후에 깨어났다. MRI 사진에 뇌가 조금 왼쪽으로 쏠렸고 바른쪽에 물이 고여 있었다. 의사는 뇌진탕 상처가 이 정도면 오래 동안 코마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한 체질일까 아니면 하늘이 도왔을까. 3〜4개월 고개 돌리지 못하고 조심해서 살아났다.

나이 65세 은퇴한 해에 나에게 4번째 생명의 위기가 다가왔다. 오하이오 주에서 남가주로 이사하고 중국 안에서 한국의 뿌리를 찾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 방문하는 여행을 즐기는 때였다. 서안에서 북경까지 열흘 여행을 마치고 오는 길에 독감을 앓았다. 한국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전신검진을 받았다. 간염이 발견되었다. 간 속에 1.5cm 직경의 까만 반점이 나타났고 2개의 회색 반점들이 보였다. 필라델피아에 형님의 친구 의사 한혜원 누님을 찾아가 까만 반점은 레이저로 태워서 제거하고 회색 2점들은 약물치료를 받아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은퇴하지 않고 오하이오에서 건축 일만 열심히 하고 살았으면 간암으로 세상과 작별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삶과 죽음의 거리는 그렇게 가깝고도 멀다. 이렇게 4번이나 죽음에 가까이 갈 적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운명을 하늘에 맡겼기에 이렇게 담담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아메리칸 드림 50년 (6)

중국 역사 탐방 서안에서 북경까지

1997년에 필자가 중국에 다녀온 후에 8년이 지나 이번에는 역사공부에 흥미를 가진 서울대학 동문들과 다시 중국의 역사지역을 탐방하는 기회를 가졌다. 2005년 10월 19일에 여행사에서 준비해 준 이름표를 목에 걸고 서안 공항에서 입국절차를 마친 후 최근에 지은 현대식 공항건물 대기실에 들어가는 데 중국 교포 젊은 남녀가 나를 안내하며 밖에서 기다리는 차에 몸을 실었다. 8년전 1997년 9월에 서안의 진시황제의 황릉 주위에서 발굴된 병마용갱을 방문하였던 때와 분위기가 믿지 못할 만큼 달라졌다. 이곳을 다시 찾아옴은 서안과 북경 사이에 중국의 사적지를 찾아 우리역사를 보고자하는 뜻이었다.

운전기사는 영어를 못하지만 젊은 여인은 영어에 불편 없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약 1시간 반 동안에 서안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도심에 들어서는 블루버드 가운데 커다란 낙타들과 카라반 조각물들은 옛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의 무역사업이 천오백년 지난 오늘에도 살아 있는 듯 보여주었다. 서안의 성곽 옛 모습은 잘 보존되었고 성곽 밖의 둘레 물길에 아직도 물이 가득하고 규모가 서울 성곽보다 훨씬 작으나 동서남북 성문이 온전하고 격자식 도시 평면은 우리나라 옛 경주시나 일본 교토 시의 평면과 유사하여 1500년 전 도시계획이 건축의 도시계획을 공부한 나에게 역사의식을 깨워준다.

지금까지 발굴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는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에 묘핸조다로와 하라파 유적이 있다. 기원전 4000년경에 성곽 안에 물을 저장하는 인공호수가 있고 동서와 남북으로 축을 이룬 바퀴 달린 차 움직이는 큰길이 있고 공공시설과 주택지역을 나눈 격자형 도시계획이다. 발굴된 토기유물들도 신라 토기와 연관성이 있다. 이들 도시들은 인도 남부에 원래의 인도 원주민 드라비디안들의 도시였다고 하며 발굴된 유물 얼굴과 눈 모습이 동아세아인들과 연관되어 광대뼈와 눈 꼬리가 올려 보이기에 우리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서울대 동문 여행

산서성 역사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민경탁 동문의 인솔에 17명의 서울의대 동문과 가족들이 돈황 막고굴과 서역을 방문하고 도착하여 함께 합류했다. 산서성 유물들을 모아 1993년에 완공된 현대식 박물관 중국 고전 건물의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주, 한, 진, 당, 시대로 나누어 진열된 유품은 청동기, 금은옥기, 벽화, 도자기 조각상, 화폐, 건축물 와당 및 동경 등은 찬란한 세계문화 중심지의 유물들로 끝없는 역사와 학문의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당나라 장희태자 묘의 벽화에 우방 국가 영접하는 모습이 그려졌고 동에서 한국인, 북에서 흉노인, 서에서 아랍인의 모습 중에 한국인의 의상과 새의 깃을 단 머리관은 특히 눈에 띄었다.

일행은 곧 서안 오페라 하우스로 갔다. 디너 씨에터로 층과 층을 나누어 좌석을 배열하고 약 500명이 관람하는 현대식 건물이다. 약 50여 명이 등장하는 무대의 크기는 모든 장비를 갖추고 음악, 무용, 곡예 등으로 펼쳐지는 라스베이거스 무대에 버금가는 호화찬란한 세트와 조명을 갖추었다. 중국 벽화에서 보는 비천상의 의상들과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는 악기와 선율은 가관이었다. 며칠 전에 관악산 서울대학교 교정에 있는 규장각에서 보았던 그림과 방불하여 가야금, 거문고, 피리, 징, 꽹과리, 크고 작은 북, 그리고 서울 성균관에 보관된 악기 종 모습, 등 여러 종류의 관현악기들이 현대음악에서 들을 수 없는 특이한 동양음악으로 들려주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기차 편으로 서안 동쪽의 옛 수나라 수도인 안양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우리가 어려서 읽었던 삼국지의 배경. 관운장과 조조의 이야기가 먼 기억 속에 새롭게 상기된다. 낙양 목단화는 유명하여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상품이었고 우리가 머무른 호텔 이름도 목단대주점이라 했다. 기차로 오는 동안 황하 계곡의 지형은 황토층의 두터운 지질이 오랜 세월에 범람이 계속되어 주름 깊은 계곡 속에 가난한 농부들의 움막집과 밭가는 모습을 본다. 우리나라 해방 후의 농가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용문석굴

10월 21일 아침 일찍 일행은 용문석굴에 도착했다. 황하의 남부 후난성의 수도인 정주시 서쪽 이강 기슭에 자리 잡은 용문석굴은 황하의 북부의 산서성에 운강석굴의 계속으로 간서성의 돈황석굴과 함께 중국의 삼대 석굴이다. 선비족이 세운 위나라는 지금의 산시 성 대동시에 운강석굴을 마치고 기원후 494년에 수도를 낙양으로 옮겨 황하 남부 중원에 한족을 다스리려 했다. 백제의 침략으로 운강석굴 완성을 중단하게 되었고 이곳 용문 석굴을 493년에 다시 시작하였다. 그때까지도 중국의 역사에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력이 컸음을 볼 수 있다. 용문 석굴은 수나라, 당나라를 거쳐 523년에 완성되었다. 동굴의 대부분은 이강 서쪽의 용문산 언덕에 있으며 강 동쪽 언덕에는 석굴과 향산사 그리고 시인 백거이의 묘소가 있다.

약 2300석굴 중에 당나라 석굴이 약 1400개에 달한다. 그중에 가장 큰 봉선사 석굴은 노사나 마애불 좌상이며 17미터 높이에 좌우에 네 보살들과 함께 35미터 넓이, 30미터 깊이에 조각되었다. 양면에 호신상은 경주 석굴암과 같은 모습이며 중앙에 얼굴 모습은 당나라 측천무후의 인상이라고 전한다.

동굴 중에 한반도의 신라에서 승려들이 찾아와 조성된 기록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경주 석굴암처럼 정교하고 잘 보존된 것은 없으나 전실과 후실을 통한 건축양식은 공통성이 많았기에 당나라와 통일신라의 불교문화 연관성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같은 날 오후에 낙양 고대 박물관 안에 관우신전에 들렸을 때 81가지 음식을 차려놓은 제사상을 구경하며 갑자기 배고픔을 느꼈다. 허기를 달래며 왕성 공원과 백마사를 들려 보는 동안, 주나라와 한나라를 거쳐 수나라와 당나라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 양식은 원나라나 청나라의 건축양식이지만, 우리나라 삼국시대 건축양식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자료들이었다.

이튿날 황하를 막아 2003년에 완성한 현대식 소양시 수력발전소를 보는 동안 중국 산업발달의 원동력이 그 규모를 자랑하는 듯했다. 곧 쑹산 소림사로 향했다. 쑹산은 중국의 오악산 가운데 성산으로 음양오행의 중앙에 위치하여 역대 제왕들이 찾아와 제사를 드리던 도교, 유교, 불교의 성지이다. 이곳 소림사는 인도의 달마 스님이 바닷길과 황하 물길을 따라 찾아왔다고 전한다. 불교가 서남아세아를 통해 중국에 들어왔다는 우리가 배운 교과서 역사의 설명과 분명히 다르다.

소림사 무술원

소림사 탑 공원은 230개의 불탑과 부도들 중에 몇 개는 티베트씩 불탑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쑹산 소림사는 옛 스님들이 도를 닦는 과정으로 무도를 연마하던 전통이 유래되어 지금은 세계적 무도 수련 도시를 이루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무도 학교를 세워 세계 각국에서 5000여 명의 재학생이 있고 5만 여명의 수련생이 이 도시에 살면서 무도를 연마한다. 한국에서 찾아온 한국 택권도인과 연예인이 이곳에 다녀간 기록을 볼 수 있었다.

일행은 후난 성의 수도 정주 비행장으로 옮겨 그날 밤 늦게 산서성의 수도 태원시에 도착하였다. 산시 성은 동에 산둥 성, 남쪽과 서쪽에 황하, 그리고 북에는 만리장성으로 원래는 흉노의 땅이었다고 한다. 황하 남쪽 중원에 자리 잡은 한족과 피가 섞이면서 양귀비를 비롯한 많은 미인이 태어났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 부모에서 태어나는 미인들을 봄도 마찬가지다. 육로와 수로를 통하여 중국 교역 중심지가 되었으며 북중국과 남중국을 지배하는 정치적 중심지였기에 여, 순, 우 등의 왕릉이 이곳에 있으며 위, 진, 당나라가 이곳에서 건국되었다고 전한다.

이튿날 태원시의 재벌가족들인 공씨, 상씨, 양씨, 조씨, 왕씨, 교씨 등의 주거지를 방문하였다. 근대 중국경제를 일으키던 부가와 자손들이 살던 주택지들이 지금은 박물관으로 잘 보존되었다. 우리 일행은 교가대원에 들려 중국 영화 ‘홍등가’에 나오는 영화 촬영지를 답사하는 동안 생활풍습과 유물들에 익숙해졌다.

세계 문화재 진사

오후에 중국 도교의 대표적인 사찰인 진사에 도착하였다. 중국 고대 모계사회의 상징으로 성모전에 여신상을 숭배하는 사찰이다. 입구 바른쪽에 종각, 왼쪽에 북각이 서 있고 물을 건너 향당에 모퉁이에 송나라 때(우리나라 고려 때) 세워진 4개의 동조각상이 서 있다. 그 뒤에 헌당은 지정된 문화재 목조건축물로 당송대의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이전의 건축양식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헌당을 지나면 우리나라 불찰 가람처럼 석교가 있고 그 역시 지정된 문화재이고 석교 건너 본당인 성모전에 도교의 산신령으로 여신상을 모셨으며 그 목조 구조 역시 우리나라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건축 양식과 통하는 바 있으며 지정된 문화재이므로 진사는 참으로 중요한 중국의 문화재 사찰이다. 진사 서쪽에 당나라 측천무후의 명복을 위한 무측전 불교 사찰이 있다. 칠층 전탑 앞에 포대화상을 모신 미륵원이 있고 그 앞 양쪽 화랑에 팔만대장경을 돌비석들에 새겼다. 우리나라 해인사의 나무판에 새겨진 팔만대장경과 대조적이다.

처음 알게된 동서양사

일행은 다음날 중국 불교 본산지인 오대산으로 이동하였다. 그 안에 108개의 불교사찰이 세워졌고 오대산은 세계 불교의 본부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백탑사 중앙에 티베트식 불탑은 75미터 높이로 하늘을 찌르는 높이의 구조물이다. 수상사에는 사자를 타고 앉아 설법하는 문수보살을 모셨다. 석가가 인도에서 설법할 때 문수보살은 이미 중국 오대산에서 설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희랍의 왕들이 인도와 중국에 와서 머리 깎고 불교 승려로 수련을 받은 후 지중해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중국에도 있고 인도에도 있다.

현통사의 벽돌 돔과 아치 구도도 특이하며 그 뒤에 작은 금당 건물은 일본의 국보인 금당보다 더욱 크고 아름답다. 한국의 오대산 월정사 역시 중국의 본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대산 관광을 마치고 항산산맥을 넘어 대동시로 버스가 이동하는 동안에 많은 중국인이 아직도 요동(꿈의 동굴)이라는 황토 토굴 주거지에 이름도 생년월일도 없이 살고 있음을 보았다. 매년 4월에 이곳에서 일으키는 황사는 산동 반도와 황해를 건너 한반도까지 이른다고 한다.

11월에 비가 내리면 농사가 시작된다. 숫말과 암당나귀 사이에 태어난 노새는 힘이 세고 온순하여 이곳 생활에 큰 노동력을 제공한다. 그들은 자체번식하지 못하는 특징이라고 한다. 항산 고개 넘어 넓게 펴지는 평야에 위치한 요나라의 수도 웅현에 도착했다. 1400년 전 북위시대에 세워진 현공사는 이곳 양귀비의 고향이라 한다. 웅현시 북쪽에 대동시가 있고 만리장성과 봉화대가 여러 곳에 눈에 든다. 석탄 매장량이 중국에서 가장 많은 지역으로 도심에 흐르는 옥녀강은 주위의 탄광에 많은 물을 빼앗겨 작은 개울처럼 줄었다. 우리는 50미터 높이 절벽에 매달린 삼현사에 들려 광야를 내려다보았고 곧 호텔에 짐을 풀었다.

운강석굴

다음날 아침 대동시 교외의 운강석굴을 찾았다. 인도의 불교가 티베트 산맥을 넘어들어 오고 바닷길로 오대산에 들어올 무렵, 인도의 석굴 조각 기술(아잔타 석굴)이 북위시대의 중국석굴로 나타남이 운강석굴이다. 불상 조각과 건축 양식이 백제 문화의 것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조각물에 나타난 목조건축 양식은 백제에서 일본 나라 지역에 건너간 법륭사와 약사사와 공통된 점이 많다.

제 9석굴의 코끼리 모습은 동인도 불교가 서역을 거치지 않고 바닷길로 전해져 변질되지 않은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제 8석굴 입구에 새겨진 힌두교 신들의 모습은 일찍이 불교가 갠지스강 유역에서 시작되었을 때 중국의 도교와 인도의 힌두교와 융합되었던 특색을 보여준다. 우리가 배운 서양사관 역사는 불교의 조각문화가 그리스문화에서 왔다고 했다. 유럽이 아세아를 침략 점령하고 백일들의 우월성을 가식하는 정치교육이었음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 10월 27일 새벽에 일행은 버스로 대동시에서 북경으로 직행하는 석탄 먼지 자욱한 고속도로를 뚫고 북경 비행장에 시간 맞추어 도착하였다. 장쩌민 중국 정부 때부터 현재의 중국은 불교국가로 정책을 세워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 문화를 멀리하고 아랍 국가들의 회교도 침략을 저지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불 수 있었다. 2008년에 있을 세계 올림픽을 위하여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었으며 8년 전에 방문했을 때보다 길에 가는 자전거 수는 줄고 자동차 수는 부쩍 늘었다. 하지만 보행자, 자전거, 모터사이클, 버스, 트럭이 뒤섞인 교통질서 없음은 예나 다름없었다.

나는 4살 때부터 8살 때까지 만주 무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반세기 지난 1997년 9월에 서안, 북경, 계림, 상해를 방문하였을 때 중국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올해 10월에 다시 방문하는 동안 중국의 커다란 변화와 사회 환경에 발전을 보았다. 동아시아 문화발달과 한국과 중국, 일본과의 문화사 관계를 공부하는 동안 우리가 배운 지식에 너무나도 부족함을 느꼈다. 앞으로 젊은 다음 세대가 할 일에 많은 격려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행을 준비한 민경탁 동문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면서 즐거운 여행기록을 여기서 마감한다.

한국 참전용사기념공원을 비롯해 데이튼 VA 병원건물, 다운타운에 라이볼 빌딩, 양키추레이스 골프 클럽하우스, 데이튼 들레곤 야구경기장, 워렌 카운티 빌딩, 등의 수많은 건물들을 내 손으로 설계하고 데이튼 시민들에게 남겨주었다. 시카고 한인회에 필요한 한인문화 회관을 기본 설계하여 무료봉사해주고 2004년에 남가주 뉴포트비취에 이사 왔다.

은퇴하고 남가주에 이사

오하이오 주에는 아직 찬바람에 눈발 날리는 2월 어느 날, 이곳 남가주에는 매 한 마리가 뒷마당에서 작은 나무 가지를 입에 물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걸 보았다. 뒤뜰에 토끼들 가족이 우리를 맞이했고 그들은 매일 밤에 찾아와 집주인인 양 우리를 보고도 아랑곳없이 풀을 뜯어 먹고 밭에 우리 먹을 채소도 훔쳐 먹었다. 그러다 계곡에 매 한 쌍이 나르기 시작하는 때부터 토끼들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삼월 어느 날 매 한 마리가 발에 들쥐 먹이를 쥐고 우리 집 굴뚝 위에 앉았는데 까마귀 여섯 마리가 요란하게 짖고 매를 괴롭히려고 떠들고 있었다. 그중에 용감한 놈은 매 머리 위로 가까이 나르며 매에게 속히 떠나라는 듯 재촉하였지만 매는 꼼작 않고 쉬어 앉아 있다가 유유한 모습으로 넓은 날개를 펴고 날아갔다.

나는 아우가 선물로 가져다준 망원경을 들고 뛰어나와 탁자 위에 세우고 계곡 건너 소나무 주위를 샅샅이 들춰봤다. 그리고 어미 매가 새끼 세 마리에게 먹이를 나누어 먹이고 있음을 보고 나는 아이들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 질러 아내를 불러내어 보게 하였다. 어미 새는 갈색 깃에 검은 반점이 있고 무서운 모습인데 새끼는 하얀 솜털에 병아리들처럼 작고 입을 째지도록 다 벌려서 어미 새에게서 받아먹는 얼굴들은 너무도 신기하고 귀여웠다.

그때부터 매일 뒤뜰에 나가 만원경보는 재미가 내 일과에 더해졌고 집에 찾아오는 친구들에게도 보여주며 이제는 내 집 식구들처럼 느껴졌다. 어미 새가 보이지 않는 저녁에는 어미 새에게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고 새끼들이 굶주릴까 염려도 했다. 비가 내리고 바람 부는 밤이면 네 가족이 서로 엉켜서 어미 새 발톱이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소나무에 밀착한 모습을 상상하며 잠이 들기도 했다. 남가주의 늦은 봄 사월에는 아침에 안개가 끼어 자욱하고 오후에야 해가 나서 계곡 건너편을 볼 수 있기에 초조하게 기다려지는 때도 있었다.

코발트색 남가주 하늘 높이 어미 새는 수놈 새와 동무하여 매들이 가진 독특한 소리로 대화하며 고공 무용 하는 때면 나는 하염없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새들과 함께 즐기며 내 마음도 그들 따라 한없이 높이 나르다가 문득 집에 들어가 아내를 불러내어 같이 앉아 춤추는 한 쌍의 새들을 보기도 하고 둥지에서 기다리는 새끼 새들을 살펴보기도 했다.

수놈 새는 어미 새를 집에 데려다 주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면 어미 새는 새끼 새들을 보살핀 다음 줄곧 먹이 잡으러 떠난다. 먹이를 물어와 새끼들에게 먹이는 시간이면 나는 그들에 즐거움을 함께 나누며 어미의 그 사랑만이 이 큰 우주의 지구에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생성의 능력을 본다. 창조주는 어머니에게 그 능력을 주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자식들을 낳고 기르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4월 말쯤에 매 삼 남매는 벌써 많이 자랐다. 하얀 솜털 안에 검은 반점들이 많이 나타났고 날개에 깃이 자라 퍼덕이는 움직임을 연습하였다. 어미가 먹이를 나누어줄 때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은 독수리 새끼들과 전혀 다르다. 독수리 새끼들은 생존경쟁을 어려서부터 시작하여 서로 싸워서 어미에게서 음식을 얻어먹기에 살벌한 가족인데 비교하면 차례를 기다리는 매 삼 남매의 우정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5월 들어 새끼들의 몸이 커져서 집이 비좁아 그중에 하나라도 밀려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어미 새가 새끼 세 마리를 위하여 집을 준비하였을 때 사람의 지혜를 초월하는 자연의 섭리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분비물을 배출할 때 모습은 아래치마를 올리고 궁둥이를 집 밖으로 돌리고 여지없이 쏘는 물총 같은 줄기는 아래 소나무가지들을 하얗게 칠해놓았다. 나는 그 모습을 내 몸으로 시늉하며 아내와 같이 웃기도 하였다. 소나무 아래에 풀을 깎는 시끄러움이 있을 때는 어미는 소리 나는 곳을 주시하고 긴장하여 집을 지키는데 새끼들은 철없이 바쁘기만 하다.

5월 중순에 벌써 새끼들은 어미만큼 자랐고 하얀 솜털과 검은 반점들은 모두 갈색으로 변하고 무서운 매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면서 넓은 날개를 펴고 둥지 안에서 나르는 연습을 시작하였다. 발이 약간 공중으로 뜨는 때도 있었다. 역시 차례를 지켜 순서 있게 연습하기에 날개가 부딪치거나 몸이 밀려 둥지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5월 하순 우리가 며칠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날 첫째와 어미는 이미 어디론가 기다리던 여정에 따라 떠났음이 분명했고 둘째와 셋째만 남아 있었다. 둥지에 먹이는 남아있기에 둘이서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면서 이번에는 둘째가 떠나는 날임을 나는 감지하였다. 둘째가 처음에는 둥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소나무가지 위로 날개를 치고 옮겼다. 하지만 멀리 땅에 떨어질까 내려다보고 또 보고하다가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날갯짓만 하다가 다시 둥지로 돌아왔다.

한참 만에 둘째는 다시 같은 나뭇가지에 조금 높게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조금 높은 가지 끝을 향하여 걷는 듯 나르는 듯 조심스럽게 옮겨갔다. 셋째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따라 나와 옆 가지에 올라와 둘째만을 쳐다보고 떠나지 말라는 듯 애처로운 표정으로 지켜본다. 둘째는 가지 끝에 이르렀고 이제는 정녕 떠날 준비를 하는 듯 위를 보고 날개를 크게 펴고 마음을 정한 듯하였다. 드디어는 둘째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해야만 하는 일을 해냈다.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서 떠나간다.

아! 나는 육 남매의 둘째로 태어나 둘째가 떠나는 모습에 참으로 감개무량한 내 인생의 즐거움을 다시 보았다. 하지만 한편 혼자 남은 셋째가 걱정되었다. 둘째가 떠난 뒤 홀로 둥지에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에 뜰에 나와 망원경 앞에 앉아 셋째를 찾는 내 눈에는 빈집만 남아 있었다.

소나무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용한 새벽의 적막이 내 마음을 비워 놓았고 한해가 다 지난 듯한 공허한 느낌은 마치 삼 년 전에 우리 집 막내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집을 떠나던 날과 같은 느낌이었다.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새 출발의 기쁨인지 헤어짐의 슬픔인지 혹은 시작인지 끝인지 우리 인생에 하나의 변화를 겪는 순간이었다.

다시 바뻐진 은퇴생활

은퇴하기 3년 전부터 할일을 생각해왔기에 시간은 여전히 바쁘게 지나갔다. 집에서 프리웨이타고 1시간 넘어 운전하는 먼 LA에 이웃집 들리듯 자주 찾아가 문인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건축 작품을 창작하듯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때 시를 쓰기 시작하였지만 공부하며 운동선수 노릇하는 틈에 시를 쓰기 어려웠고 유학시절에 영어배우기 바빠서 좋아하는 시를 쓰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다 써서 남에게 보여주면 신문이나 잡지에 올랐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해온 듯하다.

시를 쓰는 시간이면 시상에 젖어 상상의 세계 속에서 느낌이 넘쳐 기쁨, 슬픔, 분노, 희열 사이에 방황하는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 나의 생각과 느낌이 남에게 감동으로 전해질 때, 기쁨이 있기에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바쁜 삶속에 시제가 떠오르면 곧 메모지에 적어 호주머니에 보관하였다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곧 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쓰다 보면 독자들과 함께 감동을 나누게 되어 영향력을 갖게 된다고 한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적인 역할을 맞게 된다. 이렇게 쓴 시가 100편쯤 되었을 때 한국의 문인협회 회장, 이사장을 역임한 신세훈 선생을 LA에서 만났다. ‘코리언 에어 비빔밥’을 비롯한 10편의 시가 2011년 봄호 ‘자유문학’에 출간하여 나는 드디어 한국문단의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그런 후에 200편쯤의 시를 썼을 때, 한국문단에 오직 한 사람뿐인 시인, 수필가, 소설가, 희곡작가, 평론가의 거장, 홍승주 선생을 만났다. 그분이 나의 시를 보고 시집출판을 권고하여 2013년 6월 15일에 시집을 출판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함께 운동하는 친구들이 내가 호랑이 띠 해(1938) 가을(9월)에 태어났다고 추호(秋虎)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자라난 무등산을 회상하여 시집이름을 ‘무등산 가을 호랑이’라고 정했다.

그러는 동안 역사공부에도 취미 있어 ‘새로운 세계를 보는 눈’으로 역사수필을 써서 전자책 ‘yongwanchoi.com’를 만들었다. 한국 문단에 저명한 평론가이며 ’에세이 포레‘ 발행인 겸 편집인 한상열 선생은 나의 수필, ’미국에 개 이야기‘를 1911년 봄호에 실어 신인상 당선작가로 한국 문단에 수필가로도 등단하였다.

아내의 한미 가정상담소

아내는 2009년부터 남가주에 한미 가정상담소 운영하는 일에 자원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남가주에 글 쓰는 한인들이 ‘사랑방 글샘터’ 모임을 갖는 책임을 나에게 맡겼다. 늦깎이 문학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매주 수요일에 모여 시, 수필, 소설, 생활수기를 잘 쓰기 위한 문학공부를 해왔다. 저명한 강사들을 초빙하여 지도를 받고 바쁜 이민생활로 젊었을 때 이루지 못한 문학에 대한 꿈을 펼친다.

회원들 중에는 이혼수속을 위해 상담소를 찾았다가 글샘터 회원이 된 후 글쓰기에 몰두해 행복한 가정을 다시 찾은 경우도 있다. 또 93세된 한 노인이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다가 글샘터 회원이 된 후에 삶의 희망을 다시 찾고 인생경험담을 기록해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한 회원은 남편을 잃은 후에 무덤 옆에서 시를 쓰기 시작해 시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어떤 회원은 글을 쓰지 안했다면 원수처럼 미웠던 남편과 해어졌을 것이라고 회고하며 지금은 자식들과 함께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이민생활을 통해서 겪는 한과 슬픔을 글로 승화시키며 자신을 회복하고 즐거움을 다시 찾는 모임이 되었다. 올해 창립 5주년을 맞아 20여명의 시인, 수필가, 소설가, 회원들이 한국 문단에 등단하였다.

아내가 상담소에서 가정문제와 건강문제를 상담하는 동안, 우리처럼 은퇴한 가정이 겪는 여러 가지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매일 한결 같이 꾸려가는 삶 속에 급작스러운 변화를 맞게 되면 실패의 위기가 되기도 하고 성공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한평생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직장생활에만 몰두해 오던 남편이 정년퇴직하면 부부는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새로운 환경을 만나게 된다.

이제 막 은퇴한 부부가 가정상담소를 찾아와 하소연을 한다.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가정을 끌어가던 남편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아내의 조강지처 애정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말다툼은 감정폭발로 이어지고 드디어 가정폭력까지 일어나 노년 이혼으로 몰락하는 비극까지 연출하기도 한다.

상담을 하면서 두 사람이 은퇴 이전의 불만부터 오늘까지 참고 숨겨 쌓여온 하소연을 털어내고 나면 조금은 분노가 풀리는듯하여 다음을 약속하고 돌아간다. KO나 판정승은 없지만 상대편의 처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차츰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부정적 생각에서 긍정적 태도로 진전을 보이면서 다시 안정된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옆에서 마음 졸이며 걱정하던 자식들도 겨우 안도의 한숨을 돌리게 된다. 남자의 은퇴는 바깥사람이 안사람, 할아버지로 탈바꿈하는 것이며, 여자의 은퇴는 어머니의 위치에서 남편의 건강과 아직 생존하신 부모님들 보살피고 손자 손녀들을 생각하는 할머니로 탈바꿈이 아닐까.

건강 문제

또 하나의 변화는 나이 들면서 닥쳐오는 건강 문제이다. 은퇴 3년 후에 간암이 발견되었다. 다행히 1985년부터 개발된 치료약이 악화하는 속도를 늦춰주었지만, 완치는 기적이다. 세계적인 암 전문의의 연구 조사에 따르면 암으로부터 완치된 환자들의 공통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성이라고 한다. 걱정 끝에 자신을 잃은 환자는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죽음을 초월하고 희망을 지켜가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암도 물리치는 놀라운 기적을 일궈낸다는 것이다. 직장이나 외부생활에 중점을 두던 삶에서 은퇴한 남편도 아내와 마음을 합쳐 이제는 집안일도 나누어 하고 사회봉사도 같이 하면 남은 삶을 더 건강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갈수록 사람의 수명은 길어지고 있다. 미국 사회보장제도 통계를 보면 65세에 건강하게 은퇴한 사람은 평균 17.5세를 더 산다고 한다. 반면 은퇴하면서 권위와 명예를 모두 잃은 듯 상실감에 빠진 사람은 평균 3~4년밖에 더 살지 못한다고 한다. 본인의 재산과 정부보조금을 지혜롭게 관리하면서 건강한 음식을 가려먹고 몸과 두뇌 운동을 끊임없이 지속하며 주어진 능력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은 100세 시대 도전에 승리하는 인생이리라. 70~80대에도 위대한 발자국 남긴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인구폭발과 환경오염의 가속화로 깨끗한 환경은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자연을 보호하고 즐기며 주위에 부담되지 않도록 건강하게 살다가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적절한 때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는 노년이 되기 위해 좀 더 자기 관리를 잘해야만 할 것 같다. 시들기 전의 꽃이 더욱 아름답듯, 지기 전의 황혼이 더욱 빛나듯 우리도 모두 그런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한국의 전통건축 역사와 문화사가 동아세아의 문화와 어떻게 연관되며 세계 문화사 안에 어떤 위치인지 알고 싶어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다. 일본에 4번, 중국에 4번 현지답사를 하였고 인도, 캄보디아, 월남, 등의 동남아세아를 찾아다니며 조사하였다. 그중에 앙코르왓, 인도, 네팔 여행기를 나누어 보려고 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이 앙코르왓 유적

캄보디아는 동쪽에 월남을 그리고 서쪽에 태국을 접경하여 말레이 반도를 이룬 나라들이다. 남쪽에 인도네시아 섬나라들과 지형적으로 한 맥을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받는 중에 월남인들이 동아세아 사람들의 인상에 비하면 캄보디아인의 인상은 더욱 인도계 혈연으로 보였고 피부색갈도 적도에 가까운 남방계인들 임을 느꼈다. 캄보디아 국토 중앙에 메이콩 강이 흐르고 강 옆으로 거대한 톤레삽 호수가 있어 호수북단에 세계에 칠대 불가사이 중의 하나인 크머르 제국(790-1350AD)의 문화유적들이 모여 있다.

인천공항에서 6시간 직행 비행기로 시엠립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마치고 밖에서 기다려 환영해주는 일행을 만나 곧 호텔에 들었다. 도시의 분위기는 1950년대에 한국의 경제를 상기시켰다. 공중 교통설비가 없어서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이 큰 길을 매웠고 한국인들 식당들도 가끔 볼 수 있었다. 이 지역에 39개의 11세기 전후에 세워진 힌두교/불교 사원들과 궁전의 유적지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매년 그 수가 늘어나고 국가적 사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39개의 유적지들 중에 7개의 지역, 앙코르왓, 앙코르톰, 바콩, 반테이스레이, 베이욘, 프레아칸, 타푸롬에 가장 많은 유적이 모여있다. 이들 사원과 궁전들을 역사적 순서로 해설하면서 관광을 한 감상을 기록하고 앞으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흥미를 돕고 여행한 기록을 작성 해보려고 한다.

앙코르 왕국의 인드라바르만 1세와 자바르만 3세 때(877AD)에 앙코르지역동부의 바콩을 비롯한 지역에 사원과 궁전을 건설하였다. 바콩 피라미드는 우리나라 고구려의 장군총과 같은 층단식 석총에 사방 중앙에 층계를 내어 5층을 지어 올렸고 맨 상층 중앙에 동쪽으로 문이 열린 탑 하나를 세워 다시 5층 지붕을 올렸다.

고구려 분묘건축 양식에서 사방신(청용,주작,백호,현무)를 보이는 사방향공간의 개념이 이곳 건축양식과 연결됨이 명료하고 고구려의 음양 5행 사상에 5행이 있는 것처럼 5층 구조물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석굴암의 구조가 해 뜨는 동쪽으로 향하듯이 앙코르에 모든 신전과 사원들은 동쪽을 향하였고 앙코르왓 사원만이 유일하게 서쪽을 향하였다. 이곳 프레아코 사원은 처음으로 세워진 사원건축양식으로 승려들이 수양하는 우리나라 암자와 같은 공간으로 탑들을 건축 하였다. 아직 석조건축 양식이 이곳에 들어오기 이전에 벽돌전탑으로 건축하고 밖에 회를 바르고 풍부한 조각으로 싸여서 인도의 조각미술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관광버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모습을 보면 대부분 두 사람이 타고 생활전선에 나가는 모터사이클들이다. 낭만적인 젊은 남녀들의 데이트도 보이지만 작은 바퀴 두 개 위에 삼 세대 가족 다섯 사람이 함께 붙들고 아슬아슬하게 가는 모습은 온가족이 생존경쟁의 마지막 한계를 가는 듯하였다.

반테이스레이 사원

앙코르에서 약20키로 미터 북쪽에 거의 쿨렌 산비탈에 가까이 자리 잡았다. 동쪽에서 외곽 성문을 들어서면 긴 난간을 따라 내곽정문에 이르고 그 안에 인공호수를 사방에 두른 사원을 본다. 성곽 주위에 그리고 궁궐이나 사찰주위에 인공호수를 건설함은 세상에서 격리하고 보호하는 방법이며 우리나라와 동남아세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다.

반테스레이 사원은 자이야바르만 5세 때(967AD)에 건축물이며 붉은색 사암석으로 분위기가 따스하고 특이하다. 힌두교 전설을 조각으로 풍만하게 장식하였다. 3층 피라미드 위에 3탑을 세웠고 탑지붕은 5층 구조이며 매 층에 동문에서 서문으로 통하는 축을 이루어 좌우에 균형을 갖추었다. 정면에 양편 돌 창문 안에 다섯 개의 작은 기둥들이 대나무 마디처럼 조각되어 있다. 문설주와 문주방과 보 밑에 신비스러운 글들이 기록되었고 깊은 양각으로 구름모양의 넝쿨 잎 조각과 힌두의 파괴 신 쉬바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음과 양의 사상과 같이 힌두교에도 남자의 상징 링가와 여자의 상징 요니가 있어 자연종교에 자손들 번식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성기의 상징적 표현들을 볼 수 있다. 링가는 원형으로 하늘과 연결되고 요니는 사방형으로 땅에 연결됨을 본다.

힌두교의 삼성은 우주의 창조신 브라마, 관리 신 비쉬누, 그리고 파괴와 창조의 신 쉬바로 이루었고 크머르 제국의 종교의식에서 가장 많이 숭배하는 신은 쉬바 신이다. 이 시대 역사에 계속되는 전쟁 중에 승리를 보장하는 위대한 힘을 부여하는 신이기도 하다. 상채가 노출된 여신들의 아름다운 조각과 생선들, 거북이, 악어 등의 해양문화를 보이면서도 소를 타고 말을 탄 농경문화와 유목문화가 이미 융합된 역사적 내용을 볼 때 우리나라 통일신라에서 이미 세계화된 불교문화가 전성기를 이루고 고려시대 문화로 연결되는 모습을 본다. 사찰의 벽에 조각은 손가락들이 뒤로 넘어가는 듯하고 발목이 많이 꺾이면서 양쪽 무릎이 궁둥이와 일직선을 이루는 움직임이 신기하게 보였다.

앙코르왓 사원은 캄보디아에 가장 중요한 문화재이며 세계의 7대 불가사의 문화유물들 중에 대표적인 문화재 이다. 크머르 제국이 앙코르에 수도를 정하고 자야바르만 6세, (1080AD)에 완성된 거대한 사원 건축물이며 가장 최근까지 캄보디아 원주민들이 종교의식을 실행해왔기에 가장 잘 보존되었다. 17세기부터 유럽에 알려젔고 1907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 세계에 알려진 유적지이다. 최근에 일본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회의에서 세계문화제로 지정되어 프랑스와 일본정부의 후원으로 수차례 복원공사가 반복되고 있다.

앙고르왓은 유일한 서쪽을 향한 가람이다. 사면이 인조호수로 둘렀고 물 건너서 성지에 들어가는 육교양편에 긴 난간은 9개의 머리를 가진 코부라의 몸으로 만들어 졌다. 두 마리의 사자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물 건너 정문에 이르면 입구가 3대문으로 열렸고 서울에 광화문처럼 중앙에 큰문은 제왕의 문으로 부른다. 문 안에 들어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삼층 피라미드의 일층에 이르고 속세의 층이라고도 부른다.

건축양식

성지를 둘러싼 전체의 석벽조각은 8부분으로 나누어져 서쪽의 양쪽 벽에는 제왕의 승전 역사를 조각하였다. 남쪽 2벽에는 왕조역사의 기록과 지옥과 천당을 그렸다. 동쪽 2벽에는 바다의 전쟁과 비쉬누 신의 승리를 보였다. 북쪽 2벽에는 크리쉬나와 디바스의 승전을 축하하는 조각이다. 힌두교의 전설에 따라 12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역사, 생활상, 전쟁상, 신화의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세계에 으뜸가는 조각 문화재이다.

우리나라 불교 전설에 손오공 이야기가 이곳에 조각물에도 나타난다. 비쉬누는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다윈의 진화론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생선의 모습으로 생명이 시작되어 거북으로 변하고 네 발로 움직이는 돼지가 되고 다음에는 사자의 몸을 가진 사람이 나타난다. 11세기까지 전해온 인간의 육감에서 느끼는 상상과 21세기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비교할 수 있는 흥미로운 예술적 표현들이 무진장 함축되어 있다.

문안에 들면 십자형 통로로 나누어진 4개의 정원이 있고 양쪽에 경전각이 보여 한국의 궁전건축에 좌의정과 우의정을 좌우로 나누어놓은 인상이다. 정원을 지나면 다시 가파른 층계를 오르고 3대문이 열려있고 피라미드의 2층에 이른다. 여기는 승려들과 귀족들의 층이고 역시 양쪽에 경전각들이 세워졌다. 3번째 층계는 드디어 제왕과 제사장이 걸어서 신을 영접하기위해 오르는 피라미드의 삼층 즉 천신의 층에 이른다. 중앙 탑에 비쉬누 신의 위치가 중앙에 있고 사방으로 통로가 연결되어 4개의 성수지가 있어 왕과 제사장은 성수에 몸을 씻을 수 있도록 물 안에 드는 층계가 있다.

전체적으로 삼층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 졌으며 천신 층에 가장 큰 중앙 탑이 섰고 작은 탑들이 세워져 모두 5개의 탑들이 피라미드의 상부를 형성하였다. 탑들의 상부는 5층 지붕이다. 비쉬누 상이 놓였던 위치에 현재는 불상이 자리 잡고 있어 불교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웅장한 건축규모는 밖에서 느낀 바와 같이 안에서도 훌륭한 조각장식으로 이루어 졌으며 원래 건축물에 색상은 퇴화 하였지만 찬란한 신과 제사장 왕의 영접장면을 상상 해보면 인류역사 당시의 과학과 예술과 종교의 삼위일체를 이루었음을 감개무량하게 체험할 수 있다. 해가 지는 오후에 호수에 비치는 앙코르왓 서쪽 전경은 처음 프랑스 파리에 들렸을 때 에펠탑이 강물에 비추는 것을 보고 느꼈던 것처럼 지구를 떠나 멀리 어느 별나라에 온 느낌이었다.

크메르 제국의 황금기

자야바르만 7세(1181AD)에 앙코르톰 사원과 궁전들이 건축되었다. 자야바르만 6세의 앙코르왓 건설을 보면서 자라난 자야바르만 7세는 대규모의 앙코르톰 도시계획을 준비하고 크머르 제국역사의 황금기를 이룬다. 앙코르톰 성곽도시 동쪽과 서쪽에 거대한 인공호수를 건설하여 매년에 지나는 건조기와 기후변화에 대비하는 물을 저장하였고 발굴된 흙은 건축기반에 사용하였다. 호수 한복판에 수장제를 행하는 메본 사원을 지었다. 정방형의 앙코르톰 성곽도시는 앙코르왓의 10배나 되는 면적을 차지하고 베이욘 사원을 정중앙에 세웠다. 남쪽 성문 앞에 9개의 머리를 갖인 코브라 뱀의 몸을 허리에 끼고 앉아 있는 108명의 장사 신상들이 양쪽에 배열되어 장관을 이룬다.

성문에 이르면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건축 기법인 코벨 아취아래 성문이 있고 성문위에 4개의 커다란 얼굴이 동서남북을 향하는 조각이 있다. 네 모퉁이에 각각 세 마리의 코끼리 얼굴과 세 개의 코끼리 코는 기둥모양으로 얼굴을 받쳤다. 베이욘 사원 동북쪽에 코끼리 테라스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오는 군대를 영접하던 곳으로 벽에 조각물들은 왕의 위용을 보여주는 조각들이다. 나는 왕이 일어서서 손을 흔드는 자리를 찾아가 그곳에서 내손을 허공에 저어 보았다. 내 귀에 우레 같은 함성이 광장을 매우는 듯 들리고 웅장한 음악과 찬란한 색깔들이 분위기를 흔들고 비둘기 떼가 하늘로 나르는 느낌이 들었다.

앙코르톰 도시성곽의 정 중앙에 위치한 베이욘 사원은 삼층의 사각평면 위에 천신층 중앙부분을 원형평면으로 가장 큰 탑을 두었음이 우리나라 석굴암이 전방후원 평면으로 방형은 인간세계를 그리고 원형은 신의세계로 정의하는 개념과 공통성을 본다. 37개의 탑이 서있고 모든 탑들은 부처의 얼굴이 동서남북으로 향하였다. 원래 탑들은 49개 혹은 앙코르톰 입구에 다리교량에 앉은 54신과 같은 개수였다고 한다. 탑으로 이루어진 밀림 속에서 길을 잃기 쉬울 만큼 좁고 얼굴들이 많아서 신들의 얼굴로 둘러싸인 신비스러운 느낌을 경험하게 한다.

외곽전체는 회랑으로 지어 앙코르왓처럼 조각 벽으로 전체사찰을 둘렀다. 조각물의 내용은 앙코르왓에 조각물내용과 유사하지만 베이욘 사원의 조각은 외부 조각 벽과 내부 조각 벽으로 이루어진 이중 조각물이여서 그 내용이 더욱 풍만하다. 대부분의 조각내용은 전쟁 양상을 보였고 그 안에 머리모양이 다르고 귀가 짧은 중국 군인들이 참전하였으며 궁실내부에도 중국인들이 나타났음은 우리나라 역사에 신라시대 당나라 군인들이 그리고 고려시대에 원나라 군인들이 왔었음을 상기 시켰다.

창과 방패로 무장한 보병들이 대다수이고 지휘하는 왕이나 장군은 코끼리위에 얹은 대형안장 위에 있다. 지휘 장교는 벤허 영화에서 보듯 말이 끄는 췌리엇(전차)을 타고 전쟁 지휘를 하는 중에 말위에 체구가 작은 마부가 말고삐를 잡고 있음은 특이한 점이였다. 군인들이 진격하거나 행군할 때에 가축들도 가끔 섞여 있고 적을 살생하는 실전의 모습도 보였다. 배를 탄 해군들의 모습이 있고 배 머리가 용머리로 조각되었음은 우리나라 이조시대 전라감사 이순신의 거북선 머리와 같은 모양이다.

북쪽 벽에는 궁궐 내에 비쉬누와 쉬바 신들이 보이고 자연의 경치를 보이며 왕과 귀족들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쪽 벽 남부에서 시작된 조각 내용은 건물전체를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그 내용이 진행되었다가 동쪽 벽 북부에 이르러 왕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었다. 조각물의 내용은 앙코르왓 조각 벽과 함께 역사를 실감하는 배경으로 세계에 유일하게 역사기록을 한 조각의 진수이다.

제국의 왕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동안에 격는 고충을 느낄 수 있다. 가물어 흉년들면 굶는 백성들이 이웃나라에서 곡식을 빼앗아 와야 산다. 이웃나라에 빼앗겨도 죽기에 있어도 전쟁, 없어도 전쟁이었다. 내부에 정적은 항상 주위에서 맴돌며 기회를 찾고 충신들과 간신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사랑 뒤에는 질투가 따르고 만족 뒤에는 불만이 따랐다. 그러기에 왕은 천신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거다.

동아세아의 종교

앙코르톰 도시의 북쪽 성문을 나가면 프레아칸 사원이 있다. 자야바르만 7세는 남문 밖에 앙코르왓 사원이 이미 세워 있음을 보고 북문 밖에 프레아칸 사원을 세웠다. 거대한 불교사원이며 한때에 1000명 이상의 승려들이 수도하고 불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불교대학이었다. 동아세아의 자연종교인 도교는 과학적인 천체종교로 성장하여 지구의 자전과 태양계 공전을 연구하였고 미 대륙 마야문명에 까지 전해졌지만, 남아세아의 자연종교인 힌두교는 자연의 창조, 유지, 변화의 삼대개념에 머물었기에 새롭게 발전하지 못하고 대승불교는 자야바르만 7세에게 국교로 추진하기에 충분한 내용이 있었다.

많은 조각물들 중에 앙코르톰 안에 코끼리 테라스에서 보았던 귀면 얼굴을 갖인 사람의 몸으로 짐승 발을 가진 모습이 많이 보이고 그들이 하늘을 떠받고 사찰 구조물을 떠받는 모습이 여러 곳에서 눈에 뜨인다. 춤추는 무희들이 건물을 떠받는 모습으로 사원이 천국에 세워진 듯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네발을 갖인 용의 몸 위에 비쉬누가 옆으로 누어있는 모습은 불교 사원에 누워있는 부처의 모습과 같아서 힌두교와 불교의 융합된 모습이다. 우리나라 불교에 동아세아의 유교가 융합된 현상과 같다.

7개의 역사적 순서로 설명해온 마지막 지역은 타프람 사원이다. 한때 79,640명의 인구가 사원 안팎에 모여 살았고 자연산 의약 제품들을 생산하여 왕궁과 106개의 병원들에게 분배 하였다고 기록이 전한다.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위해 1186년에 세워진 사원으로 알려졌다. 거대한 나무들 숲 속에 숨겨졌기에 19세기에 사원건축 발굴 과정에서 비단 무명나무와 줄기나무 뿌리들이 건물들을 감고 있어 그대로 남겨둘 수 밖에 없었다. 건물들과 나무뿌리들이 섞여서 오히려 앙코르 관광지역 중에 가장 낭만적인 분위기를 갖추었고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유명한 영화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제국의 왕들은 서민들에게 항상 노동을 공급하고 집과 식량을 제공하면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큰 성곽과 사찰을 지었다. 그러다 거대한 자연 재해에는 저항하지 못하여 크머르 제국은 1431년에 멸망하고 수도는 놈펜으로 옮겨져서 태국과 400년 전쟁을 치르며 정복되었다. 그 후부터 캄보디아는 태국과 월남국 사이에서 약소국으로 가난하게 살아 왔다. 톤레삽 호수 안에서 배를 타고 생활하는 부양민들의 모습을 관광하는 때에 그들의 배들 중에 짚으로 짜서 만들어 가족이 사는 집모양의 배들이 여러 개가 모여서 있는 곳을 지나갔다. 짚으로 짜서 집 모양으로 건조된 배는 제주도에 옛 풍습에서도 볼 수 있고 짚 배라고도 부른다. 중남미의 마야문화와 남미의 잉카문화의 해변생활에서도 볼 수 있기에 세계역사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한때 침몰하지 않는 짚 배로 대륙이 가깝게 교류되었음을 다시 느꼈다.

동아세아의 송나라이후에 건축물들은 모두 목조건축물 들이여서 그 유물들이 보존되지 못 하였다. 동남아세아 문화에 관한 연구가 결핍되어 유럽문화가 동아세아문화보다 앞서서 발달한 것처럼 보는 현대인들의 세계사 교육에 잘못이 있다. 필자는 세계역사 속에 동양과 서양을 균등하게 다시 조명하여 공정하게 연구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세계 7대 불가사의 크머르 제국의 문화 탐방기를 여기에서 마친다.

인도 여행

세상에 금과 은으로 집을 장식한 부자들과 저녁이면 대소변 볼 곳을 찾는 가난한 사람들이 섞여 사는 나라, 인도에 우리 일행이 발드려 놓은 곳은 2008년 아카데미 오스카상을 휩쓰러간 영화 “슬럼독 밀리오네어”의 본고장 뭄바이(봄베이)였다.

타지마할 팔레이스 호텔이 테러리스트 공격을 받고 정치적 경제적 상처가 아직 아물지 못한 광장에 인도의 문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아취는 서울의 독립문보다 몇 배나 더 커보였다. 1877년에 영국군들이 인도에 침략해 와서 인도를 지배하고 1947년에 마지막 영국군이 떠나기 전에 광장을 기념하여 건립된 관문을 영국군 문이라 부르지 않고 인도의 문이라고 부르는 수치스러움을 보았다.

일행은 곧 배를 빌려 타고 바다 앞에 보이는 코끼리 섬을 찾아갔다. 뉴왁 공항에서 17시간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다음 날에 피로를 느끼지 않고 관광하는 흥분에 마음이 들떠서 바다 바람이 더욱 상쾌했다. 코끼리 섬에 오래 동안 고물이 된 장난감 기차를 타고 돌계단아래 도착하여 층계를 오르면 굽타왕조(우리나라 통일신라시대)에 거대한 암석을 두더지가 흙을 파듯 뚫고 들어가 찬란한 조각예술을 이룬 힌두교 석굴사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도의 종교

인도는 갠지스 강에서 기원전 600년에 불교가 시작되어 아세아에 포교된 종교문화의 원천이지만 현재 인도 자체 내에는 힌두교가 지배적이다. 이 동굴사원에 힌두교는 동아세아의 도교와 함께 자연을 숭상하는 가장 오래된 종교양식이다. 모든 자연물을 신으로 보는 다신교다. 그중에 힌두교의 자장 중요한 창조의 신인 브라마, 평화와 유지의 신인 비쉬누, 파괴와 부활의 신인 시바 신들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 코끼리 섬의 석굴사원 벽에 조각된 이들 3신들 중에 시바신의 세 얼굴, 두 얼굴, 그리고 춤추는 모습이 살아 움직이는 듯 실감이 난다.

다음날 인도역사에 비단 산업이 동쪽으로 당나라와 연결되고 서쪽으로 이집트, 그리스, 로마로 연결되는 실크로드 요색 이였던 아우랑가바드를 찾아갔다. 이곳에 아잔타 석굴은 인도 불교미술의 국보들이 보전되었으며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조각과 회화들을 합하여 위대한 세계적인 문화의 유산이다. 중국의 둔황, 운강, 용문, 3대 불교석굴 사원들과 함께 기원전 1세기에서 시작되어 1000년 동안 동남아세아에 수 백 개의 불교 석굴조각 동굴건축들이 유행하였다.

7세기 통일신라 때에 김대성 건축가가 건립한 경주 석굴암도 그중에 하나이며 아잔타 석굴과 용문석굴의 건축양식과 공통성을 보여줌은 전방 후원의 평면과 본실에 석가상의 주위를 윤회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석굴암은 전실이 방형이고 본실은 둥근 천정과 원형의 평면으로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이 다른 종교인들의 피해를 받지 않고 완전히 보존되어 높게 평가받는다. 유네스코 지정된 우리의 세계적 유산이다.

일행은 인도의 밤 열차 커튼으로 가린 이층침대에 각각 누어 다음날 아그라에 도착했다. 중국이나 인도에 힘든 노동하는 일꾼들을 꾸리라고 부르는데 미국에 대륙횡단 철도공사를 맡았던 중국 노동자들과 같은 이름이다. 영국인들이 아세아 노동자들을 지칭하는 이름인 듯싶다. 그들은 흑인노예들과 달리 기술노동 계약을 하고 삯을 주는 관계였다. 우리 여행 짐들이 꾸리들의 머리 위에 몇 개씩 얹고 양쪽 어께에 걸고 층계를 오르내리며 나르는 모습을 보며 1945년 해방 후에 우리나라의 기차역을 보는 듯했다.

타즈마할

아그라는 세계에 7개의 기적건축물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타지마할이 있는 곳이다. 인도의 무굴 왕국은 동아세아 몽골제국이 인도 북부를 침략한 후에 동아세아 문화의 영향을 반아 세워졌다. 12세기에 아세아의 칭기즈 칸이 로마제국보다 몇 배나 더 큰 영토를 아세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제국으로 세계를 통합한 후에 이루어졌다. 칭기즈 칸의 자손 티무르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 동양의 문화와 문명 그리고 과학과 기술을 서방에 전하여지고 유럽의 국가들을 중세 암흑시대의 긴 잠에서 깨어나 15세기부터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동서교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인류의 현대역사가 이때부터 시작했다.

이 무렵에 인도 북부에 무굴 왕국의 4번째 왕 자항거는 궁궐과 기념물 건축을 즐겼다. 그의 아들 다섯 번째 왕 샤자한은 아버지의 본을 받아 아그라 성 건축을 완성하고 사랑하는 왕비를 기념하여 정방형과 원형을 조합한 인도의 고유한 건축양식으로 타지마할을 건립하였다. 건축 전체을 하얀 대리석으로 짓고 장미, 재스민, 릴리, 등의 꽃과 잎과 줄기를 붉은 색,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대리석 안에 상감하여 그 규모와 아름다움이 비할 곳이 없다. 삼백 명의 왕비들을 거느리는 중에 동쪽과 서쪽에 다른 두 왕비들의 기념건물도 붉은 벽돌 건물로 첨가하는 자상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말년에 아들 왕에 의해 성 안에 감옥에서 7년 동안 감금되어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사랑하는 아내 옆에 타지마할 땅속 깊이 묻혔다. 아들왕은 힌두교에서 회교도로 전향하고 무굴제국은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다. 아그라 성 궁궐과 타지마할 무덤은 인도의 얼굴이 되어 인도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들리는 곳이다.

다음날 우리 일행이 찾아간 카주라호 사원들은 타지마할보다 600년 앞서서 세워진 챤델라 왕국의 석조 탑들 이였다. 우리나라 고려 때에 해당하는 시기에 인도의 석조 조각예술은 극치에 이르렀다. 석탑의 건조양식도 인도고유의 모습을 이루었고 그 특성을 관찰하면 높은 석단을 쌓고 피라미드 몸체는 단 위에 세워졌다. 층계를 따라 올라 단위에 오르면 다시 층계를 밟고 탑 입구에 이른다. 방문객의 참배는 전실에 머물지만 본실은 상징물이 중앙에 위치하여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상징물의 주위를 돌 수 있도록 통로가 설치되었다. 이들 4 공간은 각각 독립된 구조물이며 지붕은 코벨 식 아치 돔으로 건설되었다. 외부의 탑 구조 역시 웅장하고 섬세한 인도의 고유한 건축양식이다.

남녀 신들의 성교모습

탑의 외부 중단에 조각된 600여 남녀 신들의 성교모습은 84가지 몸의 모양을 보이며 짐승과 성교하는 풍습도 포함되었다. 개, 돼지, 말, 낙타, 코끼리를 동원하여 전쟁에 이르는 모습은 캄보디아에 앙코르와트 조각물들과 유사한 힌두경전의 내용을 볼 수 있다. 이 사원의 예술은 인도의 가장 중앙에 위치한 카주라호 도시의 세계적인 명물로 당시 신의 도움을 받아 인구를 증가하여 노동력과 국력을 키우려는 왕국의 의도를 볼 수 있다.

우리 일행은 다음날 바라나시에 도착하여 줄곧 석가모니의 첫 설법을 한 장소 녹야원을 찾아가 기원전 600년의 세계적인 종교, 불교의 원천지를 답습하였다. 기원전 300년에 아소카왕조에 황금기를 이루었던 불교는 동아세아,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해지고 북쪽으로 티베트와 몽골에 전해졌으며 서쪽으로 기독교와 회교도가 뒤따라 설립된다.

갠지스 강 힌두교 저녁 축제를 보러 일행 모두 꽃목걸이를 하고 릭샤(사람이 끌고 가는 택시)를 타고 강가의 밤 축제 마당에 이르렀다. 배를 타고 힌두교 노래와 춤으로 강변에 불을 밝힌 화려한 축제이다. 불교보다 먼저 시작된 힌두교의 원천지를 찾는 순례자들은 매년 백만을 넘는 방문객을 이루고 이들이 참배하고 지켜보는 무대 위에 밝은 조명과 확성기 그리고 밤을 새워 진행되는 조직적 축제과정은 무질서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느낄 수 있었다.

인도의 성지

다음날 아침 새벽에는 준비된 한번 쓰고 버릴 신발들을 신고 짐승 똥들이 아직 치워지지 않은 질퍽한 새벽길을 더듬어 갠지스 강을 다시 찾아갔다. 다시 배를 빌려 타고 강 건너 동쪽에 해 뜨는 아침을 맞아 강가에 힌두교 신자들이 가족의 시신을 화장하는 풍습을 관람하였다. 머리 깍은 장남이나 장손이 장례 제주가 되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벽바람에 날려가는 검은 연기 속에 사리지는 고인의 영혼을 멀리서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은 갠지스 강 물결에 고요히 떠가고 있었다.

상류로 배를 옮기면서 지난밤 축제현장을 다시 찾았다. 축제가 사라진 공허한 아침은 습관처럼 강물에 침례하는 사람들과 순례자들로 강가를 가득히 붐비었다. 갠지스 강물은 성수이기에 몸을 담그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더욱 상류에 오르면 강물에 빨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강가에 건물들은 대부분 오랜 역사를 간직한 사원 건축물들이며 순례자나 방문객들이 머무는 곳들이 많았다. 성지를 찾는 동안 걸인들에게 너그러워서 걸인들의 천국처럼 수 십 명의 걸인들이 줄을 지어 길가에 앉아 동냥을 기다리기도 하고 무질서하게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어린아이 거지부터 병든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행 중에 가장 큰 걸인들의 운집을 볼 수 있었다. 바라나시는 힌두교의 신비가 가득히 숨겨진 도시, 인도 역사와 전통이 살아 꿈틀거리는 도시, 현대인의 지식이나 상식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옛날의 모습을 굳게 지키는 도시이다.

인도 여행의 마지막 도시, 인도의 수도 뉴델리 공항에 도착하였다. 호텔에 가는 동안 세계에 어느 도시에도 버금가는 깨끗한 도시였다. 하지만 여장을 풀고 찾아간 서울의 강북에 비유되는 올드 델리는 인도의 어느 곳에서나 보아온 아이들과 소와 개들이 버려진 가난한 거리의 풍경이었다. 달리는 시내버스에 문과 창이 열려있고 문과 창이 없는 삼륜차 택시는 세 사람이 앉을 공간에 다섯이나 여섯 사람 끼어 앉아 흙먼지가득 날리며 달려간다.

인도 여행의 마지막 날에 우리 일행은 국립박물관을 찾아갔다.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굴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묘핸조다로와 하라파 유적부터 소개되었다. 기원전 4000년경에 성곽 안에 물을 저장하는 인공호수가 있고 동서와 남북으로 축을 이룬 바퀴 달린 차 달리는 큰길이 있고 공공시설과 주택지역을 나눈 도시계획을 보며 우리나라 신라의 수도 경주나 백제 문화의 일본 교또 격자 도시계획을 연상하게 한다. 발굴된 토기유물들도 신라 토기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이들 도시들은 인도 남부에 원래의 인도 원주민 드라비디안들의 도시였다고 하며 발굴된 유물 얼굴과 눈 모습이 동 아세아 인들과 연관되어 광대뼈와 눈 꼬리가 올려 보인다.

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이동식 목조사원은 인도 남부에 드라비디안들에 의해 최근에 만들어진 건축물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목조조각과 목조건축특성을 보여준다. 석조조각과 석조건축물이 발달하기 이전에 목조문화가 있었고 석조 피라밑이 건설되기 전에 동아세아에 흙으로 지은 피라밑 무덤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우리가 가진 지식과 상식의 인류문화에 발달과 흐름을 우리가 다시 연구하고 진실을 규명하도록 해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인도 여행은 참으로 흥미롭고 도전이 넘치는 여행이었기에 여행준비를 잘해준 아세아여행사 정수자씨와 가이드 싱순일씨 그리고 동행한 26명 회원들 모두에게 감사하며 인도여행기를 마무리한다.

네팔 여행

인도여행을 연장하여 27명 우리 일행은 세계의 지붕위에 앉은 나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하였다. 높은 산등성이와 계곡에 마을을 짓고 모터사이클 타고 도심에 오가며 사는 부지런함을 볼 수 있고 집들이 깨끗하여 인도의 삶보다 빠르고 진취적인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도 우리민족의 혈연 티베트사람과 인도사람 사이에 혼혈의 모습이 많았다. 인도의 부자들은 인도의 본토인보다 부지런한 네팔 사람들을 하인으로 채용한다는 소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숙소는 카트만두에서 히말리아 산맥 가까이 낭탕 고원지대에 위치하여 밤이면 모든 별들이 쏟아질듯이 하늘이 가까워 보였다. 마른나무 밤불을 지피고 둘러앉아 와인 잔을 돌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번잡한 아래세상에서 떠나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어깨춤을 추며 천국을 보는 듯 기뻐했다. 다음날 해 뜨는 새벽에 병풍처럼 두른 산 정상에 각각 햇빛이 이를 적마다 신비스런 색깔과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들의 감탄에 새벽바람이 차다운 줄 몰랐다.

다음날 365계단을 오르는 라마식 불교사찰에 이르러 오색(하늘, 땅, 물, 불, 바람, 들의 상징)의 깃발로 하늘을 가린 5세기부터 전해오는 석가의 반구형 부도 사원건축 양식을 보았다. 사방에 두 눈을 크게 그린 양식은 이집트 문화에 눈의 모양을 강조하는 양식과 상통하는 듯하다. 옴마니밤메흠 자신을 보호하는 경문이 새겨진 작은종을 손으로 돌리며 탑의 주위를 돌게 한다. 서식하는 원숭이가 많아 원숭이 사원으로 알려져 자연과 조화되는 환경인 듯하다. 넘치는 문화유산과 고적은 가엽게도 가난에 쪼들려 버림받은 느낌을 감출 길이 없다.

안나푸르나

다음날 히말리아 고원 안나푸르나에 가까운 도시, 포카라에 도착하여 예티 에어라인 소형비행기를 대절하여 세계의 정상 에베레스트 위로 떠올랐다. 한 시간 동안 눈앞에 펴지는 8000미터 높이 이상의 봉우리들, 비행기 날개 옆으로 바람이 구름을 밀고 지나면 눈을 뜨고 우리를 보고 닥아 오는 준엄한 산 얼굴들, 얼마나 많은 등산가들이 가까이하려다 눈 폭풍이 몰아치는 빙벽에 막혀 목숨을 잃거나 살아 울며 돌아갔을까, 검푸른 삼각 봉우리가 하늘을 찌른다. 구름과 눈사태 계곡을 내려다보는 에베레스트 정상위로 우리들의 날개가 스치는 무렵 하얀 눈송이에 마음이 부풀어 너덜너덜한 아래 세상을 까맣게 잊는 듯 멍 하는 순간 이였다. 눈앞에 커다란 검은 다이아몬드가 신비스런 빛을 내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우주와 지구의 모든 역사를 잊은 듯 한순간 스쳐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웃을 수밖에.

산악인들의 트레킹 코스로 널리 알려진 안나푸르나 계곡은 네팔의 여인들이 베틀로 짠 융단처럼 색색이 아름답기만 하고 등산객들은 히말리아의 치맛자락을 밟고 걷는 아이들처럼 즐겁기만 하다. 일행은 다시 카트만두에 돌아와 옛 하누만 왕궁건축지였던 두바 광장을 찾았다. 벽돌건물에 나무 지붕을 얹고 처마 밑에 받침대에 나무 조각은 훌륭한 힌두교의 예술이다. 우리나라 목조삼층탑과 유사하여 불국사 석가탑처럼 불교사찰에 석조 삼층탑 이전에 목조 삼층탑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파괴와 창조의 신, 시바신의 아내로 알려진 여신상의 몸에 해골들로 장식하고 손에 여러 개의 해골을 든 모습은 중미 유카탄 반도에 마야문화와 유사함을 느끼게 하고 힌두교와 마야문화가 동시에 숫자에 “0”을 사용 하는 공통성은 우연의 일치일까 생각하게 한다. 유럽과 북미대륙이 아직 빙하기에 얼음 밑에 깔려있는 수 만년 동안 우리민족 한반도의 혈연은 북남미 해안에 이르고 한편으로 만주와 몽골을 지나 티베트에 이르는 인류의 대동맥을 이어온 사실이 수년 전 혈연유전학에서 발표되었다. 티베트와 네팔의 문화는 우리나라 불교문화와 가까운 친척으로 이곳에서 우리 역사를 다시 보게 한다. 에베레스트 산 정상위로 지나는 내 작은 몸과 목숨을 느끼던 이번 여행은 참으로 오래 기억될 경험이었다.

(아래 사진들은 필자의 사진들과 황만익 교수의 사진들입니다.)

아메리칸 드림 50년 (7)

내 청춘을 바친 숭례문

숭례문(서울 남대문)은 내 청춘을 받친 건축인생의 시작이었고 미국에서 현대건축가 40년을 활동한 다음, 다시 숭례문 복구공사에 참여한 건축인생의 마지막 행사였다.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아침(한국의 일요일 밤) 8시 TV에 YTN 24시간 방송을 켰을 때 숭례문 불길은 우리 민족의 혼이 어두운 서울 하늘에 횃불처럼 크게 타고 있었다. 육백년 도읍을 지켜온 수문장이 제 몸을 불사르고 잠들려는 우리의 문화의식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아침 교회에 가려던 나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길이 없어 TV에 엉겨 붙어 있던 중에 펑 소리와 함께 터지는 산소 절단재 투척에 검은 연기는 한순간에 흰 연기로 바뀌고 화면이 보여주는 마지막 하얀 연기 속에서 내 마음은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1961년 7월 건축과 졸업논문 심사에 나의 한국건축양식에 관한 발표는 일제 36년 동안 우리문화를 공부하는 일이 금지되었기에 당시 우리세대에 선구적인 노력으로 교수님들의 주목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 일본건축학자 관야정의 조선건축 책자와 고유섭 선생의 고고학 자료를 연구하며 준비되었다. 대부분 동기졸업생들은 4월에 이미 졸업하였고 나는 군복무기간이 끼어서 9월에 졸업하게 되었다.

김형걸 건축과장님이 심사하였고 졸업반 주임교수 김정수 교수는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주관하는 숭례문 복원공사의 건축 자문위원장이었다. 나는 곧 7월에 시작되는 현장사무소에 출근하여 서울대, 한양대, 홍익대, 선배들과 숭례문 실측에 종사하였다. 한편 현장에서 일하는 목수들과 석수들을 지휘하는 조원재 도편수는 전통건축의 살아있는 증인으로 현장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를 보조하는 이광규 목수 부편수와 김천석 석수 부편수가 한국에 실존하는 최고의 전통건축 기술진을 이루고 있었다.

숭례문은 이성계가 고려의 국사에 종지부를 찍고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옮겨 사방에 사대문을 지어 성곽을 두르고 궁궐을 새웠다. 태조 5년 (1396)에 숭례문을 도읍의 관문 곧 이조 왕국의 정문으로 건립하여 2년 후에 완성하였다. 세종 29년(1447)에 보수되었음이 실록에 기록 되었으나 성종 10년(1479)에 보수된 기록은 공사 도중에 발견된 기록에 의해서 알게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고종 때에 보수했음이 논의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직전(1907)에 문루 양쪽 성곽을 헐어내려 큰길을 내었을 때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되었으나 6⦁25한국전쟁에 포탄을 맞아 부분적인 손상이 있었다가 문루와 석축의 노화현상이 심하여 군사 정부의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결단하여 1961년에 중수공사를 감행하였다.

우리나라 건축양식은 성곽건축과 사찰건축에 가장 잘 보존되었으며 한옥의 건축전통도 궁궐건축에 잘 보존되어 있다. 목조건축양식의 변화는 중국의 당송시대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전기양식이 있고 고려 때 원나라와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발전된 후기양식으로 나누어진다. 현존 목조 건축물들 중에 전기양식은 백제에서 일본에 건너간 대부분의 백제문화 건축물과 중국 산서성에 도교사찰 진사의 건축물과 당나라의 도읍 서안에 산재한다. 우리나라 전기 목조건축 양식은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볼 수 있으며 부분적인 양식이 사찰 건축에 산재한다.

숭례문 건축양식은 우리나라 후기 목조건축양식 중에 가장 웅장하고 궁궐과 성곽 건축물 중에 가장 오래된 전통양식이다.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기둥 상부를 들보로 연결하고 기둥과 지붕구조 사이에 수많은 첨차와 소로를 축적하여 만들어진 공포 구조물을 갖춘 다포양식이다. 다포의 기능은 지붕의 무게를 고르게 분배하여 처마의 곡선이 아름답게 조성되고 오래토록 유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재도와 설계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추녀와 처마의 곡선을 찾아서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목조건축은 건축부제들이 지붕위에 개와를 비롯한 무거운 하중을 받아 차츰 휘어지게 된다. 목조 건축물에 처마곡선은 필연의 결과이다.

숭례문 현판

아세아의 남방건축물들은 처마곡선이 크고 북방건축물들은 비교적 작다. 시대적으로 고대건축물은 처마곡선이 경직하고 후대에 올수록 곡선이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숭례문의 추녀모양과 그 밑에 귀포의 모양은 웅장하며 우아한 곡선으로 각 부제들이 그 기능에 맞는 예술적 표현으로 역사의 향기가 가득하다. 지붕에서 기와를 들어 내리면 크기를 기록하고 문양을 탁본하여 재사용여부를 결정하였다. 우리 선조들이 수천 년 동안 대대로 전수해온 정교하고 안정된 예술과 기술이 숭례문의 모든 부제 하나하나에 가득하여 감탄을 멈출 길이 없었다.

문루 하부에 석축은 거대한 화강암을 사각방형으로 다듬어 이를 맞추어 높게 쌓고 무지개모양 홍예를 짓고 관문 통로를 이루었으며 철갑문을 달았다. 성문이 열리고 닫는 시간을 종을 쳐서 알렸다. 색깔 찬란한 단청은 붉은색과 초록색의 두 가지의 혼합색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문루 중앙에 걸린 현판은 양녕대군의 친필이라고 전해지며 세워 쓰인 의미를 관악산 풍수에 연결하기도 한다. 숭례문(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썼다고 한다. 우리나라 성곽건축 건설기록은 화성(수원) 성역의괘에 정확하고 정밀하게 기록되었다.

1961년 7월에 시작된 서울시 산하의 공사 관리는 중단되고 1962년 3월부터 문교부 문화재 위원과 국립박물관의 협조로 진행되었다.

숭례문의 모든 기록물 보관

필자는 쉬지 않고 조원재 도편수와 새로 부임한 김정기 감독을 보조하며 해체되는 모든 부재를 하나하나 실측하고 기록하였다. 수천 개에 달하는 모든 숭례문 건축부재들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원형을 찾고 그 모든 기록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조원재 도편수 댁에 투숙하여 도편수와 함께 출퇴근하며 사라져가는 전통건축기술을 이해하고 용어를 기록하여 후에 건축학계에 전해줄 수 있도록 기록하였다. 동기동창 여상현과 장석진의 도움을 받으며 실측도와 복원도를 공사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작성하였다. .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시민들의 궁금함을 돕기 위하여 당시 일간 신문에 보도하기도 했으며 당시 손으로 쓴 원고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공사 도중에 발굴된 기록과 유물들은 앞으로고 계속해서 연구할 의문들을 남겼다. 예를 들면 기록을 남기지 않고 서둘러 진행된 보수공사가 이조 후기 어느 때였을지. 이태조 때 건축양식이 세종 성종 때에 변조되지 않았는지. 지금의 우진각 지붕이 원래는 팔작지붕이었는지. 많은 의문이 숨겨있는 국보 일호 건축물 안에 실마리를 찾아서 규명하는 과정이 우리가 우리의 근원을 찾는 학구적 임무이며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노력으로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963년 5월 14일 준공식에 최봉주 현장사무소장, 김정기 감독관, 조원재 도편수, 최용완 제도사, 네 사람은 윤태일 서울특별시장에게서 중수공사 공로 표창장과 금일봉을 받았다. 그때 광주광역시에 사시는 부모님이 참석하셨다. 그 후에 윤천주 문교부 장관은 나를 문교부 건축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위촉하였고 당시 철도청 산하에 공무원 교육원에서 한국문화사와 건축사 강사로 일하며 25세 젊은 나이에 바쁘게 연구하며 종사하였다.

교육 공무원인 아버님도 교육원에 오셔서 교육과정을 거치는 중에 내 강의를 듣고 가셨다. 김정수 교수는 연세대학교 이공대 학장으로 부임하시고 나는 건축과 졸업반에게 특강을 하였다. 당시 대학원 과정이 설치되어 이경회 학생과 주남철 학생이 한국건축 관계논문을 준비 중이었다. 윤장섭 교수와 현지답사하며 함께 연구했다.

문화재청은 숭례문이 다행히 디지털 측량 기업인 위프코가 2002년 문화재청 의뢰를 받아 3D 레이저 스캔으로 촬영해 놓은 자료가 있었고 수기(手記) 형태 숭례문 도면도 있었지만, 이 3D 레이저 스캔 자료가 복원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태조 5년(1396년)창건

옛사람들은 건물 부재들의 용도에 적합한 여러 가지 나무들을 산에서 찾아 가장 적절한 시기에 베어서 바닷물에 수년 동안 침수한 다음 다시 그늘에서 수년 동안 말려서 나무의 결을 따라 부재용도에 맞는 모양으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박원규 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교수는 “건축물 나무 부재(뼈대를 이루는 중요한 재료)의 벌채 연도를 알면 건축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며 “숭례문 목부재 68점의 나이테 연대를 측정한 결과 1860년대에 대대적인 지붕 공사가 있었던 흔적을 찾았고, 조선 태조 때 사용됐던 건축양식을 가진 목부재도 알아냈다”고 말했다. 숭례문은 조선 태조 5년(1396년)에 창건돼 세종 29년(1447년) 터를 새로 닦으면서 재건됐다고 알려졌다. 성종 10년(1479년)에 대규모 공사가 이뤄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에는 6·25전쟁 때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기 위해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진행한 게 전부다.

하지만 이번 나이테 연대 측정 결과 숭례문의 상층과 하층의 지붕을 받치는 목부재인 ‘추녀’ 7개가 1860년대에 벌채된 것으로 분석됐다. “고종 5년(1868년) 정도에 ‘숭례문 문루와 성문 수리공사가 급하다’는 내용의 개인적인 기록 등이 나온다”며 “그 시기에 지붕까지 들어내는 대규모 공사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

화재 후 나의 기록에 관한 대서특필

1966년에 모교와 자매결연한 미네소타주립대학에 대학원과정을 위해 서둘러 도미할 때에 숭례문 자료들은 부모님 댁에 남겨 두었다. 수년 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살림을 치우실 때 숭례문 자료들을 안전하게 보관하셨고 내가 미국에 온 지 20년 후에 이민 오실 때 숭례문 모든 자료를 고스란히 가져오셨다. 그 후에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다시 20년 동안 숭례문의 모든 자료를 보관할 수 있었음은 어머님의 정성이였다고 감사해한다. 숭례문은 불에 탔어도 사라진 부재들의 기록이 살아 있기에 불에 타지 않은 아래층을 회복하고 여기에 보관된 기록에 따라 위층이 회복되면 숭례문은 다시 국보 일호로 화상을 회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옴을 나는 믿었다. 6백년의 역사가 다시 후세에게 전해지게 됨은 내 인생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로 느껴졌다.

화재발생 후에 2008년 2월 11일부터 2월 25일 사이에 LA에 중앙일보와 한국일보를 비롯한 일간지와 한인 방송국들은 내가 소장해온 숭례문 실측도와 자료들을 대서특필 보도하였다. 1963년도에 작성되어 서울시에 전해준 실측도와 복원도는 문교부 문화재 관리국으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모두 분실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내가 가진 실측자료가 숭례문 복구에 유일한 복구 설계 자료임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문화재청에서 조상순 학예사는 곧 나에게 숭례문 실측도와 자료들을 가지고 한국에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보내왔다. 나는 서둘러 한국을 방문하고 숭례문 현장에 찾아가서 문화재청 최종덕 건축과장을 비롯한 숭례문 현장사무소 이정연 사무관과 문화재청 직원들과 보수공사 도편수 신응수씨를 만났다. 신응수 도편수는 1962년에 이광규 부편수를 도우며 당시 복원공사장에서 함께 일하는 젊은 목수였기에 다시 만남을 무척 반가워했다.

다음날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회가 서울 광화문 사무소에서 소집되었고 나는 문화재 위원들에게 자료들을 설명해주었다. 1962년에 숭례문 현장 감독으로 일했던 김정기 씨도 만났다. 문화재청 이건무 청장은 나를 숭례문 복구단의 고증분과 위원과 기술분과 위원으로 위촉했다. 자료의 일부는 사진촬영으로 복사하여 남겨주고 미국에 귀국하였다.

문화재청은 60년대 숭례문 수리공사 당시 실측 조사작업에 참여했던 최용완 씨의 숭례문 해체실측기록 소장자료들을 확보해 조사·분석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라고 발표했다. 해체실측기록 자료에는 지난 1961년부터 1963년 사이에 진행된 숭례문 해체보수 공사 과정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부재 규격, 수리된 부재의 위치와 수량 등이 매우 상세히 나와 있어 숭례문 원형 복원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고 했다. 현재 숭례문복구자문단 고증분과 위원으로 위촉된 최 위원은 해체실측기록 이외에 숭례문 기와, 부재 등의 탁본 자료와 사진 등을 가지고 최근 방한하여 숭례문 해체보수 당시 도면 기록 작성을 담당했다고 보도했다. 최 위원은 소장한 해체실측기록 등을 숭례문 복구단에 공개하였고, 숭례문 복구단은 기록 등을 자세히 분석해 숭례문 복원 설계 등에 활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KBS-TV에 출연 생방송

서울에 채류중에 문화재청의 알선으로 2008년 10월 14일 저녁 9시 뉴스에 KBS TV 방송의 대담 요청을 받았다. 정은승 아나운서와 숭례문에 관한 대화로 생방송을 하였다. 나는 한국의 문화재 건축과 현대건축이 연결되어 대학 건축과에서 교육과정에 전통건축 연구가 이루어지고 현대 건축의 설계에 우리나라 고유의 특성을 보여주는 현상이 나타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2010년 2월 10일 이건무 문화재청장, 최종덕 건축과장, 신응수 대목장, 그리고 관여 기관장들이 참석하여 복구공사 착공식이 열렸고 화재 잔여부분 해체에 착수하였다. 숭례문 발굴 및 조사연구를 기반으로 드디어 해체실측이 진행되었다. 문화재청 숭례문 복구단체는 복구공사팀, 실측고증팀, 행정지원팀, 3팀으로 구성되고 복구자문단은 고증분과, 기술분과, 방재분과, 3 자문위원팀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고증분과와 기술분과 위원으로 일하였다. 매년 숭례문 복구 현장에 찾아가 공사과정을 지켜보며 신응수 도편수를 도우며 고증과 기술면에서 협조하였다. 하지만 상세도면 없이 공사가 진행됨은 우리나라 문화제 보수공사에 현대건축기술과 완전히 결별되었음을 보았다. 한국의 국보 제일호 문화재 숭례문의 복구가 외국에 있는 교포 건축가의 소유물인 실측도에 의존하여 복구되는 상황은 참으로 한국의 슬픈 현실임을 모두가 함께 느꼈다.

신응수 도편수는 2010년 3월 5일 KBS 아침마당에 건축 팀을 소개하였고 도편수 본인이 초보자 목수로 1962년에 이광규 부편수의 조수로 숭례문 공사에 참여한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당시 조원재 도편수와 일하는 최용완 제도사를 도와주기도 했고 목수에게 도면을 읽는 일이 필연으로 느꼈을 때 최용완 제도사가 본인을 남대문 시장에 데려가서 9가지 제도기 세트와 제도기구를 사주며 제도실의 제도판에서 실습하도록 해준 최선배의 친절에 지금도 고마운 마음 잊지 못한다며 다시 숭례문에서 함께 일하게 되는 인연을 기뻐하였다. 나는 아침마당 방송을 통해 우리가 우리 문화를 인식하고 세계에 알리는 일이 우리 앞에 직면한 중대한 과제임을 강조했다.

한국 문화재청은 유홍준 청장이 화재 책임으로 사퇴하고 이건무 청장이 약 3년 동안 근무하였다. 그 후에 이명박 대통령은 최광식 청장을 임명하였다가 6개월 후에 문화부 장관으로 승진되며 김찬 청장이 뒤를 이었다. 숭례문 하체의 불에 타지 않은 하층부분 공사가 거의 완료되고 화재에 소실되어 사라진 상체부분 공사에 진입할 무렵에야 김찬 문화재 청장은 나에게 공사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문화재청에 인수하도록 요청하였다.

숭례문과 함께 있는 동안 나의 느낌을 아래와 같이 시를 썼다.

<詩>

그슬린 얼굴

최용완

불에 탄 상처를 가리개로 두른 채
병상에 누어
찾아온 나를 껴안고 흐느낀다

36년 동안 몸을 빼앗기고 마음이 짓밟혔던 고통
해방되어 찢겨진 옷깃을 여미었었다

반세기 지나도록
정치에 경제에 바쁜 사람들 구경하는 동안
빼앗긴 역사
잃어버린 문화
흩어진 선조의 혼을
지켜 돌보아 온 외로운 숭례문

육백년 옛 도읍의 수문장이 제 몸을 불사르고
훨훨 타는 불길 속에
피 끓는 선조들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애통함이여

불에 그슬린 임의 얼굴을 더듬어
가족의 넋을 다시 찾으려.
그 앞에 엎드려 통곡하는 경복궁의 눈물

2011.08.08

내가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조선일보에 “숭례문, 겉 구조만 잰 도면만 갖고 완벽한 복원 가능하겠나” 하고 대서특필한 기사에서 “문화재청은 왜 이제 와서야 건축가 최용완씨의 실측도를 요청하는가”하고 물었다. 문화재청은 “최씨가 기증한 자료가 매우 의미 있고 귀한 자료인 것은 분명하지만, 불타고 없는 내부를 복원하는 것은 대목장의 몫”이라고 해명했다. 세계적 문화유산을 대목장 한사람에게 의존하는 한국 문화제 관리가 한심스럽기 짝이 없어다는 느낌이 들었다.

2011년 11월 4일에야 문화재 청장의 대리인 박왕희 씨는 나와 협약서를 체결하였다. 나는 한국에 두 번 다녀가는 여비만 받고 모든 자료의 복사 사본을 무상증정하였다. 숭례문 하부 공사가 끝나고 상부에 불타고 없어진 부분의 자료가 필요할 때에 내가 간직한 모든 자료들을 동원하여 복구에 필요한 고증분과와 기술분과 위원의 기능을 다하였다.

숭례문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되는 과정과 그 기록은 일본과 중국 외에도, 세계 선진국 전문가들이 한국의 문화재 관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문화재 보수공사가 1960년대의 수준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상황을 보며 답답하고 섭섭함을 느꼈다. 잃어버린 전통 기법을 단 한 번의 시도로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문화재청은 외국에 개인 소장 자료로 국보가 보수되었다는 수치를 감추려고 내가 준공식에 참석하는 것마저 주저하는 듯했다.

드디어 2013년 5월 4일 박근혜 대통령 참석으로 준공식이 열렸고 숭례문은 5년3개월간 277억원을 투입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에 나무기둥에 틈이 열리고 단청이 벗겨지고 기와 재작에 문제들이 나타나며 공사 관리 부실이 들어나며 변영섭 문화재 청장은 임명 8개월만에 경질되었다. 재료보급 재작 감독이 한사람에게 주어진 문제점을 비롯한 후진성은 한국사회가 겪는 진통인 듯하다. 현대건축에서 소외된 전통건축의 장래는 참으로 우려스러움을 느끼며 나는 나의 할일을 마쳤지만 현재 소장한 모든 자료의 원본은 부수공사 기념관을 설치할 무렵에 기증할 예정이다. 후배들의 계속하는 연구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한심스런 문화재관리와 우리의 할 일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우리생활을 새롭게 정립하여 우리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가, 선조가 우리에게 전해준 것들이 무엇인가, 우리가 후손들에게 우리의 전통을 어떻게 전해줄 것인가, 세계화 역사 속에 우리민족의 역할을 분명히 확립하고 실행할 때가 지금인 듯하다.

최근 중국의 변화

한반도와 호흡을 함께하는 중국의 변화를 본다. 지난 2012년 4월에 중국을 다녀왔다. 여행사 안내를 따라 상해 항주 소주 황산 장가계 원가계를 둘러보았다. 어렸을 때 만주에서 몇 해 살았고 모택동 혁명 후에 네 차례 다녀왔다. 이번 여행 중에 두 가지 놀라운 경험은 최근에 달라진 중국의 모습과 중국의 자연 경치이었다. 15년 전에 상해의 동부, 푸둥 지역은 허허벌판에 정부가 세워놓은 전망 탑하나 우뚝 서 있었다. 이번에 다시 찾아간 푸둥 지역은 뉴욕의 맨해튼이 들어섰고 서울의 강남처럼 중국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홍콩의 금융가를 본토의 땅으로 옮겨오는 정책으로 상해는 바야흐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둔갑하였다. 자전거 도시가 자동차 도시로 변했고 고대 도시가 현대 도시로 탈바꿈했다. 도시 교외에 주거지는 가난한 마을에서 현대식 주택지로 발전하였고 고속도로는 빠르게 뻗어 나가고 있다.

새로 지은 주택건물마다 지붕 위에 조상의 영전을 모시는 작은 공간을 건축했음은 동아세아의 오랜 유교적 생활풍습을 불 수 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관광객은 붐볐고 그들의 고유한 시끄러운 말소리는 옆을 지날 적마다 조용한 분위기가 얼마나 좋은지 다시 느끼게 했다. 50년 전에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을 이곳에서 가끔 볼 수 있었다. 우리 안내는 여행 중에 귀중품의 손가방을 눈앞에 보관하고 다니라고 경고했다. 뒤에 매면 뒷사람 것이고 옆에 두면 옆 사람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5억의 인구에 56개 소수민족이 각자의 언어와 풍습을 보존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중국정책은 유럽인들이 세운 신국가의 정책과 크게 대조되기에 중국의 만만디 사상을 여기서 볼 수 있다.

항주와 소주

상해 근교에 항주와 소주는 기원전 200년 진시황제가 날씨와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머무른 지역으로 그때 운하가 개설되었다. 남녘에서 쌀을 북녘으로 가져가면 북녘에서 석탄을 가져왔다. 11시간의 뱃놀이도 아직 남아있다. 이탈리아에 베니스가 있듯 중국에 소주, 물 위에 도시가 있다. 고구려를 침략하려다 을지문덕 장군에게 패배당한 수양제는 황허 강와 양쯔 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개설했고 원나라 칭기즈 칸은 운하를 북경까지 연결하여 남방의 쌀과 비단을 실어오게 했다고 한다. 세계 최대의 경항대운하 인공 물길이 북경(北京)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항주(杭州)를 잇는 수로이다. 북경, 천진 등 6개 성(省)에 접해 있으며 황하(黃河), 회하(淮河), 장강(長江, 양자강) 등 5대 강을 연결하여 전체 길이 1,794km로 세계에서 가장 길고 2500년 역사를 보여주는 해운 통로이다.

항주시에 서호의 기후와 경치는 중국 문화제 국보 1호 ‘남송의 도시 풍경 그림’으로 자세히 묘사되었으며 원나라 때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도 나타날 만큼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곳이다. 황산은 오대산, 보타산, 아미산과 함께 중국의 4대 불산에 속한다. 공산당 정부에서 처음 개방정책을 시작한 덩샤오핑 때에 개발되어 관광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미국의 국립공원인 캘리포니아에 요세미티에 비교되는 곳이다. ‘하늘 아래 이름난 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황산에 모였다.’라는 별명을 가졌다.

징가계와 원가계

장가계의 천문산은 세계에서 가장 긴 곤돌라를 45분 동안 타고 도시의 지붕을 지나 산악지대의 급경사를 오르는 장관을 감상한다. 곤돌라가 끝나는 지점에서 정부 관광청에서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고불고불 99굽이 비탈길을 약 30분을 오르면 드디어 천산 층계 밑에 도달한다. 999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산봉우리에 커다란 동굴이 뚫렸다. 해발 1,300m의 고지에 높이 131m 폭 57m의 하늘로 열린 문은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과 구름이 통하는 문이다. 이곳 역시 최근 공산 정부의 장쩌민 지도자 때에 개발되었다.

원가계는 ‘대자연의 미궁’이며 ‘지구의 기념물“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능원이다. 일 년 중에 260일 비가 내리는 신비스러운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120만 바위 봉우리 들이다. 높이는 평평한 고원에 이르고 계곡의 바닥은 미국의 그랜드캐니언 협곡에 바닥처럼 천 길 낭떠러지로 깊다. 자연보호 구역 국립공원으로 수억 년의 원시림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어있다. 구름이 바다를 이루어 봉우리 바위 절벽에 자라는 소나무가지에 스쳐 흐르는 절경은 세계적인 자연 유산이다. 삼국지에 유방의 난을 피해 장량이 이곳에 숨어 살았다고 전해지고 영화 아바타의 배경을 이곳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중국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나라의 음식을 다 먹어보지 못하고 그 나라의 글 한자를 다 배우지 못하고 그 나라 땅을 다 밟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 하지만, 원가계 경치를 보지 못했으면‘나이 백 살 되도록 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다. 15억 인구의 중국과 12억 인구의 인도 사이에 동남아세아는 인류의 문화와 문명의 뿌리를 품고 있음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그 뿌리에서 인류 역사는 새 시대의 싹이 꿈틀거리며 자라 올라옴을 보았다.

고립되어가는 북한

중국이 세계 경제에 게방하고 도약하는 동안 중국과 한국에 접한 북한을 보면 걱정스럽다. 세계의 이목이 북한의 새 지도자와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두는 동안 북한 동포는 더욱 외면당하고 고립되어가고 있다. 최근에 조금은 북한의 새로운 모습을 본다. 여러 신문과 방송보도를 보아도 김정은 체제는 과거의 북한과는 조금 다르다. 젊은 지도자의 개방적인 태도는 좀 더 우리에게 가까워지는 느낌을 준다. 최근에 동창회지 논설위원이며 LA 중아일보 편집국장인 이원영 동문을 비롯하여 미주 교포 여덟 사람으로 구성된 방문객이 북한을 다녀와서 보고하는 모임이 있었다. 자유스럽게 취재할 수 있는 여유롭고 자신 있는 북한 감시단의 태도에 방문객도 놀라고 여행 기사를 읽는 독자도 흥미롭게 했다.

9·11사건 이후에 후세인의 이라크 독재 정부가 미국의 침공으로 일주일 만에 사라짐을 본 북한은 핵무기 개발이 유일한 생존방법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미사일을 남쪽으로 발사하겠다고 하며 위협과 공포청치를 계속한다. 연임에 성공한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에 ‘미얀마의 길을 따르라.’고 권고하고 핵무기를 내려놓고 평화와 진전의 길을 주문한다. 유엔이 북한을 경제 봉쇄하고 국력을 약화시켜 정부의 붕괴를 기대했던 정책은 북한 동포를 극도로 가난하게 만들고 중국의 원조에 의존하여 북한의 영토가 중국 산업의 개발지역으로 변화하는 현상을 보게 한다. 태어나면서 지도자에게 종교적으로 의존하는 북한 동포는 벽에 걸린 두 얼굴을 보고 ‘가난해도 이대로가 좋다.’하는 구호를 외우며 가난을 인내하고 기아상태까지도 복종하며 산다.

남한 동포와 재외교민이 북한 지도자에서 눈을 돌려 북한 동포를 끌어안는 적극적인 노력이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남한에 반정부 주의자들

지난 며칠 동안 캐나다 로키산맥 관광을 다녀왔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 중에 과거에 청와대에서 국방 보좌관으로 일하던 모 인사와 버스 안에서 오랜 시간 이야기 나누며 최근 국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정치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꿰뚫고 있는 인물 백과사전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한국 진보계 인사들을 셋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가정에 해방 후부터 좌익계활동을 해온 혈연이 있는 이들, 둘은 전두환 호남학생 탄압 때에 반정부 항거한 학생 운동권 출신들, 셋은 김대중 친북 기회를 악용하여 만들어진 교조의 반미교육을 받고 자라난 신세대들로 설명했다.

대부분 이들은 대중의 관심을 이끄는 사건을 주동하고 종북 좌파 몇몇 소수의 활동에 흥미를 갖고 동조한다고 한다. 북한정부의 악랄한 인민탄압에 무관심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원칙적인 혜택을 주장하며 남한의 민심을 교란시키는 활동에 동조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기는 한국 언론은 김정일 일거일동 소식을 전할뿐 평양인민들의 부유층 생활이나 북한 농민들의 극심한 생활고는 알 길이 없고 오직 탈북 민들의 말로 전해지는 소식을 통해서만 북한 인민들의 어려움을 알게 될 뿐이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나드는 탈북민의 비참한 생활상과 잔인한 인권탄압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 선조는 우리 민족의 자유를 찾기 위해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목숨을 바쳐 해방운동을 하였다. 남한국민들이 북한인민들의 자유를 찾기 위한 노력이 전혀 없는 듯하다.

잔인하게 인민의 인권을 유린하는 세계에서 최악의 정부라고 규탄하는 유엔도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보호를 받고 있기에 손을 쓰지 못하는 실정이다. 남한의 국가 보안법은 좌경진보파의 숫자가 너머 많기 때문에 북한 정부처럼 정치수용소에 넣을 수도 없고 박정희 군사정부처럼 인간개조 훈련을 시킬 수도 없다.“그래 나는 종북 인사다. 어쩔래?”해도 주적으로 처벌하지 못한다. 이것이 한국의 진보파와 보수파가 만드는 국민의 불안이다.

평양에 부유층은 남한의 전자재품들을 사용하고 남한의 한류가 중국을 통해 북한에 들어오고 남한국민의 부유한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 농민들도 차츰 소식을 듣고 있다. 공개처형으로 인민을 위협하고 기만교육으로 인민을 속여 지냄도 한계에 이르고 있다. 남한의 진보파가 북한에 동조하고 북한의 인민들이 남한국민을 인식하는 경향은 남과 북이 가까워지는 느낌을 보여준다. 이것은 과도기의 전조인 듯하다. 과도기에 겪는 불안을 극복하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세력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조용한 국민들이다. 공갈 협박에 흔들리지 않고 사회교란에 휩쓸리지 않고 각자의 사회임무에 꾸준히 충실한 국민들이다. 남한 국민과 북한 인민들의 가슴에 흐르는 민족적 양심이 대동맥을 이루고 한강과 대동강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현재 세계의 추세는 스탈린식 공산주의 독재가 쓰러진 이후부터 독재정부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공산주의는 국민의 자발성이 약해져서 경제가 무너지고 소련 연방국가가 사라지게 됨을 보았고 북한도 그때부터 어려워졌다. 북한의 김 씨 삼 세대를 이어가는 독재정부가 지금의 지구상에 펼쳐지는 정치 환경에 얼마나 오래 더 존속할 수 있을까. 국민의 생산능력이 약해질수록 북한의 국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갈수록 남한과 가까워지는 중국의 생각도 달라지고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국민의 복지를 감당할 수 없어 정부는 빚더미를 지고 비틀거린다.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GM같이 막강했던 자동차 산업도 은퇴 고용인의 복지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 보수적인 사회주의 야당은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쟁의 반대편에서 대조 역할을 하다가 잠깐 정권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원동력을 앞설 길은 없다.

세계경제에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놀라운 발전을 보여준 한국의 맥박은 아직도 쉬지 않고 뛰고 있을 것이다. 반기문, 김용, 세계적 지도자를 속속 배출하고 한국의 상품은 이미 세계의 일용품이 되었고 한류는 세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생활도구가 되었다. 솟구쳐 거침없이 나가는 우리의 앞길을 누군들 막을 수 있으랴.

나이 70 어르신

나이 70 어르신에 이르면 삶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고 한다. 아이들이 성숙해서 가정을 이루고 손자 손녀가 재롱부리는 재미를 보며 즐거움을 누린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 은퇴재산과 건강관리가 중요하다. 나이 들면 운동신경이 약해져서 넘어지기 쉽고 감기 들면 면역력이 약해서 폐렴을 앓기 쉽다고 한다. 아내는 음식에 관심을 쏟고 나는 운동에 관심을 두어 매일 함께 걷는 운동을 하며 건강을 위해 노력하며 산다. 낮에는 사회봉사에 바쁘고 저녁이나 주말에는 독서와 글쓰기에 바쁘게 지낸다.

친척이나 친구들이 찾아와서 집에 머물러 세상 이야기 나누며 함께 웃고 지내다 가고 나면 우리가 아이들일 때 할아버지와 친구들이 돌 화롯불에 곰방대 두들기며 ‘세상이 말세’라고 불평하시던 때를 기억한다. 이제는 우리자신이 그렇게 하며 그때 할아버지 심정을 이해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우리도 가끔 젊었을 때 바빠서 가보지 못한 외국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우리가 배워 온 세계역사에 편견이 많았음을 다시 생각하곤 한다.

어르신은 인생의 죽음을 면하게 되는 겸손한 기간이기도 하다. 우리 부모는 80대 중반에 고별하셨다. 우리의 시계도 멈추지 않고 그때를 향하여 초침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인류가 태어나는 때가 있고 떠나는 때가 있다. 태어나는 때는 부모가 준비했지만 떠나는 때는 자신이 준비해야 함을 함께 생각하고 있다. 죽음이 두려워서 떠나기 전에 종교를 택하는 친구들을 가끔 본다. 종교는 과학이나 예술처럼 인간만이 갖고 사는 커다란 혜택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생활의 한부분이 되면 삶에 많은 도움을 얻으며 살게 됨을 주위에서 항상 본다.

인생의 황혼

어르신의 인생 황혼은 슬프고 아름다운 기간이기도 하다. 이루지 못한 꿈은 떠나는 날에도 아쉽고 아름답다. 목숨이 떠나고 나면 사는 동안 인류사회에 보탬이 되는 좋은 성취와 흔적은 다음 세대로 이어져서 이 세상에 영원히 남께 되는 데, 그것이 영생하는 결과가 아닐까 싶다. 동물은 목숨을 유지하려고 매일 먹이를 찾아다니고 짝을 찾아서 떠난 후에 목숨을 이어가도록 새끼를 남기고 간다. 인간은 언어가 형성되면서 종교◦ 예술◦ 과학의 형식이 사회를 이루고 만물의 영장으로 이 땅에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 않는가. 목숨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사람들을 위해 사람답게 살아왔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잘 달궈진 몸과 마음이 미국에 이민하여 한국인의 뿌리를 깊게 키우며 살아온 듯하다. 세계화 추세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살아온 우리의 세대는 거의 지나가고 있다. 다음 세대는 디지털 정보시대로 바꾸어서 지구의 표면은 더욱 축소되고 인류는 더욱 하나의 국가로 가까워지는 듯하다. 시간이 갈수록 마시는 공기와 물에 오염이 더욱 심해지기에 심각한 공해와 싸우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사람을 시험관 안에서 만들어 우주인이 태어나는 때가 오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드디어 모든 인류가 어르신이 되는 때가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 사회 환경과 의학의 발달로 100세를 내려다보는 때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수만 년 전부터 수백 년 전까지 사람의 나이는 40세까지가 보통이었다. 자연과 함께 사는 다른 동물처럼 먹고 자고 자식 낳는 일이 인생의 축복이었다. 사회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때에 겪는 변화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인생에 가장 성공하는 절정의 나이는 45세에서 55세까지라고 말한다.

Wellbeing, Wellaging, Welldying

사람의 나이에도 자연연령, 건강연령, 영적연령으로 분별하여 진단하기에 이르렀다. 사람이 아름답게 사는 것을 웰비잉(Wellbeing) 이라고 하고, 사람이 아름답게 나이 드는 것을 웰에이징(Wellaging)이라고 하며 사람이 아름답게 죽는 것을 웰다이잉(Welldying)이라고 구분한다.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면서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나이 들어가면서 건강하게 자신과 남에게 도움 되어 살다가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삶을 마감하는 일인데 쉽지는 않다.

본인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여 자신을 다스리고 사회에 봉사하는 삶은 아름답다. 개인생활과 전문분야에 밀려오는 어려움이 있지만, 역경을 인내하는 긍정적인 즐거움을 찾으면 성공한 사람이다. 이들의 공헌은 사회가 받아주고 금전도 뒤따라온다. 가정과 사회에 필요한 일을 찾아 열정을 갖고 즐기는 삶을 웰비잉(Wellbeing)이라고 한다.

중년과 노년에 건강의 원천은 부부 사랑에서 온다고 한다. 서로 마음을 터놓고 소통하는 이웃이 되고 아이들이 출가한 후에도 서로 의지하며 함께 즐기는 시간은 아름다운 삶의 지름길인 듯하다. 나이 들면서 질병, 고독감,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지금까지 누려온 역할 상실 등에 실망하지 않고 적응하여 자기 나름대로 가족과 사회에 공헌함을 즐기는 노년을 웰에이징(Wellaging)이라고 한다.

세계 역사를 통하여 가장 훌륭한 업적의 64%가 60세 이상의 노인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한다. 과거에 나이 60이면 환갑잔치를 하여 오래 살았음을 축하했는데 이제는 인생이 60부터라고 말하는 때다. 나이 들면서 이기주의나 노욕(老慾)을 자제하고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남을 위한 훌륭한 일을 하게 되고 좋은 인연을 맺어 행복을 얻는 듯하다.

이성 감성 영성의 능력을 겸비한 현대인의 삶은 더욱 아름답다. 이성은 사리를 이해하여 당면하는 현실에 본인과 이웃의 지식과 철학을 동원한다. 과학적 판단을 하고 대응함으로서 성공의 길에 오른다. 감성은 노래, 춤, 그림, 조각, 시와 소설, 등의 예술을 즐기고 느낌 속에 함께 젖어보는 시간이다. 삶의 아름다움이요 행복한 순간이기에 마음속에 싸여온 걱정이 사라진다. 영성은 믿음에 의지하여 자연의 섭리에 수긍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능력이다.

위급한 진단을 받았을 때, 사후를 걱정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환자는 병이 빨리 악화하여 생명을 잃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념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치료와 회복에 도움되어 행복을 되찾는 이들도 자주 본다. 전쟁터에 나간 용감한 병사는 나라를 구하고 살아남아 승전가를 부르며 돌아오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병사는 전쟁에 패배하고 목숨도 잃는다고 한다.

우리의 사후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준비해 놓은 다음, 두려워하지 않고 늠름하게 죽음을 맞으면 아름다운 죽음, 웰다이잉(Welldying)이라고 한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담담한 최후를 맞기 위해 존엄사를 허용하는 미국의 5개 주가 있다. 1994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존엄사법을 제정한 오레곤 주는 시한부 환자를 위해 의사가 처방해준 약물을 스스로 복용해 사망하는 것을 허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땅 위에 제한된 생명의 공간 안에서 자기가 밟고 온 발길을 돌아보며 행복한 마음으로 새로 찾아오는 생명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줌은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리라.

한순간 지나거나 일백년을 살거나 하나뿐인 목숨. 삶의 길에 등장하는 때부터 인연을 맺어 실패와 도전을 눈물과 웃음으로 삼키며 세월 함께 꿈을 꾸고 나면 퇴장의 시간이다. 사랑 안에 태어나서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목숨에 도움이 되려함이 목숨의 가치라고 할까. 그래서 인생의 사랑은 받는 것보다 끝까지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싶다. 때가 오면 겁 없는 결단으로 아름다운 웰다이잉(Welldying)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내와 함께 걷는다

태어나서 처음 엄마가 내 손을 잡아주어 두 눈이 떴고 아빠와 첫 걸음마 할 때 마음이 열리었나 보다. 친구들과 거닐며 노래 불으면 밝은 세상이 우리를 찾아왔다. 자라면서 수없이 지나는 사람 중에 내 짝을 찾았다. 결혼행진곡에 우리만의 인생을 걷기 시작하고 살면서 아내와 함께 걷는 시간이면 가는 길에 낭만이 가득히 흐른다.

분주한 도심에도 사색하는 공간이 꾸며졌고 교외에 나가면 나무와 풀들 벗하여, 꽃향기, 솔 냄새, 구름 가는 바람길, 계절을 밟고 가는 흙길이 열렸다. 나무와 바위들의 산길, 이름 없는 풀꽃 가득한 들길, 곡식이 무르익는 농촌 시골 길, 옛 왕과 신하들이 다니던 궁궐 길, 상가에 진열장 드려다 보는 도시길, 기적 소리 울리며 달려간 기차 철길, 흰 줄 끌어가는 비행길, 매일 흘러가는 길들을 따라 우리와 함께 가는 세상은 이야깃거리가 넘친다.

걷는 단조로움과 즐거움에 내 마음은 창문을 열어 시를 읊고, 상상 속에 소설을 이야기 하고, 연륜과 함께 찾아온 철학을 설명하고, 묶여있던 모든 욕구에서 풀려난 자유, 이미 지나간 시간, 이제야 찾아오는 낯선 공간, 아무 목적지 없이 비어있는 여정, 그럴듯한 제목 없는 대화, 우리들의 이야기 나눔은 마음이 서로 손을 잡고 끊임없이 다가오는 세계를 헤쳐 간다. 삶의 문을 연다.

같이 걷는 동안이면 생각하는 속도를 맞추고 두 마음이 하나 되어 아이들을 기르는 사랑의 기틀을 만들고 생존경쟁 속에 필연의 순리를 생각한다. 오직 사랑만이 이루어낼 수 있었던 기회를 감사하게 된다.

이제는 자라난 아이들이 집을 떠났고 둘이서 서로 의지하는 말 없는 대화로 함께 걸어서, 가족, 친구, 친척, 기다리는 사람들, 멀리 계신 부모님, 돌아가신 선조, 우리를 보호하는 신, 모두 맞아서 소리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새들 노랫소리에 함께 콧노래 부른다. 언덕 넘어 해지는 수평선을 보고 새벽 바다와 함께 걷는 길에 아침 해 뜨는 순간이면 밤이 낮으로 바뀌는 기적을 경험한다.

이렇게 걷기는 가장 단순한 활동의 근본이라, 아주 신비롭고 과학적인 움직임이란다. 걸음은 우리 삶에 시작부터 몸의 꿈틀거림이요, 바른발 디디면 왼쪽 뇌신경이, 왼발 디디면 바른쪽 뇌신경이 몸을 바로 세운다. 뇌신경은 움직이며 발달했기에 좌우가 바뀌었나 보다. 운동초기에는 탄수화물이 동원되지만, 운동시간이 길어질수록 체지방을 연소하며 비만을 제거한다. 한 걸음을 떼는 순간 200 여개의 뼈와 600개 이상의 근육이 일제히 움직이기에 모든 장기도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팔을 힘차게 흔들면서 보폭을 넓혀 빠르게 걷는 파워워킹은 전신을 사용해 운동효과를 극대화하고 발바닥 전체가 지면에 닿아 하체근육과 신경이 튼튼해진다. 복합호흡으로 심폐기능을 강화시켜 필요한 산소를 끊임없이 공급한다.

모든 고등생물은 지구의 중력에 저항하여 살기에 다리의 움직임은 생명의 모습이다. 다리가 무너지면 삶이 흔들리기에 다리는 또 하나의 심장이라 부른다. 비탈길을 오르면 숨 가쁘고 가슴에 고동이 친다. 맑은 바람 속에 만들어진 마음과 몸이었기에 피는 산소를 공급하고 오장 육부가 정비된다. 걸음을 바르게 잡으면 골반에 균형을 잡고 근육과 골격을 제대로 사용하여 척추가 바로 서는 자세교정이 된다. 걷기는 각종 성인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필수운동이다. 고혈압 환자의 혈압이 떨어지고 지친 몸이 기운을 차려서 시들은 마음에 새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매일 30분 정도의 걷기를 권고하지만 즐거운 걸음은 한 시간이 짧게 지난다. 걷는 동안 모든 병을 고치고 잠든 시간과 걷는 시간이면 몸과 마음을 청소하고 함께 걷는 시간이면 다시 오는 젊음을 되살린다. 사람도 가정도 사회도 더불어 건강해진다.

땅을 눌러 걸으면 지구가 흔들린다. 산천경개 느슨하게 숨을 쉬면 하늘과 땅이 만남을 보고 조물주의 아름다운 창조의 손자국을 본다. 같은 길을 매일 걸어도 항상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시고, 처음 겪는 새날을 맞아서 끝없는 삶의 즐거움을 본다. 우리가 이 세상을 걷고 남기는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아침 길의 시작이기에 우리는 해 지는 황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다.

걷는 동안 한때 무겁고 역겨웠던 시대가 시들고 요란스럽던 유행이 사라져서 밟고 지나간 길은 역사의 끝이요, 앞에 걸어갈 길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미래의 시작이라, 지금 걷는 이 순간만이 진실한 우리 삶의 순간이다. 내 몸은 길을 걷고 내 마음은 아내와 함께 이 순간에 넘치는 영원한 우리 몫을 나누며 오늘도 하루를 누비며 엮어간다.

아메리칸 드림 50년 (8)

My journey to America (24)

서울공대 57학번(1957년 입학 1961년 졸업) 동문이 지난 10월 25일에 50년 만의 모교방문을 했다. 십년이면 산천도 변한다는데 반세기의 세월을 그림 한쪽으로 가슴 깊이 간직하고 아내와 함께 배움의 고향을 찾아온 어르신 전사들의 만남이었다. 해방되는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6◦25를 겪었다. 대학 졸업할 무렵에 4◦19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5◦16 군사혁명을 겪으며 허리띠를 조르고 앞을 달리었음은 소띠와 호랑이띠의 땀 흘림이었다. 색 바랜 머리카락에 주름진 얼굴의 웃음에는 가난했던 한국을 세계 선진국으로 끌어올린 빛나는 공학도들의 반가움이 넘쳤다. 전쟁 후에 가장 빈곤한 사회에서 IT산업을 주축으로 80년대와 90년대에 세계적 경제발전의 기적을 일구어냈던 인생황금기 40대에서 50대의 기술 산업계에 천재 선구자들이 아니었던가.

이제 막 단풍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관악산의 계곡은 216명의 무르익은 인생의 가을을 보여주는 듯 뿌듯하였다. 대학 본부를 찾았을 때, 젊음의 열기가 가득한 후배 공대 학장과 교수들의 정겨운 환영은 노장 선배들의 마음을 따듯하게 감싸주었다. 서울대학교 운영비 40%가 공과대학 몫이라고 할만큼 공대 교육 분야가 광대하다고 한다. 졸업 후에 서울대학 동창의 사회활동에도 공대 졸업생이 돋보이는 듯하다. 서울대학교는 영국에서 발표한 2011년 QS 세계대학평가에서 42위에 자리매김을 했다.
1975년 박정희 군사정부는 당시 삼성기업 창시자 이병철 씨의 골프장을 서울대학의 종합 캠퍼스로 선정하였다. 1961년에 태릉 불암산 교정에서 졸업하고 유학을 떠난 해외동문 19명 중에는 50년 만에 찾아온 낯선 땅이기도 하지만, 관악구 신림동에 빠른 속도로 팽창한 건물들과 교정에 울창한 수목은 동문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차세대 자동차 연구센타는 현대와 기아 자동차가 세계를 앞질러 달리는 그 뿌리를 보여준다. 조선 왕조실록이 보관된 규장각이 서울대학교 교정에 위치함은 국립대학의 위치를 돋보였고, 대동여지도를 비롯하여 궁정의정의 섬세한 그림들은 우리 역사를 더욱 훌륭하게 부각시켜 준다. 최근에 프랑스에서 돌아온 국보 사록을 관람하면서 세계적 국위를 보여주는 듯 자랑스러웠다.

서울시청 광장 옆에 조선호텔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는 동문들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하여 모처럼 아내들을 처음 만나는 기쁨이 넘쳤고, 가족들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국내동문들에게는 남정현 회장 때, 30년 모임이 있었기에 20년 만의 만남이지만, 19명 해외동문과 그들의 아내들에게는 아이들 시집·장가보낼 때 낯선 어른들을 만나는 때처럼 흥분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심이택 57학번 동기회장의 환영사로 시작하여 이기준 전 총장의 건배로 만찬과 오락이 펼쳐졌다. 한용호 동문의 사회로 진행되는 동안 학교 시절의 동영상이 50년 전의 학창시절 모습들을 보여주어 더욱 감개무량하였다. 다음은 이번 행사의 모든 부문을 상세히 준비한 나종인 동문의 사회로 오락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후배 소프라노와 테너의 노래를 이어 동기동문의 장기를 보여주는 텡고 춤, 2중창, 독창, 색소폰과 피아노 독주, 노래자랑은 프로급의 재치를 보여주었기에 57학번 동기들의 끼를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즐거움이었다.

다음날 버스 4대에 과별로 나누어 타고 강원도 속초여행이 시작되었다. 나이는 칠순인데 어렸을 때 소풍 가던 들뜬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진가 보다. 한반도의 등골, 태백산맥을 넘는 동안 굽이굽이 산수 절경을 구경하며 동문들의 이야기는 열을 올렸다. 산맥이 보여주듯 우리민족의 기질은 대단하다. 다른 민족이 100년이나 200년에 거쳐 이루어낼 수 있는 변화를 우리는 단 30년 만에 이루어냈다. 세계적 경제발전, 강남과 인천시를 비롯한 한강변의 기적, 세계첨단 IT산업과 사이버 기술, 동남아 세아를 휩쓸고 이제 세계로 진출하는 한류, 우리말의 ‘빨리 빨리’나 ‘김치’는 이제 외국 사람들도 알아듣고 쓰는 말이다.

하지만, 너머 빠른 성장에서 오는 공허하고 그늘진 부분도 많다. 남북통일을 향한 이념의 혼돈, 정치사회의 무질서, 언어와 행동의 모순, 전철 안에 쭈그린 우울한 분위기 등의 동문들이 여행 중에 나누는 이야기는 다양하였다. 우리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노인들의 푸념인 듯 들리기도 하고 사회생활에 도통한 최고 지성인들의 고견이기도 했다. 진정한 선진국을 향한 발걸음 소리처럼 울리는 듯했다.

가을 등산객들이 웅성대는 산길에서 점심을 먹으며 평창 동계 올림픽이 성공하기를 기원하였다. 일행은 푸른 동해 물결이 출렁이는 속초 시에 도착하였다. 2박 3일동안 취미에 따라 골프, 등산, 바다낚시, 온천, 바둑, 등의 함께하는 즐거움을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에 통일전망대에 들렀다. 휴전 분리지대 너머로 보이는 북한의 나무 없는 산과 슬픈 눈물방울처럼 맑은 해금강을 멀리 바라보며 뼈아픈 고통의 6◦25를 회상하고 아직도 자유 없는 북한동포의 어려움을 느끼며 하루속히 통일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였다.

잠실 올림픽 경기장 문 앞에 도착하여 서로 껴안고 헤어짐의 아쉬움을 나누며 이제가면 언제 다시 보나 하는 느낌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 행사대회장 심이택 동문, 준비위원장 나종인 동문, 해외동문 회장 김태훈 동문의 수고와 지원 해주고 협력해준 여러 동문에게 감사하는 흐뭇한 느낌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칠순을 넘는 노익장들의 훌륭한 일기장 한 페이지를 만들고 떠나가는 그들의 늠름한 뒷모습은 대견하였다. 그들이 사회에 남겨놓은 빛나는 발자국은 각자의 아름다운 가정과 함께 현대 세계를 장식하고 보다 나은 미래로 떠나가는 장엄한 역사의 피날레였다.

천리안 청룡(千里眼 靑龍)

한국 문교부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일하던 때부터 습관적으로 박물관 구경을 즐기고 골동품을 수집해왔다. 미국 남가주 골동품 가게에서 우연히 손바닥 크기의 날개 달린 청용 옥돌 조각물을 보았다. 두 눈이 앞으로 튀어 나오고 네발로 기어가는 모습에 날개달린 점이 눈길을 끌었다. 이집트 피라미드 옆에 스핑크스처럼 발가락이 셋이고 날개의 깃도 셋으로 나누었다.

머리와 가슴은 연푸른 옥색이고 짙푸른 옥색 꼬리는 힘 있게 휘어 감겼다. 왼쪽 앞발은 달려들 듯 들어 올리고 다른 세발은 땅을 딛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기어가는 모습이다. 이제 막 날개 펴고 뛰어 나를 듯하다. 입은 으르렁 소리 나는 듯 잇발을 내밀고 귀를 쫑긋 새워 머리 수염은 길게 늘려 목덜미 뒤까지 장식하였다. 얼굴은 앞을 보는 듯 두 눈이 튀어나와 저 멀리 천리만리 내려다본다.

중국은 1976년에 진시황의 병마갱을 발견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1986년에 사천성 청두시 근교에서 촉나라의 청동과 금 조각물을 발굴하여 동아세아와 세계문화사를 다시 생각하고 고쳐 써야하는 놀라움을 보였다. 그곳 삼성퇴 박물관에 전시된 청동 유물들 중에 천리안을 가진 사람 얼굴 모양 청동 가면이 전시되어 있다. 제작연도는 5000년 전으로 알려졌다.

1982년에 요하지역 적봉시 흥룡와 촌에서 옥 귀걸이를 비롯해 수십 점의 옥기들이 발굴되어 8200년 전의 유물들로 판명되었고 흥룡와 문화로 소개되었다. 한국에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패총에서 발굴된 옥기들과 유사하고 암록강변 수암지역에 매장된 옥돌의 질이라고 한다. 요하 주위의 발굴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홍산문화 (BC 4500-BC 3000)로 결집되어 요하문명을 대표한다. 홍산문화의 옥돌 청룡 조각은 황하문명보다 1000년을 앞섰고 층단식 석조 피라미드는 이집트보다 2000년을 앞섰다고 중국의 동북공정 고고학계는 주장한다.

청룡은 음양호행에서 동쪽에 바다를 상징하여 동이족과 연관된 우리 민족의 이름이기도하다. 삼성퇴 유물들의 모습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발굴되는 유물들과 연관되어 촉나라와 서남아세아 무역 관계도 보여주고 있다. 중국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천 년에서 3천 년전 사이에 이곳이 고대 촉(蜀)나라의 도읍이었고 이곳의 문명이 2천년동안 찬란하게 발전했음을 설명한다. 약 3천 년 전에 갑자기 삼성퇴 문명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원래 촉나라는 상나라와 요하지역에 위치했으나 상나라가 멸망할 무렵 금속 문화가 지금의 삼성퇴로 옮겨진 듯하다. 룡은 십이지(十二支)중에 유일하게 상상의 동물이며 맨 처음 모습을 드러냄은 8200년 전에 요하지역의 흥룡와 문화 유물에서이다.

이 작은 천리안을 가진 옥돌 청용 조각물이 5000년 전의 삼성퇴 문화의 유물일까 상상해본다. 도굴되어 미국에 흘러온 진품유물이라면 중국 본토에서도 볼 수 없는 유일한 고고학 자료유물인 듯하다. 이글과 사진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사진은 수집한 천리안 청룡, 삼성퇴 박물관 천리안 청동가면

우리 선조의 지혜

원시시대 인류의 지성이 발달하면서 사람은 모든 사물에 비교대조 되는 다른 사물이 있을 때 비로소 인식을 하기에 이른다. 여자가 있어 남자를 알아보고 밤이 있어 낮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우리 선인들은 세상에 사물을 음과 양으로 나누어, 땅과 하늘, 달과 해, 바다와 육지, 안과 밖, 물과 불, 마음과 몸처럼 늘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았다. 상대와 대조되고 조화하며 우주 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균형을 이루어 진행하는 진리를 깨달았다.

이러한 음양사상은 사람의 몸 안에 생리적 기능도 작은 우주와 같게 보아 건강관리와 질병치료에 한의학의 기본이 되었다. 마음에 기쁨과 슬픔, 용기와 무서움, 몸에 따듯함과 차가움, 습기와 건조, 음식과 분비물처럼 생리균형을 유지하는 때 건강하다. 균형을 잃으면 질병을 얻게 됨을 설명하였다.

우리 선조들의 지식이 더욱 발달하면서 다섯 손가락의 오행사상(五行思想)이 나타났다, 봄여름가을겨울의 계절을 동남서북 공간으로 나누고 땅은 사각형으로 생각하고 하늘은 원형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열 손가락의 십진법을 이해하는 동시에 육각형과 팔각형을 이해하여 여섯을 쪼개어 64괘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태극기는 중앙에 음과 양이 회전하는 원을 그리고 네 모퉁이에 팔괘 중에 사괘의 의미를 선택하여 그려졌다. 우리 문화에 오래된 종교철학의 상징을 보여준다. 도교의 경전인 주역은 자연을 64괘로 나누어 우주의 사물을 노래하는 시를 읊었다. 공자는 예수가 태어나기 600년 이전에 젊은 나이에 논어와 주역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동양의 오행사상은 삶의 환경을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누었다. 물 불 나무 쇠 흙으로, 눈에 보이는 사물의 색을 파란 빨간 하얀 까만 노란 색으로, 세상에 생명을 가진 것들을 물고기, 새, 네발짐승, 기는 짐승, 그리고 두발로 서는 사람, 등의 다섯으로 나누어서 고구려 고분의 청용 주작 백호 현무와 중앙에 위치한 황제는 이들 다섯 가지 목숨을 상징하였다. 수 만년 동안 그림그리기에 능숙한 선인들은 삼원색과 명암을 이미 이해하였다.

오행사상은 한의학에 결부되어 오장(五臟)은 간(肝), 심(心), 비(脾), 폐(肺), 신(腎)으로 지정하고 오관은 눈 혀 입 코 귀, 오체는 근육 맥 살 피부 뼈, 오분비는 땀 콧물, 눈물 오줌 뒤 등으로 나우어 마음의 오지(五志) 화냄 기쁨 근심 슬픔 무서움에 따라 연쇄적 상호관계로 유기적인 순환과 조화를 이루어 균형을 이루는 사람목숨의 기능을 설명했다.

하늘의 네 방향을 일곱으로 나누어 우주를 28등분으로 나누었다. 우주 안에서 해의길 황도와 달의 길 백도는 한 해에 12번 겹쳐서 12달이 정해지고 자축인묘로 시작되는 12지 상징적 동물들이 꾸며졌다. 바다에 용궁이 있다고 믿었기에 심청전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졌다. 하늘에 천궁은 항상 자리가 일정한 북극성을 왕으로 모시고 북두칠성과 주위에 별들은 왕위를 받들었다. 궁궐 옥좌 뒤에 오악도는 해와 달을 그리고 다섯 산봉우리를 그렸다. 음양오행은 우주를 상징하고 땅 위에 임금님은 우주를 다스린다는 뜻이며 동시에 우주는 임금님을 받든다는 뜻이다.

음과 양 그리고 오행을 합하면 일곱이 되는 숫자이고 우주를 상징한다. 삼국유사의 우리나라 건국신화에도 곰과 호랑이가 산신령에게 찾아와서 사람 되기를 청하였을 때 마늘과 쑥 을 먹으며 세 번의 일곱 날들을 굴속에 살라고 명한다. 곰은 말씀을 따라 21일을 인내하여 사람이 되고 우리나라 건국 시조 단군의 아버지가 된다. 불교에도 석가의 열반 후에 7날을 7번 지나서 49제를 모신다. 일곱 숫자는 성경에서 4백 30번이나 나타난다. 음력 7월 7석이면 소를 몰아 밭을 가는 견우와 베틀을 움직여 옷감을 짜는 직녀가 은하수에서 만난다.

하늘에 별의 움직임을 보고 많은 설화와 신화가 나타났다. 동양에서 시작된 신화와 설화는 수 만년 후에 빙하기가 지나서 나타난 유럽인들에게 아세아 상인들의 비단길을 따라 전해지고 그리스의 신화로 이어졌으리라. 인도의 역사기록이 보여주듯 그리스의 왕들이 인더스강에 찾아와 불교승려가 되어 삭발하고 동양의 문화를 배워가서 유럽의 문화가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의 석조 조각 예술에서 남 인도의 목조 조각 특색을 볼 수 있고 그리스의 초기 석조 건축 양식에서 동아세아의 목조 건축 양식을 불 수 있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한다. 세계 인류 혈연 역사에 5만 년 전에 한반도에 도착한 민족이 북미 대륙과 아세아 내륙으로 진출하면서 시작한 동아세아 문화와 문명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1만 5천 년 앞서 있음을 보여준다. 종교와 철학의 원점이 우리 선조의 지혜 속에 숨겨있을까.

태양계에 지구와 동행하는 다섯 별들을 오행의 이름으로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으로 부르고 일주일의 일곱 날 이름도 음양오행의 일곱 이름으로 일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로 세계의 모든 일류가 사용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에 사신도를 그린 음양오행의 철학과 과학이 전세계에 나타남을 보면, 우리 선인들이 금속기, 고인돌, 피라미드 등의 세계의 문화와 문명을 시작하고 세계의 다른 곳에 전해줬음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집안에서 사랑 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세상의 부모를 찾으려했다. 자연은 땅위에 사는 모든 목숨들이 서로 의존하고 함께 사는 큰 가정임을 알게 되고 자연의 부모 사랑을 찾아서 종교를 얻게 되었다. 경전을 만들어 생활의 기준을 세우고 지식의 힘으로 자연의 질서를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생존경쟁을 이겨낸 현대인류는 자연에 모든 목숨들을 지배하는 주인이 된 듯 생각하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 혹은 “사람은 조물주의 걸작”이라고 말하며 자연을 인간의 가정환경으로 개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우리 선조의 지혜를 다시 찾아, 이 땅에 모든 목숨들이 균형을 유지하며 조화를 이루어 사는 음양오행사상에 관한 이해는 더욱 절실하다. 인류는 이제 지구상에 다른 생명들의 생활영역을 침범하여 제한된 지구 표면에 자연을 파괴하는 주범이 되어가는 현실이다. 우리 선조의 음양오행으로 설명되는 종교와 과학의 원점을 되찾아서 자연과 인류가 균형을 이루는 움직임이 인류와 지구를 구원하는 미래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노력이 세계평화를 가져오는 시작이 되기도 하겠다.

My journey to America (25)

비단 날개

날개는 끝없이 날아갑니다. 알에서 나온 나뭇잎에 벌레는 집을 짓고 잠들고 나면 날개 편 나비 되어 날아가지요. 새들은 알에서 나와 날아가고 땅 위에서 걸어 다니다가 뛰어가던 사람이 바퀴 만들어 굴러가더니 날개를 만들어 어느 날 바람 위로 날아오르기에 이르렀답니다.

알에서 갓 부화한 애벌레 누에가 뽕나무 잎을 먹고 자라면 명주실로 집을 짓는 번데기 되고 누에고치에서 누에나방으로 날면 암 수컷 서로 찾아 알을 낳고 죽습니다. 약 40여 날들의 한평생을 사람에게 비단 옷감 남기고 떠나갑니다. 마치 알래스카 무지개송어가 강물의 흐름을 역행하여 상류에 이르면 알을 낳고 제 몸은 새끼들 먹이로 남긴 채 생을 마치이듯. 사람도 어른 되면 집을 짓고 자식 낳아 먹이 찾아와 살다가 자식들 자라면 자리를 비워주고 떠나갔기에 나이 30〜40살까지 삶이 보통이었데요.

동남아세아에서 쌀밥을 지어 먹고 누에고치 옷감을 만든 흔적은 7천 년 이전부터이라 하고 비단길을 내어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이집트에 비단을 전해줌은 3천 년 이전부터라고 고고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와 로마가 값비싼 비단 옷감 사치에 망했다고 이야기도 하고 비단길 따라 달려간 훈족의 침략으로 망했다고도 말합니다. 터키사람들은 자신들이 훈족의 자손이기에 고구려의 형제라고 말하기도 한답니다.

이만하면 고인돌 세우던 우리 선조가 이집트에 돌무덤 짓기 시작했다는 말도 믿어 볼 만한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몽골이 비단길 따라 단숨에 아세아 대륙과 유럽을 정복하고 2백 년을 통치하여 중세기의 어두운 잠에서 유럽 사람들을 깨워 현대 역사가 시작되었음도 이해가 됩니다. 만주 들판에서 말을 달리고 석탄불로 녹여 만든 철기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다가 총알은 화살보다 강하고 비행기는 탱크 위를 날아서 원자폭탄까지 만들기에 이르렀지요.

하지만 솔개가 30년 살고 나면 바위에 둥지 트고 낡은 부리를 쪼아 부수고 새부리가 자라면 먼저 헌 발톱을 뽑고 다음은 헐린 날개깃을 하나하나 뽑아내어 새 날개를 얻어 40년을 더 산다고 합니다. 사람도 의학이 발달하여 100세 시대를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지구는 사람의 발자국에 짓밟혀 공해로 더럽혀지고 버림받은 별이 되어가는 가요?

오하이오주에서 자전거 고쳐 팔던 라이트 형제가 날개를 만들어 모래사장 위를 날아가게 된 날부터 비행기 날개는 하늘 길에 넘쳤습니다. 아세아에서 유럽까지 말을 타고 누비던 비단길을 사람들의 날개가 무지개송어처럼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여 역사의 상류로 되돌아가는 건가요. 불을 뿜는 날개는 달나라에 이르고 화성 별나라까지도 도착하였습니다. 비단길의 세계 역사는 비단 날개를 타고 암 수컷 누에나방이 서로 찾아가듯 우리 인류는 새 보금자리 찾아서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습니다. 컴퓨터 심장 뛰는 비단 날개는 끝없는 하늘로 훨훨 높이높이 날아가고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사업은 지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첫째 세계 역사에 동아세아 역사 지식을 알려주고 싶다, 둘째 현대 인류가 과학과 종교를 혼돈한 마음으로 이웃을 괴롭히고 목숨에 해 끼치는 생각에서 벗어나오도록 도와주고 싶다. 셋째 현대 인류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다. 이런 인생의 목적을 새우고 은퇴하면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제목이 ‘A common sense of human civilization‘이다.

서문을 소개하면 내가 세계 건축 문화사를 공부하면서 한 순간 나름대로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문화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 진화하는 현상이다.

유전자를 통해 생명을 바라보면, 태초부터 복제하는 능력을 가진 화학 물질이 있어 DNA 라고 부른다. 유전물질이 비슷한 물질을 계속 복제하는 능력이다. 그 능력이 생명을 만들어내서 오늘날의 생명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박테리아를 만들다가 개구리를 만들다가 원숭이를 만들다가 사람을 만들면서 복제를 지금껏 계속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생명과 그 생명이 경영하는 문화는 한계성도 지니지만, 영속성을 지녔다.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 지구촌에 존재하는 이 많은 문화를 따지고 보면 전부 조상이 하나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전부 연결돼 있다. 우리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생명과 그들의 문화가 모두 거슬러 올라가면 한집안에서 왔다. 생명은 태초에 하나로부터 여러 갈래로 갈려 나온 것이다. 생명이 운영하는 문화도 일원성을 지녔다. 찰스 다윈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큰 교훈 중 하나다.

지중해의 석조건축이 있기 이전에 목조건축과 석굴 조각이 있었고 석조 피라미드가 있기 이전에 흙으로 지은 피라미드(mound)와 작은 돌을 끌어와 고인돌 신전(dolmen temple)을 이해함은 현대인의 상식이다. 그리스의 왕들이 중국과 인도를 찾아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아세아 종교와 문화를 배워가서 지중해 종교와 문화가 부흥하게 되었음은 중국과 인도의 역사기록에 있지만 유럽의 학자들은 백인들의 자존심을 우려하여 거론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인간이 자행하고 있는 지구의 환경 파괴는 곧 생명 파괴가 결국 가족을 죽이는 시작이다.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권리가 전해졌을까, 따지고 보면 인간은 우리 생명 가족 중에 제일 막내둥이다. 인간을 한사람의 생명으로 보고 그 나이가 얼마 되는지 앞으로 얼마 남았는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지구 위에 막내둥이 생명의 종말이 어떻게 끝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인류 혈연 역사에 가장 먼저 나타난 민족인 동아세아 민족은 그들의 자손이 북남미 대륙으로 이어지고 내륙으로 만주, 몽골, 티베트, 동유럽으로 진출하는 동안 인류의 문화와 문명 발달에 어떠한 공헌은 하였는지 이야기 하고 싶다.

그동안 보고 느낀 건축가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아본다.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고 개인의 수필이기에 정보의 근거를 밝히지 않았고 사진과 그림도 구글에 올려 알려진 것들에서 퍼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가려진 사실을 밝혀 세상에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부분적인 표절의 의심을 일으킬 위험을 감수함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1978년 가을 내가 과테말라 국립병원을 설계하던 중에 중미 유카탄 반도의 티칼문화 유적지를 방문하였다. 동아세아의 한자(漢字)와 비슷한 모습을 지구의 반대편에서 찾아보는 느낌이었다. 그 때부터 35년 동안 동아세아의 문화사를 공부하면서 세계사와 비교하게 되고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대학교 졸업논문에 한국 전통건축의 특성에 관한 보고를 하는 계기로 대한민국 국보 제 일호, 서울의 남대문(숭례문)의 보수 공사장에서 도편수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런 후에 2008년 2월 10일에 숭례문은 불에 탔다. 내 개인 소장 기록을 동원하여 숭례문 복구사업을 도왔기에 내 건축인생의 처음이고 마지막 프로젝트가 숭례문이 되었다. 내 젊은 나이에 문교부 문화재 건축 전문위원으로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동아세아 건축을 특강하는 때부터 나는 내가 가진 역사에 관한 취미가 무르익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많은 나라의 지식인들 사이에 ‘뿌리’를 찾는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008년부터 시작된 new genetic evidence reveals clues to the first human journeys는 우리의 혈연학 지식에 획기적인 정보를 제공했고 national geography에 대대적으로 홍보됨으로서 세계 각 민족의 DNA에 관한 새로운 견해가 시작되었다. 최근에 동아세아의 한국과 중국의 경제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고고학계의 발굴과 발견도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기록에만 의존해오던 이론적 역사형식에서 벗어나 혈연학과 고고학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까지 발표된 세계사는 동양사에 관한 결핍된 지식에 근거하였기에 이제는 새로운 지식에 근거하는 새로운 상식(common sense)를 찾아야하는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다.

만리장성과 경향대운하, 그리고 실크로드가 시작하는 동아세아의 한반도 주위에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하였다. 신석기시대 석탄의 발견으로 금속문화의 시작을 비롯하여 그리스의 석조건축 양식에 동아시아 목조건축 양식을 보았고 아프리카와 멕시코 피라미드가 태어나고 자라난 과정을 이곳 동아세아에서 볼 수 있었다. 모헨조다로의 도시계획이 동아세아의 도시계획과 공동성을 보고 세계 궁성과 사찰들의 가람(site plan)이 이곳 동아세아에서 형성됨을 보았다.

아프리카를 떠난 현대인류가 가장 일찍 정착생활을 시작한 동남아세아에서 꾸준히 인구증가를 지속해올 수 있음은 음식이 풍부하고 기후가 따듯한 인류의 온상(nursery)을 제공해준 동남아세아의 자연환경이다.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 고지에서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흘러내리는 강물은 현대인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기에 15억 인구의 중국과 12억의 인구의 인도 사이에 펼쳐진 자연의 신비는 인류의 문화와 문명의 뿌리를 품고 있음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하여 해변을 따라 이주해온 현대인류가 동아세아에 이르러 처음으로 죽음의 계절인 겨울 기후에 도전하면서 야생적인 생활에서 인위적인 생활로 진화되고 드디어 자연을 극복하는 내륙생활에 적응한 곳이 동아세아인 듯하다. 자연을 극복하는 훈련(discipline)과 능력으로 현대인류의 종교, 예술, 과학이 발생한다. 문화와 문명의 형성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듯하다. 내륙으로 침투하여 지금의 silkroad를 개척하여 지중해 지역과 동유럽에 이르고, 과거에 이미 걸어온 아프리카에서 동아세아에 이르는 해변 길을 계속해서 태평양 연안을 따라 북남미 대륙으로 진출하였다.

현대 인류의 현대 역사는 동아세아의 칭기스칸이 유럽을 정복하고 동아세아 문화를 유럽에 전해주면서 시작하였다. 현대역사는 총과 대포를 구비한 유럽인이 활을 쏘는 아세아인의 영토를 빼앗고 대영제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세아인의 대륙에 유럽인이 세운 새로운 국가, 미국은 2개의 세계 대전을 겪고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주도해 왔다. 인류는 아직도 미개하기에 600만 유태인의 학살을 막지 못했고 종교전쟁을 멈추지 못해 살인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동아세아의 2,000만의 북한 인민을 김씨 가족의 독제에서 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을 혼동하며 자신의 종교를 위하여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현대 인류의 미성숙함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영성, 감성, 지성의 혼동은 인류의 미숙한 모습이며 종교에서 오는 세계적 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류의 인구폭발은 계속되어 자연은 심각하게 오염되어 앞으로 50년 동안에 지금 인류와 함께 생존하는 생명의 50%가 사라진다고 예측한다.

역사를 이야기함에는 과거를 돌이켜보고 현재 인류가 어디에 오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 생각해봄이 현대인의 상식(common sense)이 아닐까. 나는 인류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비밀을 어머니의 몸에서 보았다. 어머니의 배 속에 잘 숨겨온 비밀 속에 아기가 자라나는 과정을 보고 인류의 진화과정을 볼 수 있었다. 인류의 역사를 한사람의 생애에 비교하게 되고 우리가 어느 나이에 있으며 앞으로의 미래는 어떠한 세계의 모습인지 보게 되어 독자와 나누고 싶다.

이 책의 결론에서는 성경에 400여 번이나 나타나는 7숫자는 동아세아 신석기시대의 천체종교에 북극성을 받드는 천궁을 믿어서 북두칠성에서 시작하여 음양과 오행을 합한 숫자로 일월화수목금토의 천지가 완성되는 숫자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지중해의 석조건축이 있기 이전에 목조건축과 석굴 조각이 있었고 석조 피라미드가 있기 이전에 흙으로 지은 피라미드(mound)와 작은 돌을 끌어와 고인돌 신전(dolmen temple)이 있었음을 이해함은 현대인의 상식임을 말하고 있다.

목조건축과 석굴조각의 시작과 유물이 동남아세아에 있고 흙으로 지은 피라미드와 고인돌 신전이 한반도 주위의 동아세아에 있음을 보면 그 유래가 선명해진다. 그리스의 왕들이 중국과 인도를 찾아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아세아 종교와 문화를 배워가서 지중해 종교와 문화가 부흥하게 되었음은 중국과 인도의 역사기록을 보면 서남아세아의 지중해 문화는 동남아세아의 후손임을 이해가게 된다. 마치 일본의 문화가 한반도에서 이전된 사실을 감추려는 정치적 조작이나 벡인 우월사상에서 지중해문화가 동남아세아 문화보다 먼저였다는 착각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래토가 이야기한 아틀란티스가 곧 동아세아였음을 이해하고 동아세아에서 시작한 인류의 문화와 문명은 서쪽으로 움직여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동아세로 돌아오는 현대역사에서 미래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머지않아 더욱 성숙해진 인류는 우주인 자식을 기르기 시작하는 살기 좋은 가정생활의 시대를 보게 될 것이다.

현대 인류의 현대 역사는 동아세아의 칭기스칸이 유럽을 정복하고 동아세아 문화를 유럽에 전해주면서 시작하였다. 현대역사는 총과 대포를 구비한 유럽인이 활을 쏘는 아세아인의 영토를 빼앗고 대영제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세아인의 대륙에 유럽인이 세운 새로운 국가, 미국은 2개의 세계 대전을 겪고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주도해 왔다. 인류는 아직도 미개하기에 600만 유태인의 학살을 막지 못했고 종교전쟁을 멈추지 못해 살인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동아세아의 2,000만의 북한 인민을 김씨 가족의 독제에서 구하지 못하고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을 혼동하며 자신의 종교를 위하여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현대 인류의 미성숙함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영성, 감성, 지성의 혼동은 인류의 미숙한 모습이며 종교에서 오는 세계적 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류의 인구폭발은 계속되어 자연은 심각하게 오염되어 앞으로 50년 동안에 지금 인류와 함께 생존하는 생명의 50%가 사라진다고 예측한다.

책의 내용에 남의 글을 허락받지 않고 인용한 부분이 있고 구글에서 퍼온 부분과 사진들로 많다. 짧은 시간에 목적을 이루려는 조급한 마음이 조금은 무리한 듯 하지만 이해하고 양해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내용을 요약해보면 크게 3장으로 나누어 현대 인류의 보편적 역사 이야기를 하고 동아세아 역사를 보여준 다음에 인류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제1장 현대 인류의 문화와 문명

혈연학적 지놈(Genome)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인류가 10,000년 전경에 아프리카에서 시작하여 50,000년 전경에 동남아세아에 이렀음을 설명한다. 고고학적 발굴 자료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40,000 년 전에 북미 대륙에 이렀음을 보여준다. 현대인류는 한반도 주위에서 처음으로 겨울철에 도전하여 50,000년 전경에 자연을 극복하고 만주지방에서 내륙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듯하다. (M130 & M174) 만주, 몽골, 티베트, 동유럽으로 이주해가면서 35,000년 전경에 현대 인류가 유라시아에 분산했음을 보여준다.

현대 인류의 혈연 중에 가장 일찍 나타나 아프리카에서 동아세아에 이르고 그들의 후손이 북남미 대륙으로 진출하고 아세아 내륙으로 만주, 몽골, 티베트, 동유럽까지 진출하는 동안에 동아세아의 석기문화가 고인돌과 피라미드를 새우고 천문 지식을 쌓으며 종교 발달에 어떤 공헌을 하였는지 추적하고 싶다.

1982년에 적봉시 흥룡와촌에서 옥 귀걸이를 비롯해 수십 점의 옥기들이 발굴되어 BC6,200경의 유물들로 판명되어 흥룡와 문화로 소개되었으며 한국에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패총에서 발굴된 것들과 같다. 암록강변 수암지역에 매장된 옥돌의 질이라고 한다. 요하 주위에서 발굴된 사해문화, 부하문화, 보조구문화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홍산문화(BC4500-BC3000)로 결집되어 요하문명을 대표한다. 홍산문화의 특징은 섬세한 토기문화를 비롯하여 금속도구로 백두산에서 가져온 옥돌을 조각했고 금속도구로 큰 바위를 필요한 크기와 모양으로 깨어서 멀리 끌어와 층단식 적석총 피라미드를 짓고 작고 섬세한 석관을 만들어 시신을 안장했다. 홍산문화의 옥돌조각은 황하문명보다 1000년을 앞섰고 층단식 석조 피라미드는 이집트보다 2000년을 앞섰다.

유목민인 훈(흉노)족은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해 남부 사이베리아를 거처 중앙아시아 초원을 따라 대이동을 시작해 초원을 따라 북상해서 서쪽으로 이동했으리라. 미국에서 제작한 Atilla, The King of the Babarian 에서 훈족(흉노)의 대이동이 한반도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해와 추측은 충분하다. 독일방송에서 제작한 훈족 추적 다큐 <역사의 비밀> 제작에서 베린토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고증으로 한반도 남단 가야 지방에서 출토된 청동솥 유물과 훈족(흉노)이 서쪽으로 이동하며 거쳐 간 지역에서 발굴된 훈족(흉노)의 청동솥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목차에서 보여주는혈연학적 동아세아의 위치, 문화와 문명의 시작, 미대륙 원주민의 생활풍습에 동아세아 풍습과 공통성, 언어의 발달, 문자의 발달, 한반도에 고구려 선조와 백제의 선조, 동아세아의 도시계획, 소와 말이 끌어가는 수레, 삽살개 모양과 사자 모양, 생존경쟁에서 문화와 문명으로,

제2장 동아세아의 문화와 문명

한반도의 신석기시대에 고인돌(Dolmen)문화는 봉토(Mounnd)문화와 결합하여 만주에 층단식 피라미드 건설을 시작하였으며 중미와 서남아세아의 나일강 유역까지 피라미드 건설을 전하는 합리적인 상상을 하게 한다. 인류문화의 흐름은 생물의 목숨처럼 연속성을 유지한 결과이지 지역적인 돌연변이로 나타나지 않는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농사짓는 해양민족이 낮에는 그림자의 위치를 보고 밤에는 북극성 주위에 북두칠성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알아차린 듯하다. 옛사람들은 지상에 왕궁이 있듯이 바다 밑에는 용궁이 있고 하늘에는 천궁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기에 천궁에 북극성은 왕이요, 북두칠성은 7신하로 생각하였다. “7”이라는 숫자를 가장 성스러운 숫자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동아세아의 천체 종교에서 “7“의 의미가 여러모로 적용되기 시작한다. 칠성제, 칠성 바위, 칠성깃발—–

칭기즈칸이 기마병을 대리고 달리던 대륙횡단의 길은 선조들 훈족이 이미 로마를 멸망시킬 때 열어놓은 큰길이었기에 5년 동안에 서남아세아와 동유럽을 장악하는 거사를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부친의 거사를 이어받아 유럽에 돌아온 오고다이칸은 1230년에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백인들의 근거지인 남부유럽을 공략하고 1236년에 6년 동안 동유럽일대를 샅샅이 노략질을 하였다. 같은때 티벹, 월남, 동인도를 공략하였다. 세계의 현대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한다.

징기스칸이 서유럽민족들을 어두운 중세기에서 잠을 깨우고 유럽인들이 동아세아인들의 문화, 문명, 지식을 배우고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일차 세계대전과 이차 대전을 통하여 세계의 나라들은 가까워지고 지구는 자꾸만 좁혀졌다. 인류의 횡폭은 자연동물의 생활권을 빼앗고 지구의 공해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목차에서 보여주는 내용을 보면, 고인돌 문화, 피라미드의 진화와 분포, 중국의 동북공정, 토기와 금속 도구의 발전, 음양오행과 ‘7’의 날짜, 동아세아의 한의학과 음양오행, 한의학과 음양, 한의학과 오행, 오행과 신체의 기관, 신체의 오행구분, 오행과 사물의 속성, 음양오행과 자연건강, 침술, 종교의 발생과 분포, 훈족이야기, 동아세아의 석굴, 만리장성과 경항대운하, 비단길(Silkroad), 미인들이 많이 태어나는 산서성, 동아세아의 과학과 발명, 칭기즈칸의 유럽 정복.

제 3장 이 땅에 인류의 미래

세계의 종교가 동아세아의 도교에서 시작하여 서유럽의 개신교에 이르기까지 2000년의 시간을 거쳐 동아세아 문화의 파도가 서유럽에 이르렀다. 서유럽의 개신교는 미국에 전해져 오늘의 기독교와 회교도의 분쟁이 이어지고 한국은 미국의 개신교 선교에 앞서고 있다.

어머니의 배 속에 간직된 사람이 태어나는 비밀은 지구상에 인류의 과거를 이해하는 해답이다. 하나의 난자가 수억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찾아온 정자를 받아드려 복합세포가 되고 미생물 모습에서 작은 벌래 모양이 된다. 물고기 모양, 꼬리와 네발달린 파충류 모양, 그리고 아기 모양이 되어 체액에 잠겨 헤엄치다 어머니 몸 밖으로 나와 공기를 처음 마시며 소리쳐 운다. 몸을 비틀어 움직이다. 네발로 기어 다니다 드디어 두발로 서서 걸어간다. 이것이 과거에 인류의 모습이었다. 이것이 진화론이고 과학이며 현대인의 상식이다.

이러한 시점에 인류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고 인류의 미래를 생각함은 필연의 길을 찾는 노력이다. 그 방법은 인류의 역사를 한사람의 생애에 비유하여 생각하는 방법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탄생한 이래 신에 의지하고 자연과 종교에 부모처럼 집착해 성장해오다가 이제는 “신은 죽었다”고 외치며 부모에 반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현대세계의 현상은 인류의 성장에 사춘기에 겪는 정서의 변화현상이며 세계인구의 급성장은 사춘기의 육체적 성장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현대세계가 성장된 인류 성인의 모습을 보이기에 이른다. 혈액연구와 체외임신기술이 발달하여 개조인간으로 새로운 우주인을 잉태하고 산출하게 되는 가능성은 성숙한 사춘기의 출산능력을 보여준다. 21세기에 들어 인류의 생활은 우주인을 출산하고 기르는 인류 가정생활에 진입하게 되고 지구상에 인류생활에 가장 행복한 기간을 가져올 듯하다.

목차에서 보는 내용을 보면, 인류 역사와 인류의 나이, 목숨 가진 것들의 세계, 느낌 있는 것들의 세계, 생각하는 것들의 세계, 3가지 언어, 사춘기에 겪는 이성 감성 영성의 혼란, 인류의 역사를 한사람의 생애에 비교하면, 현대와 미래의 세계, 그리고 결론으로 책을 마감한다. 이 책은 이 시대에 태어난 내 인생의 사명으로 여기고 지난 수년 동안 심혈을 기우렸다. 책이 전자책과 인쇄된 출판물 되어 나오면 많이 읽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나의 인생 이야기, 아메리칸 드림 50년은 여기서 마치려고 한다. 지금까지 읽혀진 동창회지의 내용과 여기에서 소개한 역사수필 책의 내용은 yongwanchoi.com 웨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여기까지 여정을 함께한 동문들과 가족 및 친구들에게 그리고 서울대학 미주 동창회지를 운영해오 회장단, 논설위원, 이기준 주간에게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 간절하다. 앞으로 계속해서 시, 수필, 논설, 등을 통하여 동문들과의 우정을 나누어가도록 노력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