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칭기즈칸이 대려온 현대 인류의 사춘기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세계를 정복한 칭기즈칸은 초원을 달리는 늑대라고 정복당한 모든 나라가 무서워했다. 중세기 암흑시대에서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지구의 반대편에 동아세아를 알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Divisament dou monde)에 기록된 것처럼 1274년 원(元)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여름 궁전이 있는 상도(上都 네이멍구자치구 남부)에 도착했다. 17년 간 원나라에 머물면서 그 수도 대도(大都 베이징)는 물론, 산시(山西), 산시(陝西), 쓰촨(四川), 윈난(雲南),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장쑤(江蘇), 저장(浙江), 푸젠(福建) 지역들을 여행했다. 그는 양저우(揚州)에서 관리로 일하는 중에 공주의 호송단에 참가하여 수마트라, 말레이, 스리랑카, 인도 서남부 말라바르를 거쳐 1295년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동방의 막대한 부유와 풍요의 이야기는 유럽인들의 호기심과 탐험욕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오랜 세월을 지나며 해안의 농경문화에서 시작하여 내륙의 유목문화로 변하였다가 다시 두개의 문화가 결집하여 융합된 동아세아의 문화는 사계절에 적응하여 완벽한 문화와 문명을 이루었다. 당나라(AD618-907)의 동아세아문화는 편리한 비단길을 따라 서남아세아와 유럽에 지출하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대륙에까지 연결되는 세계대제국의 문화와 문명이었다. 당나라가 300년을 집권한 후에 동아세아는 북에는 만주족이 지배하는 금나라, 그리고 남에는 송나라 양자강 문화가 성장하였다. 북에서 성장해온 몽골국은 같은 동이족의 후손 금나라와 경쟁을 해오다가 나머지 만주지역과 티벳트지역에 같은 혈연의 민족들을 통합하여 드디어 동아세아 세력이 세계를 정복하는 역사에 나선다.

1167년에 태무진(칭기즈칸)이 태어난 몽골사회는 유목사회의 인구증가에 따라 음식을 생산하는 유목토지를 확보하기위한 끊임없는 전쟁과 고난의 시기였다. 같은 혈연의 만주민족 이웃나라인 동쪽에 금나라와 남쪽에 우이거국의 압력을 계속해서 받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풍운아로 자라난 태무진은 군사들을 모아 경쟁에서 승리하여 정복하고 소유하는 즐거움을 길렀다. 30대 나이에 몽골국을 통일하고 42살되는해인 1209년에 황하 상류에 옛 당나라의 부귀를 포함하고 있는 우이거국을 정복하고 재원을 확보한다.

1215년에 황하 하류에까지 옛 한나라의 부귀를 포함하는 금나라를 정복하여 언어가 통하는 삼국을 통합한 몽골대국을 확립하였다. 곧 이어서 1918년에 옛 페르시아 문화지역인 파키스탄지역과 카스피안해지역 동유럽에 침공해 들어갔다. 계속해서 1223년에 옛 로마의 영역인 흑해주위를 정벌하고 군사력은 막강한 무기와 노동력을 구비한 최강의 능력을 구비하였다. 지도채제를 아들과 친족들에게 인계하면서 건강이 약해지는 동안 태무진은 지금의 몽골고향 카라코럼에 돌아와 향년 60세 되는 해 1227년에 동아세아 만주지역에서 동유럽 흑해지역에 이르는 대제국을 세워 아들 오고다이칸과 친족들에게 맏기고 세상을 떠났다.

칭기즈칸이 기마병을 대리고 달리던 대륙횡단의 길은 선조들 훈족이 이미 로마를 멸망시킬 때 열어놓은 큰길이었기에 5년 동안에 서남아세아와 동유럽을 장악하는 거사를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부친의 거사를 이어받아 유럽에 돌아온 오고다이칸은 1230년에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백인들의 근거지인 남부유럽을 공략하고 1236년에 6년 동안 동유럽일대를 샅샅이 노략질을 하였다. 같은 때 티벹, 월남, 동인도를 공략하였다.

한반도에는 1231년에 고려의수도 개성을 함락하고 1260년에 동경(경주)을 점령하고 1274년과 1281년의 두 차례에 거처서 일본침공을 시도하였으나 해풍에 고난을 겪고 실패하였다. 이때부터 한국의 문화권에 속해왔던 일본문화는 독자적으로 한국이 가졌던 당송문화를 보존하였고 한반도는 대륙문화의 변화에 따라 당송문화경향에서 원명문화경향으로 변조되었다.

1254년에 유럽에 중세기문화에 주류역할을 해온 천주교는 위협을 느꼈고 로마의 교황청에서 몽골수도 카라콜럼에 사자를 보내어 교황청 보호요청을 청원하였다. 1258년에 바그다드, 터키, 그리고 지중해연안 일대를 공략하였다가 1260년에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이 집권하여 34년 동안 동남아세아 섬나라들과 인도의 남부와 스리랑카를 점령하고 서남아세아와 유럽에 영토를 더욱 확장하고 모든 피침략국으로 부터 조공을 바치게 하여 국호를 원나라로 칭하였다. 수도를 대도(북경)으로 천도하여 자금성을 증축하고 당나라 때 장안에서 누리던 세계의 수도를 북경(베이징)에 다시 세우고 세계문화와 문명의 중심지를 다시 이루었다. 로마제국과는 비교가 안 되는 더 큰 제국을 세웠음에도 세계가 오래 동안 아세아인의 역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유럽국가들이 조공을 바치고 세계 각대륙에서 상인들이 왕래하였다. 그들 중에 로마교황의 서신을 가지고 찾아온 말코폴로 부자는 쿠빌라이칸의 신하로 일하고 모국을 왕래하면서 동아세아의 문화와 문명을 서유럽에 소개하였다. 유럽은 아직 동전을 사용하는데 몽골은 종이돈을 사용하는 등의 선진국 환경이 그들에게는 놀라웠다. 동아세아에는 옷감을 솜, 누에 실, 양털로 짜서 입고 종이와 목판인쇄가 발달하여 지식과 정보를 교환하는데 이러한 문화와 문명이 그들에게는 신기한 현상이었다.

해양산업이 왕성하고 세계지형을 탐험하여 항로를 개발하여 대륙들과 섬나라에서 조공을 받았고 말코폴로가 스리랑카에 방문하여 몽골의 세금을 받아 왔다. 북경에서 동인도를 연결하는 육로와 해로는 일직부터 동아세아와 인도사이에 도교, 유교, 불교, 등의 청치, 종교, 경제가 연결된 동아세아와 남아세아의 통로였었다. 이 길은 동아세아에서 유럽으로 연결하는 비단길이 있기 이전에 개통되었고 황하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인조운하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먼저 발달된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연결이었음을 보여준다. 그 후에 명나라 때 세계 항해지도를 작성하여 나침판과 함께 동아세아 항해기술이 유럽에 분포되는 결과를 가져와 서유럽에 해양산업이 촉구되었다.

몽골 군사들은 화약 폭팔로 대포를 개발하여 유럽에 전해졌고 군사전쟁역사에 변화를 가져왔다. 목판인쇄와 후에 한국에서 개발된 금속활자인쇄는 동아세아에서 오랫동안 문화와 문명을 개발하는 능력이었다. 이때 서유럽에 전해진 출판기술은 유럽에 문예부흥을 가져오게 하는 결과를 냈다. 중세기에 암흑시대를 겪는 유럽을 잠에서 깨우고 서유럽에 해양활동이 시작된다. 유럽내륙과 해안일대는 몽골침략이후 혁명적인 생활변화를 초래하였고 이때부터 세계역사는 동아세아 주도권의 역사에서 서유럽 주도권의 역사로 바꾸어지기 시작하였다.

훈족으로 결성된 흉노제국은 로마와 유럽을 정복하고 동유럽에서 동아세아를 거치는 유목지대를 지배하면서 한나라와 경쟁하였다. 7세기경에 우이거제국을 건설하여 당나라와 경쟁을 펼쳤고 서기1167에 태어난 칭기즈칸이 다시 유목민들을 통합하여 인류역사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는 유라시아대륙을 통합하는 제국을 새웠다. 유럽중세기에 암흑시기를 지내는 유럽인들이 흉노의 침략 이후에 잊었던 아세아의 문화와 문명을 다시 배우게 되는 기회를 가져왔다. 그때부터 세계에 현대문명이 시작되었다.

몽골제국의 세계통일은 현대 인류의 성장기 중에 십대 소년소녀의 사춘기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 기간의 특성은 마치 소년과 소녀가 처음 보는 이성에 매력을 느끼듯이 아세아가 유럽을 비롯한 아프리카등의 다른 대륙에 인구지역을 보고 매력을 느끼고 유럽은 처음으로 아세아를 보고 매력을 갖는 때였다. 사춘기에 변화는 육체적으로나 감성적인 면에서 가장 격렬한 변화의 기간이다. 몽골역사는 세계역사의 그러한 부분과 개성을 보여준다.

몽골 군사들은 화약 폭팔로 대포를 개발하여 유럽에 전해졌고 전쟁역사에 혁명을 가져왔다. 목판인쇄와 후에 한국에서 개발된 금속활자인쇄는 동아세아에서 오래 동안 문화와 문명을 개발하는 능력이었다. 이때 서유럽에 전해진 출판기술은 유럽에 문예부흥을 가져오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종교개혁, 산업혁명으로 이어지고 인본주의 사상은 제국주의를 축출하여 민주사회와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가 시작된다. 서유럽이 주동이 되어 동유럽의 천주교에서 벗어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사회종교, 개신교가 시작된다.

그동안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중앙아세아 중국한족이 다시 회복하여 명나라를 세웠다. 명나라는 원나라 문화를 계승하고 퇴폐된 모든 정부정책과 설비를 재정비 하였다. 영국의 해군탐험가 개빈 맨지스는 그의 저서 “1421”에 명나라 해군재독 정허가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고 사용한 세계원정의 함선 크기가 151m 길이에 61m폭의 대형선박이며 200여척의 수행선박들에 2만 7천여 명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1405년에 장수성에 태창을 떠나 인도와 아프리카를 거쳐 1421년에 미 대륙에 도착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귀국한 후에도 계속하여 1433년에 7번째 원정을 마치고 항해지도를 마들었다고 한다. 1525년에 명나라는 모든 해양산업을 폐쇄하고 쇄국정책을 세웠다. 이들 항해정보는 유럽에 전파되고 이때 동아세아는 세계패권을 유럽에 넘겨주었다.

압록강 상류 백두산에서 태어난 누루하치는 만주지역에 청나라를 세우고 1644년에 명나라를 침공하여 중국한족의 주도권을 북쪽에 흉노 몽골이 빼앗았던 일을 이번에는 동이족 만주한반도계 민족이 다시 반복하였다. 한반도에 신라가 고려의 침략을 받고 신라의 왕족들이 옛 고구려 영토에 세운 금나리가 북송을 멸망시켰다. 그 후에 몽골 칭기즈 칸은 금나라를 제일먼저 몽골제국에 연합시켰었다.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에 국경주위와 내국에 반란은 다시 계속되었고 일본왜족은 명나라 때 한반도에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계속해서 청나라 해안지대를 괴롭혔다. 명나라 때 세운 쇄국정책은 청나라 때 계속되고 동아세아의 세계로 연결되었던 오랜 역사는 여기서 끝났다.

9.1 유럽의 세계진출

1493년에 폴튜갈 항해사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북미대륙에 이르고 1598년에 바스코 다가마는 아프리카를 지나서 인도에 도착하여 유럽은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칭기즈칸의 침략으로 동아세아에 국가 간의 경쟁사회는 이제 유럽으로 전해저서 유럽에 치열한 내전과 정치 사회 경제에 개혁이 시작된다. 경쟁사회에는 도시 인구가 증가하고 전문분야가 발달하고 교육산업 교역금융이 급성장하여 해외로 진출하게 된다. 1650년에는 스페인, 영국, 홀란드, 프랑스, 포르투갈, 등의 나라에서 탐험대와 교역선박들이 북미, 중미, 남미, 아프리카, 인도, 중국, 동남아세아에 여러 섬나라에 왕래하기 시작하였다. 아세아의 비단, 자기그릇, 털옷, 여러 귀금속들이 유럽에 수입되었고 야채 과일 곡식 씨들이 들어와 유럽에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세계의 지식이 유럽에 집중되어 과학과 발명이 성행하고 방직, 운송, 군사무기, 등의 산업이 발달하고 북미동해안에 13식민지 지역을 나누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는 대륙을 나누어 소유권을 사고팔았다. 드디어 미국에 이민 온 유럽인들은 미국정부를 수립하고 1776년에 조지 워싱톤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영국은 인도, 오스트라리아, 뉴질랜드를 식민지화하고 해가지지 않는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였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일대를 소유하는 국토확장을 했고 유럽과 세계지도의 모양이 크게 변하였다. 농업지역 확장으로 노동력이 필요한 지역에 아프리카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파는 사업이 성행하였다.

수만 년 동안 주거해온 원주민들은 무자비하게 학살되고 그들의 생활지역에서 축출되고 주민들은 재한 된 지역에 감금되어 인류역사에 가장 큰 비극으로 유럽백인들의 토지확장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인류의 성장에 사춘기에 겪는 과격한 현상이었으며 17세기에 들어서부터 세계인구의 급성장은 사춘기의 육체적 성장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북미대륙에 남북전쟁은 의욕과 양심의 대립이었다. 북군이 승리하고 노예제도는 중단되었다. 에디슨은 전기를 발견하고 전기통신과 전기기계 동력은 증기기관차의 철로연결과 함께 세계가 육체적으로 성장된 성인의 모습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사춘기 인류의 성장은 계속되고 일차와 이차 대전의 폭력도 보이는 현상이 있었다. 포드는 자동차를 발명하고 기름을 태워 움직이는 자동차는 고속도로로 대륙을 횡단하였다. 수요와 공급을 연결하는 대량생산은 자본주의 경제에 빈부격차가 나타나고 그에 대조되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도 나타났다. 유럽의 국토확장 의식은 이태리에서 유럽 내에 일차대전으로 시작하였다가 미국과 프랑스의 재재로 멈추었다. 1939년에 다시 세계 이차대전이 시작하였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이 쇄국정치하는 동안에 60년을 앞서서 현대화하였고 한국과 중국만주를 점령하여 식민지화에 성공하였다. 동남아세아에 확장하려는 의도로 일본은 독일의 이차대전에 가담하고 하와이를 공격하고 미국에 도전하였다.

9.2 일본의 침략

동아세아는 한반도와 서해주위에 정착하여 겨울과 싸우며 농업을 추진하고 겨울의 연료로 석탄을 사용하면서 금속을 찾아내어 인류문명의 아침 해가 떠오른 인류문화의 고향이다. 세계문명의 발상지인 동아세아민족이 정치적으로 경쟁하며 세력확장을 위한 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일본은 신라의 한반도 통일로 백제의 영토였던 일본 땅에 백제인이 건너가 세운 국가이며 백제문화의 연장이었다. 백제가 신라의 침공을 당할 무렵에 백제인이 대거 이주해 들어가서 일본국이 세워지고 아소카 문명이 시작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문화가 한국에서 전래되었음을 잘 설명한다. 언어와 풍습이 한반도와 거의 동일하게 이어오면서 한국은 대륙권 영향으로 변화가 진행되고 일본은 원래의 백제모습을 잘 유지해왔다. 마치 한반도는 중국의 대륙성 변화에서 다소 격리되어 원래의 문화를 중국보다 잘 보존하는 현상과 같다. 한국의 한자 발음은 원래 한자 발음을 잘 보존하듯 한국의 상고사는 원래의 중국역사의 기번을 잘 보종해왔다. 일본의 문화는 한반도의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다.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 사이에 차이가 발생한 때는 원나라가 한반도에 고려를 식민지화하여 대륙문화를 유입하면서 일본은 대륙문화의 영향을 한반도처럼 크게 받지 안했을 때부터이다. 원나라가 세계제국으로 성장하면서 동아세아의 문화는 당송 문화권에서 탈피하고 명청 문화권으로 변화하였다. 당나라문화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 문화는 원나라 대륙 문화가 고려에 미치며 한국과 일본은 격리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 배제인 후손은 조상의 염원을 이어받아 한반도에 귀향하는 의지를 실행해왔기에 오랜 역사를 통하여 해적의 모습으로 한반도의 동해안 해변을 괴롭혀왔다. 일본의 국력이 강해질 적마다 한반도를 침공하는 거사가 이루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과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한일관계에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다. 조선의 쇄국 상태로 일본에서 일어나는 현대화 개혁과 노력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거치며 크게 쇠퇴되었다. 일본은 먼저 조선을 합병 식민지화하여 조선의 석탄과 철광이 일본의 확장 일로에 있는 산업 기반에 도움이 되었다.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조선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주도권 경쟁으로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진행된 전쟁이다. 유럽에서는 제1차 중일 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부른다. 1894년, 친일 개혁세력인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암살당하고 일본은 그 유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청나라가 이를 막았다. 일본 정부는 이를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은 원정군인 8,000명을 조선으로 보냈다. 7월 23일 고종 임금이 거하는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청나라는 양국간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그 시대에 청나라에 조공을 바쳐 왔으며, 보수파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개화당들은 일본과 서방 국가들과의 연대를 확립하기를 원했다. 아편 전쟁과 청불 전쟁의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청나라는 약해졌고 서양 열국의 간섭과 잠식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재거하고 청나라를 침략하여 중국의 성경과 길림과 흑룡강 3성을 점령하여 일본의 수중에 넣고, 북경까지 진공하여 보물과 고서적 같은 귀한 재보들을 약탈하였다. 황해 해전, 압록강 전투, 여순 2만명 대학살, 우금치 전투, 웨이하이 요새 함락으로 동중국해 점령에 성공하였다.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하여 청나라는 조선 안에 완전한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확립시켜 주었고, 배상금 2억 냥(兩)을 일본에 지불하였으며, 랴오둥 반도·타이완, 펑후 제도 등을 할양하였다. 청나라는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국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고, 일본은 필연적으로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요동반도는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반환되었다.

 

유럽이 아세아의 영토를 빼앗고 식민지를 통제하며 백인 우월주의 사상으로 오늘의 세계지도를 만들었듯 일본도 한국에 같은 침략자의 행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제이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 굴복하고 동아세아는 미국의 영향권에서 발전하고 있다.

9.3 일차, 이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병사 900만명 이상이 사망한 유럽의 대전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기 이전까지 참전국의 수많은 혁명 등을 포함하여 주요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국민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계기로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영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연합군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군 사이에 유럽의 주도권 쟁탈전이었다. 후에 오스만, 불가리아가 독일를 지원하고 이탈리아, 일본, 미국이 대영제국을 지원하면서 7천만 명의 군인이 전쟁에 가담하는 세계대전이 되었다. 러시아 정부가 1917년 3월 붕괴된 이후 동맹국이 러시아의 영토를 획득했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전쟁동안,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오스만 등 4개 주요 제국이 해체되게 되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승계국가가 탄생했지만 많은 영토를 잃었으며, 러시아와 오스만은 완전히 해체하게 되었다. 유럽과 서남아시아의 지도는 새로운 독립 국가들로 그려졌다. 제1차 대전은 유럽의 민족주의의 부활과 독일에서 독재주의 설립으로 상황이 악화되며 실패했다. 여기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하게 되었다.

제 2차 대전은 인류 역사상 최대, 최악의 전쟁이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시작된 세계대전이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한 다음 히틀러가 다스리는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면서 영토를 얻으려 했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또 하나의 대전으로 커졌다. 또 다른 편에 동아세아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국의 수십만 인구를 학살한 일본이 1941년에 미국 하와이 주의 오아후 섬 진주만에 있는 미국군 기지에 가한 기습 공격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전쟁 전에는, 미국은 중국, 프랑스, 영국, 소련을 무기 대여를 통해 지원하고, 영국과는 대서양 헌장으로 통합적인 지원을 하였다. 미국은 또한 적극적으로 일본의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하와이에서 샌디에이고로 미국 태평양 함대 이동을 포함하여 일본과 전쟁하는 중국을 지원하고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 은 전쟁을 시작했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에게 선전포고하였다.

동아세아에서 기원한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낸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르고 1976년에 독립하였다. 멕시코 전쟁과 남북전쟁의 몸살을 치르면서 흑인노예들을 해방하고 남북의 국민의 결속을 이루었다. 일차 세계대전 중에 석유, 철강, 제조업과 금융업으로 산업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하여 경제공황의 경험을 쌓으며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하였다.

2개의 세계대전을 치르는 중에 미국은 전기, 자동차, 비행기, 원자탄을 발명하여 독일과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며 미국은 세계 초강국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결과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지역국가들이 독립하여 자국으로 복귀하고, 세계의 여러 제국들의 식민지가 사라지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국가는 독일과 주변국이 대부분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뿐 아니라 아프리카, 중동, 동아시아, 호주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수많은 국가의 정치나 정책이 변화를 경험했고, 국가나 정권이 멸망하거나 재탄생하기도 하였다. 국가들 사이에 분쟁과 무역으로 더욱 가까워지고 세계는 한 지붕 아래로 모여들었다. 유엔이 출범하고 세계가 하나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럽은 칭기즈칸의 폭죽을 보고 총을 발명하게 되고 칭기즈칸의 대포를 배워 나포레옹은 아프리카까지 진군하였다. 활을 쏘는 원주민들의 영토를 빼앗기 시작하였다. 유럽은 지금의 세계지도를 만들고 인류역사를 지중해에서 시작한 것처럼 교과서를 만들어 가르쳐왔다. 옛날부터 역사는 승자(winner)의 기록이라고 한다. 나는 패자(loser)의 기록을 보고 싶어 했기에 새로운 눈으로 그늘에 가려진 진실을 찾게 되고 새 시대에 걸맞은 역사관을 나누려고 이 글(essay)을 쓰기 시작하였다.

10. 인류역사를 한사람의 생애에 비교하면