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복원시 상세자료 잘 보존돼, 큰 도움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아침((한국 일요일 밤) 숭례문 불길은 우리 민족의 혼이 어두운 서울 하늘에 횃불처럼 크게 타고 있었다. 육백년 도읍을 지켜온 수문장이 제 몸을 불사르고 잠들려는 우리의 문화의식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아침 교회에 가려던 나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길이 없어 티브이에 엉겨 붙어 있던 중에 펑 소리와 함께 터지는 산소 절단재 투척에 검은 연기는 한순간에 흰 연기로 바꿔지고 화면이 보여주는 마지막 하얀 연기 속에서 내 마음은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1961년 7월 건축과 졸업논문 심사에 나의 한국건축양식에 관한 발표는 일제 36년 동안 우리문화를 공부하는 일이 금지되었기에 당시 우리세대에 선구적인 노력으로 교수님들의 주목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 일본건축학자 관야정의 조선건축 책자와 고유섭 선생의 고고학 자료를 연구하며 준비되었다. 대부분 동기졸업생들은 4월에 이미 졸업하였고 나는 군복무 기간이 끼어서 9월에 졸업하게 되었다.

김형걸 건축과장님이 심사하였고 졸업반 주임교수 김정수 교수는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주관하는 숭례문 복원공사의 건축 자문위원장이었다. 나는 곧 7월에 시작되는 현장사무소에 출근하여 서울대, 한양대, 홍익대, 선배들과 숭례문 실측에 종사하였다. 한편 현장에서 일하는 목수들과 석수들을 지휘하는 도편수 조원재 선생은 전통건축의 살아있는 증인으로 현장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를 보조하는 이광규 목수 부편수와 김천석 석수 부편수가 한국에 실존하는 최고의 전통건축 기술진을 이루고 있었다.

숭례문은 이성계가 고려의 국사에 종지부를 찍고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옮겨 사방에 사대문을 지어 성곽을 두르고 궁궐을 새웠다. 태조 5년 (1396)에 숭례문을 도읍의 관문 곧 이조왕국의 정문으로 건립하여 2년 후에 완성하였다. 세종 29년(1447)에 보수되었음이 실록에 기록 되었으나 성종 10년(1479)에 보수된 기록은 공사도중에 발견된 기록에 의해서 알게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고종 때에 보수했음이 논의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직전(1907)에 문루 양쪽 성곽을 헐어내려 큰길을 내었을 때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되었으나 625한국전쟁에 포탄을 맞아 부분적인 손상이 있었다가 문루와 석축의 노화현상이 심하여 군사 정부의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결단을 하여 1961년에 중수공사를 감행했다.

우리나라 건축양식은 성곽건축과 사찰건축에 가장 잘 보존되었으며 한옥의 건축전통도 궁궐건축에 잘 보존되어 있다. 목조건축양식의 변화는 중국의 당송시대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전기양식이 있고 고려 때 원나라와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발전된 후기양식으로 나누어진다. 현존 목조 건축물들 중에 전기양식은 백제에서 일본에 건너간 대부분의 문화재 건축물들과 중국 산서성에 도교사찰 진사의 건축물들과 당나라의 도읍 서안에 산재한다. 우리나라 전기목조건축양식은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볼 수 있으며 부분적인 양식이 사찰 건축에 산재한다.

숭례문 건축양식은 우리나라 후기 목조건축양식 중에 가장 웅장하고 궁궐과 성곽건축물들 중에 가장 오래 된 전통양식이다.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기둥 상부를 들보로 연결하고 기둥과 지붕구조사이에 수많은 첨차와 소로를 축적하여 만들어진 공포 구조물을 구비한 다포양식이다. 다포의 기능은 지붕의 무게를 고르게 분배하여 처마의 곡선이 아름답게 조성되고 오래토록 유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문루 하부에 석축은 거대한 화강암을 사각방형으로 다듬어 이를 맞추어 높게 쌓고 무지개모양 홍예를 짓고 관문 통로를 이루었으며 철갑문을 달았다. 성문이 열리고 닫는 시간을 종을 처서 알렸다. 색깔 찬란한 단청은 붉은 색과 초록의 두색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문루 중앙에 걸린 현판은 양녕대군의 친필이라고 전해지며 세워 쓰인 의미를 관악산 풍수에 연결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성곽건축 건설기록은 화성(수원) 성역의괘에 정확하고 정밀하게 기록되었다.

1961년 7월에 시작된 서울시 산하의 공사 관리는 중단되고 1962년 3월부터 문교부 문화재 위원과 국립박물관의 협조로 진행되었다. 필자는 쉬지 않고 조원재 도편수와 새로 부임한 김정기 감독을 보조하며 해체되는 모든 부재를 하나하나 실측하고 기록하였다. 수천 개에 달하는 모든 숭례문 건축부재들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원형을 찾고 그 모든 기록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조원재 도편수 댁에 투숙하여 도편수와 함께 출퇴근하며 사라져가는 전통건축기술을 이해하고 용어를 기록하여 후에 건축학계에 전해줄 수 있도록 기록하였다. 동기동창 여상현과 장석진의 도움을 받으며 실측도와 복원도를 공사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작성하였다.

제도와 설계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추녀와 처마의 곡선을 찾아서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목조건축은 건축부제들이 지붕위에 개와를 비롯한 무거운 하중을 받아 차츰 휘어지게 된다. 목조 건축물에 처마곡선은 필연의 결과이다. 아세아의 남방건축물들은 처마곡선이 크고 북방건축물들은 비교적 작다. 시대적으로 고대건축물은 처마곡선이 경직하고 후대에 올수록 곡선이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숭례문의 추녀모양과 그 밑에 귀포의 모양은 웅장하며 우아한 곡선으로 각 부제들이 그 기능에 맞는 예술적 표현으로 역사의 향기가 가득하다. 지붕에서 기와를 들어 내리면 크기를 기록하고 문양을 탁본하여 재사용여부를 결정하였다. 우리 선조들이 수천 년 동안 대대로 전수해온 정교하고 안정된 예술과 기술이 숭례문의 모든 부제 하나하나에 가득하여 감탄을 멈출 길이 없었다.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시민들의 궁금함을 돕기 위하여 당시 일간 신문에 보도하기도 했으며 당시 손으로 쓴 원고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공사도중에 발굴된 기록과 유물들은 앞으로고 계속해서 연구할 의문들을 남겼다. 예를 들면 기록을 남기지 않고 서두러 진행된 보수공사가 이조후기 어느 때였을지. 이태조 때 건축양식이 세종 성종 때에 변조되지 않았는지. 지금의 우진각 지붕이 원래는 팔작지붕 이었는지. 많은 의문들이 숨겨있는 국보 일호 건축물 안에 실마리를 찾아서 규명하는 과정이 우리가 우리의 근원을 찾는 학구적 임무이며 우리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노력으로 계속되기를 바란다.

1963년 5월 14일 준공식에 최봉주 현장사무소장, 김정기 감독관, 조원재 도편수, 최용완 재도사, 4 사람은 윤태일 서울특별시장에게서 중수공사 공로 표창장과 금일봉을 받았다. 그때 전남 광주에 사시는 부모님이 참석하셨다. 그 후에 윤천주 문교부 장관은 나를 문교부 건축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위촉하였고 당시 철도청 산하에 공무원 교육원에서 한국문화사와 건축사 강사로 일하며 25세 젊은 나이에 바쁘게 연구하며 종사하였다.

교육 공무원인 아버님도 교육원에 오셔서 교육과정을 거치는 중에 내 강의를 듣고 가셨다. 김정수 교수는 연세대학교 이공대 학장으로 부임하시고 나는 건축과 졸업반에게 특강을 하였다. 당시 대학원 과정이 설치되어 이경회 학생과 주남철 학생이 한국건축 관계논문을 준비 중이었다. 윤장섭교수와 현지답사하며 함께 연구했다.

1966년에 모교와 자매결연한 미네소타주립대학에 대학원과정을 위해 서두러 도미할 때에 숭례문 자료들은 부모님 댁에 남겨 두었다. 수년 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살림을 치우실 때 숭례문 자료들을 안전하게 보관하셨고 내가 미국에 온지 20년 후에 이민 오실 때 숭례문 모든 자료들을 고스란히 가져오셨다. 그 후에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다시 20년 동안 숭례문의 모든 자료를 보관할 수 있었음은 어머님의 정성이였다고 감사해한다. 숭례문은 불에 탔어도 사라진 부재들의 기록이 살아 있기에 불에 타지 않은 아래층을 회복하고 여기에 보관된 기록에 따라 위층이 회복되면 숭례문은 다시 국보 일호로 화상을 회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6백년의 역사가 다시 후세에게 전해지게 된다.

2010년 2월 10일 이건무 문화재청장, 최종덕 건축과장, 신응수 대목장, 그리고 관여 기관장들이 참석하여 복구공사 착공식이 열렸고 화재 잔여부분 해체에 착수하였다. 여기까지 발굴 및 조사연구를 기반으로 드디어 해체실측이 진행된다. 문화재청 숭례문 복구단체는 복구공사팀, 실측고증팀, 행정지원팀, 3팀으로 구성되고 복구자문단은 고증분과, 기술분과, 방재분과, 3 자문위원팀으로 구성되었다. 2010년에 해체실측을 하고 2011년에 설계하는 동안 건축 재료를 준비하여 2012년에 건립하여 준공할 계획으로 보인다.

신응수 도편수는 2010년 3월 5일 KBS 아침마당에 건축 팀을 소개하였고 도편수 본인이 초보자 목수로 1962년에 이광규 부편수의 조수로 숭례문 공사에 참여한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당시 조원재 도편수와 일하는 최용완 재도사를 도와주기도 했고 목수에게 도면을 읽는 일이 필연으로 느꼈을 때 최용완 재도사가 본인을 남대문 시장에 데려가서 9가지재도기 세트와 재도기구를 사주며 재도실의 재도판에서 실습하도록 해준 최선배의 친절에 지금도 고마운 마음 잊지 못한다며 다시 숭례문에서 함께 일하게 되는 인연을 기뻐하였다. 나는 아침마당 방송을 통해 우리가 우리문화를 인식하고 세계에 알리는 일이 우리 앞에 직면한 중대한 과제임을 강조했다.

숭례문 해체실측이 끝나고 상부에 불타고 없어진 부분의 자료가 필요할 때에 내가 간직한 모든 자료들을 동원하여 복구에 참석하여 고증분과와 기술 분과위원의 기능을 다하려고한다. 그리고 모든 자료들은 기념관에 기증하여 건축 후배들이 계속해서 연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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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그슬린 얼굴

최용완

불에 탄 상처를 가리개로 두른 채
병상에 누어
찾아온 나를 껴안고 흐느낀다

36년 동안 몸을 빼앗기고 마음이 짓밟혔던 고통
해방되어 찢겨진 옷깃을 여미었었다

반세기 지나도록
정치에 경제에 바쁜 사람들 구경하는 동안
빼앗긴 역사
잃어버린 문화
흩어진 선조의 혼을
지켜 돌보아 온 외로운 숭례문

육백년 옛 도읍의 수문장이 제 몸을 불사르고
훨훨 타는 불길 속에
피 끓는 선조들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애통함이여

불에 그슬린 임의 얼굴을 더듬어
가족의 넋을 다시 찾으려.
그 앞에 엎드려 통곡하는 경복궁의 눈물

최용완(Bryan Choi)
在美 건축가/숭례문 복구단 고증.기술 분과위원

-71세, 전남 순천 생
-1961년 서울공대 건축과 졸업
-63년 국보 제1호 서울 남대문 중수공사 설계사
-64 년 문교부 문화재 전문위원
-71년 美 미네소타주립대 대학원 졸업
-82 년– 05년 오하이오주에서 건축회사 경영(메이슨리 설계상 등 다수 건축 설계상과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 및 공로상 수상)/데이튼 신크레어대 강사,데이튼 한인회장 .이사장, 美 연방인권위 오하이오주 위원 등 역임
-美 로스앤젤리스 식목원 한국전통정원건립추진위원(現)
-03년 저서 “새로운 눈에 보이는 세계”(2006)
-서울 숭례문 복구단 고증및 기술 분과위원(現)
-이메일: bryanchoi@cox.net

http://blog.joins.com/naki/11583741
http://www.younwooforu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